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을 전제한다면, 생산관계가 사회적 구조를 규정하고, 모든 잡다한 사회적 요소들은 본성적이거나, 무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적 욕구 또한 당연히 사회적 생산관계로부터 내려온 규정인데, 이 때문에 사회적 욕구의 양상은 그 시대의 구체적인 생산관계에 따라 달리 나타납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일반 법칙은 자본의 자기증식, 그에 따른 자본에 의한 인간의 물적 대상화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인간은 자본의 목적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자본이 사회의 주인으로서 모든 분야를 자신의 목적성에 맞게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결과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적 행동의 동기, 즉 사회적 욕구부터 자본의 합목적성에 맞게 규정됩니다.

중세 봉건제에서 농노는 현세에 이룰 수 없는 신앙적 이데아를 노동의 동기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봉건제에선 영주와 농노의 관계는 착취적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농노에게 노동 가치를 보장한다면 봉건적 생산관계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노동 가치를 주지 않으면서도 노동 욕구를 보장할만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자가 자기 욕구를 충족할 수 있으면 노동 착취는 중단될 것이고, 이것은 곧 자본의 죽음으로서 실현될 것입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 자본은 기회의 공정성, 정당한 노력과 성공 등의 관념을 대중에게 주입함으로서 패배가 보장된 인생 게임을 실시하며, 이 관념이 소멸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재주입합니다. 하필 이것인 이유는 오늘날 노동 관계는 세속적이기 때문에, 자본은 대중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할 법 하면서 결국은 그저 가능성에 불과한,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은 주장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념이 사회적으로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관념론자들은 이것이 본성적이라고 하지만, 잘 생각해보십시오. 당신들은 노력해서 경력을 쌓고, 더 나은 직업을 가지며, 사회의 최상층에 서는 것이 곧 개인의 최고선이라고 여기는 관념을 태어났을때부터 가졌습니까? 제가 기억하기론 경험상 그것을 최초로 습득한건 학교였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사회적 욕구 또한 사회적으로 습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다양성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자본이 요구하는 사회적 생산관계는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생활 방식도 한정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