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믿거나 말거나.



1. 시한부 선언


   1) 연인이어도 진료실 못 들어간다. 드라마랑 다르게 옆에서 같이 엉엉 운다던가 그런 거 없다. 온 건 둘인데 혼자서 멀뚱멀뚱 시퍼런 의자에 앉아 기다려야 한다.


   2) 궁뎅이는 아파오고, 파란색인지 녹슨 청동색인지 모르겠는 패브릭 의자가 참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다 보면 간호사가 빼꼼 고개를 내밀더니 '혹시 가족분이세요?'라고 물어본다.


   아니라고 하면 더 기다리라고 한다. 한 10분쯤 더 기다린다. 생리대 사오라던 여동생한테 "씨발아 뭐 이리 늦어"라고 톡이 온다. 그 쯤 누나가 나온다.


   3) 나와서 눈치를 보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큰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얘기를 들어보니 ct가 복잡해서 가족들한테 의사가 할 말이 많댄다. 큰일인 거냐고 물어봐도 대답은 시원치 않다. 설명하기 복잡하니 나한테 가라고 한다. 가족들하고 알아서 할테니 넌 가라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찝찝하다. 가방이 무거운 것도 아닌데. 


   진짜 괜찮은 거냐고 카톡을 해도 1은 사라지지 않는다. 3시간 뒤에야 "응 괜찮을 거야" 하고 톡이 왔다.


   '별 것도 아닌 거면 좀 시원하게 말하던가 ㅅㅂ 그래도 남친인데' 라고 원망을 했었던 거 같다.


   4) 사흘~나흘 쯤 뒤에 입원해야 한다고 연락이 왔다.


      4-1) 전공교수님하고 면담하다 "지금 여자친구가 암에 걸렸다는데 잠깐 다녀와도 될까요?" 라고 물어봤다.


      도저히 어떻게 말해야 할 지 감이 안 와서, 날씨 물어보듯이 말했던 기억은 난다.


      교수님은 어떻게 면담 도중에 스마트폰 보면서 연애질을 하냐고 쪼인트를 까고 있었다. 내 대답을 듣고 교수는 어땠더라? 일단 다녀오고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했던 거 같다. 


      아쉽게도 후피집 4드론에서 나올 꼰대 교수와 다르게 이 분은 참된 교수님이라 갈등의 소재로 쓸 수 없었다. 이후에 날 가장 많이 챙겨주신 분이었다.


      수서역까지 가는 동안 아무 기억이 없다. 존나 뛰긴 했다. 무서웠나? 못믿었나? 모르겠다.


      소설이었다면 거의 하이라이트인 부분인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이러니 분충이 못 되나?


   5) 첫주에는 '상사병 났네' '그리 섹스가 하고 싶니' 낄낄대며 친구들과 가족들이 놀렸다. 여친이 입원했다는 거 말고 아무도 사실을 몰랐으니까. 웃어 넘기려고 애를 썼다. 


   사흘동안 쌀밥 반 그릇 이상을 먹은 적이 없었다. 내가 돼지였다면 다이어트 중이라고 핑계를 댔을텐데 하필 난 멸치였다.


   6) 그래서 제일 먼저 눈치 챈 건 우리 엄마였다. 지랄말고 설명하라고 해서 결국 다 말해줬다.


   그 다음은 둘째 여동생하고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말해줘서 알았다. 여동생은 감이 온 건지 뭔지 하여간 어떻게 알아낸 건지 모르겠다.


   막내는 짱구 누나(여친 별명) 어딨냐고 물어봤다. 내가 대답을 못하니 엄마가 막내를 데리고 갔다. 그 뒤에 막내는 누나가 죽기 전까지 짱구의 'ㅉ'자도 언급을 안했다. 아직도 막내한테 미안하다.


   7) 그러다 어느 날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도 아가리가 뚫린 병신 하나가 입방정을 떨었다.



2. "시한부 여친을 둔 사람"이 된 이후의 일들


   1) '이거 절대 말하지 마'라고 시작했을 이야기들이 카톡에서 dm에서 페북을 흘러 내 대학교에까지 소문이 퍼지면 친구들도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2) 들어가 있는 단톡들이 다 멈춘다. 단톡이 울려도 친구들이 '여자친구'나 '암걸린다'나 뭐 하여간 그런 언급을 꺼린다.


   3) 최초로 입방정을 떤 놈이 a4 2장 분량의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카톡을 보낸다. 알면 아가리나 여물라고 하려다 그냥 차단했다.


   4) 한 번은 "페이커 암걸리네"라고 친구가 단톡에 올렸다가 내 눈앞에서 (삭제된 메시지입니다)로 바뀐 적이 있었다.


   5) '술먹자' '다인큐 너만오면 고' '스팀 비번좀' 대신 '괜찮냐' '나 너 믿는다' '힘내라' 이런 톡들만 온다. 


   6) 어딜 가도 '지금 어디냐'고 여동생이 물어본다. 뭘 해도 '너 그러다 죽겠다'고 엄마가 운다. 



3. 2에서 좆같았던 점들


   1) 뭘 해도 배려해주는 게 느껴진다. 


   친구들끼리 있다 누구 하나가 암드립 치면 꼽을 주고, 죽는다는 말이나 그런 언급을 알아서 꺼린다. 그런 말을 하면 서로 싸움이 난다. 


   "넌 왜 눈치 없이 구냐?" 

   "난 말도 못하냐? 언제까지 쟤 눈치봐야 하냐?"


   결국 청승맞게 구는 내 탓이 된다. 싸우는 건 그런 여자친구를 둔 내 탓이 된다.


   난 화난 적도 없고 별 느낌도 없고 솔직히 그럴 정신도 기운도 없는데 나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나 보면서 울고 미안해하고 신경쓰고 나 챙기려 들고 염병을 떤다.


   위에서 페이커 어쩌구 한 거. 난 그게 제일 좆같았다. 암드립이 아니라 내 눈치 보고 지운 게 너무 좆같았다.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난 슬픈 사람이었고 배려해줘야 하는 사람이었고 또 그런 사람이어야만 했다. 내 동의는 없었다.



   2) 상황


   내가 회복이 안되니 우리 부모님과 여동생은 누나쪽 부모님들을 욕했다. 


   당신들 이기심 때문에 우리 애 잡겠다고.

   그 사람들이 오빠랑 뭔 상관이냐고. 


   양심고백) 가족들한테 엄청 고마웠다. 솔직히 병수발하는 거 진짜 좆같았으니까. 그리고 누나 부모님들도 엄청 예민해졌었고.



   3) 병수발


   11: 50 수업 종료

   12: 30 왕십리 도착

   13: 00쯤 수서 도착

   버스타고 병원가서 병실가면 1시 20분?쯤


   머리 아프다고 땡깡부리는 거 받아주기 , 토하는 거 두들겨주기, 가려운 거 못 긁게 하기, 망고빙수 먹으러 가고 싶다고 할 때 울지 않기, 수업 얘기 해주기, 예쁘다고 말해주기, 다 나으면 여행갈 곳 말해주기, 막내가 누나 보고 싶다고 한 거 말해주기.


   2층 클리닉 들어가면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기, 마취 깰 때까지 기다리기, 진통제 돌아서 멍한 얼굴로 있는 사람 기다리기, 어머님 퇴근해서 (가끔 성남에서 막힌다고 하면 아버님) 올 때까지 기다리기.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씨발 인생 좆같다 걍 죽여버리고 자살할까 고민 좀 하기. 


  엘리베이터 내리면 오른쪽 아니고 정면으로 나가기(오른쪽에 장례식장 보여서 짜증남). 3호선 타고 집 가기.


  다음 날은 9시부터 5시까지 꽉차서 일찍 자기.


  한우대회때 이것들을 쓸까 했는데 걍 활자 덩어리여서 포기함.


  하여간 드라마나 다큐에서 보는 것보다 좆같을 거임. 내가 쓴 문장들 중에 유일하게 장담할 수 있음.

   


----------------------------------------------



   왜 썼냐고? 모르겠음


   걍 과제 끝나니 쓰고싶어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