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간 나는 용사였다.


다양한 곳을 여행하고,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가졌으며,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쓰러뜨리며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믿음직한 동료들과 함께 마왕성 앞에 도착했다.



"드디어...! 마왕성에 도착했어!"


"그러게요! 이제 마왕을 쓰러뜨리기만 하면 돼요!"


"...저기 용사님, 마왕을 꼭 쓰러뜨려야 할까요? 우리 그냥,평화롭게 마저 여행을...."


"브렌, 또 그 얘기야? 몇번이고 말했잖아, 마왕을 쓰려뜨리는게 용사인 내 사명이라니까?"


"....하아,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마왕과의 전투를 대비해 포션을 만들어 올게요."


"그래, 항상 고마워 브렌!"



대마법사 브렌.


살짝 이상하고 엉뚱한 구석이 있지만, 마법을 사용해 언제나 우릴 구해주고 강력한 포션을 만들어주는 좋은 동료다.


그 포션을 먹으면 늘 졸리고 정신이 몽롱하지만, 아무튼.




"용사님, 드디어 결전의 순간이에요!!"


"그러게요 성녀님. 떨리네요."


"떠실 필요는 없어요! 용사님은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 분명 성공하실 거에요! 어깨 펴요!!"


그녀가 밝은 미소와 함께 내 손을 마주잡는다.


성녀 루나.


이세계에서 만난 첫 동료이자 브렌에겐 미안하지만 가장 의지되는 동료.


성녀인 그녀는 늘 신성력으로 용사에게 축복을 걸어주고 상처를 치유해줬다.


이상하게도 큰 상처엔 별로 효과가 없었지만, 아무튼.




"성녀님께선 항상 저를 너무 추켜세우시네요."


"추켜세우다뇨! 저는 진심이에요! 용사님은 진짜진짜 특별하고, 진짜진짜 멋지시고, 또, 또 완전 남자답고 강하고 빛나고 그... 으.... 아."



"...크흠..."



"헤헤, 좀 부끄럽네요...."



성녀 루나님께선 나를 너무 잘 따르고, 과대평가하신다. 



가끔 내가 절망하고 의지가 꺾일때도 그녀는 나를 믿고, 이끌어준다.



그리고 난 그런 성녀님이.... 싫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루나님. 마왕을 쓰러뜨린 뒤.... 만약, 만약 저 같은 보잘것없는 남자로 괜찮으시다면...."



"에?"


"저, 저와 결혼ㅇ..."



"용사님, 포션 가져왔어요."


"...."



아, 브렌. 최악의 타이밍이야.




뭐, 괜찮다. 청혼은 마왕을 쓰러뜨린 뒤에 하면 되니까.



"그럼 가볼까."



마왕을 쓰러뜨리ㄹ...



쓰러...


뜨...ㄹ...



ㅆ...


...



....


...


.....


......?




"어...? 할아버지....?"


"...어어?!"


"할아버지... 맞죠? 할아버지?"


"...어...! 어어....!!! 아이고오! 준태야!!!! 의사선생님, 얼른 와주세요!!!! 우리 손주가 드디어 정신 차렸어요!!!!"



새하얀 병실.



묶여있는 몸.



놀란 간호사들.



그리고 날 부여잡고 울고 계신 할아버지.



갑자기 모든 것이 사라졌다.


갑자기 낯선 풍경이 날 맞이한다.


그리고 잊었던 감각들이 되살아난다.




"어.... 이게...."



지난 3년간 나는,



환자였다.


.

.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시길,


3년전 교통사고로 지금까지 정신장애를 겪었다고 한다.


나 자신을 선택받은 용사로, 주변을 판타지 세계로 인식하고 헛소리를 하며 난동을 피웠댄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 천문학적 확률의 기적으로 갑자기 회복한거고.



"정말 놀랍네요. 이런 말씀 드리긴 뭐하지만 솔직히 회복 못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종류의 환자분들은 대부분 회복하지 못하거든요. 특히 이렇게 갑자기 별 다른 이유도 없이 돌아오는건..."


"아이고 기적이야, 기적!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흐윽...."


"예, 보호자분 말대로 기적이란 말로 밖에 설명이 안되네요. 축하드립니다 환자분."



"네...."



모든 것이 갑작스럽고 낯설었지만, 할아버지 말대로 정말 기적인 걸까.


회복은 빨랐다.


처음엔 이세계와 좀 헷갈렸지만 점차 현실감각이 돌아왔고 의사선생님이 시키신 테스트에서도 대부분 정상판정을 받았다.


몆달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회복하여 정신병원이 아닌 할이버지 집에서 지내는 중이며,


병원엔 일주일에 한번씩 혹여나 이상이 없는지 검사하러만 간다.


그리고 그것도 오늘로 끝난다.



"예, 오늘도 정상판정이네요. 앞으로는 검사 받으러 안 오셔도 됩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선생님이야말로 고생 많으셨어요."



"하하, 대마법사 브렌이 아니라 선생님이라 불러주시니 정말 좋네요. 그럼 살펴가세요."


"예, 감사합니다."



드디어 전부 끝났다.


이젠 일자리도 알아보고, 나 돌보느라 고생하신 할아버지 편히 해드려야지.


그래, 주말에 할아버지랑 같이 외출이라도 할ㄲ...



"용사님!"


검사를 마치고 병원을 나가는 길,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끌어안았다.



"어, 어어???"


"이 얼굴, 이 냄새, 이 목소리...! 용사님! 용사님 맞죠? 헤헤헤, 저 성녀에요! 성녀 루나!"



이 목소리... 성녀... 루나... 설마.



"루,루나님!?"


"맞아요, 바로 저에요! 성녀 루나!"


"....루나님...?"


"네, 맞아요맞아요! 저에요, 헤헤헤헤!!!"



난 루나님의 모습을 보고 당황하여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어딘가 이상한 퀭한 눈동자, 


얇은 환자복만 대충 걸친 복장,


그녀의 뒤에 떨어져 있는 구속복의 끈,


맨발로 뛰어왔는지 피투성이인 발,


루나를 발견하고 달려오는 간호사와 의사들.



"용사님, 마왕을 쓰러뜨리고 어디로 사라지셨던 거에요? 정말 걱정했어요."


"루, 루나님... 이게 대체...."


"김예은 환자분! 거기 서요! 김예은 환자!!!"


"아, 용사님! 지금 이럴때가 아니에요! 저들이 우릴 잡기 전에 얼른 도망쳐야 해요! 빨리요!!"


"어, 어어....."


"꺅! 이거 놓지 못 해! 이 마왕군의 잔당들!"


"잡았다! 후우, 예은환자님, 제발... 갑자기 이렇게 뛰쳐나가시면..."


"이거 놔요! 용사님, 도와줘요!"


"...."


아무래도, 지난 3년간 환자였던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던거 같다.


.

.


"네, 네. 보호자분. 간호사가 예은씨를 씻기고 옷 갈아입히다가 구속복을 제대로 못잠가서... 네, 퇴원한 환자분이 잡아주셔서... 크게 다친 곳은 없습니다. 네, 네. 다른 문제도 없습니다."


"...선생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저기, 보호자분. 그 환자분한테 상황설명을 하기 위해... 예, 된다고요. 네 감사합니다. 예, 끊겠습니다."


"루나... 아니 예은이라는 분, 대체....."


"...원래는 다른 사람에게 환자 개인정보를 함부로 말씀드릴수 없지만, 준태씨는 예은환자님과 가까운 사이였고 보호자분께서도 허락하셨으니 말씀드릴게요."



의사는 루나... 아니, 예은에 대한 진료기록을 보여주며 설명해줬다.



"예은씨는 4년전 약물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 이후 정신장애에 빠진 상태입니다. 보다시피, 상태가 꽤 심각하고요."


"자살...?"


"학업 스트레스와 극심한 우울증등으로 자살을 시도 했는데... 깨어난 이후 주변을 평소 좋아하던 판타지 세계로 인식하시기 시작했어요. 마치..."



"...저 같네요."


"네. 준태씨와 같은 경우죠. 하지만 준태씨와 달리 예은씨는 상황이 훨씬 안좋았어요.


준태씨는 보호자분께서 매일 찾아와 말을 걸고 병간호를 해주셔서 그런지 상태가 꽤 안정적이었지만,


예은씨는 준태씨보다 훨씬 심각했어요. 매일 난동을 부리고, 자살시도까지.... 결국 저희도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어졌고, 다른 시설로 옮기려할때... 동태씨가 입원하신 겁니다."



"예? 저요?"



"준태씨와 예은씨의 망상은 놀랍게 아주 비슷한 종류였고, 두 분은 금새 어울리기 시작했어요. 본인이 더 잘 아시겠지만, 두 분은 늘 붙어다녔죠."


"네... 그랬죠."



내가 용사인줄 알고 살던 시절, 성녀님은 가장 처음에 만났던 동료다. 그리고 가장 마음이 잘맞고, 가장 가까웠던... 소중한 사람.



"그리고 이런 경우는, 정말 드물어요. 어쩌면 동태씨가 갑자기 회복했던 일보다 더 기적일지도 모르죠.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거의 똑같은 망상을 비슷한 수준으로 느끼고, 서로의 망상을 공유하고 소통하며 거의 똑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이런 경우는 정말이지, 뭐라 설명할 길이 없네요. 전 무신론자지만 이번 만큼은 신이 장난친 거 같다는 생각밖에 안들어요."



의사는 잠시 말을 쉬고, 다른 자료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현상은 예은씨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어요. 비록 망상엔 더 깊이 빠졌지만, 그 밖의 돌발행동과 증세들은 많이 줄고 자살시도는 아예 사라졌죠. 약 복용과 간호사들의 부탁에 훨씬 협조적으로 대했습니다. 동태씨 오기 전까지느 구속복이 필수였지만, 동태씨가 오신 후로는 병원 앞을 산책할 정도로 정말 많이 나아졌어요."



"그렇군요... 근데, 지금은...."



"...예, 사실 그게 문제에요. 동태씨가 퇴원한 후부터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어요. 아무래도 같이 망상을 하던 동태씨가 없어지니 예은씨의 세계가 망가지고, 그 바람에 이상증세도 심해진게 현재 추측입니다."



"그럼 저 때문에...."



"아뇨, 그렇게 생각하진 마세요. 그래도 최근엔 간호사분들이 잘 케어해 주시고 약물치료도 시도중이라 비교적 좋아지고..."



"용사님!"



그 순간, 나와 의사 선생님만 있던 진료실 문이 활짝 열리고, 예은이 달려왔다.



"루나... 아니, 예은씨!?"


"예은이라뇨? 그 여자는 대체 누구죠 용사님? 전 루나라고요, 성녀 루나!"


"예은환자? 아니 대체 여긴 어떻게...."


"헥, 헥.... 죄송해요 선생님,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하시길래 잠깐 구속복을 풀었는데 그 사이 또...."


"어? 브렌도 있었네요? 헤헤헤, 정말 오랜만에 셋이 다 모였네요... 히히, 용사님..."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


다가올수록 텅 빈 눈에 어딘가 뒤틀린 빛이 들어오는 것만 같다.



"아 맞다, 이거 선물이에요."



그녀가 구속복의 끈과 긴 휴지뭉치를 내밀었다.


쥐고 있는 자세나 선물이란 밀로 보건데, 설마 이거...


"혹시 꽃다발...?"


"어때요? 예쁘죠? 오는 길에 예쁘길래 몇송이 꺾어왔어요."



"김간호사, 얼른 예은 환자 데려가세요."


"네 선생님. 예은씨, 아니 성녀님. 우리 기도하러 가요. 이제 곧 기도시간이잖아요?"


"...싫어요."


"성녀님, 그러지 마시고..."


"싫어! 싫어! 싫다고!!!"



간호사가 접근하자, 그녀는 내 뒤로 숨으며 소리쳤다.



"날 용사님이랑 떨어뜨리지 마! 날 혼자두지 마! 날 외롭게 하지 마!"


"아니에요 성녀님, 저희는.."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용사님, 용사님..."



루나.. 아니 예은씨가 내 소매를 붙잡고 매달렸다.



"제발요, 싫어요, 안돼요, 가지 마요, 용사님은 내 친구잖아... 내 편이잖아... 가지 마... 싫어.. 더 이상 살기 싫어... 같이 모험해요... 용사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으나 거기에 담긴 간절함과 떨림은 심해졌고, 소매를 붙잡은 손은 점점 힘이 들어가 날 놓으려하지 않았다.



"루,루나.."


"여보세요, 마간호사? 예은씨가 또 탈출했어요. 네, 2층 A진료실로 얼른 와주세요."



잠시 뒤, 덩치가 큰 간호사와 다른 의료진들이 와 그녀를 붙잡고 진정제를 투여했다.


"놔, 이거 놔! 이 마왕의 자식들!!"


그녀는 진정제를 맞고도 한동안 거칠게 반항했으나, 약의 효과로 힘이 풀리고 졸음이 오자 이내 얌전히 간호사의 품에 안겨 병실로 갔다.



예은은 시야에서 내가 사라질때까지 흐리멍텅한 눈으로 계속 날 응시했다.



"...의사선생님, 분명 방금 좋아지고 있다고...."



"...죄송합니다. 사실 그 부분은 거짓말입니다."



의사는 그녀가 떨어뜨린 끈과 휴지를 치우며 말을 이었다.



"계속 준태씨를 부르고 찾더니 이젠 구속복이 없으면 안돼요. 근데 그마저도 기회만 생기면 바로 빠져나오니...."


"....저 때문이네요. 전부 저 때문에...."


"동태씨, 정신 차리세요. 이건 그녀의 사정이지, 동태씨 때문이 아닙니다."


"그치만.... 제가 뭔가 해줄수 있는게..."


"그렇다고 예은씨 옆에 계속 붙어계실수도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그러면 보호자님께서도 걱정하실거에요. 그리고 붙어있는다고 예은씨가 회복할 확신도 없고요."


"....."


"이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할테니 그저... 가끔 면회나 와주세요."


"....."



마음 깊은 곳에서 의사의 말에 반항하는 소리가 나오려 했으나, 목구멍을 넘진 못했다.


난 더 이상 환자도, 용사도 아니며,


그녀의 주치의 보호자는 더더욱 아니니까.



그렇기에 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힘없이 끄덕였다.


.

.


"이야, 또 월척이구나! 이렇게 큰 생선은 내 낚시인생을 통틀어 최초일게야!!"


할아버지가 방금 잡은 대어를 자랑하며 말했다.


3년 만에 할아버지와 함께 하러 낚시터로 갔다.


낚시한지 30분도 안됐는데 할아버지의 양동이는 팔딱팔딱 뛰는 싱싱한 생선들로 가득 찼고,



"아이구, 우리 준태. 아직 한마리도 못 잡았니? 이 할애비가 도와줄까?"


"아뇨, 괜찮아요."


내 양동이는 물한방울 없이 텅 비었다.


아니, 양동이 이전에 미끼도 제대로 못 끼겠다.


예전엔 잘 됐는데, 이상하게도 잘 안 된다.


"...아."


또 애꿎은 미끼만 버렸다.


결국 보다못한 할아버지께서 대신 끼워주셨다.



"줘 봐라, 이 할애비가 껴주마. 아직 그 뭐시냐, 후유증 때문에 그런가보다."


"..죄송해요, 오랜만에 낚시하는건데."


"죄송할게 뭐 있어, 이 할애비는 우리 준태랑 같이 낚시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족해. 정말, 작년까지만 해도 다시 같이 낚시를 할 수 있게 되리라곤... 흐윽..."


할아버지는 미끼를 끼우다말고 눈물을 훔쳤다.

아무래도 날 병간호하던 때가 떠올랐나 보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그동안 하신 맘고생을 생각하니 나도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졌고, 고장난 라디오처럼 입에서 죄송하단 말만 연신 뱉을수 밖에 없었다.



"얌마, 사내자식이 뭔 눈물을 흘려, 뚝 그치지 못해?"


"아니 할아버지도 우시잖아ㅇ.."


"난 사내가 아니라 노인네니까 괜찮아!"


할이버지는 미끼를 끼운 낚시대를 내게 쥐어주곤, 화제를 돌렸다.



"준태야, 혹시 그거 기억나니? 네가 아파서 한참 이상한 소리하며 지냈을때, 식사로 생선구이가 나오면 이 세계의 생선은 날 것도 구운 맛이 나는구나! 라며 헛소리를 했었지. 그리곤 이걸 구우면 무슨 맛이 날지 궁금하다며 생선구이를 들고 라이터를 찾아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생선...?"


"아, 혹시 기억 안 나니?"


"...아뇨, 기억나요."


할아버지하곤 다르게 기억하지만, 기억난다.



'이 곳의 물고기는 날 것도 꼭 구운 것 같네요!'


'아무래도 용암에서 사는 물고기라 그런게 아닐까요?'


'용사님, 이걸 구우면 무슨 맛일까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우리 한번 불의 원소를 찾아 구워 먹을까요?'



성녀님과 함께 불의 원소... 아니, 불을 낼 물건을 찾기 위해 동굴(병원) 곳곳을 돌아다녔고,

그러다 악마(의료진)들에게 잡혀 브렌이 풀어줄때까지 감옥에 갇혔었지...




"그리고 그때 네가 의사선생님과 포선인지 뽀샵인지를 만든다고 미역을 막.."


할아버지는 내가 입원했을때 있던 일들을 최대한 밝게 설명하며 분위기를 풀었고, 난 내가 잊으려 했던, 정확히는 외면하던 기억들을 파노라마처럼 떠올렸다.




처음 이세계에 갔던 기억,


처음으로 괴물을 무찌른 기억,


새로운 마을에 갔던 기억,


사천왕을 잡았던 기억,


처음 보는 동물을 만난 기억,


마왕성에 도착한 기억....



지난 3년 간의 기억들은 겨우 내 망상에 불과했다기엔 너무나 장황하고 뚜렷했으며, 그 뚜렷한 기억 가운데엔 언제나...


 

'당신이 용사님인가요?'


'역시 해낼거라 믿었어요!'


'보세요! 엄청 큰 시계탑이에요! 여기 사람들은 모두 부지런한가 봐요!'


'드디어...! 우리가 늑대왕을 잡았어요!'


'드디어 도착이네요 용사님!'



그녀가 있었다.



'그거 아세요, 용사님? 


사랑은 감출 수 없는 거래요.


모조품을 만들 수도, 


지울 수도 없대요.


사랑은...'



"...."



파노라마가 끝났다.

허나 파노라마를 돌린 톱니바퀴는 헛돌며 멈추지 않는다.


추억은 끝났으나 감각은 끝나지 않았다.



"하하하, 우리 준태가 아팠을때 딱 한번 낚시하러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땐 잡히긴 커녕 바늘에 미끼 끼는 것도 잘 안 됐단다. 근데, 지금은 월척이 계속 낚이는구나! 하늘에서 우릴 가엾게 여겨 축복이라도 준게 분명해! 어이쿠, 또 누가 물었나보다!"


할아버지가 낚시대를 끌어당기자 이번에도 내 머리만한 물고기가 올라왔다.



"..."


나도 던졌지만 이번에도 잡히지 않았다.


미끼는 여전히 바늘에 잘 안 꼈고,


낚시대를 던져도 미끼만 버릴뿐 물고기는 안 잡혔다.



미끼통도,

양동이도,

내 마음도.


공허했다.


단지 잊어야할 감각만이 맴돌뿐이었다.


.

.


정신이 망상을 벗어난지 몇달이 지났고,


몸은 언제나 현실에 있었으나,


마음은 아직도 이세계에 머물고 있다.



마음 없는 몸과 정신은 마음을 찾기 위해 마음이 있는 곳을 향했고,



[환자:김예은]


날 이곳으로 이끌었다.



"...첫 면접을 보러 갔을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 평생 문을 앞에 두고 이렇게 겁먹었던 적이 또 있을까.


난 한참을 문 밖에 서 있다가, 몇번의 심호흡 끝에 천천히 문을 열었다.



"어머."


"...아.



예은 혼자 혹은 간호사만 있을줄 알았던 병실에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뭐지? 예은씨의 보호자인가? 설마 어머니?'


저 분이 누구든 간에 타이밍이 잘못됐다.


지금 그녀를 만나는 것도 긴장되는데 그녀의 가족이나 지인까지 만날순 없다.



그래서 그냥 다시 돌아가려 했는데,



"시,실례했습.."


"오랜만이네요 준태씨. 얘기 들었어요, 퇴원 축하드려요."


"...에?"


난생 처음 보는 아주머니께선 날 알아보시다 못해 친근하게 대하셨다.



"저,절 아세요?"


"어머, 저 기억 안 나세요? 아, 하긴 나으신 뒤에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니..."


아주머니께서 근처에 있던 신문지를 꾸겨 십자가처럼 만드시더니, 그걸 들고 이상한 손짓을 했다.


"어때요? 이제 기억나나요?"


"어... 아!"



갑자기 느껴지는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


십자가... 아줌마... 주문을 외우는 손짓...


 생각났다!



"성국의 늙은 수녀!"


"...늙은은 빼주시죠?"


"...죄송합니다."



성국의 늙.. 아니, 나이가 조금 있으신 수녀.


성녀 루나의 보호자로, 같이 여행하던 동료는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여행중 자주 마주쳤다.



화산에서, 바다에서, 정글에서, 도시에서 마을에서... 정말 수상할 정도로 자주 마주쳤다.

특히 루나와 관련된 일이 생겼을땐 더더욱.



"항상 어딜가든 수녀님과 만나서 의아했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간병인이셨구나..."


"네. 몇달 전엔 건강 때문에 잠시 쉬었다가, 지금은 다시 괜찮아져서 왔어요."



"요..우...사.니ㅁ.."


침대에 누은 예은이 잠꼬대를 하며 이불을 발로 차자, 아주머니가 다시 잘 덮어주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ㄷ

었다.



"방금 막 잠들었어요.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애지만, 그만큼 재우기가 힘들죠. 예은이랑 얘기하러 왔을텐데, 미안하지만 얘기는 다음번에.."


"네네, 그럼요. 괜찮아요."


혹여나 아주머니가 예은씨와 대화할거냐고 묻거나 깨울까봐 황급히 대답했다.



마음이 코 앞에 있으나, 감히 더 다가갈수 없었고, 그렇다고 여길 벗어날수도 없다.



이도저도 못하는 애매한 상황 속에 침묵이 생길때쯤,



"혹시 그때 기억나세요?"


아주머니가 먼저 침묵을 깨셨다.



"예은이가 준태씨한테 삐져서 준태씨가 달래주면서 한 말이요."


"예? 그랬던 적이 있.. 아."



아, 안돼.. 잠깐만...



"막 꺾은 장미 꽃잎 흩뿌린 듯이, 돌아버릴 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여. 그대는 내 삶의 빛이요, 내 삶의 소금이니. 그대 없는 앞날은 등대 없는 밤바다를 항해하는..."


"그만. 제발, 그만..."



생각났다.


그녀를 달래기 위해 어디선가 들은 말들을 섞어 엄청 오글거리는 말을 했었지.



"그것도 기억나시나요? 천둥치던 날 거인의 발소리라면서 베개로 요새를 만드시던거."


"두 분이 변기물에 머리를 담갔을땐 정말, 뭐라 형용할수 없는.."


"호호호, 두 분이 같이 이불보를 뒤집어쓰고선, 동굴 안이라도 대답했죠 아마?"



아주머니께선 끊임없이 옛날 일을 꺼내며 날 부끄럽게 했다.



맙소사, 이세계에서 있었던 일들이 현실에선 저랬다니.


앞으로 이 병원을 어떻게 오지. 아니, 이젠 간호사들 눈도 못 마주치겠다. 



"하아, 부끄럽네요... 3년치 흑역사...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아주머니께서도 많이 고생하셨겠어요."


"고생은 무슨. 그리고 흑역사도 아니에요."



아주머니가 잠 자는 예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예은이에게 그 시간은, 어쩌면 가장 행복했을 시간이니까요."


"...네?"



"전 예은이의 간병인이기 전에 예은이네 집에서 10년 넘게 일한 가사도우미에요. 예은이의 마음이나 생각은 잘 몰라도 그 애가 어떻게 자랐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잘 알죠.



예은이는 부모님이 바빠 옷과 먹을 건 풍족하지만, 사랑은 부족한 환경에서 자랐어요. 덕분에 타인과 어울리는데 서툴고, 또래들에겐 따돌림 당하기 일쑤였죠.


그래서 그런지 클수록 사람들을 점점 멀리하고 책이나 영화에 빠져 살았는데, 그 누구도 바로잡을수 없었어요. 도와줄 친구도 없고. 상담도 거부하고, 저도 큰 도움이 안됐죠."



"...예은씨의 부모님은요?"



"...예은이의 부모님은, 솔직히 예은이를 크게 신경쓰지 않아요."


아주머니는 잠시 뜸을 들이다 씁쓸하게 답했다.



그러고보니 이세계를 모험하던 시절에도 성녀님 곁에 수녀님 외에 보호자처럼 보이는, 아니, 애초에 가족 같은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


가끔씩 원래 세계에 있을 가족들 얘기를 꺼내거나 물으면 늘 어두워지며 말하길 꺼려했지.


과한 추측일수도 있지만, 딸이 며칠 전에 병원을 탈출할려고 했는데 본인들 대신 간병인이 있다는 건 어쩌면...


"...."


궁금증이 들었으나 그걸 내뱉을 정도로 눈치 없는 놈은 아니기에, 입을 열진 않았다.


조용히 침묵하자 아주머니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랬기에 더욱 준태씨와의 인연이 의미가 컸어요. 준태씨와 함께 한 3년 간의 모습은... 제가 지금껏 봐온 예은이의 모습중, 가장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거든요."


"그럴리가요. 저 같은 거랑 있는게 뭐가 좋다고.."


"아뇨, 정말이에요. 그 애가 사람과 대화할때 그렇게 미소 짓는건 처음 봤어요. 정말 얼마만에 보는 미소였는지 몰라요... 정말, 이런 모습이 되흑..."


아주머니께선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셨다.


아마 이런 모습이 되서야 행복한 모습을 보게 된게 미안하고 하시는 거 같았다.


아주머니는 한참을 눈물을 흘리시다 지치셨는지 벽에 기대 잠들어 버리셨고, 나 또한 예은씨를 멍하니 바라보다 서서히 눈이 감겼다.


.

.


'막 꺾은 장미 꽃잎 흩뿌린 듯이, 돌아버릴 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여. 


그대는 내 삶의 빛이요, 내 삶의 소금이니. 


그대 없는 앞날은 등대 없는 밤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고 수통 없이 사막을 횡당하는 것이니.


아아, 그대란 불꽃 없는 삶은 차가워서 어찌 살란 건가.

아아,그대란 빛 없이 산다는 건 지옥을 떠도는 맹인이나 다름이 없는데 나보고 어찌 살란.. 건...'


'...?'


'...크흠, 흠흠... 자,잠시만요. 이거 좀 부끄러운데... 아,아니, 그니까 다음 대사가 뭐였는지 까먹어서...'


'..풉, 뭐에요 용사님. 음유시인도 그러진 않겠어요.'


'...미안해요. 성녀님께서 이런 뭐랄까.. 시적인 말을 좋아하시니 기분 좀 풀어줄려고 해봤는데, 그게 잘...'


'부끄러워요? 아니면 어려워서 못하겠어요?'


'둘 다요. 얼굴이 화끈거리네요.'


'푸흐흐흐.'


성녀는 입가를 가리며 잠시 웃다, 바닥을 보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런 제가 싫지 않으세요?'


'네?'


'잘 삐지고, 잘 토라지고, 잘 화내고, 잘 하는 건 없고...'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와 함께 눈빛도 흐려졌다.


아니라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보인다.


난 잠시 머리를 쥐어짜내며 고민하다 그녀의 두 손을 붙잡고 말했다.



'성녀님, 이 자리에서 약속할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위해서,'


살아가겠다고.


.

.


"...."


파노라마의 마지막 한장이 지나간다.

톱니바퀴는 더 이상 고장난 것처럼 헛돌지 않는다.


마음 속이 기쁨이나 슬픔 따위로 정의 내릴수 없는 감정들로 가득 찬다.


다시 눈을 떴을때 아주머니는 잠시 편의점을 다녀오겠단 쪽지를 남긴채 사라져 계셨고, 


병실엔 나와 잠든 예은이 둘 뿐이었다.



"용... 사니므...."


날 찾는 그녀와,



"루나..."


그녀를 잡고 싶은 내가.


.

.


"성녀님, 아~"


"음... 용사님, 다음 여행은 언제 떠나실 건가요? 아직 마왕군의 잔당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걱정마세요 성녀님. 지금 브렌이 마탑의 동료들과 함께 대륙을 돌아다니며 처단하는 중이니. 우린 천천히 떠나요."


"후후, 그럼 오랜만의 여유를 즐겨볼까요?"



그녀가 내가 내민 수저를 받아먹으며 웃었다.


아직 받아 먹는게 부끄러운지 뺨을 붉혔다.



의사선생님께서 말했다.


그녀와 내가 같은 망상을, 같은 상상 속에서 살았던건 기적이라고.



기적의 다른 이름은 믿음의 결실이랬다.



그리고 믿음은,


"성녀님."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용사님?"


3년이든, 30년이든, 상관 없다.


아직 이세계를 헤메고 있는 그녀의 곁엔, 길잡이가 필요하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세요?"


그녀는 내 마음의 불꽃이니,

난 그녀의 등불이 되어주자.



"...아니에요, 그냥 뺨에 뭐가 묻어서."


그녀의 두 손을 마주잡고, 이끌어주자.



"우리, 다음엔 어디로 모험을 떠날까요?"


그녀의 세계 끝까지.


.

.


옛 소재 다듬어서 써봄


뒷내용과 성녀가 이세계를 벗어나 현실을 다시 마주하고 주인공과 결혼하는 엔딩도 생각해지만 그것까지 썼다간 몇십화 연재를 해야 하기에 여기서 끊을게요...


진정한 순애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상대가 병들고 아파도 옆을 지키며 상처를 보듬어주는게 아닐까?


그리고 아프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사랑과 감정만큼은 변치 않는게 아닐까?


아무튼 간에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나, 나도 한우 먹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