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넘지만 어쩌면 나만의 철학을 만든다면

나의 철학에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갈등"이 될 것 같다



내가 "갈등"이란 개념에 대해 사유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우선 나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 갈등과 혐오를 겪었다. 인터넷 상에서 여성, 남성 등 특정 집단을 향해 인신모독, 혐오가 재생산되는것을 보았다. 그러한 혐오가 정치적 주장으로 이어져 현실에 전체주의를 재림시킬 위험성을 느꼈다. 레드필같은 극우 이데올로기는 수십년전의 가부장제의 악몽을, 정체성 정치와 terf 페미니즘은 새로운 형태의 전체주의를 형성할 구체적 위협으로 보였다.


따라서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여성도 남성도 억압받지 않는 사회를 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갈등이 너무 심각해요 ㅠㅠ, 혐오 나빠요" 정도의 진단은 불충분했다. 구체적인 해답이 필요했다. 


나는 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철학에 몰두했다. 미셸 푸코, 들뢰즈, 프랑수아 리오타르 등등의 책을 읽고 철학에 흥미를 느껴 다른 철학자의 저서를 읽었다. 포스트 모더니즘부터 읽기 시작해 거꾸로 간 이유는 현실과 시간상 가장 최신 철학이 포스트 모더니즘이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 니체같은 수백년전 사람들보단 더 정답을 알고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난 이때 철학적 조예가 그리 깊지 않아 포모던이 최신인줄 알았다)





아무튼 처음에 집중적으로 읽게 된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은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는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였다. 


리오타르는 칸트의 사실 - 가치 구별을 가져와 사실은 당위를 가리키지 않는다라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참에서 가치가 우러나온다는 믿음은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러한 정치 개념에서는 공정함은 참의 일부가 되고, 그에 따라 도출된 '좋은 사회'라는 개념은 특정한 윤리적 행동 방식들을 함축하여 그에 따른 행동 양식이 권력에 의해 전달된다. 진리는 이미 주어져 있고, 이에 순응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처벌받는다 


이러한 사회는 "근본주의적"이다


또한 더 고도화 된 방식으로 두번째 형식에서는 진리가 위에서부터 전달되지 않고, 사람들에게 내제하여 있는데, 마치 "나는 미국인이야, 그러므로 나는 미국적 삶의 방식이란걸 믿는다" 라는 식이다. 이러한 사회는 민주적이지만 전체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공정함과 사람들의 의지를 동일시하게 되면 그 사회의 이상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을 탄압할 수 있게 된다. 가령 중세 유럽의 '이교도'들, 1950년대 메카시즘이 사냥했던 '공산주의자'들이다. 


특정한 사람들의 이상이 옳은 것이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억압되었다.


나는 전자에게서 레드필의 가부장제 강요를, 후자에게서 정체성 정치가들의 캔슬 컬쳐를 보았다. 그는 내가 느끼는 문제의 원인을 (내가 느끼기에) 정확히 진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 발생 원인은 "사실 - 가치 구분이 흔들리고, 참에서 가치가 나온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의 철학적 핵심 가정중 하나는 "참은 가치를 가리키지 않는다" 가 되었다.






그렇다면 두번째 문제, 문제점은 알았는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리오타르는 "분쟁"이라는 개념에 집중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분쟁은 단순히 모든 당사자에 적용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보편적 양식에 호소하여 분쟁을 수습해서는 안된다. 그는 분쟁을 증언하고 논쟁을 문장화하는 새로운 방식과 어법을 지속적으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사상가의 일이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나는 분쟁이라는 개념을 갈등이라고 부르고 갈등이라는 개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리오타르는 "분쟁을 증언하고 논쟁을 문장화 어쩌고 지속적으로 찾자.." 라고 말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그는 아직 내가 원하는 답을 주지는 못했다.


그 후, 나는 내가 너무 포스트 모더니즘에 경도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을 찾아보게 되었다. 이때 슬라보예 지젝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순수 차이를 주장하며 포모던을 비판했는데 신기했다. 그에 대해 알고 싶어 저서를 찾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은 갈등에 대한 나의 고민에 힌트를 주었는데,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이 무슨 문제를 발본적으로 '극복하거나' '소멸시키'려는 욕망에서 발원한 만큼,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끔찍한 학살은 언제나 적대적인 긴장이 완전히 해소된 상태로 나아가려는 욕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문제를 근본적으로 소멸시키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그 문제들과 대면하려는 자세, 지젝의 표현대로면 "파국과 함깨 하기"이다.



여기서 나는 갈등은 영원하고 필연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사실 갈등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갈등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갈등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문제가 아닐까? 갈등은 잘 다루면 오히려 다양한 가능성과 발전을 추동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내 갈등에 대한 사상은 어느정도 정리가 되었다.


1. 갈등은 필연적이며 궁극적으로 갈등을 없애려 하면 파국이 나타난다


2. 그렇다면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잘 다루어야 한다, 갈등은 오히려 필요하다


3. 갈등을 잘 다루기 위한 규칙 중 하나는 "참에서 가치가 나온다"라는 믿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에서 가치가 나온다는 믿음은 끊임없는 반론과 그에 따른 갈등의 발생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나의 사상을 한번 현실에 적용해 보았다.


우선 현대사회는 갈등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잘못되었다. 인터넷이 그 이유인데, 의견, 정체성이 동일한 사람끼리만 모이는 것이 극도로 쉬워져 사람들은 오히려 갈등을 피하게 되었다. 갈등은 고통스러우니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갈등을 피하고 집단 내에서 서로 우쭈쭈만 하니 타 집단에 대한 확증편향과 혐오는 더욱 심해진다. 갈등을 피하려는 태도가 갈등을 불건전하게 만들며 더더욱 키우게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갈등의 해결이 아닌 진정한 갈등이다


나와 정체성, 의견이 다른 사람과 마주보고 갈등하며 고통을 겪으며, 내 견해가 반박당할 두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인터넷의 알고리즘(보고 싶은것만 보게 만드니)의 변화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