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has never been a year like 1968.












-서론


유럽을, 나아가 기존의 모든 질서를 뒤흔들고자 한다.


 그 누군가 남겼던 말처럼

세계 대전 이전과 이후의 상황은 너무나 달랐다.

권위와 무기의 폐허 그 아래에서

새로운 창조의 물결이 구시대의 장벽을 연일 강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후 그 거침 없는 반항에 구심점이란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청년들의 이러한 분노는 사그라질 공허함에 불과한가?

분명히 새로운 환경의 새로운 인간들은 무엇인가 갈구하고 있었다.

답답한 기존 질서의 거대한 해체를, 누구보다 성급하게.


-점진




 그리고 실존주의가 등장했다.

이들은 전후 유럽 대륙을 마치 폭풍처럼 휩쓸었다.

휩쓸어 새로움을 갈구하는 청년들에게 단비처럼 내렸다.


 오랫동안 유럽을 지배해온 십자가와 

추하게 몰락한 이성과 폭력의 근대사에 맞서

이들이 내세운 제 3의 길은 선택자유였다.


 사람들은 해방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성의 보호막 아래 평안한 인간이 아닌

불안한 실존적 주체로 자신을 자각하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을.


 그리고 두려움이 가시면 마침내 분노가 찾아올 것이다.

밀려오는 자유 앞에서 사슬에 묶인 자신을 바라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과 자신을 짓누르는 압제에 대한 분노를.


 이제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무언가 더, 결정적인 것이 필요하다.





 이 즈음 대륙 학계에 거대한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실존주의가 거센 물결에 밀려 갑작스레 몰락한 것이다.

이전의 질서를 해체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대한 움직임이

마침내 구조주의structuralism의 탈을 쓰고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비판했다.

죽일 기세로 모든 것을 해체하려고 들었다.

헤겔, 셸링, 칸트, 심지어 마르크스 또한 한낱 해체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이제 하나의 절대적 상징이었던 인간의 주체성은

레비스트로스에 의하여 무용지물이 되었고

이성과 합리주의의 토양 위에서 굳건하게 자라던 서양 사상의 모델인 나무

들뢰즈에 의하여 역동적인 뿌리들의 집합체로 해체되고 변모하였다.


 이렇듯 근대-이후를 추구하는 자들의 세력은 

역동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늘어가고 있었다.



 치기로만 가득해서는 어떤 것도 제대로 무너뜨릴 수 없으나

이제 혁명의 씨앗이 학문의 토양 위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역동적이고 불안한 것처럼 보여도

역사는 착실히, 계속해서 임계점을 향하여 비틀거리며 질주하고 있었다.


-개화





 냉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본과 자유의 정점에 서 있는 미국은

다른 모든 유럽을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원조를 개시했다.


 서유럽의 경제는 이 원조로 다시 회복되었다.

기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그들의 성장은 엄청났다.

이제 유럽이 다시 국제 사회의 고고한 맹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일까?


 당연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유럽은 냉전이라는 이름의,

그들에게 새로운 터전을 주었으나 

그들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막은 벽을 끝내 뚫지 못했다.


그리고 격렬한 성장 끝에는 성장의 둔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굳이 경제에서 그 이유를 찾지 못하더라도

온 세계가 권리와 자유의 신장을 위하여 혼란 속에 들끓고 있었다.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



중국 광기의 문화대혁명,



유럽 신좌파new left와 반전주의의 부상까지.



조금 다른 의미지만 정말로 광란의 60년대가 그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각국의 학생 운동 세력들은 

전후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한데 모아줄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거대한 시위의 중심이 될 의제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시위의 열기가 뜨겁더라도 그것은 그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걱정은 세계 정세의 거센 풍파 앞에서 그저 기우에 불과했다.

한껏 비대해진 학생 운동의 예민한 시선은 이제 베트남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미국의 적극적인 패권 투사는

신랄한 시선으로 세계를 훑던 학생들의 눈에는 그저 제 2의 홀로코스트에 불과했다.


 이제 각국 운동권의 머리 위에 거대한 단일 의제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실존과 구조에서의 해체, 억압에 대한 반항, 패권에 대한 저항' 이 한데 뒤섞인 무언가였다.

아직 실체가 뚜렷하지 않고 불분명한 의제였지만 이는 당장에 거대한 기폭제로 작용하였다.

세계 곳곳에서 베트남의 참상에 반대하는 운동과 시위가 발발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저 베트남의 참상에만 그치지 않고 곧 사회 전반으로 퍼졌다.


-절정



"역사-칼-마르크스."


 혁명의 위력은 실로 거대했다.

신좌파들의 새로운 성지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그치지 않고

미국에서 파키스탄까지 세계 전체가 혁명의 폭풍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각국 정부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진압을 시도하고

협상을 통하여 만족할 만한 조건을 수 차례 제시했지만

한번 퍼져버린 불길은 도저히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거리에는 왜곡된 문화대혁명의 찬양 구호와

베트남의 '새로운 주인' 호치민을 숭배하는 듯한 플래카드로 가득 찼다.

결국 서양 사회 전체가 이 거대한 화두를 두고 두 패로 갈라져 싸웠다.




한 쪽은 독재자 마오쩌둥과 함께 하는 혁명은 

그 누구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신랄하게 조롱했고



한 쪽은 무의미한 전쟁을 반복하는 패권국에 대한

'거리 곳곳에 들어차는' 시위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반동 또한 만만치 않았다.

기존 유권자들은 이 새로운 시위와 혁명에

불쾌한 의사를 투표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또한 거대하고 광범위한 규모의 혁명이었기에

그에 걸맞은 규모의 사회적 진통과 폭력으로 인한 후유증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혹자는 이 혁명을 두고 '적군 대신 아군을 섬멸한 어리석은 행위' 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의 의의는 단기-정치적 패배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이후 장기적인 승리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사람들을 가두어 놓은 이성의 족쇄가 끊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해체의 조류로부터 떨어져 나온 여러 사상들이 힘차게 헤엄친다.

족쇄를 푼 그들은 사회의 눈을 올바로 고치기 위하여 달려 나가기 시작한다.




과연 68은 폭력과 증오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젊은이들의 중상모략인가?



아니면 자유와 개성을 위하는 모든 정신들의 탈출구인가?


 우리는 아직 판단할 수 없다.

혁명은 죽었으나 죽어있지 않고

일련의 움직임이 남긴 영향은 아직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We can change the world.


 세상이 바뀔 수 있음을,

그리고 그 결과를 자신들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자유의 아주 기본적인 결실 하나.

그것이 그들이 얻어낸 하나이자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