“으갹!”

 

 얼빠진 소리를 내면서, 사슬에 칭칭 감긴 여자가 지하 최하층에 있는 수감실로 던져졌다.

 

 엉덩방아를 찍은 그녀는 급히 몸을 틀어 자신을 투옥한 무리를 마주했다. 이미 간수 하나가 문을 닫은 채 열쇠를 절그럭거리고 있는 모습은, 분명 자신이 여기에 영락없이 갇혔다는 방증이었다.

 

 “아으윽... 이게 무슨 짓이야!”

 

 짜증 섞인 목소리가 그들을 겨냥했지만,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남자를 포함 전원이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음.”

 

 그들은 악마의 무서움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인과 비교하자면 그들이 불러올 수 있는 재앙을 너무나도 잘 아는 족속들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평온히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악마라는 것치곤 좀 멍청해 보이는데.”

 

 “뭐? 야, 너 말 다 했어?!”

 

 위엄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이 녀석이, 성유물에 구속되어 쩔쩔매는 꼴은 갖고 있던 아주 약간의 경각심도 무마할 정도로 한심해 보였기 때문이다.

 

 “악마는 식사가 필요 없다고 하죠? 그럼 당분간은 여기에 가둬 두세요. ...아, 밖에 보초 한 명 정도는 세워두고.”

 

 우두머리, 그러니까 왕의 명을 받든 기사들은 저마다 경례하며 그를 따라 지하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거기 서, 나 아직 말 안 끝났, 야! 무시하지 마-!!”

 

 쾅.

 

 “으윽...”

 

 빠드득, 그녀가 이를 갈았다.

 

 분한 마음을 곱씹으며, 악마는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지하실을 주욱 훑었다.

 

 태양빛 한 점 닿지 않는 싸늘한 감옥.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인지 구석마다 거미줄이 칭칭 감겨 있었고, 차가운 돌바닥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현현한 것이 뒤늦게 후회될 만큼 자신의 맨살에 매정했다.

 

 그러나 악마가 분개한 것은 옥살이 대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은 자물쇠 하나로 어설프게 마감해 둔 보안은, 빈말로도 수준이 높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저 녀석, 대체 얼마나 얕잡아 보고 있는 거야...!”

 

 심지어는 경비를 같은 방에 두지도 않는다. 자신이 무얼 하든 탈옥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이상한 부분에서 화내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이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전쟁’을 관장하는 벨로나 가의 공작, 루그브리스.

 

 자신은 마계의 귀족들 중에서도 최상층에 자리잡은 악마였다. 그런데 이딴 식의 대접이라니.

 

 “...하아.”

 

 루그브리스가 한숨을 푹 뱉었다. 어쩌다 자신이 이런 꼴이 되었는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선, 하루가량 시계를 되돌릴 필요가 있었다.

 

 

 

 

 

 * * *

 

 

 

 

 

 ‘인간은 건방진 생물이다’.

 

 그것이 악마들 대부분이 인간에게 갖는 감상이었다.

 

 유인원 주제에 머리 좀 컸다고 세상을 지들 맘대로 주무르려 하질 않나, 다른 생물을 목줄 달아서 애완동물 취급하지 않나, 하물며 어떤 것들은 식용으로 기르지를 않나.

 

 그런 주제에 자기들 사이에서도 계급을 나누고, 그것도 모자라 허구한 날 치고박고 싸우고. 아마 세상에서 동족을 제일 혐오하고 서로를 제일 많이 죽인 것들이 인간들일 것이다.

 

 “그래도 뭐, 계약 상대로는 최고잖아?”

 

 “그건 그렇지.”

 

 먹을 게 필요하다, 추위를 피하고 싶다, 거미줄에서 풀어주면 좋겠다 같은 일차원적인 욕망이 아니라, 어떨 때는 악마마저도 놀래킬 만큼 포부가 당당한 소원들. 그건 오직 인간들에게서만 발현되는 특성이다.

 

 “매번 새로운 거 들고 오는 발상력 하나는 인정해줘야 한다니까.”

 

 거기에, 이런 근사한 것도 만들고 말이야.

 

 늦은 밤. 술집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던 두 여성이 쨍, 하고 잔을 맞부딪쳤다. 어째선지 다른 고객들은 모두 곤히 잠든 상태였으며, 주인장마저도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악마.

 

 악마들은 그들이 자부하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단순한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선 계약이 법이고, 생명이며, 의식주인 동시에 금전이다.

 

 “그나저나~ 설마하니 조항도 제대로 안 읽고 냅다 서명할 줄은 몰랐어. 멍청하긴.”

 

 도움의 손길이 급급한 생물을 찾아서, 그들의 바람을 계약의 형태로 이루어준다. 일찍이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생활 습관은 현재에 와서도 달리 변한 건 없었다.

 

 이렇게만 보면, 악마들은 언제나 컨트랙트 따내려고 동분서주하는 영원한 콩라인으로 보이지만.

 

 “자~ 이걸로 계약 기간은 끝.”

 

 만약 그것뿐인 이야기였더라면, 그들이 불운의 상징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짜악. 두 악마 중 하나가 손뼉을 치자, 주인장의 몸에서부터 검푸른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악마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내밀어 그 속을 휘저었고, 안개는 얼마 안 가 엷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음~ 이거지. 얼마 만에 맛보는 거야.”

 

 목표를 포착한 다음엔,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이명에 걸맞은 감언이설로 잘 구슬린 후 원숭이 손을 내밀어 나락으로 빠뜨린다. 이번 희생양의 말로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았다.

 

 ‘매출이 올랐으면 좋겠다’라는 간단한 소원.

 

 악마는 그 소원을 확실히 들어주었다. 점장이 계약을 한 후로부터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으며, 매일 밤 술집을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고객들 또한 많아졌다.

 

 “이, 이 새끼가...”

 

 “응? 뭐야, 깨어 있었네.”

 

 가까스로 자신을 일으켜 세운 술집의 주인장이 능청스레 술잔을 홀짝이는 악마를 노려보았다. 허나 힘이 닿는 범위는 거기까지였는지, 그는 금방이라도 다시 쓰러질 듯한 몸을 지탱하는 게 고작이었다.

 

 “분명 조항에서 마법 사용을 금했는데, 어떻게...!”

 

 그에 비해 악마의 표정은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으응, 술에 내 특제 레시피를 첨가한 것뿐이야.”

 

 “...너 또 약 탔구나.”

 

 “정답~ 매번 걸려든다니까?”

 

 잔을 완전히 비운 그녀들은 후드를 뒤집어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술집의 현관이 거칠게 열리고, 도시의 경비대원으로 보이는 무장 단체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경비병들은 악마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건지, 그들을 잽싸게 가로질러 술집을 헤집어놓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점장의 원망 어린 시선을 느낀 악마는 싱긋 웃으며 그를 조롱했다.

 

 “너무 화내지 말라구. 소원은 확실히 들어줬잖아?”

 

 한 달간 술집의 매출은, 확실히 기존의 5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그마저도 재산 몰수로 사라질 운명이었지만.

 

 “다음부터는 계약서 정도는 제대로 읽어보고 싸인하셔~”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들은 술집을 나섰다. 조금 뒤 두 쌍의 박쥐 날개가 유유히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래서, 참고는 됐으려나?”

 

 아까 전의 계약을 완수한 나긋나긋한 말투의 악마, 룩스리아가 동행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친구의 부탁으로, 며칠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왕국에 대한 것들을 알려주고 있던 참이었다. 오늘 밤을 끝으로 헤어질 예정이었기에 마지막으로 확인 겸 묻는 것이었다.

 

 루그브리스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가 꽤 위태롭네.”

 

 “그치~ 경비병도 내가 안 불렀으면 저놈 잡히지도 않았을걸?”

 

 치안 상태가 엉망이라니까.

 

 “하여튼, 저런 곳에서 왕족 보필이라... 너도 참 성가신 일을 떠맡았네.”

 

 “...그래.”

 

 선조가 원망스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녀가 남기고 간 숙제를 대신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루그브리스로선 아니꼬울 만도 했다.

 

 비르투스 왕국.

 

 먼 옛날, 그녀의 선조는 전란 시대에 한 명의 사내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 보답으로 선조는 남자를 도와 대륙을 평정했고, 그의 왕국을 다른 국가 위에 군림하게 하여 번영을 이끌었다.

 

 자기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걸고 말이지, 루그브리스가 속으로 그런 말을 삼켰다.

 

 훗날 비르투스가 멸망의 위기에 빠진다면 딱 한 번, 다시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주겠다는 악마의 맹세.

 

 “어쩔 수 없지, 뭐.”

 

 가문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선대의 약속을 자신이 이행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귀찮았지만, 악마들에게 있어 약속은 인간들 사이의 그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의미를 지녔다. 계약을 구심점 삼아 돌아가는 그들인 만큼 약속을 거스르는 행위는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올 테니까, 그때 다시 한잔하자.”

 

 “오케이~ 기다리고 있을게.”

 

 두 악마는 짧게 인사를 나눈 뒤 길을 달리했다. 루그브리스는 자신의 친구가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돌려 왕성 쪽을 바라보았다.

 

 “자, 그럼...”

 

 이번엔 어떻게 요리해볼까나.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속으로 씩 웃었고.

 

 정확히 12시간 뒤, 그녀는 비르투스 왕성의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시발.’

 

 은폐 마법을 맹신한 것이 실수였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국가라고 해도, 그녀가 들이닥친 곳은 한 나라의 왕성. 이곳저곳 둘러보다가 의도치 않게 방범 시스템을 작동시켜버린 악마는 도주 시도 5분만에 왕실 기사단의 손에 잡혀버렸다.

 

 왕성에 있던 인간들을 싸그리 죽여버리고 도망칠 능력은 충분했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약속 지키는 건 물 건너가게 된다. 결국 어떻게 할지 갈팡질팡하다가 성유물에 구속되어 꼴사납게 안면을 바닥에 들이받은 그녀는 심문실에서 자신의 사정을 필사적으로 설명하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아, 도와주러 왔다니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퍽이나 도움이 되겠어요.”

 

 “와, 미치겠네 진짜.”

 

 일반적인 성인 여성보다도 작은 체구. 검은 베이스에 보라색 치장이 들어간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확실히 외관만 놓고 보자면 어느 귀족 가에서 자란 어린 영애 같아 보였으나.

 

 설마 하던 애 취급에 루그브리스가 애꿎은 돌바닥을 발길질하며 답답한 마음을 표출했다.

 

 “야, 너 왕이라며. 왕실 극비 문서 같은 거 열람 권한도 있을 거 아냐. 가서 보라니까? 우리 선조님이 도와주겠다고 맹세한 거 떡하니 나와 있을 거라고!”

 

 그녀가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한 나라의 왕이라는 것치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다리를 꼬았다. 사전에 기사들을 모두 물렸기에 보는 눈도 없겠다, 체면을 치르는 모습이라곤 전혀 없었다. 호위 한 명 대동하지 않은 채 악마와 독대하는 것이 얼핏 보면 위험해 보일지라도 주군이 강요하는 마당에 기사들이 거스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 말대로, 당신이 아주 대단한 악마에다가 망해가는 우리나라를 살려줄 동아줄이라 칩시다. 그럼 왕성에는 뭣 하러 침입한 건데?”

 

 “사전 답사지, 뭐. 별거 있어?”

 

 루그브리스가 남자의 눈을 피하지도 않으면서 그리 뻔뻔스럽게 답하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니, 지금 이런 시답잖은 얘기할 시간 없다는 거 알지?”

 

 루그브리스가 운을 뗐다.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한 밑작업의 시작이었다.

 

 “너, 목 달아나기 직전이잖아.”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심문실에 들어오면서 가져왔던 깃펜을 이리저리 돌리며 조용히 그녀의 변명을 들을 뿐.

 

 “오는 길에 봤어. 나라 상태가 엉망이던데, 내가 도와줄 수 있다니까?”

 

 “...”

 

 “난 악마야. 대가만 치른다면 어떤 소원이든지 들어줄 수 있다구.”

 

 뭐, 말이 ‘도움’이지만.

 

 악마는 변덕스러운 존재다. 제아무리 도움을 약조하였다 한들 그건 변하지 않는다.

 

 루그브리스는 애초부터 선조의 ‘약속’에 잠자코 어울려줄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은 악마. 몇천 개가 넘는 계약서를 써내려가며 인간들을 희롱해 온 존재.

 

 한낱 인간을 거저 도와준다니, 체면이 안 서지 않는가.

 

 계약의 빈틈을 교묘히 파훼해서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유도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때마침 도움이 절실한, 기둥이 기울어지고 있는 나라의 어리숙해 보이는 왕.

 

 모든 면에서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런 인간 하나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었다.

 

 “원한다면, 시민들을 세뇌해서 왕가에 절대복종하도록 만들어줄게. 아니면 아예 신봉하게 만들 수도 있어. 그것도 싫으면, 너의 악행들을 모조리 잊도록 기억을 조작할 수도 있고.”

 

 “...무서운 소리를 곧잘 하네요, 악마는.”

 

 루그브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심각한 상황일수록 극단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어때? 어질러진 국가에 대한 책임을 타국에 전가하는 거야.”

 

 진부하지만 이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지. 악마가 자신의 뿔을 매만지며 속삭임을 제안했다.

 

 “구실은 뭐든 붙이면 돼. 전쟁이 일어나면 더 좋지.”

 

 “하, 병력이랑 물자는 누가 지원하는데요?”

 

 “내가 군세를 빌려줄게. 물론 폴리모프를 써서 악마족이라는 건 꿈에도 모를 거야.”

 

 화르륵. 악마의 손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들며 세련되어 보이는 계약서 한 장으로 변했다.

 

 “뭐, 자세한 건 나중으로 미뤄도 돼. 난 상관없어.”

 

 그녀의 얼굴에 차가운 웃음이 내려앉았다.

 

 “자, 어때.”

 

 계약할 거야, 말 거야?

 

 왕은 잠시 침묵하더니, 손을 뻗어 루그브리스가 내민 계약서를 이리저리 돌려보기 시작했다.

 

 한 나라의 왕이라면, 어떤 종류의 계약이든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을 터.

 

 물론 루그브리스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상대가 뭘 하는 인간이든 간에 자신이 내민 조건을 결국엔 의구심 없이 받아들일 거라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조정해 줄 수 있어. 이건 계약이라기보단 은혜에 가까운걸. 너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필요 없습니다.”

 

 탁. 비르투스의 왕은 손을 뒤집어 계약서를 테이블 위로 엎어 놓았다. 그는 계약을 제대로 읽어본 것도 아닌 눈으로 대충 훑은 기색이었다.

 

 “...으응?”

 

 악마가 두 눈을 끔뻑였다.

 

 “아니, 너 지금 네가 무슨 상황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 네 나라 망하게 생겼다니깐?”

 

 “그럼 망하라 하죠 뭐. 제 알 바도 아니고.”

 

 왕이라는 작자의 입에서 나오기엔 심히 부적절한 언사였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루그브리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하긴, 처음부터 좀 이상하긴 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판에 왕이 이렇게 침착해서야. 처음엔 그저 자포자기한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걸지로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진짜 안 해? 후회할 텐데.”

 

 포커페이스는 당연히 유지하고 있지만, 이렇게 되면 애가 타는 것은 그녀였다. 선대의 맹세는 한 번에 한해 ‘무조건’ 도와주겠다는 약속.

 

 지금이 아니라면 나라를 멸망할 거고, 그녀는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계약을 거스른 악마의 말로는...

 

 ‘아냐,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어떻게든 이 녀석을 설득하는 게 중요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지금 제힘만으로 일어서겠다는 건 아니겠지?”

 

 “당치도 않은 소리네요.”

 

 “그럼 뭐 어쩔 건데.”

 

 그가 계약서의 뒷면에다 대고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벌이는 기행에 말문이 막힌 루그브리스가 뭐라 하기도 전에,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히, 당신 말이 맞습니다.”

 

 “...응? 뭐가?”

 

 낙서는 점점 모양을 잡아가더니 몇 획이 더해지자 작은 박쥐 날개를 단 꼬마 악마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먼 과거, 전란 시기의 국왕께서는 악마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져 내려오죠. 물론 극비 사항이라 아는 이는 극소수이지만...”

 

 그가 눈을 감았다. 이곳 지하에서도 옅게나마 들리는 국민들의 원성이 잠시간 귀를 어지럽혔다.

 

 “악마는 약속에 꽤나 민감한 종족이라고 기술되어 있더군요.”

 

 흠칫. 순간 루그브리스가 침을 꼴깍 삼켰다. 슬며시 실눈을 뜬 그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아 조금 전의 느슨함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분명, 당신이 말했죠. 우리들을 돕는다는 ‘맹세’를 했다고.”

 

 “...그런데?”

 

 “그럼,” 그가 상체를 숙여 테이블 깊숙이 몸을 붙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맹세는 지켜야 하는 거겠죠?”

 

 “...?”

 

 “제가 만약 당신 도움을 안 받겠다 하면, 어쩌실 건가요?”

 

 왕은 어느새 약간의 웃음기를 머금은 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녀석, 생각보다...’

 

 인간치고도 어려 보이길래 낮잡아 봤더니. 루그브리스가 속으로 비르투스의 왕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당신 말대로, 전 지금의 비르투스를 바로잡을 힘도, 시간도 없습니다. 정말로 손 놓고 있다간 나라가 멸망할지도 모르죠.”

 

 그런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될지도 궁금하군요.

 

 악마가 평가를 거듭 수정했다. 이건 머리 좀 큰 놈이 아니라 그냥 미친놈이다.

 

 제 궁금한 거 하나 해결하려고 나라를 말아먹겠다니 제정신인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네가 도움을 안 받겠다면 난 그걸로 됐어. 계약을 거절하는 건 네 자유고, 난 갈 길 가면 되는 거지.”

 

 “그런 것 치고는 몸동작이 아까보다 확연히 굳었는데요. 더군다나 이건 ‘맹세’라고, 당신이 말했잖습니까. 계약이 아니라.”

 

 “착각도 유분수네. 말도 안 되는 트집은 잡지 말지?”

 

 “그럼 볼 일은 여기까지네요. 가셔도 됩니다. 아, 쇠사슬은 이제 풀어드리죠.”

 

 휘리릭, 그가 손을 내젓자 악마를 옭아매던 성유물이 원래 자리를 되찾은 듯 그의 오른팔에 도로 휘감겼다. 무게가 제법 나가는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왕은 소매를 내려 팔을 덮고선 여유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그브리스가 자신의 팔뚝을 몇 번 만지작거렸다. 사슬에 닿은 부분이 아직 아렸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흥, 그래봤자 허세겠지. 언제까지 가나 한번 보자.’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루그브리스는 포탈을 열어 곧장 심문실을 빠져나왔다.

 

 

 

 

 

 * * *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났다.

 

 비르투스는 나날이 기울어 갔다. 경제가 완전히 작살난 탓에 폭동과 약탈의 횟수는 늘어만 가고, 농민들은 급기야 낫이나 호미로 자신을 무장해 도적이 되는 길을 택하기 시작했다. 왕성에는 늘 집회가 열려 시민들이 기사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일이 일상이 되어갔다.

 

 “...야! 너 진짜 제정신이야?!”

 

 벌컥. 왕의 침소에 있던 창문을 밖에서부터 열어낸 악마가 숨을 몰아쉬며 그를 노려다보았다. 주에 한 번, 그것도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독서 시간을 방해받은 것 치곤 왕은 꽤나 평온했다.

 

 “아, 오랜만이네요. 그러니까 이름이... 루그? 였나?”

 

 “루그브리스 님이다, 멍청아!”

 

 씩씩거리며 쳐들어온 침입자는 방의 주인을 향해 잰걸음으로 달려가더니, 급기야 그의 멱살을 잡으며 쏘아붙였다.

 

 “계약해. 당장.”

 

 “싫습니다만.”

 

 “인간들을 선동해서 나라를 더 위태롭게 만들어볼까? 그때 되면 네 마음도 바뀔지 모르지.”

 

 “그래봤자 당신이 대가를 치를 시기만 앞당기게 될 겁니다.”

 

 “그럼 네가 아니라 다른 녀석한테 가서 계약을 따내면 돼. 왕가 쪽 사람이어야 한다는 제약은 없어.”

 

 “그런가요? 하지만 신하들은 이미 다 주변 나라로 피신해서 행정은 마비된 지 오래고, 남은 관리 인력은 나 하나뿐인데.”

 

 “정 그러면 평민 한 놈 잡아서 용사로 만들어버리지 뭐. 쿠데타 일으켜서 싹 다 갈아엎으면 그것도 형식상으로는 도와준 게 될 테니.”

 

 “저희는 구설수가 하도 많아서 말이죠. 국명 따위 절대로 이어받으려 하지 않을 텐데? 그런 꼼수는 안 통해요.”

 

 “...너 진짜 사람 개빡치게 하는 재주가 상당하구나.”

 

 “하하, 뭘 이 정도로.”

 

 약속이고 뭐고 개처럼 패고 싶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악마의 뇌리를 스쳤다. 

 

 애초에 다시 찾아와서 이렇게 협박하는 데에서부터 자신의 밑천은 다 까발려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은 이 능글맞은 인간도, 자신도 충분히 알고 있을 터였다.

 

 ‘...그냥 확 다 엎어버려?’

 

 도움을 약조한 인간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이지만, 근처에 있는 기사 몇 명을 세뇌한다면...

 

 “알겠어요. 그깟 계약, 해드리죠 뭐.”

 

 루그브리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깟’ 계약? 그깟??”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는 내심 안심했다. 이 녀석이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흔들어 놔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후우.”

 

 털썩. 그녀가 침대 위로 팔짱을 낀 채 내려앉았다.

 

 “그래 좋아, 잘 생각했어. 지금이라도 마음 바꿨으면 됐지.”

 

 그래서, 어떻게 할래? 품에서 예의 계약서를 꺼내든 그녀가 두루마리를 손가락 사이로 이리저리 돌려댔다.

 

 “어떤 방식으로 할지는 정해놨어?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을 거 아냐.”

 

 “...”

 

 레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의 가장자리에 있던 조그마한 책상에 다가갔다. 데스크 위로는 양피지가 뭉텅이째로 소복이 쌓여 있었고, 자리가 없어서 옆으로 스르르 흘러내리기도 했다.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지금 인력이 꽤나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가 음흉한 눈빛으로 악마를 다시 눈여겼다. “조금 도와줬으면 하는데 말이죠.”

 

 “...”

 

 왕의 뜻을 이해하기까지 몇 초. 루그브리스는 아까보다도 얼굴을 심하게 찡그렸다.

 

 “미쳤어? 지금 나보고 나라 행정 업무를 하라고?”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쉬운 길 떡하니 놔두고 그딴 한세월 걸리는 방식을 고집하니까 말하는 거잖아!”

 

 “재정 관리, 국토 관리, 경제 관리. 모두 기사들 보고서만 훑은 다음 보기 좋게 정리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중요한 것만 추려서 제게 주시지요.”

 

 “야, 난 아직 하겠다고 한 적 없거든?!”

 

 기껏 신비를 다루는 악마의 힘을 빌릴 기회이건만, 끽해야 인력 하나 추가되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다. 마치 커다란 분수대를 사놓고 주방 옆 손 씻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꼴이 아닌가.

 

 “...”

 

 왕은 잠시 루그브리스를 쳐다보더니, 서류를 한 움큼 집어든 채 집무실로 가기 위해 방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루그, 혹시나 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고개를 돌려 다시 악마를 마주한 그는 눈을 좁혔다가, 이윽고.

 

 “...업무 볼 줄 몰라서 연막 치는 건 아니겠죠?”

 

 “개소리하지 마. 내가 인간 놈들 정치 놀이 하나 못할 것 같아?”

 

 “됐네요 그럼. 하죠, 계약.”

 

 “아, 진짜...!”

 

 말이 안 통한다. 이 녀석과 대화해본 건 단 몇 번뿐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그녀의 속을 뒤집어놨다.

 

 “...하아.”

 

 입씨름에 기력이 다한 루그브리스는 등을 눕혀 침대 위로 엎어졌다. 몇 초간 입술을 질겅질겅 씹더니, 이윽고 체념한 듯 몸을 일으키고선.

 

 “...그래, 까짓것 하지 뭐.”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이었으나,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후후. 그렇게 나와야죠.”

 

 돌아오는 답변은 실로 열 뻗치게 하는 부류였다. 그러나 뭘 어쩌겠는가.

 

 애초에 결정권은 저쪽이 가지고 있는데.

 

 “참,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요.”

 

 그가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으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물론, 제아무리 인간 사회에 대해 무관심한 악마라 해도 한 나라의 국왕 이름을 알지 못하는 바보는 없었다.

 

 레아 비르투스. 속으로 그 이름을 짓씹은 악마가 그를 멈춰 세웠다.

 

 “기다려. 계약 체결은 하고 가야 할 거 아냐.”

 

 졸지에 서류 정리로 나라를 바로잡아야 하게 생긴 악마는 한숨을 폭 내쉬며 계약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 됐어. 네가 동의하기만 하면 계약 성립이야.”

 

 귀찮은 계약서도 뭣도 없는, 그저 ‘행정 업무를 도와준다’라는 간단한 구두 약속이었기에 별다른 준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네? 계약서는 똑바로 적어야죠. 허점투성이인 약속에 냉큼 동의하면 된통 당하는 게 누군데.”

 

 쯧. 설마 걸리리라고는 기대도 안 했지만, 악마는 지푸라기 집는 심정으로 준비했던 얕은수가 통하지 않은 것을 보곤 혀를 찼다.

 

 이후 그들은 약 한 시간 동안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 조율을 했다. 그가 어찌나 집요하게 각 조항을 살펴보던지, 루그브리스는 속으로 질색했다.

 

 “아, 귀찮아 정말. 이걸로 됐지?!”

 

 “...뭐, 이 정도면 되겠네요.”

 

 레아는 피식 웃더니, 악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인간과 악마 사이에서 푸른 스파크가 일었고, 방 전체를 잠시간 환하게 비춘 그 빛은 나타난 만큼이나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둘 간의 계약이 마법적인 효력을 가지고 체결되었다는 증거였다.

 

 “그럼, 얼마간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만, 잘 부탁드립니다.”

 

 레아가 내민 손에 콧방귀를 뀌며, 루그브리스가 먼저 방을 당당히 나섰다.

 

 물론, 자신이 길을 아는 것도 아닌 만큼 곧바로 레아를 졸졸 뒤따라야 했지만.

 

 

 

 

 

 

 

 

 

 

 

 

 

 

 

 -사각사각

 

 오늘도 어김없이 시작되는 서류 지옥.

 

 “...”

 

 루그브리스는 눈길을 돌려 맞은편에 앉은 레아를 살폈다. 몇 시간 전부터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저 펜을 놀리던 그에게선 지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녀가 레아를 관찰한 지 일주일째.

 

 ‘...이 녀석, 괴물이잖아.’

 

 그것이 비르투스 현 왕에 대한 악마의 한줄평이었다.

 

 처음에는 태평하다고 생각했다. 나라 자체가 기울어지게 생겼는데, 하는 거라곤 책상 위에 앉아 종이 쪼가리만 끄적이는 게 다였으니.

 

 그러나 얼마 안 가, 진즉에 망했을 나라가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건 순전히 이 인간 덕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슬쩍 그가 작성하고 있던 양피지에 눈이 갔다. 한 시간 전에는 국고 예산 사용에 대한 명령서, 그보다 한 시간 전에는 군사 지휘 및 군대 축소에 관한 내용. 지금은 타국의 침공을 막기 위한 외교 서신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아무리 작은 나라라 해도, 국가의 모든 행정을 자신이 모두 담당하고 있다. 식사나 휴식, 수면 시간 도합 두 시간을 넘기지 않으면서. 휘하 기사들의 보고서를 팔랑팔랑 닥치는 대로 넘기면서도 내용을 꼼꼼하게 읽는 월등한 속독 실력은 그녀가 혀를 내두를 만한 것이었다.

 

 루그브리스는 이전, 레아가 자신의 계약서를 건성으로 훑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거, 제대로 보고 있었던 거구나.’

 

상념은 또다른 기억을 불려 들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그들이 작업을 시작하던 첫날의 일이었다.

 

 

 

 - 아니, 근데 애초에 왜 네가 모든 걸 다 관리하고 있는데? 뭘 이 지경이 돼도록 멍청하게 보고만 있었어?

 

 

 

 어째서 신하들이 다들 도망칠 때 붙잡지 않았냐, 그런 뜻으로 물었던 것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한참 웃도는 것이었다.

 

 

 

 - 제가 모두 내보냈습니다.

 

 - ...뭐?

 

 

 

 대화는 거기서 멈췄다.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서류 더미들이 그들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애초에 행정 업무를 보는 신하 한 명 없는데 뭔 보고서가 이렇게 많냐, 투덜거렸던 것은 그들만큼이나 왕실 기사들 또한 알차게 부려 먹히고 있다는 측은해지는 사실을 알게 된 걸로 끝.

 

 탁. 옆에서 펜을 놓으며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나는 레아의 인기척이 루그브리스를 상념에서 건져냈다.

 

 “...? 오늘은 일찍 끝내네?”

 

 평소엔 밤을 지새우면서 일하더니, 아직 해가 중천인데.

 

 “잠시 들러야 할 데가 있습니다.”

 

 따라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악마가 언제 누구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족속이던가. 호기심을 참지 않고 루그브리스는 레아의 꽁무니를 뒤쫓았다.

 

 레아가 발걸음을 옮기자 집무실 밖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이 그의 양옆을 꿰찼다. 집무실을 나오기 전 챙겼던 서류 몇 장을 넘기면서, 그는 호위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빅스, 마차 몇 대를 끌고 동부 쪽 접경지대에 있는 마을에 물자를 지원하러 가세요. 물론 왕실 소속이라는 건 되도록 숨기고.”

 

 “알겠습니다.”

 

 “휴론은 임페투스로 넘어가 이 서신을 그쪽의 왕에게 전달해 주시지요. 능변가인 당신에게는 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폐하.”

 

 두 기사는 각자의 임무를 맡은 채 자리를 떴다. 군말 없이 명령을 받드는 모습은 그들의 충직함을 나타냈다.

 

 그러나 몇 가지, 악마는 의문을 느꼈다.

 

 서신은 그렇다 치고, 다 스러져가는 마을 하나 살리기 위해 왕실에서 직접 힘을 쓴다고?

 

 게다가 물자 지원이다. 왕실의 좋지 못한 소문을 바로잡을 기회이기도 할 텐데, 왜 익명으로 하려는 거지?

 

 “...”

 

 ‘내가 왜 이런 걸 신경 쓰고 있지.’

 

 루그브리스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요근래 이 인간과 하도 부대끼다 보니, 자신의 사고방식마저도 이상해지는 느낌이었다.

 

 됐다. 뭐든 간에 자신이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한 나라의 왕이 일개 기사에게 존댓말을 쓴다는 것에 딴지를 걸어야 할 판이었다.

 

 권위가 땅바닥에 처박혔구만, 루그브리스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레아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그녀에게 말했다.

 

 “왕성에 남아있는 기사들은 모두 제 의지로 남길 선택한 겁니다. 그들에게 이 정도 예를 갖추는 것에 손속을 두면 그것이야말로 체면 안 서는 일이죠.”

 

 “...”

 

 루그브리스는, 레아가 자신의 업무 담당자들에게만 말고 다른 이들에게도 국외 도피를 권유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바보같은 놈들이네.”

 

 이런 미래도 뭣도 없는 나라에 일부러 남아 사서 고생하다니.

 

 생각이 깊어지는 동안 그들은 왕성 마차 앞까지 와 있었다. 레아가 먼저 마차 앞 계단을 밟았고, 악마가 그의 뒤를 따랐다.

 

 “뭐야, 인간 놈들은 또 왜 이렇게 많아?”

 

 그녀가 마차 주위를 서성이는 몇십 명의 기사들을 훑어보며 이죽거렸다.

 

 “...곧 알게 될 겁니다.”

 

 루그브리스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왕실 마차의 인테리어를 살피기 시작했다.

 

 왕실의 마차인 것치고는 외관부터가 소박한 디자인이었기에 별 기대는 안 했건만, 역시나 안쪽도 밋밋하기 짝이 없었다. 좁은 4인승의 구성은 별다른 편의가 제공되지 않았고, 승차감도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소박한 장식과 최소한의 꾸밈은 제작한 목공이 미니멀리즘을 과하게 고수했다는 느낌이었다.

 

 눈여겨볼 만한 점이 있긴 있었는데, 커튼이 모두 닫혀 있어서 내부가 새까맣다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크거나 하진 않은데?”

 

 푸핫, 왕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예산도 부족한데 그런 사치를 부릴 수가 있어야 말이죠.”

 

 끼익. 레아는 악마가 탑승한 걸 확인하고는 문을 닫았다. 곧 있어 마부 대용으로 말에 앉은 기사들이 출발을 알리고, 덜커덩거리면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몇 분 가지 않아, 루그브리스는 어째서 레아가 호위를 그렇게나 많이 대동했는지 알 수 있었다.

 

 “국왕 폐하-!! 부디 도와주십시오!”

 

 “어째서 저희의 말을 들어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악마와 계약하셨다는 소문은 사실입니까?!”

 

 왕성을 나오자마자 커튼 너머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사람들의 원성은 악마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분명 밖에서는 몸싸움도 꽤나 일어나고 있을 것이었다.

 

 “아, 시끄럽게 진짜...”

 

 루그브리스는 주의를 돌려 레아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평온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그 시끄러운 소리를 흘려들을 뿐이었다.

 

 “...이런 걸 외출할 때마다 듣는 거야?”

 

 “이미 익숙합니다.”

 

 담담한 어조로 그리 말하는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어째서 저들이 저를 원망하는지 아십니까?”

 

 “몰라, 관심 없어.”

 

 말은 그렇게 해도, 악마는 내심 알고 있었다. 그간 봐온 레아의 행적으로 판단해 비르투스의 왕은 무능하다거나, 탐욕적이거나 하진 않은 인간이었다. 왕으로서의 자질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렇게 평판이 나락인가. 그것은 룩스리아와 도시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질릴 만큼 들었기에 아는 것이었다.

 

 “하여간, 종교쟁이들이 문제야. 걔들은 시대 장소 상관없이 썩어 문드러진 곳이 한 군데는 꼭 있기 마련이지.”

 

 편들어준 게 기뻤던 걸까, 레아는 그 말에 살짝 웃음을 비추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온갖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북쪽에서는 경계를 맞댄 여러 국가의 침입이 몇 년 주기로 빈번히 일어났고, 동쪽으로부터는 오랑캐들의 약탈이 일상처럼 벌어졌죠. 그나마 안전한 서쪽은 바다의 기세가 심상찮아서 무역 항구로 사용되던 것도 폐쇄된 지 오랩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신문 기사에서 잇따라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부고 소식. 가뭄이나 장마로 인한 흉작. 정책 실패나 경제의 불안정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시장 위기.

 

 그런 것에 두려움을 느낀 국민들은 다른 곳에서 ‘구원’을 찾기 시작했다.

 

 “몇십 년간 그런 사태가 지속되니 의심을 품을 만도 하죠.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국가가 위태로운 것을 두고 악마의 저주니 계약이니 하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뭐, 결정적으로 새로운 교황의 취임이 크게 작용하기도 했죠, 그가 다리를 쭉 뻗으며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왕권이 약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교황청이 사람들을 선동해 비르투스를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한 게 현 교황, 성 폰티안이 취임한 이후부터니까요.”

 

 “...그래서 아까 마을 지원한다는 것도...”

 

 “비르투스는 위태로웠던 만큼 신앙이 굳건한 나라입니다. 악마에게 저주받은 왕실의 지원 따위 받고 싶어 할 국민은 없죠.”

 

 나라를 떠서 타국으로 도망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판입니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레아는 조금 외로워 보였다.

 

 “...”

 

 악마는 잠시,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 루그브리스, 인간들에게 너무 정을 주진 말려무나.

 

 

 

 앞에서 대놓고 코웃음 치진 않았으나, 그녀는 어째서 선조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들에게 정을 붙인다니, 자신이? 저 하등한 유인원들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것도 그럴 게, 봐라.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면서 진실은 코빼기도 보려 하지 않잖은가.

 

 ‘...아둔하기 짝이 없기는...’

 

 니네들이 그렇게 원망하는 왕이, 늬들 명줄 필사적으로 이어붙이고 있는 거라고.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이 남자가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든 연명시키려고 어떤 노력을 하는지.

 

 “역시 인간 놈들은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다니깐.”

 

 여전히 귀를 어지럽히던 인간들의 아우성이 악마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다. 짧게 혀를 찬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사아악-

 

 마차 내부로 얇은 방음막이 퍼지면서 밖으로부터 오는 소리를 원천 차단시켰다.

 

 루그브리스는 약간 우쭐해져 레아를 쳐다봤다. 답지 않게 그는 놀란 표정이었다.

 

 “...당신, 악마가 맞긴 하군요.”

 

 “너 진짜 죽을래?”

 

 

 

 

 

 * * *

 

 

 

 

 

 어느새 마차는 멈췄고,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물 떠밀려가듯 달라붙었던 인파는 마차가 왕도를 지나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루그브리스는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인상을 지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도착한 곳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장소 중 하나였으니.

 

 “야, 성당 가는 거였으면 미리 알려주든가! 괜히 따라왔네...”

 

 학을 떼는 악마를 뒤로하고 레아가 문을 열자, 조그만 예배당이 그들을 반겼다.

 

 척 봐도 잘 관리된 곳은 아니었다. 발치만 훑어봐도 드문드문 쌓인 먼지가 보였고, 건물 자체가 많이 낡았는지 허름한 인상을 주었다. 사람의 체중을 받쳐본 지 오래된 예배용 의자는 레아가 자리를 잡고 앉으니 끼긱거리며 거친 신음을 흘려댔다. 일요일 오후의 교회에 사람 한 명 없는 것은 필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근데, 웬 교회? 너 종교 믿어?”

 

 교황청 놈들이 얼마나 자신을 구워삶으려는지 뻔히 알면서도 신을 믿는다니.

 

 왕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이래 봬도 전 독실한 신자라서 말이죠. 아무리 바빠도 달에 한 번쯤은 예배를 드린답니다.”

 

 그 말을 들은 악마가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종교 놀이에 정신이 팔려선...

 

 “잠시만 기다리세요. 오래 안 걸릴 겁니다,” 레아는 그리 말하며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뜩이나 질색하던 루그브리스는 자신의 발이 더러워지는 꼴은 못 본다고, 성당 내부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왕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지루함을 못 이긴 건지, 그녀는 작은 날갯짓으로 허공을 부유하면서 건물 이곳저곳을 쑤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원래부터 먼지 날리던 예배당을 마구 헤집어놓을 즈음.

 

 “...”

 

 슬쩍. 문득 그녀가 뒤를 돌아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던 그에게로 눈을 돌렸다. 서창에서 흘러들어오는 나른한 오후 햇살이 청은발에 반사되는 게 평소보다도 조금 더 누그러진 분위기였다.

 

 ‘...저런 꼬맹이가.’

 

 나이도 어린 게, 어쩌다가 벌써부터 왕이 된 걸까.

 

 “뭐합니까, 거기서?”

 

 ‘...!’

 

 악마의 의식이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눈치채 보니 기도를 끝낸 그가 눈동자를 자신에게 향한 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빨리 가자, 여기 계속 있다간 토할 것 같아.”

 

 그녀가 먼저 기도실을 빠져나오며 레아에게 손짓했다.

 

 곧 그들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고, 다시 마차로 돌아와 탑승할 때쯤 그가 대뜸 악마에게 고백했다.

 

 “루그.”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전 사실, 딱히 신을 믿진 않습니다.”

 

 황당한 발언에 루그브리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대체 예배당까지 와서 이 뻘짓은 왜 한 건데?

 

 그 반응이 자못 우스웠는지 레아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신이란 자가 있었다면, 지금 저와 씨름 중인 교황이 아니라 제 편을 들어주지 않았을까요?”

 

 “...그걸 네 입으로 말하는 것도 참...”

 

 그가 창에 팔을 고정해두고 턱을 괴었다. 황금으로 빚은 듯한 홍채에는 약간의 애수가 담겨 있었다.

 

 “신은 믿지 않지만, 신앙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이런 때일수록요.

 

 “...”

 

 “인간은 나약한 생물이죠. 기댈 곳이 없어지면 너무나 쉽게 바스러지고, 자기 스스로를 파멸로 내몰아버리기도 합니다.”

 

 “알고 있어.”

 

 자신과 계약한 인간들은 대부분 그런 족속이었으니까.

 

 절박해지고 다급해져서, 끝내 자신을 지옥으로 끌고 갈 소원을 비는 멍청한 것들.

 

 “그런 인간들이니까 신을 만들고, 종교를 만든 거겠죠.”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을 대신 짊어질 누군가가 필요했기에, 신을 염원했다.

 

 그건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그는 나직이 생각했다.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피곤한 거 같은데, 가면서 조금 자지 그래? 어차피 왕성에 도착하면 또 미친 듯이 일해야 할 거 아냐.”

 

 그대로 잡생각에 사로잡혀 버릴 뻔한 레아였지만, 그전에 악마가 그를 제지했다. 뾰로통하게 입을 비죽 내민 그녀는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

 

 그가 빙긋 웃었다.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계속 깜빡거리던 것이 피곤하다는 신호였던 건가.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루그.”

 

 왕성에서 봐요. 그리 말한 뒤 그는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깐.”

 

 그나저나, 악마를 바로 앞에 두곤 곤히도 자네. 루그브리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배짱이 좋은 건지, 그냥 멍청한 건지...”

 

 ...

 

 ‘뭐, 됐나.’

 

 어짜피 계약만 끝나면 안 볼 사이.

 

 처음에는 어떻게든 등쳐먹으려 했으나, 이젠 그것마저도 귀찮다.

 

 하루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악마는 넌지시 생각을 던지며 등받이의 안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계약을 체결한 지 한 달째.

 

 “...뭡니까, 이건?”

 

 대낮부터 온갖 연성진을 방바닥에 전개하고 있는 악마를 보며 레아가 도끼눈을 뜬 채 한 말이었다.

 

 그가 조용히 집무실을 주욱 훑었다. 구석으로 아무렇게나 치운 카펫은 하얀 가루로 범벅이 된 채 고이 찌그러져 있었고, 중앙을 차지하던 책상은 염동력으로 띄워 올려져 시야의 한 폭을 차지하고 있었다. 몸을 돌려 마주한 루그브리스는 말린 육포를 한 손으로 뜯으며 발을 사용해 소환진의 마지막 수식을 적어나가는 중이었다.

 

 “네가 하도 나라 바로잡을 생각이 없어 보여서 말야.”

 

 “...너무하네요. 이쪽은 나름 열심인데.”

 

 하나 먹을래? 육포 조각을 건네는 루그브리스에게 다가가 그는 한 점을 받아먹었다. 언제부턴가 스스럼없이 대하는 게 편해진 그들은 아침을 이렇게 대충 때우곤 했다.

 

 “루그, 요즘 들어 음식을 많이 먹네요.”

 

 “그냥 기분 내는 거야. 생각보단 맛이 괜찮거든.”

 

 탁. 작성을 끝마친 그녀가 분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흐르던 땀을 닦아내며 미리 떠 놓은 물을 벌컥벌컥 마신 루그브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작품을 한껏 감상했다.

 

 “그래서, 아직 대답을 못 들었습니다만.”

 

 집무실을 어질렀기 때문일까, 약간의 가시가 돋쳐있는 질타였다. 자신보다 머리 한 개 정도 더 큰 레아가 마땅찮은 듯 내려다보고 있으니 악마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 주춤해버렸다.

 

 “...네 업무 능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인력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

 

 이 상태론 나라 얼마 못 가는 거 알지?

 

 “...”

 

 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째서 신하들을 모두 물렸는가, 말해줘야 하나 고민하던 중.

 

 “그래서 말인데.”

 

 말을 계속하며 그녀가 손톱으로 손바닥을 가볍게 그었다. 주륵, 새빨간 피가 닿자 분필로 그은 문양이 보랏빛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그 인력, 그냥 내가 보충하기로 했어.”

 

 빛이 소환진 쪽으로 굴절되면서 더욱 환하게 빛나는 것과 대조되게 주변이 새까맣게 변했다. 곧이어 집무실 바닥으로부터 검은 구정물이 솟아나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이내 무릎을 꿇은 채 악마를 향해 예를 표하는 자세를 취한 사람의 형태를 갖추어갔다.

 

 레아는 그 모습을 잠깐동안 눈여겨보다 무거운 입술을 떼어 말했다.

 

 “...권속들인가요?”

 

 “응. 정확히는 소환수지만.”

 

 “업무에 관한 것만큼은 마법을 쓰지 말라고 조항에서 명시했었는데.”

 

 “마법과 주술은 엄연히 계통이 다른 별개의 학문이란다, 애송아.”

 

 레아가 침묵했다. 이쪽 분야에 대해 문외한인 만큼, 그 둘을 따로 분리해서 조항에 넣을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손수건으로 피를 닦으며 능청을 떠는 그녀는 마치 ‘왜, 불만 있어?’라고 말하는 듯 레아를 올려다보다가, 그의 옷차림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채곤 눈을 치켜뜨며 물어왔다. 실내에서 입던 헐렁한 나이트가운이 아니라 왕가의 표식이 새겨진 새하얀 예복을 착용한 게 웬일로 치장에 신경을 썼다는 느낌이었다.

 

 “...? 뭐야, 엄청 차려입었네. 여친이라도 만나러 가?”

 

 “하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일단 따라오세요,” 그가 악마를 불렀다. “오랜만의 외출 일정입니다.”

 

 그 말에 루그브리스의 귀가 트였다. 확실히, 이 한 달간 그들은 집무실에 처박혀 업무 보는 것 외의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봐도 좋을 정도로 폐쇄된 생활을 해왔었다. 밖으로 나간다는 상황 자체는 그녀에게 있어 썩 달가운 소식이었다.

 

 “좋아, 어디 가는데?”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교황 만나러요.”

 

 “...?”

 

 정적.

 

 루그브리스는 다급히 몸을 비틀어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보다 한발 빠르게 레아의 손이 그녀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악을 쓰며 벗어나려는 그녀를 쇠사슬로 칭칭 감은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소환수들에게 방청소를 명령하고선 유유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아악, 끌지 마, 끌지 말라고-!”

 

 

 

 

 

 * * *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 몇 시간째.

 

 레아는 눈을 돌려 출발하기 전부터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악마를 슬쩍 훔쳐보았다. 몸을 부르르 떠는 시늉과 볼을 있는 힘껏 부풀린 모습은 누가 봐도 삐졌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 화 푸시죠. 볼일 끝나면 가고 싶은 곳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했잖습니까.”

 

 “...으으.”

 

 홱, 좌석에 누워 있던 그녀가 몸을 일으켜 레아와 시선을 맞췄다.

 

 “그 사슬, 아프다고 했지! 암만 내가 마계 공작이어도 성유물 정도면 후유증 한나절 동안은 남는다고!”

 

 “...미안합니다.”

 

 “거기다! 교황 만나러 가는 거면 너 혼자 가면 되지, 난 왜 끌고 가는 건데?”

 

 사실 진짜 화난 이유는 이쪽이었다. 악마를 교황 앞으로 끌고 가다니, 암만 생각해도 좋은 꼴 보기엔 글렀지 않은가.

 

 레아는 눈을 마주 보다 말고 고개를 창가 쪽으로 향했다.

 

 “그냥, 혼자 있으면 좀 불안해서요.”

 

 루그브리스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불안해? 이 인간이?

 

 “전혀 상상이 안 가는데.”

 

 “...당신, 대체 절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다음 편 내일 올라감

순챈도 대회 하던데 거기에도 내도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