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시우야. 돈 줄 테니까 크림빵이랑 바나나맛 우유 하나씩 사오고 거스름돈 만원 남겨와라."

"저, 하람아...?"


"왜."

"이거 5만원짜리인데...?"



빵셔틀을 시킨 일진, 그러니까 천하람이 나에게 건네준 지폐에는 신사임당이 그려져있었다.


크림빵 하나랑 우유 하나라고 해봤자 3,000원을 넘지 않을 거다. 거스름돈을 만원 남겨오라고 했으니, 사실상 37,000원이 남는다는 거다.



"그래서?"

"응?"


"빨리 빵이나 사와라, 쳐맞기 싫으면."

"아, 응...."



그렇게 빵을 사왔는데, 정말로 하람이는 거스름돈으로 만원짜리 한 장만 가져갔다.


어... 이게 맞나?


이러다가 나중에 왜 자기 돈 가져갔냐고 지랄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하람이 얘, 돈 계산도 못하는 빡대가리인 건가?



*



'후... 나, 자연스러웠지?'



처음 시우를 본 건 작년 초의 일이었다.


가난하다느니, 어머니가 도망갔다느니, 뭐 그런 놀림을 받으며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는 그냥 저런 아이도 있구나, 하고 넘어갔었는데.


어쩐지 그 이후로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늘어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먼저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고, 운 좋게도 같은 반이 되어있었다.


만약 내가 대놓고 도와주면 자존심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걸 이유로 괴롭힘이 심해질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시우를 내 '셔틀'로 삼았다.


평소에 내 돈을 보고 달라붙는 '노는' 친구들이 많았기에 주변에서도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고있었다.



*



"시우야."

"어, 어? 응, 하람아...."


"짠. 이게 뭘까?"

"자물쇠...?"


"정답! 정답을 맞췄으니까 상을 줘야겠네."



철컥. 쇠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내 안경에 자물쇠가 걸렸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안경이 콧볼까지 흘려내려, 안경을 계속 고쳐써야했다.



"푸흐핫. 웃기다."

"...."


"아, 참고로 열쇠는 없다? 뭐, 돈 줄 테니까 안경은 새로 맞추든지."



그렇게 말하며 하람이가 건넨 것은 5만원짜리 여섯 장.


겨우 안경 하나를 새로 맞추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다.



"부족한가? 안경이 얼마지?"

"...아냐. 고마워."


'...마침 여동생이 새 신발이 가지고 싶다고 하던데, 이걸로 사줘야겠다.'



돈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해버린 나 자신에게 환멸마저 느꼈지만, 그런 부끄러움조차 사치일뿐이다.


순간적으로 내뱉은 고맙다는 말은 어쩌면 진심이 아니었을까.


나 자신조차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



여동생이 맨발로 집에 돌아왔다


부루튼 발에는 신발도둑, 거지, 신발 브랜드 로고 따위의 낙서가 그려져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여동생은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렸다. 긴, 물소리가.


그 순간 내가 수도세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구역질이 나온다.


아.


아아.


아아아.



*



아, 시우 책상에 아예 몰래 돈을 넣어놓을까? 하트 스티커를 붙인 평지 봉투에 넣어놓는 거야.


그러면 흠칫 놀라면서 주변을 둘러보겠지?


시우가 편지 봉투를 뜯어보는 순간, 내가 나와서 말하는 거지.



- "새끼, 설렜냐?"



크, 완전 걸크러쉬.


그리고 봉투는 그냥 가지라고 하는 거야. 안에 돈이 들어있는데!


응응. 이게 좋겠다.


그러려면 새벽 일찍 등교해야겠네. 후후….


.

.

.


"어라?"



시우잖아?


오늘따라 일찍 등교했네.


이러면 내 작전은 실패인가? 그래도 등교 시간이 겹치다니, 이거 운명 아니야?


가서 먼저 인사할까? 등을 살짝 치면서, 살짝 일진스럽게.



'…그런데, 왜 옥상 쪽으로 가는 거지?'



옥상 문은 분명… 잠겨있나?


생각해보니 옥상에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아마 잠겨있을 것 같기는 한데, 이 학교 은근 보안이 엉망이라 그냥 열어뒀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시우가 평소에 휴식하는 비밀 장소같은 느낌일지도?


좋아, 한번 따라가볼까?


.

.

.


시우를 뒤따라간 옥상은 열려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자, 높은 곳 특유의 쌀쌀한 바람이 피부를 식혔다.


그리고, 시우가 보였다.


옥상 난간 위로 올라선 채, 몸을 떨며 난간 너머를 내려다보고 있는 시우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저대로 두면 안 된다고 느꼈다.


달려갔다.


내가 달려오는 기척을 느낀 건지, 시우의 고개가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간다.


그리고, 그대로 균형을 잃고 난간 너머로 기울어지는 것이 보인다.


안 돼.


잡을 수 있나? 제발, 조금만 더.



"잡았…!"



그 순간.


시우의 손이 나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내 손이 튕겨져나갔고.


시우의 몸은 난간 너머로 떨어졌다.


판단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다행히, 나는 급한 마음에 양손을 전부 내밀고 있었다.


다른 손으로 시우의 옷을 붙잡고.


어떻게 난간에 매달려 버텼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일까.


나는 끝내 시우를 끌어올리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우에게 소리쳤다.



"무, 무슨 짓이야 - ! 위험하잖아!"

"…."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그렇게 목숨을 끊는 건, 안, 되는…."

"…."



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아니, 빤히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 눈동자가 어쩐지 평소보다 어둡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나, 때문이야…?'



내가 시우를 괴롭혀서 그런 건가?


아니, 나는, 그냥.


시우를 위해서 그런 건데.


돈도 줬고, 나는, 시우가 가난때문에 놀림받는 게, 싫어서….



"…미, 미안, 흐윽, 미안해애…."



시우가 돈이 없는 게 싫은 게 아니었을 텐데.


시우가 놀림받는 게 싫었던 건데.


나는, 돈으로 시우를 놀리고 있었을뿐이다.


예전에, 시우를 가난뱅이라 놀리던 그 아이들처럼.


새삼, 내가 시우에게 한 짓들이 머릿속에 하나둘 떠올랐다.



- "야, 돈 줄 테니까 빵이랑 우유 좀 사와라."

- "푸흐, 안경에 자물쇠 달고있는 거 왜 이렇게 웃기냐?"

- "왜, 꼽냐?"


"정말로, 미안, 흐아앙…."

"…하람아."


시우가 나를 불러줬는데, 눈물 때문에 앞을 보기가 힘들었다.


아니, 눈물을 닦는 게 무서웠다.


시우의 표정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그, 울지마. 뚝."

"흐아, 흐, 웅…?"



하지만, 내 눈물을 닦아주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고서야.


시우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시우는, 그러니까.


미안해하고 있었다.



"너 때문에 자살하려던 거 아니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 킁, 그치만, 내가 너 괴롭혀서 그런 게…."


"아니, 음, 완전히 관계 없다고 하기는 힘든데, 너 때문은 아니야…."



나 때문이지…, 라며 말을 흘리는 시우.


설마, 나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져서 모든 게 자신 탓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고보니 들어본 적 있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시우도 그런 걸지도 모른다.



"흐, 히끅, 흐아앙…."

"아니, 울지 말라니까 그러네…."



자살하려던 건 시우이고, 말리려던 건 나인데.


왜 시우가 나를 위로하는 걸까.


왜 나는 울고있는 걸까.


전부 나 때문인 것 같다.


내가 바보같이 굴어서, 시우를 위한다는 이유로 시우를 괴롭게 만들어서.


전부, 나 때문에 잘못된 거다.



"다, 킁, 히끅, 나 때문이잖아…."

"아니라니까, 음, 그러니까. 하아…. 조금 길어질 것 같은데. 이야기 좀 들어줄래?"



*



'조금 당황스럽네….'



솔직히, 처음에 나를 말리려 할 때는 아니꼬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를 붙잡으려던 손을 나도 모르게 쳐냈을 정도로.



"…미, 미안, 흐윽, 미안해애…."

"…."



그런데, 울며불며 난간에 매달려서는 억지로 나를 끌어올리는 하람이를 보니.


어쩐지, 여동생 생각이 났다.


여동생이랑 하람이는 닮은 곳 하나 없는데 말이다.



"정말로, 미안, 흐아앙…."

"…하람아, 그, 울지마. 뚝. 착하지?"



어렸을 때는 나를 붙잡고 참 많이도 울었던 여동생이었는데.


어느새부턴가 우는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 나아지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정작 여동생은 나한테 걱정끼치고 싶지 않아 속에 꾹 담아두고 있었을뿐인데.



"너 때문에 자살하려던 거 아니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 킁, 그치만, 내가 너 괴롭혀서 그런 게…."



여동생이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놓고 울어야만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왜, 더 나를 의지해주지 않았던 걸까.


그 의문의 답을, 순간 수도세를 걱정하고 있던 나의 모습이 알려준 것 같아서.


이기적인 스스로에게 구역질이 나왔다.


여동생을 그렇게 만든 범인은, 하람이의 돈으로 산 신발이나 동생을 도둑으로 몰아간 아이들이 아니었다.


바로 나였다.


신발을 사줄 게 아니라 이야기를 나눴어야했다.


동생이 부러워하던 신발을 멋대로 사주는 대신, 동생이 하고싶은 게 있는지 물어봐야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흐, 히끅, 흐아앙…."

"아니, 울지 말라니까 그러네…."



그게 견디기 힘들어서, 이번에도 도망치려고 했을뿐이다.


정작 남겨질 여동생의 기분은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서럽게 우는 하람이를 보고서야.


문득, 남겨질 사람이 있다는 실감이 갔다.


죽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다, 킁, 히끅, 나 때문이잖아…."

"아니라니까…."



그래, 정말,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닮았다.


여동생이랑.



"음, 그러니까. 하아…. 조금 길어질 것 같은데. 이야기 좀 들어줄래?"


.

.

.


"…나쁜 새끼들! 다 죽여버려야 하는데!"

"하, 그러게. 학교로 찾아가버릴까?"



여동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글썽거리다가, 갑자기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화를 내는 하람이.


내 여동생을 괴롭힌놈들한테 화를 내는 하람이를 보니.


왜 나는 하람이처럼 반응하지 못한 걸까.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하람이의 괴롭힘이 그렇게 불쾌하게 느껴졌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으으, 시우야. 그 중학교랑, 여동생 이름 좀 알려줄래?"

"…응?"


"아버지한테 말해서 싹 다 혼내주라고 해야…."

"어어, 그, 그건 좀 그렇지 않을까?"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지만.


여동생한테 위로 하나 해주지 못한 나한테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럴 수 있을까.



"아으으, 짜증나! 진짜, 그런 일진놈들은 다 죽어야 한다니까!"

"…."


"…."

"…."


"…내가 할 말은, 그, 아니었나?"



자각은 있는 모양이네.



"아니, 시우야, 그, 미안…. 그동안 괴롭혀서…."

"뭐, 이번에 살려준 걸로 퉁친 걸로 할까?"


"어, 응? 그래도 되는 거야?"

"뭐어, 솔직히 지금에 와서는 후회하고 있으니까."



그녀에게 속을 털어놓다보니 어느새 죽고싶다는 생각이 날아가버렸다.



"그, 그런 거 요구 안 해? 정신적 피해보상금이라든지, 합의금이라든지…."

"…너는 우선 그 뭐든 돈으로 하려는 태도부터 고쳐야할 것 같은데."


"아, 으, 미안…."

"하아."



사실 이제와서는 하람이에 대한 내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다.


원망은 아닌 것 같은데.


음, 미운정이라고 해야하나?



"하람아."

"으, 웅. 시우야."


"그, 혹시… 내 여동생이랑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솔직히, 오빠로서 비겁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도저히 여동생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만약 여동생의 원망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면, 견디기 힘들 것 같다.


하람이라면 여동생과 잘 어울리는 친구가 되어줄 것 같고.


나 너무 오빠 실격인가…?



"어, 응? 여동생이랑? 시우 네 여동생?"

"어, 그, 힘들면…."


"하, 할게! 아니, 하게 해줘!"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면 오히려 불안하기는 한데.


음, 괜찮겠지…?



*



"…오빠."

"어, 시연아."


"저 언니 이상해…. 왜 데려온 거야?"

"…미안."


"…뭐, 나쁘지는 않았어. 연락처도 교환했구."

"그래?"


"오빠랑 뭔가 닮았더라. 저 사람."

"…."


"좋아하면 서로 닮는다던데, 그래서 그런 거 아냐?"

"야, 그런 사이 아니거든?"


"아니기는…. 오빠가 그런 사이도 아닌데 여자를 집으로 데려올 리 없잖아?"

"진짜 아니라니까, 참나."


"그러면 무슨 사이인데?"

"빵…."


"빵?"

"빵…을 함께 먹는 사이."


"푸흣, 뭐야 그게."

"하하…. 그러게."


"…오빠."

"…응."


"신발 사줘서 고마워."

"…응."



*



"언니! 나참, 오빠, 언니한테 또 이상한 짓 했지?"

"그런 적 없거든?! 그보다, 또는 뭔데, 또는…."

"프흐핫, 둘 너무 사이좋은 거 아니야? 나 질투나려고 그런다?"


"에이, 오빠같은 인간 보다야 언니랑 제 사이가 더 좋죠!"

"내 여자친구거든?"

"글쎄, 어떨까~. 확 우리 시연이한테 시집가버릴까?"


"헤헤, 전 좋아요."

"나참…."

"어라, 질투하는 거야?"


"당연히… 질투하지."

"오, 아니라고 했으면 조금 화날뻔 했어."

"쳇, 그러면 내가 오빠 밀어내고 언니랑 사귀는 건데."


"푸흐흣."

"푸흐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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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탭에 피폐로 올렸던 글인데 소고기 먹고싶어서 수정했읍니다….


참고로 우리 시연이 괴롭힌 나쁜넘들은 하람이가 돈의 힘으로 '인실좆' 해줬으니 걱정마십쇼.


여동생은 히로인 아닙니다.


오직, 순애.


오직, 한우.


재미있게 보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