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짤방은 예전에 디시에서 간간이 본 적이 있습니다.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등판하고는 하는 짤방이었습니다. 이 말씀(?)들은 실제로 여기에 적힌 성현들이 하기도 했고, 또 책들에 등장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이 짤방에 반영되어 있지가 않습니다. 사실 꿈보다 해몽이라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구절들 자체보다도 그것이 전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가방끈이 짧다 보니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나마 잘 알고 있는 성경의 저 구절에 대한 해몽을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신앙의 진리에 대한 노래인 창세기는 하느님에 대한 찬미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로부터,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말씀만으로 빛을 만드시고, 하늘의 별과 행성들을 만드시고, 시간의 흐름을 시작하시고, 온갖 생명을 만드셨습니다. 이 중에는 당신이 보시기에 '참 좋으셨다'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만으로도 우주를 주관하실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신, 가능성 그 자체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진흙으로 빚으시고, 숨을 불어넣어 그것이 살아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사람이 가능성을 호흡해야 사는 존재라고 말한 것으로 아는데, 이 대목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창세기는 그 구절에 담긴 뜻 하나하나를 풀어보고 해석하며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미드라쉬라고 불렀습니다.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든 일화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굳이, 정강이뼈도 발가락도 아닌 갈비뼈를 빼서 하와를 만드셨을까요? 갈비뼈는 우리의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폐와 심장을 감싸는 뼈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런 갈비뼈로 여자를 지으셨다는 것은, 여자가 부족한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자와 동등한 존재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23-24절을 보면 이것은 혼인에 성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 근원이 한 몸이었듯이 다시 한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와가 뱀에게 속아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구절은 창세기 3장에 등장합니다. 저 짤방에서는 마치 어리석은 하와가 사탄에게 속아 선악과를 따먹고 남편에게 가져가서 그도 죄를 짓게 만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창세 3,6). 또 그 교만과 이기심이 하와에게서만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추궁하시자, 아담은 하와에게 그 책임을 떠넘깁니다. 하와는 뱀에게 그것을 또 떠넘깁니다(창세 3,12-13).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책임회피에만 급급한 모습을 아담과 하와가 모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유의지로 지은 죄 때문에 원초적인 거룩함을 잃고 하느님의 충만함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의 상처입은 본성과 충만함의 결여가 하나의 죄로서 '인류 공동체'에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원죄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자세히 얘기해보겠습니다.)


창세기 자체로만 해석하면 이러한데, 기독교는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종교입니다. 구약은 신약에서 벌어질 대사건에 대한 예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담 얘기를 했으니 아담의 예를 들겠습니다. 구약의 아담과 신약의 그리스도는 대칭 구조를 이룹니다. 아담 안에 들게 된 인류가 그의 죄 때문에 생겨난 원초적 의로움의 상실과 충만함의 결여,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공유하게 되었듯이, 그리스도 안에 든 인류는 그의 희생을 통해서 죄의 용서와 거룩함의 회복, 그리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로마 5). 아담의 범죄가 구약 시대의 역사를 여는 대사건이었듯이, 그리스도의 희생은 신약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여는 대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를 '새 아담'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하와와 대칭을 이루는 신약의 인물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마리아입니다. 구약의 하와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슬러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 첫 번째로 범죄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성령으로 잉태해 구세주를 낳았습니다. 하와는 뱀의 독니에 발꿈치를 물렸고, 마리아는 뱀의 머리를 발로 밟았습니다(창세 3,15). 이처럼 구약의 사건들은 구약에서 끝을 낼 것이 아니라, 신약으로 펼쳐지는 새로운 역사를 미리 보여주는 예형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와가 보여주었던 그 뻘짓(?)들은 '여자들은 이처럼 어리석고 이기적인 존재다'라는 주장의 근거가 아니라 사람의 죄악의 결과에 대한 하느님의 해결책을 앞서 제시하는 예형이 되어준다는 겁니다. (이것에 대해서도 나중에 한 번 다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