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 백석

옛날엔 통제사(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港口)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客主)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사랑하는 여자를 친구에게 빼앗기고 천희를 찾은 남자의 시다. 과연 화자는 천희를 동정하고 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납득이 어렵다.
  건전해야 할 교육마저 이 모양이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가 개인의 삶을 오독하는 건 어찌보면 필연이다.
  독자 나름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작품 해석은 독자의 몫이니 정답이 없다고. 그러나 작품 자체가 이미 작가의 메시지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걸 독자 맘대로 해석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독자의 시각이 절대적이라면 영화 시사회에서 감독에게 의도를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타자의 삶을 단순화, 범주화하는 노력이 있다. 그게 의미 없는 노력은 아니지만 재단할 수 없는 가치까지 범주화하려 드니 문제다.
  나는 ICO라는 게임을 재밌게 했다. 이 게임은 여주인공이랑 손을 잡고 다닐 수 있는 게 매력적이다. 그 덕에 캐릭터한테 쉽게 이입할 수 있다. BGM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 대신 파도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등 자연의 소리로 몰입감을 높였다.
  누군가는 묻는다. 그래서 그게 얼마나 재밌는 게임인데?
  메타크리틱 메타스코어 90점에 유저 점수 8.8이다.
  그것 참 갓겜이구나!
  어린왕자의 탄식은 현대에 와서도 이어진다.

  난해하면 난해한 채로 두면 안 될까. 그게 삶인 것을. 그 자체로 가치 있단 사실을 인정해주면 좋겠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 '달에 울다'가 모든 문장이 시여서 인정을 받는다고, 레이먼드 카버의 건조체가 가치를 인정 못 받는 게 아니다.
  페도필리아의 삶이든, 여자를 돈 주고 사는 남자의 삶이든, 돈이 있어도 여자를 못 사는 장애인의 삶이든 그 가치가 다르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나의 가치로 타인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범죄를 나무라는 것과 타인의 삶을 평가하는 건 다른 일이다. 타인에게 분노할 수 있고, 훈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삶도 있음을 못 본 척하는 건 자기 세계의 매몰이다.
  작품 롤리타든, 시인 백석이든, 다큐 주인공이든 그저 삶은 삶이다. 나의 가치는 내가 창출할 수 있지만 타인의 가치는 남이 재단하는 게 아니다.
  타인을 오독하는 건 무지가 아닌 오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