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에서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고도 모자라, 이튿날이 거의 다 흘러가서야 그들은 교황이 거주하고 있는 성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따분해진 악마가 레아를 가끔씩 귀찮게 굴기도 했으나, 그는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혼자 움직였더라면 그는 제 상념 속에 너무 빠져들어 간신히 되찾은 안정을 놓쳐버릴 것만 같았기에, 결과적으로 그녀를 대동한 것은 옳은 판단이라 반추했다.

 

 “아 진짜, 겁나 지루하네! 인간들은 어떻게 이런 걸 매번 타고 다니는 거야?!”

 

 “조금만 참으세요. 거의 다 왔으니깐.”

 

 “애 취급하지 말랬지! 내가 너보다 몇십 년은 더 살았거든?”

 

 마치 소풍 가는 도중 인내심이 바닥난 아이를 달래는 어미 같은 말투가 악마의 못난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아는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일침을 흘려넘겼다. 창밖을 내다보자 교황청이 보이는 것이 도착지에 근접했음을 알렸다.

 

 “웩, 교황청이잖아... 응?”

 

 질색하던 것도 잠시, 그녀가 레아에게 질문했다.

 

 “...근데 왕이 교황청에 찾아가도 되는 거야?”

 

 “안 될 건 뭐가 있습니까? 교황을 만나러 가는 건데, 교황청으로 가야죠.”

 

 “아니, 그게 아니라...”

 

 교황과 만나는 거라면, 하다못해 다른 접선 장소를 마련하면 될 텐데, 

 

 이래서야 마치 호출을 받고 달려가는 신하 같지 않은가.

 

 대외적으로 이것이 어떻게 보이느냐, 그런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레아는 짐짓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의문에 대답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저쪽이 지금 왕권보다 권위가 까마득히 앞서는 건 사실이니까요.”

 

 무너져가는 국가의 왕과 대륙 전체를 통틀어 번성하고 있는 교회의 수장.

 

 제대로 된 대결이 성사되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멈추고, 대동하던 기사들이 마차의 문을 열자 그들은 땅을 딛었다. 하늘이 우중충한 게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만 같았고, 공기가 차가워 바람 없이도 쌀쌀한 느낌이었다.

 

 “루그, 은신 마법 준비해두세요. 저번처럼 들키지 말고.”

 

 “알고 있어.”

 

 아무리 그래도 교황 앞에서 악마를 대동하는 걸 떡하니 보여줄 배짱은 없다. 루그브리스가 전신을 유체화한 것을 확인한 뒤, 레아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교황청 내로 입성했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마주한 눈부신 광채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휘황찬란하고 사치스러운 내부엔 온갖 장식품들이 곳곳에 비치되어 있었고, 커다란 샹들리에가 같은 방에 몇 개씩이나 달려 있었다. 왕성의 깔끔하지만 단조로운 꾸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루그브리스는 레아를 슬쩍 곁눈질했다. 웬일로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언제 봐도 화려한 인테리어군요, 성하.”

 

 험한 표정은 이내 비릿한 웃음으로 번졌다. 방의 맞은편에서 푸짐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등장했던 까닭이다.

 

 “허허, 이게 다 건실한 형제자매분들 덕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자비에 감사하며 살고 있죠.”

 

 교황이 손짓하자 성기사들은 일제히 물러나며 벽 쪽으로 정렬했다.

 

 “이런, 제가 큰 실례를. 금방 다과를 준비하겠습니다.”

 

 “됐습니다. 어차피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앉자마자 시작된 신경전. 분위기가 날카로워지는 걸 방에 있던 모두가 느꼈다.

 

 “용건만 보고 해산하죠. 무엇 때문에 부르신 겁니까?”

 

 철커덕. 성기사들의 갑옷이 맞물리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성 폰티안 교황이 손을 들어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칼부림이 났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스산한 분위기였다.

 

 ‘...압박 넣는 게 순 건달들이잖아,’ 루그브리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교황은 사람 좋은 미소를 유지한 채 느긋한 말투를 이어갔다.

 

 “비르투스가 당면한... ‘어려움’에 대해 논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

 

 “왕께서도 숙지하고 있으시겠지요. 지금의 비르투스는 외부의 도움 없이 혼자 일어설 수 없다는 걸.”

 

 단순히 현실을 말하는 것뿐이었지만, 레아는 그것이 이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게 영 껄끄러웠다. 애초에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게 누군데 이런 말을 뻔뻔스럽게 한다는 것인가?

 

 “이럴 때일수록, 서로를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하시는 게 뭡니까?”

 

 평소보다 감정적이다. 레아와 한 달간 지내면서 그의 행동이나 말투를 관찰해 온 루그브리스는 알 수 있었다.

 

 “비르투스의 수도에 교황청 대사관을 설치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민심을 안정시켜, 경제를 회복하는 데에 전념하실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지금 국고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큰 규모의 건축은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국의 마도사들을 빌려드리겠습니다. 모두 유능한 자들이니, 저들에게 맡기신다면 한 달 이내에 완성될 겁니다. 물론 건축 자재 또한 이쪽에서 마련할 테고요.”

 

 겉보기엔 좋은 일 하는 걸로만 보이지만, 이 방에 있는 그 누구도 미끼를 덥석 물 정도로 무르지 않았다.

 

 ‘너무 대놓고 속을 드러내는데.’

 

 빚을 지우려는 속셈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두 국가 간의 입장이라든가 힘의 차이가 압도적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수도에 성국의 대사관이 설치된다면 종교의 믿음이 강한 비르투스의 특성상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

 

 즉, 교황이 간섭할 여지가 이전보다도 많아지게 된다. 그것을 아는 레아가 곧이곧대로 ‘협조’를 수락할 리가 없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아직 성국이 움직이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행여나 일이 틀어진다면 협조를 부탁드릴 터이니, 그때 가서 다시 의논해보는 게 어떠신지.”

 

 일순, 폰티안 교황의 눈에 험악한 빛이 깃들었다.

 

 “...왕께선 무언갈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이 제안은 지금 말고는 없는 거라 보셔도 좋습니다.”

 

 마치 ‘베푸는 쪽은 이쪽이다’라고 확실하게 못 박는 듯한 언사. 그러나 레아는 그 암묵적인 협박을 담담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럼, 이 이야기는 없던 걸로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움찔. 루그브리스가 저도 모르게 긴장 상태로 돌입했다.

 

 ‘...또야.’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 갑자기 레아의 분위기가 돌변했던 것처럼. 지금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의사를 확고히 하는 데에 있어 그런 대화의 주도권 탈환은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었다. 교황은 잠시 당황한 듯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느긋하게 끝을 고했다.

 

 “...안타깝군요. 평화롭게 해결할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무엇을 해결한다는 건지는 명확히 하지 않았으나, 루그브리스는 하나를 콕 집어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교황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지만, 눈매가 단단히 고정된 게 웃는 표정은 아니었다.

 

 “모셔다드리세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휘하의 성기사들이 움직였다. 그중 몇 명이 레아의 양옆을 압박하듯이 꿰찼고, 비르투스의 왕은 교황을 노려보면서도 마지못해 발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죄수를 운송하듯 그들은 복도를 걸었다. 순식간에 입구로 되돌아온 일행은 내쫓아지듯이 밖으로 나왔고, 교황청의 문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굳게 닫혔다. 불과 몇 분 만에 허무하게 끝나버린 회담은 가라앉은 분위기만을 남기고선 자취를 감춰버렸다.

 

 “폐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사들 중 한 명이 레아에게 다가와 말했다.

 

 “...”

 

 왕은 아까부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먹구름이 낀 것이 이대로 마차를 운행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비가 올 것 같습니다,”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어딘가 하룻밤 묵을 곳을 찾죠.”

 

 

 

 

 

 * * *

 

 

 

 

 

 “...”

 

 은신을 푼 악마가 탁자 위에 있던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옆을 슬쩍 곁눈질했다.

 

 “너 아까부터 왜 그래?”

 

 암만 봐도 상태가 이상했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으나 호흡은 거칠었고, 두 눈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혼란스러워서요.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저 말만 벌써 세 번짼데, 루그브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티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 상태면 고작 차 몇 잔 홀짝이는 것만으론 아무런 도움도 안 될 것이 뻔했다.

 

 “야, 나 좀 봐봐.”

 

 “...”

 

 그는 여전히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하아...”

 

 짝!

 

 “...?!”

 

 놀란 레아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루그브리스가 양손으로 그의 두 볼을 감싸 쥔 채 얼굴을 받치고 있었다.

 

 “뭘 그렇게 풀 죽어 있어? 교황 놈 능구렁이 같다는 거 몰랐던 것도 아니고.”

 

 “...아, 그...”

 

 “뭐가 문제인지 말해줘야 알 거 아냐. 뭐라도 좋으니까 얘기해봐.”

 

 어쩌다가 보모 노릇까지 해야 하는지. 루그브리스가 혀를 찼다.

 

 “...막막해서 그래요,” 그가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라는 엉망이고, 국민들 원성은 커져만 가고, 다른 나라들은 맹수들처럼 언제 쓰러질지 기회만 노리고 있으니...”

 

 아무리 심지가 굳은 인간이어도 정신력에 한계는 있다. 그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런 모습, 체면도 신경 써야 하니까 밖에선 보일 수도 없는데,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힘이 빠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도, 계속 이러진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가 미약하게나마 입꼬리를 올렸다.

 

 “하루 동안 푹 쉬면 괜찮아질 테니...”

 

 “레아.”

 

 그가 정신을 차린 건, 악마가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부른 것 때문이었다.

 

 “잘 들어. 인간들은 원래 죄다 추악한 놈들 뿐이야.”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녹여 다져진 악마의 철학.

 

 “...”

 

 설령 그것이 편파적이고, 이기적이며, 객관적이지 못한 잘못된 관점이라 해도.

 

 지금의 그에겐 이 말이 필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 놈들 말에 귀 기울이지 마. 시간 낭비일 뿐이니까.”

 

 한동안 레아는 말이 없었다. 그는 오직 악마의 보라색 눈동자를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다.

 

 “푸흡.”

 

 그러고선, 갑자기 소리내어 웃었다. 루그브리스는 처음으로 거짓 한 톨 없는 그의 웃음을 보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안 어울려요, 루그.”

 

 “뭐?! 야, 기껏 위로해줬는데...!”

 

 평소의 성깔을 드러낸 악마를 향해 그가 몸을 앞으로 살며시 기댔다. 약간 당황하면서도, 루그브리스는 그를 피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주었다.

 

 “...고마워요.”

 

 레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숙박 시설에 들어오자마자 움직이기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기에, 그는 의자 위에 걸쳐 둔 예식용 옷을 집어 들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민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한결 낫네요.”

 

 그 표정을 보고 나서야, 루그브리스 또한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약속 지켜.”

 

 “네? 약속이라니...”

 

 아직 텁텁하게 안개가 낀 머리로 그는 어렴풋이 이전에 주고받은 대화를 상기시켰다.

 

 

 

 - 볼일 끝나면 가고 싶은 곳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했잖습니까.

 

 

 

 “...아.”

 

 기억났어? 그녀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날씨도 이래서 좀 곤란할 것 같네요. 마차도 못 움직일 테고...”

 

 “걱정 마. 다 방법이 있으니까.”

 

 애초에 인간들 탈것은 너무 느리단 말이지.

 

 그녀가 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문도 모른 채 그는 악마의 손을 붙잡았고,

 

 “우왓-!”

 

 휘릭! 자신의 손을 잡기가 무섭게 그의 몸을 통째로 잡아당긴 루그브리스가, 양손으로 레아를 끌어안고 몸을 날려 창문 밖으로 떨어졌다.

 

 “잠, 루그, 무슨?!”

 

 그들이 묵고 있던 곳은 3층 높이의 방. 떨어진다면 무사하진 못할 것이었다.

 

 그가 당황할 사이, 지면이 근접함을 알렸다. 레아는 충격을 대비하여 눈을 질끈 감았지만.

 

 펄럭-

 

 “...?”

 

 “아하하, 뭐야. 쫄았어?”

 

 눈꺼풀을 다시 열었을 때 보이는 건 비가 내리는 대도시의 풍경. 날개를 펼쳐 하늘을 유영하는 루그브리스의 얼굴에는 웃음이 만개했다. 처음으로 우위를 점한 것 같아 신선함을 느끼던 그녀는, 얼이 빠진 레아를 안심시키듯 토닥이며 말했다.

 

 “걱정 마, 절대 안 놓치니까.”

 

 “...루그. 처음으로 연장자 같았어요.”

 

 뭐래, 멍청이. 입을 씰룩이며 말하는 악마는 전혀 나쁜 기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더 빠르게 상공으로 치솟았다.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곳까지 멀리, 또한 높게. 어느샌가 구름 위를 주파한 두 사람은 쏟아져 내리는 달빛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루그는 매번 이런 풍경을 보는 건가요?” 그가 물었다.

 

 “나도 이렇게 높게 나는 날은 많이 없어.”

 

 그보다, 어때. 악마가 표정으로부터 자부심을 내비쳤다.

 

 “이런 거 좋지 않아? 자유롭다는 느낌이잖아.”

 

 평소보다 밝아 보이는 달. 밤하늘을 빼곡히 채운 별무리. 솜털같이 푹신해 보이는 구름으로 된 카펫.

 

 그렇네요, 라고 한마디 하기도 전에.

 

 “그럼, 다음 관광지로 가볼까-!”

 

 “...네?”

 

 문답 무용이라고, 루그브리스가 상공 몇 킬로미터에서 커다란 게이트를 열었다. 커다란 균열로부터 전해져오는 쌀쌀한 한기에 레아는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아, 맞다. 보호막 쳐준다는 걸 깜빡했네.”

 

 키득키득. 그녀의 손으로부터 흘러나온 따스한 감각이 몸 곳곳으로 퍼졌다. 눈치채 보니, 그들은 성국으로부터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빙하 산맥으로 와 있었다.

 

 “...와아.”

 

 그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시야를 빼곡히 채운 설산의 산맥. 대자연이 선보이는 풍경은 그가 이제껏 봐왔던 그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휘우웅, 악마가 힘찬 날갯짓으로 창공을 쏘다녔다.

 

 “...예쁘네요. 이런 게 실존한다는 것조차 몰랐는데.”

 

 어느새 왕의 얼굴에는 일말의 고민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생일날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표정이 걸려있을 뿐.

 

 “여기, 내 고향이야.”

 

 “...고향이요?”

 

 그가 의문을 표출했다. 그렇다면 여기가 마계란 말인가.

 

 “벨로나 공작가는 예로부터 북부를 담당했어. 따지고 보면 우리 영지인 거지.”

 

 “마계는 뭔가 좀 더 불같은 곳일 줄 알았는데요.”

 

 “응? 뭔 소리야,” 루그브리스가 고개를 내려 그와 눈을 맞췄다. “여기 인간곈데?”

 

 상식의 차이로 발생한 엇갈림. 이내 악마가 이해한 듯이 아하, 하면서 설명했다.

 

 “어차피 여긴 사람 살 수 있는 날씨가 아니잖아? 그래서 이런 곳은 암암리에 마족들이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거야.”

 

 “...뭔가 엄청난 걸 거저 들은 느낌인데요.”

 

 “뭐 어때,”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레아가 다시 눈을 돌렸다. 먼발치에서 건축물의 실루엣이 눈보라에 가려져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게 분명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곳에서 살고 있었다니, 평생 알기나 했을까.

 

 자각할 틈도 없는 새에, 그가 작게 바람을 입 밖으로 냈다.

 

 “언젠간 세계여행이라도 한번 가보고 싶네요.”

 

 흠칫. 그가 뒤늦게 숨을 삼켰다. 이뤄지지 못할 걸 알면서도 말도 안 되는 소원을 빌었다는 데에 한심함을 느낀 이유는,

 

 “그래, 좋아. 모든 게 끝나면 내가 어디로든 데려다줄게.”

 

 필시 그녀가 자신의 기도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마는, 소원을 빌면 그걸 이뤄주는 존재니까.”

 

 “...”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악마를 위해, 그는 그저 짧게 수긍할 뿐이었다.

 

 “...그러네요.”

 

 “그럼, 오늘은 어디 가볼지 맛보기로 쭉 보여줄 테니까, 어디로 갈지 잘 생각해 둬-!”

 

 “네? ...윽!”

 

 촤락. 루그브리스가 다시 한번 포탈을 열고선 가속을 거듭하며 균열 속으로 직진했다. 엄청난 풍압에 눈을 질끈 감은 레아가 말릴 틈도 없이, 그녀는 세계 각지를 떠도는 표류자가 되어 온갖 풍경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시뻘건 용암이 흐르는 화산 분화 현장, 커다란 폭포들이 일렬로 나열된 커다란 협곡, 정확한 깊이를 알 수조차 없는 심해의 바닥까지...

 

 

 

 

 

 * * *

 

 

 

 

 

 날씨가 점점 더 더워지고, 여름이 찾아온다. 내리쬐는 햇볕에 사람들은 옷을 얇게 입기 시작했다.

 

 교황청으로의 방문 이후. 악마는 레아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었다.

 

 업무를 볼 때도, 잠깐 눈을 붙일 때도, 갑갑한 왕성에 질려 잠시 외출할 때도.

 

 그녀가 불러온 소환수들 덕에, 레아는 이전보다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휴식하는 시간은 눈에 띄게 늘어났고, 자연스레 거기엔 루그브리스가 끼이게 되었다.

 

 “이것도 꽤나 오랜만이네요.”

 

 레아는 상권이 다시 활성화된 길가로 나와 시장을 거닐고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에 얼굴을 가린 후드를 뒤집어쓴 게 키만 컸지, 어릴 적 몰래 성을 나와 시내를 떠돌아다니던 때와 빼다 박은 모습이었다.

 

 “...근데, 난 또 왜?”

 

 투덜거리는 악마를 보며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강요에 떠밀려 은신 마법을 푼 채 자신과 나란히 걷던 루그브리스는, 새로운 옷이 불편한지 계속 치맛자락을 이리저리 돌려대는 중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때 약속, 못 지켰잖아요. 가고 싶은 곳 데려다주겠다고 했던.”

 

 비록 ‘제가 가고 싶은 곳’이지만요.

 

 제멋대로인 말을 뻔뻔하게도 내뱉는 그를 보며 악마가 실소했다. 무슨 짓을 하든 눈알을 굴리던 예전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전까지도 달라붙어 일하는 게 일상이었지만, 그 이후로는 좀 더 긴밀해진 느낌.

 

 루그브리스는 저도 모르게 그 느낌에 익숙해져 갔다.

 

 두 달 동안 뼈 빠지게 일했던 그들의 노력은 성과를 빚어냈다. 국력은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차츰 원상태를 회복해가는 중이었으며, 민심이 안정되자 사람들은 단출하다고는 해도 이런 축제를 준비할 수 있는 수준까지 활기를 되찾아갔다.

 

 비르투스는, 다시 자립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어갔다.

 

 “그래서, 여기가 네가 ‘가고 싶었던 곳’이야?”

 

 레아는 대답 대신 작은 가판대 앞에 서서 그녀를 손짓했다. 루그브리스가 다가가자, 새빨간 양념을 두른 꼬치 몇 개가 불에 노릇하게 구워진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그, 이거 먹어 볼래요?”

 

 “뭔데 이게.”

 

 헙, 그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꼬치 하나가 날아와 입 안으로 들어왔다. 당황한 나머지 씹는 것도 잊은 채 그것을 베어 물어 꿀꺽 삼키자, 달짝지근한 맛이 혀끝에 살짝 닿고는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뭐야, 맛있잖아.”

 

 “후후, 그렇죠?”

 

 인간의 문화는 술을 제외하곤 하등한 것. 그랬던 그녀의 가치관도 어느덧 변화하여 꽤나 물렁해져 있었다. 양손에 꼬치를 하나씩 들고 먹는 모습은 분명 그런 연유에서였다. 

 

 인파가 붐비는 큰길을 빠져나와, 숲을 끼고 난 길을 따라 그들은 걸었다. 시끌시끌한 배경음 속에 숨은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잔잔한 기분을 더해주었다.

 

 “꽤 멀리까지 왔네, 우리.”

 

 그것은 비단 물리적인 거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레아는 눈치챘다.

 

 “...그러게요.”

 

 “슬슬 계약 기간이 다해가는 것 같은데.”

 

 “...”

 

 레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도 직감했다. 이 ‘비일상’이 곧 끝날 거라는 건 안타까웠지만, 이미 이별에 익숙해진 그는 별다른 불만 없이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 자신의 차례가 된 것일 뿐.

 

 “그렇네요.”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 상태로면, 정말로 바로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쉽진 않아?”

 

 “...네?”

 

 루그브리스가 그를 마주했다. 자수정처럼 빛나는 홍채에는 그가 볼 수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한 씁쓸함이 반짝이고 있었다.

 

 “계약이 끝나도 못 만나는 건 아니지만.”

 

 악마와 인간. 그것도 한 나라의 왕.

 

 기간이 끝나면, 최대한 입방아에 오르는 걸 피하기 위해 만나는 건 자제해야 했다. 루그브리스는 알고 있었다.

 

 “인간이랑 가까이 지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어.”

 

 “...”

 

 툭.

 

 “아얏!”

 

 가볍게 악마의 정수리를 손날로 친 레아가 그녀를 지나쳐 왕성으로 향했다.

 

 “뭘 벌써 다 끝났다는 듯이 얘기합니까.”

 

 “...으윽.”

 

 “자, 빨리 오세요. 내일 아침까지 해놔야 할 일이 산더미잖아요.”

 

 “또 철야하는 거야?! 으엑...”

 

 루그브리스가 레아의 앞으로 다가갔지만, 어째선지 그는 얼굴을 보여주려 하지 않으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부끄러워하는 거냐고 놀려댔지만.

 

 악마는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가 자신으로부터 무언갈 대단히 숨기고 있다는 걸.

 

 

 

 

 

 

 

 

 

 

 

 

 

 

 

 “...전염병? 이 시기에?”

 

 보고를 받은 악마의 목소리에 위기감이 불거졌다.

 

 [수도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모양입니다. 전파력이 어마어마해서 확인된 보균자만 벌써 10만 명이...]

 

 루그브리스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수도는 위생이나 의료 시설이 가장 발달한 곳.

 

 ‘...대체 뭐가 어떻게 일어났길래 수도 한가운데에서 전염병이 퍼지지?’

 

 모처럼 일궈낸 기반이었다. 여기서 무너져내릴 수는 없었다.

 

 “...가봐야겠어.”

 

 “루그, 같이-”

 

 “안 돼, 넌 여기 남아.”

 

 그녀가 단호하게 레아의 말끝을 잘랐다.

 

 “가서 뭐 하게? 할 수 있는 것도 마땅히 없는데. 의학 전공한 것도 아니잖아, 너.”

 

 “의사들을 모집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자칫하면 그 의사라는 것들 죄다 병 걸려서 쥐꼬리만큼 남아있는 의료 인력 붕괴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수뇌부가 마비되면 말짱 도루묵인 거 알잖아. 고집부리지 마, 사태 파악이 우선이야.”

 

 깊게 살피지 않아도 보이는 경계심이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엿보였다. 냉담하게 들리는 말투에는 그런 속마음이 반영된 것도 있었다.

 

 “...”

 

 레아는 항변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물론 자신이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있음은 알고 있었지만.

 

 “...당신은요?”

 

 그 말을 들은 루그브리스는 멈칫했다가 잠시 뒤,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악마가 병 걸리는 거 봤어? 걱정 말고 하던 거나 마저 하고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폴짝, 창문을 열고 성의 첨탑 위에 사뿐히 쪼그려 앉은 루그브리스가 매서운 속도로 감염원이 발생한 지역을 향해 주파하기 시작했다. 같은 도시 안에 있었던 만큼, 십 분이 되지 않아 그녀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찾은 건 당연히도 병원이었다. 교회 재단이 설립한 병원은 환자들이 너무 몰린 탓에 인파를 통제하지 못하여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고, 그 광경은 안 그래도 복잡한 그녀의 머리에 짜증을 끼얹기 충분했다.

 

 “멍청한 것들...”

 

 따악! 악마가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왕실 기사단으로 의태한 그녀의 소환수들이 대열을 갖춰 아우성치는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당장은 저 정도면 되겠지.’

 

 루그브리스가 은폐 마법을 걸고 인간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병원 내부로 진입한 그녀는, 환자들의 상태를 엿보기 위해 가장 가까운 병실을 골라 문을 열어젖혔다.

 

 “...!”

 

 순간, 박동을 한 박자 놓친 그녀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방에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몸져누운 환자들은 죄다 멍이 든 것처럼 몸이 보랏빛 반점으로 얼룩져 있었고, 의료진들은 다급하게 병상을 옮기며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있었다. 누군가가 각혈하면서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것이 몇 분에 한 번가량으로 일어나는 중이었다.

 

 이미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느냐 아니냐가 다였다. 맥박이 없는 환자들을 수거하는 병원 인력은 모두 새까만 옷을 입은 채, 한 구를 나르기가 무섭게 다음 시체를 이송하려고 분주히 움직여댔다.

 

 그녀가 움직이지 않는 환자 한 명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들었다. 투둑, 마치 자갈 더미를 들어낸 것처럼 팔이 너무나 쉽게 몸통으로부터 분리되어 그녀의 손에 들렸다.

 

 “...이게 무슨...”

 

 백 년 가까이 살아온 그녀도 처음 보는 종류의 재난이었다. 어떻게 이런 단시간에, 이렇게 많은 인간이 세상을 뜰 수 있는 것인가.

 

 ‘...아니, 처음 보는 게 아니야.’

 

 알고 있었다.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이 정도의 격변을 불러오는 게 가능한 학문을.

 

 마법.

 

 누군가가 마법을 사용해 ‘저주’를 퍼뜨리고 있었다.

 

 악마가 주먹을 꽉 쥐었다. 병상을 중심으로 미약하게 빛나는 자색 마력의 흐름이 추측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교황, 그 여우 같은 늙은이가...!’

 

 너무나도 명확히 주모자를 특정할 수 있는 탓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서둘러 술자를 찾아내어 죽이든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녀가, 마력의 파장을 역산하려던 중.

 

 너무 열을 올렸던 게 문제였을까.

 

 “...?!”

 

 툭.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에 악마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폴리모프가 풀렸어...?’

 

 자신이 소환해 두었던 소환수들의 의태가 일제히 해제되었다. 몇십 마리의 흉측한 마족 무리가 갈팡질팡하던 인간들 앞에서 맨몸을 드러낸 것이다.

 

 불러들인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꺄악-!!”

 

 “마, 마족이다! 왕국 기사들이 마족이었어!”

 

 [젠장, 철수해!]

 

 그녀가 염화를 통해 명령을 전달했지만, 이미 피해는 일어난 뒤였다.

 

 가뜩이나 혼란스럽던 병원은 이제 완전한 패닉 상태에 빠졌다. 사람들은 환자와 의료진 구분할 것 없이 소환수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병원을 탈주하기 시작했으며, 몰린 인파 때문에 압사가 빈번히 일어났다.

 

 “...”

 

 인간들을 지켜보던 악마가 눈을 질끈 감았다. 주구장창 일이 꼬인 탓에 현기증이 인 그녀는, 어떻게 사태를 수습할지 머릿속에서 계속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모든 가정을 그만두고 자리를 이탈한 건 왕성에 남겨두었던 한 소환수의 보고 때문이었다.

 

 [공작이시여, 계약자가 돌연 각혈을...!]

 

 

 

 

 

 

 

 

 

 

 

 

 

 

 

 여론은 순식간에 나빠졌다.

 

 왕실에 마족이 주거한다느니 하는 발도 없는 소문은 전염병보다도 빠르게 퍼져, 사람들의 마음속 묻혀 있던 의심의 씨앗에 싹을 틔웠다.

 

 집회를 위해 모일 수 없게 된 그들은 왕성을 향해 돌이나 썩은 달걀을 던져대기 시작했고, 급기야 루그브리스가 방어 마법을 걸어 왕성이 더럽혀지는 걸 막아야 할 정도로 수위가 심각해져 갔다.

 

 그러나 루그브리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것쯤은 나중에 어떻게든 만회할 자신이 있었다. 마력 역산을 계속해서 주모자를 찾아낸 후, 사술을 사용한 자를 처형하여 공표하면 민심은 다시 안정될 것이다.

 

 불신감이 남아있어도 괜찮다. 어차피 돌림병이 끝난 뒤엔 참상은 차츰 잊혀질 테고, 그사이 나라 개혁을 계속해서 살살 달래주면 그런 건 씻은 듯이 사라질 테니까.

 

 최악의 경우엔 레아와 한 계약을 수정해서 마법으로 인간 놈들 기억을 지워버리면 될 일이었다. 천만 가까이 되는 녀석들의 기억을 모조리 소거하는 건 그녀로서도 부담되는 일이었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마지막 단추 끼워 넣으려고 뭘 못하겠는가.

 

 하지만.

 

 하지만 그녀도, 이것만큼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루그, 불을 좀... 켜주시겠어요?”

 

 술자를 찾아내어 죽이기 전까지, 레아의 몸이 버틸 수 있는가.

 

 “...”

 

 그녀가 말없이 손을 들어 침대 머리맡에 있던 초에 불을 붙였다.

 

 “...대체 뭘 했길래, 너한테까지 옮는 건데...”

 

 노란 촛불에 비친 그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했다. 창백해진 얼굴에는 보라색 혈관이 번개 모양으로 울룩불룩하게 튀어나왔고, 황금빛의 머릿결은 푸석해져서 생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심장 부근에 차오른 반점은 영락없는 환자의 꼴이었다.

 

 루그브리스가 몸져누운 레아에게 힘없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미안해, 내 탓이야.”

 

 자신이 괜한 짓을 벌여서 상황이 수습 불가능할 정도로 벌어졌다. 죄를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녀로서는 처음 하는 경험이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가 악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초췌한 낯빛이었지만,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의지가 확고했다.

 

 “...죄송합니다.”

 

 느닷없는 사과에 그녀가 당황하기도 잠시, 레아가 말을 이었다.

 

 “사실,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습니다.”

 

 갑자기 분위기를 잡기 시작한 그에게 루그브리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희의 계약은 원래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어요.”

 

 “...무슨 소리야? 이제까지 잘만 하고 있었잖아.”

 

 그개 고개를 저으며 침실의 천장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생기를 잃어 퀭한 그의 눈동자에는 후회와 죄책감이 섞여 있었다.

 

 “비르투스의 역사는 삼백 년 정도입니다. 한 나라의 나이치고는 정말 어린 축에 속하죠.”

 

 그런데도 우리는 벌써부터 망국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갑자기 옛날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를 보며 루그브리스는 왠지 모를 꺼림칙함을 느꼈다. 그것은 마력을 역추적하던 도중 느낀 위화감과도 연관이 없지 않아 있다고, 그녀는 직감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전란이 끝나고 난 후부터 점점 쇠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대 왕의 자질이나 정책과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

 

 “선대 왕께서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국가 최고의 마도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을 끌어모아 연구를 진행하셨죠.”

 

 그리고 저희는 하나의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말하기가 지치는지, 그가 숨을 몇 초간 몰아쉬며 나지막이 진실을 토해냈다.

 

 “비르투스는, 전란 시기에 진즉 죽어 없어졌어야 했던 국가였던 겁니다.”

 

 루그브리스는 슬슬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자신이 넘겨짚었던 것이었다. 이 마법의 술자는 교황 측 인물도 아니거니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을 ‘보랏빛’ 마력 잔흔으로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녀가 뒤늦게 반추했다.

 

 “...선대께서 너희와 계약해 운명을 비튼 거구나.”

 

 레아의 희미한 미소는 그것이 정답이었음을 은유했다.

 

 “전란 시대의 왕께서는, 악마와 계약해 국가가 전쟁으로 파멸하는 그 ‘인과율’을 수정하신 겁니다.”

 

 “그래, 그러니까 수도 한가운데서 돌림병이 퍼지는 개연성도 없는 일이 뜬금없이 일어나지.”

 

 악마의 힘은 분명 대단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운명.

 

 마법을 밥 먹듯이 다루는 그들에게도 여전히 미지인 영역. 벨로나의 선대 공작은 파멸의 운명을 최대한 유예시켰을 뿐,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던 것이다.

 

 “왕이 되고 나서 알겠더군요. 제가 무얼 하든, 얼마나 신중하게 사항을 결정하든,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든 간에 이 나라는 그 ‘멸망한다’라는 인과율에 자석처럼 끌려다닐 뿐이라는 걸.”

 

 전란 시대의 왕도, 그와 계약한 악마도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비틀어진 운명을 대가로 왕가에는 ‘저주’가 내려앉았다. 미루고 미룬 파멸의 운명이, 결국 코앞까지 다시 한번 돌아온 결과였다.

 

 “...뜬금없이 제게도 발병한 건 그런 연유겠죠. 왕가의 사람들은 전부 살아있는 한, 그 운명에 이끌리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그 멸망을 향해 치달으려는 인과율이 악마의 저주로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런 저주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기 시작하며 왕실에 대한 반발심을 키웠다.

 

 “우리가 무엇을 했든, ‘인간의 방식’을 고수했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운명이었으니까요.”

 

 이어지는 그의 말에, 악마는 교회의 벽에 매달려 있는 십자고상처럼 묵묵히 참회를 들어줄 뿐이었다.

 

 “...루그, 전 악마가 미웠습니다. 그들 때문에 사람들이 죽는 것이 싫었고, 제 나라가 망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국민들이 저를 원망할 때면 두려움과 함께 증오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나랑 이뤄지지도 않을 계약을 한 거야?”

 

 레아가 미약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나타났을 땐, 어떻게 해야 이 악마를 조롱할 수 있을까, 어떻게 가장 고통스럽게 구렁텅이로 처박을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처음엔 아예 들은 채도 안 하려고 했었죠. 당신이 초조해하는 모습이 볼만할 거라 생각해서, 애타는 걸 지켜볼 심산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무얼 할지도 모르는 당신이 온갖 걸로 협박하니까 이런 방법을 생각해낸 겁니다.

 

 계약을 제시하여 헛된 희망을 심어준 뒤, 최후에 나라가 멸망하면 ‘대가’를 치루게 될 당신을 보고 비웃을 예정이었다고, 그는 죄를 묵묵히 실토했다. 침대의 머리판에 등을 기대는 왕에게선 약간의 후련함과 더불어 루그브리스가 어찌 반응할지에 대한 긴장감과 두려움이 엿보였다.

 

 “당신 말이 맞았군요. 인간은 모두 추악한 생물입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마치 한 대 때려주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야, 나 아직 포기 안 했어.”

 

 그러나, 악마는 그의 오른손을 꽉 잡으며 담담하게 얘기했다.

 

 “선대께서 운명을 비튼 게 벌써 이백 년도 더 된 일인데, 그사이에 마법이 얼마나 발전했는진 알아? 그깟 운명 하나 못 이겨내진 않는다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 나라 바로 세운 다음 저번에 약속했던 세계여행, 니 아픈 몸 끌고서라도 무조건 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러니까,”

 

 속사포로 말을 내뱉던 그녀가 숨을 가다듬었다.

 

 “이대로 죽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멍한 눈으로 그가 악마를 쳐다보았다. 얻어맞았으면 얻어맞았지, 신경도 쓰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고마워요, 루그. 매번 고생만 시키네요.”

 

 “알면 빨리 낫기나 해.”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선대가 운명을 비튼 것이었다면, 이후 국가가 이런 참상이 될 것도 충분히 알고 일을 벌였을 터.

 

 결국 벨로나 공작의 맹세는 미래의 비르투스를 위한 사후관리였던 것이다.

 

 ‘...근데 거기에 나까지 말려들게 하지 말라고, 망할 할망구.’

 

 한숨을 쉬며 악마가 레아의 이마에 새로 적신 손수건을 올려놓았다. 익숙하지 않은 작업에 손놀림은 서툴기 짝이 없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묵묵히 간호에 몰두했다.

 

 그녀는 그녀 나름으로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의 선조가 계약하지 않았더라면, 이 아이는 이런 험한 세상이 아닌 더 평화로운 곳에서 태어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안해.”

 

 설익은 듯한 작은 사과의 말이 그녀의 입술 사이를 빠져나갔지만, 레아는 이미 잠들었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지친 꼴로 어떻게든 잠에 빠진 것이 다행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악마는 그의 곁에서 밤새도록, 손수건을 갈았다.

 

 

 

 

 * * *

 

 

 

 

 

 병이 퍼지길 보름. 성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떠한 서신도, 허락의 요청도 없이 비르투스의 수도로 행차하신 교황께서는 한층 더 대담하고 또한 노골적으로 시민들을 선동했다. 대부분의 병원이 교회와 같은 편이었던 것은 그런 작업을 너무도 쉽게 만들었다. 사람들을 치료하고, 해주를 하는 동시에 왕가에 모든 책임을 떠맡기는 그의 이면적인 행동은 비르투스 국민의 민심을 좌지우지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사람들은 또다시 왕성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예전과는 비교할 바도 안 될 만큼 날카롭고 폭력적으로 변한 그들은 당장에라도 성문을 부수고 쳐들어올 기세였다.

 

 “방음 결계를 풀어줘요. 전 저들의 원망을 들을 책임이 있어요.”

 

 “...미쳤어? 저딴 개소리를 일부러 듣겠다니, 농담이지?”

 

 그녀가 눈을 찌푸려 레아를 쏘아보았다. 병도 악마의 저주라고, 성유물인 사슬을 온몸에 칭칭 감은 그는 이전보다는 상태가 좋아 보이긴 했으나 여전히 창백한 낯짝이었다.

 

 “조금 쉬었으면 좋겠어요, 루그. 벌써 열흘 동안 한숨도 못 잤잖아요.”

 

 “닥쳐 봐. 지금 잘 시간이 어디 있다고...”

 

 악마의 신경이 곤두서 있던 건 수면 부족의 탓도 있었다.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역시 이 운명은 파훼할 뾰족한 수가 마땅히 없었다. 며칠 동안 해온 연구는 진척도 없이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어째서 제가 이런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는지 아나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레아는 말을 이었다.

 

 “선대 왕께서는, 운명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신 대가로 일찍 타개하신 겁니다.”

 

 ‘어떻게든 운명을 파헤치고, 거스르려는 행위는 일절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늘의 의지이며, 필멸자 따위가 감히 이해하려고도 하면 안 된다는 듯이.

 

 “...전, 당신이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루그브리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건 분명 레아뿐만 아니라, 자신을 설득하고픈 마음이 나타난 것이었다.

 

 “선대께서는 이렇게 될 줄 알고 미리 맹세를 나눴던 거야. 그렇다는 건 당연히 해결책이 있다는 거고. 그러니까...”

 

 “인과율을 수정하려 들지 마세요, 루그.”

 

 담담한 목소리. 참다못한 루그브리스가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아까부터 궁시렁궁시렁, 시끄럽게 진짜...!”

 

 이전과 같은 행동엔 전혀 다른 속뜻이 담겨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 그녀가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너 곧 죽는다고! 왜 이렇게 침착한 건데?!”

 

 하지만 그것도 무리였는지, 곧바로 울상이 된 얼굴을 들어 레아를 마주했다. 그녀가 이렇게 울분을 토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인간 하나 때문에 우는 것도 처음, 이 녀석이 한심하면서도 짜증 나고, 또 온갖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이 상황도 처음...

 

 “지금 저 인간들이 무슨 얘기 하는지 알기나 해?! 당장 널 끌어내린 다음 성국에서 처형식을 집행한다잖아. 저주 때문이 아니어도 너 죽게 생겼다고, 근데도 넌 왜, 대체 왜...!”

 

 퍽, 퍽. 원망 어린 주먹질이 그의 가슴팍을 두어 번 때렸다. 축 늘어진 그녀의 팔에 힘이 실려 있지 않았기 때문일까, 레아는 요지부동이었다.

 

 “...있지,” 루그브리스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도망치면 안 될까.”

 

 “...”

 

 “그동안 충분히 해왔잖아. 열심히 했으면 된 거 아니야?”

 

 그녀는 인정해야만 했다.

 

 손 쓸 도리가 없다. 이 운명이라는 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전부 미지수였다.

 

 그런 미지와 마주한 악마는, 그를 잃는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체면과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고 그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이건 제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에요.”

 

 그러나.

 

 “이 ‘저주’ 때문에 이제껏 몇 명의 사람들이 주어진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스러졌을까요.”

 

 이 이백 년간, 셀 수 없을 정도의 목숨을 앗아간 계약의 말로는 왕가의 사람이 시작한 일이었다. 고로 끝맺는 것도 왕가의 역할이리라.

 

 “피가 끊어지지 않는 한, 대가는 계속될 겁니다. 이젠 멈출 때가 된 것뿐이에요.”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때가 온 것이었다.

 

 “날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어요. 전 괜찮으니까... 루그?”

 

 그가 말을 멈췄다. 루그브리스가 돌연 그의 얼굴에 손바닥을 슬쩍 가져다 댔던 까닭이다.

 

 자신을 향해 살짝 내려다본 그의 뺨에는, 그녀가 처음 보는.

 

 “...그럼 왜 우는 건데.”

 

 눈물 줄기가 한 획 그어져 있었다.

 

 “...”

 

 레아가 손끝을 위로 가져가려다 멈췄다. 자신도 눈치채지 못했던 건지, 그의 동공은 약간 커진 채 놀라움을 표출하고 있었다.

 

 “아, 그...”

 

 “...레아.”

 

 “...미안해요. 못 볼 꼴을...”

 

 서둘러 뺨을 훔친 그가 무어라 횡설수설했으나, 문장은 완성되지 못한 채 맥없이 끊어져 버렸다.

 

 “너도 무서운 거잖아...”

 

 “...”

 

 루그브리스가 그의 품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녀는 선대의 충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아.’

 

 정을 너무 줘버렸구나.

 

 “넌 진짜 나쁜 놈이야.”

 

 “...미안해요.”

 

 “닥쳐, 듣고 싶지 않아...”

 

 비르투스의 마지막 왕은, 자신의 품에 안긴 악마를 토닥이면서 집무실의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신이 원망스러웠다. 두려웠고, 또한 억울했다.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가야 하는가.

 

 하다못해 자기 세대가 아닌, 차세대에 일어났으면.

 

 아니, 애초부터 이런 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

 

 그럼에도.

 

 피식.

 

 그럼에도 그는 후회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루그. 당신과 만나서 전 행복했습니다.”

 

 만일 그런 가정이 현실이었다면, 자신은 이 악마와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네요. 지금 이 상태로라면 당신도 선조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겠죠.”

 

 왕족이 사라진들, 국민들이 과연 ‘비르투스’라는 저주의 이름을 물려받고 싶어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레아는 그리 생각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계약해주세요.”

 

 악마가 그를 올려다봤다. 거기엔 지난 몇 달간 그녀를 반겨주던, 상냥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 * *

 

 

 

 

 

 새벽의 찬 공기가 살갗에 스쳤다.

 

 비르투스의 마지막 국왕이 눈을 떠 군중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저마다 가지각색의 표정을 지은 채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레아 비르투스.]

 

 확성 마법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멀어 잘 보이진 않았으나, 올려다본 저 높은 심판의 자리에 앉아있는 건 틀림없는 성 폰티안 교황이었다.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 국가를 패망의 길로 인도한 죄를 물어...]

 

 “...”

 

 심장 소리가 이렇게 확실하게 들리던 적이 있던가.

 

 소리치는 군중의 목소리도, 교황의 사심 가득한 겉치레도 전부 잠겨버릴 만큼 강하게.

 

 [...그대에게 성화를 하사한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 그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닌 건 별 볼 일 없는 기억들 뿐.

 

 처음 수감실에서 만났던 때를 기점으로, 계약을 하게 되고, 같이 업무를 보면서, 가끔은 기사들의 눈을 피해 밖으로 놀러 나가던.

 

 전부, 루그브리스와 함께 있었던 기억들 뿐.

 

 괘념치 않았다. 이미 모든 미련은 그녀의 곁에 두고 왔으니.

 

 화르륵-

 

 따스한 열기가 발끝으로부터 느껴지더니, 이윽고 그의 몸 전체를 뒤덮었다. 지푸라기로 만들어진 허수아비처럼 십자가에 매달린 왕이 화려한 불길에 휩싸여 자취를 감췄다.

 

 ‘끝났군.’

 

 성대하게 흩날리는 불꽃을 지켜보며, 교황은 속으로 미소했다.

 

 이제 비르투스는 제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우매한 자들에게 자신은 이미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비쳤을 터.

 

 이제 남은 일은, 혼란스러울 정세를 구실로 지배권을 행사하겠다 선언하는 것뿐.

 

 [아아- 여보세요. 내 말 들리나?]

 

 그때, 돌연 이변이 발생했다.

 

 섬뜩한 찌릿함이 교황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군중도, 곁을 지키던 성기사들도, 모두 그 목소리의 출처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누, 누구냐?!]

 

 [어머~ 잘 들리나 보네. 그런데 뭘 그렇게 놀라? 우리가 그렇게 껄끄러운 사이였나, 폰티안 교황? 나한테 울고불고 달라붙어서 계약해달라고 빌 땐 언제고?]

 

 군중 속에서 다시 한번 파장이 일었다.

 

 [무슨 헛소리냐, 내 너의 목소리를 오늘 처음 듣거늘!]

 

 교황의 머리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한 번도 틀리지 않았던 그의 직감이 강하게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일이 대단히 꼬였다고.

 

 교묘한 쥐덫에 붙잡힌 건, 불타 없어진 비르투스의 왕이 아닌 자신이라고.

 

 [뭐~ 됐어. 어쨌든 계약은 이걸로 끝이니까, 볼 일도 이제 없겠지.]

 

 장난스러운 목소리는 아이처럼 웃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늙은 구렁이를 계속해서 조롱했다.

 

 [그럼 전염병은 수거해간다? 왕이 죽었으니까 인간들 선동할 필요도 없고, 이제.]

 

 [아까부터 계속 알지도 못할 망발을...!]

 

 파앗-!

 

 교황이 노하던 와중, 그의 앞에 진홍으로 빛나는 커다란 인장이 허공에 나타났다. 염소의 대가리를 형상화한 입체 홀로그램은 광장에 모여든 모든 이들이 볼 수 있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그것이 발산하는 빛은 너무도 불길하고, 또한 사악해서.

 

 “저거 봐...!”

 

 “악마의 문양이잖아, 왜 교황 성하 곁에서...”

 

 “아직도 모르겠어?! 교황이 악마랑 짜고 친 거잖아!”

 

 누구나가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이, 이...!]

 

 전혀 상정하지 못한 상황. 대동한 성기사는 십여 명. 그에 비해 비르투스의 수도에 집결한 국민은 보이는 것만으로도 수천 명.

 

 제아무리 혹독한 훈련을 거쳐온 병사들이라 해도, 그 인파를 감당해낼 수는 없었다.

 

 [뭐, 그럼 난 가볼게~ 다음에 부탁할 일 있어도 연락하지 마, 역겨우니까.]

 

 픽. 그걸 끝으로 악마의 목소리가 툭 끊겼다.

 

 “...후우.”

 

 확성 마법을 해제한 룩스리아가 숨을 골랐다. 그녀가 아까부터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친구를 향해 물었다.

 

 “이걸로 됐어?”

 

 평소라면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겠으나, 왠지 그녀는 몇 달간 못 본 새에 말수가 퍽 줄어들었다.

 

 “...응. 충분해.”

 

 “별난 일이네, 너. 왜 이리 죽상이 돼서 돌아왔어?”

 

 “...아무것도 아니야.”

 

 루그브리스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진즉 자신의 세상에 갇힌 채 계속 현실과 동떨어진 곳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돌아오지 않을 과거를 꾸역꾸역 되새김질하면서.

 

 

 

 - 당신은 내가 죽은 뒤, 사람들 앞에서 현현하는 겁니다.

 

 - 처형식은 교황 측에서 준비할 테니까요. 당신이 거기에 현현하여 마치 교황과 한패인 것처럼, 덤터기를 씌우세요. 그것만으로도 민심은 비르투스에게 우호적으로 변하게 될 거예요.

 

 

 

 그녀는 한사코 거부했다. 관심조차 없었다.

 

 네가 죽는 마당에 이제 와서 그런 거, 알까 보냐.

 

 “...필요 없다고...”

 

 

 

 - 제 마지막 부탁이에요, 루그.

 

 

 

 그런데도 악마는, 계약자의 소원을 이뤄줘야만 했기에.

 

 “...룩스.”

 

 “응? 왜?”

 

 고개를 돌린 채, 루그브리스가 작게 말했다.

 

 “...역시 인간 놈들은 도저히 못 견디겠어.”

 

 “...? 으응, 뭐 그럴 수 있지.”

 

 원래부터도 인간을 싫어하던 그녀였으나, 갑자기 돌변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계약했던 인간이랑 무슨 일이 있었나? 룩스리아가 생각했지만, 이내 쓸데없는 상념을 고이 접어서 떨쳐냈다.

 

 ‘뭐, 괜찮겠지.’

 

 악마인 그들에게, 반백 년 사는 것도 오래 가는 편인 인간들이 마음에 흠집을 낼 수는 없었다.

 

 어차피 한 잔 가득 채운 와인만 있으면 모든 게 씻겨 내려갈 테니까.

 

 필시, 그것이 악마라는 족속이니까, 분명히.

 

 아우성치는 인간들을 뒤로하고 달밤에 두 쌍의 날개가 여느 때처럼 비상했다. 오늘도 새로운 장난감을 찾기 위해 힘차게 날갯짓하는 녀석이 하나.

 

 그리고, 부서진 둥지 주변을 계속 맴돌며 회상을 반복하는 안쓰러운 녀석이 하나.










단편 소설로 상정해서 급전개가 좀 아쉽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썼으니깐 재밌게 읽어줬으면 좋겠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