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바람 사이로 푸른 빛이 가물거렸다. 서서히 시야가 안정되자 그것이 인간의 눈빛이라는 걸 깨달았다. 평소에 온화하게 내려간 눈꼬리는 호전적으로 치켜올라가 있었고 그의 갈색 피부와 대비되어 보이는 이빨은 유난히 날카롭게 빛나 보였다.

...드래곤 같아.

긴박한 배틀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 기억났다. 찰나, 의지와 무관하게 발각된 내 목소리가 들리고 내 포켓몬이 적에게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아, 이건 꿈이야. 과거의 배틀을 꿈에 보고 있는 것임을 알아챘다. 눈 앞을 가로막는 강력한 포켓몬과의 접전에 당시 느꼈던 감정이 선명하게 흘러들어왔다. 즐거워, 즐거워, 즐거워, 즐거워!!

포켓몬에게 내리는 명령은 이미 포효에 가까워 고함치듯 쏟아붓고 있다. 이렇게 꿈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평소의 나와 배틀 중인 나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단단한 드래곤 타입 포켓몬이 이쪽의 총공격을 이겨내고 일어서자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






"......으응..."


반짝하고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고에 낀 안개가 점차 걷히고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마 어제 마신 따뜻한 우유에 수면제를 탄 것이 분명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몬스터볼을 넣어둔 가방은 없었고 다른 사람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어 봤지만 허공을 스쳤다. 잠든 사이에 포켓몬과 스마트로토무는 뺏겨 버린 것 같았다. 동거는 취소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해. 힘차게 몸을 일으키자 옆에서 "음..." 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서 옆을 돌아보니,


"아!?"


저도 모르게 이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바로 옆에 로마의 조각상처럼 잘 단련된 금랑 씨의 아름다운 육체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반라에 수면제를 섞었다는 두려움도, 원망도 날아가 버려서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더 나아가 이불이 벗겨져서 터무니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자...? 일어났나 우리"

"........."

"...뭘 보는 거야, 변태가"

"......왜 맨몸인거예요"

"응? 이 몸은 잘 때 안입고 자거든"


아니, 먼저 따져야 하는 부분은 왜 수면제를 탔는지, 왜 옆에서 자고있는건지, 같은 것들이었는데 무심코 가장 큰 의문이 입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혼란스러워하는 나와는 달리 정작 금랑 씨는 큰 입을 벌리고 흐암~ 하품하고 있다.


"아~ 졸리니까... 이제 다시 자자. 오늘은 나도, 너도 오프잖아..."


이불과 함께 끌어당겨져서 눈앞에 단단한 가슴팍이 펼쳐졌다. 힉ㅡ!! 하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귀까지 빨개졌을 것이 분명한 나를 들여다보며 "...귀여워" 라고 중얼거린 그는 그대로 꾹 입술을 포개어 왔다.


"~!!"

쿵!! 하고 들이받자 의외로 저항 없이 떨어진 금랑 씨는 입꼬리를 핥으며 바들바들 떨고있는 나를 태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만..!! 아이에게 손대는 취미는 없는거 아니었어요!?"

"이런 것도 손댄거에 포함되는건가?"

"키스는 노카운트인거예요!?"

"오~ 그렇네, 더 좋은 것도 알려줄까?"

"~~~최악이야!!"


화를 내며 침대에서 벗어나 달려나왔다. 그대로 방을 나섰지만 하하하, 웃으며 잠자리로 다시 들어간 금랑 씨는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놀림 당하는 바람에 기세가 꺾였지만 어떻게든 이 집을 탈출해야했다. 어딘가에 숨겨져있을 가방을 찾으러 뛰어다녔다.

찬장 위, 없다. 옷장 속, 없다. 휑뎅그렁한 집을 닥치는 대로 털어보지만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가방 안의 몬스터 볼만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그거라면 휴대폰 기능으로 축소할 수 있으니까 의외로 데스크에 들어있지 않을까. 서랍을 열자 안에는 무기질의 서류들이 잔뜩 깔려 있었다. ...야성적인 금랑 씨에겐 연상되지 않는 것에 눈길이 끌려 본래 찾던 것도 잊고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건, 리그 위원회와 관련된...

스폰서 계약, 보도진 연락처 목록, 토너먼트 개최 일정, 짐 리더 연합 회의 자료. 그저 어린애인 내가 보기엔 너무 어려운, 공적인 서류들에 굳어버렸다. 평소의 와일드한 금랑 씨로부터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이런 어려운 사무 일도 하고 있는 건가... 어른, 이란 거구나.

마지막으로 끌어낸 파일에는 『 미성년 챔피언 관리 대행 업무 규정 』이라고 라벨링되어 있었다. 스케쥴 조정과 기업과의 협상에서 직무 능력이 없는 챔피언 대신 후견인을 1명 영입하고 그 책임 범위나 업무 범위에 대하여 운운하지 않는다... 라고 적혀 있었다.

이걸 금랑 씨가 가지고 있다는 건 지금까지 챔피언으로서 일은 모두 뒤에서 금랑 씨가 관리하고 있었던건가? 그러고 보니 그는 어제 늦은 밤에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아침에도 졸리다고 다시 잠들려 했다. 혹시 이런 일들을 늦게까지 처리하고 있었다는 걸까. 자다가 깬 뒤에 일어난 성희롱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내가 오늘 오프인걸 알고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까.

그렇,구나. 챔피언이 배틀만 한다고 해도 보수나 성과의 협상이라든지, 각 관계자에 대한 수속이라든지 여러가지가 있지. 아무 생각없이 그저 배틀만 하고 있던 내가 한심했다. 나는 금랑 씨가 농담한 것 이상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였다.


서류에 정신이 팔려있던 나는 정작 금랑 씨가 일어나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시야에 불쑥 큰 손이 나타나 쥐고 있던 서류를 가져갔다.


"이봐, 장난도 적당히 해야지"


머리 위에 손을 얹고는 야단쳤다. 금랑 씨는 평소보다 더 낮은 위치에 묶은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나로 인해 흐트러진 방을 둘러보며 어이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많이도 어지럽혔네. 아쉽지만 네가 찾는 건 여기 없어"

"...제 포켓몬들은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돌려주진 않겠지만"

"...돌아갈래요, 포켓몬 돌려주세요!"

"그래, 돌아간다고? 어디로?"

"...그건 "


큰소리쳤지만 어딜 가도 기분 나쁜 주목을 받는 지금의 나에게는 안심할 만한 장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하자 금랑 씨는 만족스럽게 흐, 하고 웃고는


"뭐, 천천히 가라고"


리모콘을 손에 들고 텔레비전을 켰다.

시간은 정확히 정오. 와이드 쇼가 틀어졌다. 사회자의 뒤의 보드에 내 사진이 펼쳐졌다. 챔피언의 화제임을 알고 마음 속으로 대비했지만 상황은 최악의 사태로 치달았다.


[영광의 가라르 프린세스, 챔피언 우리 선수. 그 눈부신 활약의 이면으로 현재 포켓몬 학대 의혹이 부상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의 엔트리 포켓몬의 상처에 대해서 지적하는 SNS의 투고가 화제가 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스튜디오에는 전문가분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 코멘트를 달아주세요. ]

"뭐...?"


눈앞의 사회자가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한동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뻣뻣한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사회자의 멘트를 시작으로 기회를 놓칠세라 지껄이기 시작했다.


[수상하군요. 포켓몬 센터에 가면 요즘의 기술로는 상처 째로 낫는 거죠? 그렇다면 센터에 제대로 데려다 주지 않은 게 아닌가요? 지금까지 무패였고 그런 실적이라면 포켓몬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은 훈련이 뒤에 있는 게 아닐까요?]

[어린아이 만의 끝을 모르는 잔혹함이라고 할까요? 그 챔피언 취임 직후의 사건, 유명한 실종 사태라고 하던데요. 정신적으로 미숙한 부분이 눈에 띕니다.]

[게다가 저 포켓몬의 털. 모래 먼지 투성이에 털이 갈라져서 부스스한게 자꾸 신경 쓰였거든요. 정말 애정을 받고 자라는 아이가 그런 모습일 리가 없어요.]

[의견 감사합니다. 리그 위원회의 공식입장에 의하면 학대 사실은 일절 없다고 여겨집니다만, 앞으로의 전개에 주목합시다.]


논의는 거기서 끝이 났고 프로그램은 깨끗하게 다음 화제로 전환되었다.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면 그만인 언론은 마치 정보를 소모품처럼 있는 일, 없는 일 가리지 않고 흘려보낸다. 내 화제는, 어쩌면 좀 더 지나면 잊혀질 작은 소재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사자인 나에게는, 마음을 후벼파는듯한 충격을 남기고 갔다.


"...저, 그런 게 아니라"

"알고있어. 저렇게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 모를 수가 없지. 전문가라고 해도 책상에서 책만 쓰는 놈이지 실제로는 포켓몬에 대해선 아마추어일거다"

"그 아이의 상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있었어요...야생에서 만난 아이고 흔한 일인데... 잡기 전에 생긴 오래된 상처는 포켓몬 센터의 치료로 고칠 수 없잖아요... 털도, 다이맥스로 날씨가 자주 바뀌면 털이 갈라지는 정도고... 집에서 키우는 애완용이 아니니까"

"그렇지, 너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그런데. 사람이란 건 진실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싶은 걸 보는 거다"


금랑 씨가 텔레비전의 전원을 껐다. 갑자기 조용해진 방 안에, 두 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릴 법한 공간 속에서 금랑 씨가 말한 문장의 의미를 되물었다.


"...보고싶은 것?"

"그래,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네가 가진 천부적인 재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성공한 사람이 있으면 뭔가 떳떳하지 못한 실수가 있기를 바라고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있으면 끌어내리고 싶다고 생각하지. 세상은 말이야, 너를 챔피언에 공주라고 칭찬하는 한편 어떻게든 네가 패배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나있다고"


분명히 그 영상 속에서 벌어진 것은 명백히 악의에 찬 대답이었다. 그 사람들은 딱히 포켓몬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나를, 헐뜯고 싶어한다.


게다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갈수록 보는 시청자들도 즐거울 것이다. 저 와이드 쇼는 사람이 마음에 품은 정말 보고 싶은 것을 끌어내고 자극하는, 프로그램의 존재 자체가 퍼포먼스 같은 것이다.


...마음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옛날부터 그랬다. 나는 사람과 사귀는 방법을 몰랐다.

칭찬 뒤에는 질투가 있다. 미소 뒤에서 흉을 본다.
네는 아니오. 아니오는 네. 온통 뒤바뀌어서 머리가 아파온다.
어째서, 모두 당연한 것처럼 굴 수 있을까. 왜, 다들 태연한 걸까.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자 금랑 씨가 눈 앞에 서있었다. 천천히 몸을 웅크려서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얼굴에 걸린 앞머리를 옆으로 빗어넘겨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우리야, 너는 항상, 사람이 무섭다는 얼굴을 하지. 사람 따위 보다 훨씬 강력하고 사나운 포켓몬을 길들이는 주제에 사람을 상대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도 몰라서 농락당하고... 불쌍하게도"


팔을 붙잡혀 끌려가자, 금랑 씨의 큰 몸에 감싸졌다.


"우리, 너를 괴롭히는 건 모두 이 몸이 멀리해줄게. 지위에 사로잡혀서 움직일 수 없다면 이 몸이 휩쓸어줄게"


꽉 껴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의 상처에 꿀을 바른 듯한 말로 머리가 어질어질해져서, 금랑 씨의 어깻죽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귓가에 한숨이 내려앉았다.


"있잖아, 우리야"


고개 숙인 채 나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그가 낮게 속삭였다.


"너에게 상처만 주는 세계따윈 버리자. 계속 여기에 있으면 돼. 너는 나에게 지켜지고 있으면, 그게 가장 행복한 거야"






***






『 챔피언 활동 정지! 복귀 시기 미정 』


신문의 일면을 장식한 제목을 나풀나풀 내걸고 "사실은 은퇴시키고 싶었지만, 여러가지로 입막음하기 귀찮아서" 라며 보여주는 금랑 씨에게 나는 소름이 끼쳤다. 이렇게 갑자기, 은퇴 당사자의 기자회견도 없이 문답무용으로 활동정지까지 갈 수 있다니, 도대체 내 후견인으로서 얼마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걸까.

...단델 씨가 실망하셨을까? 마리와 두송 씨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할 것이다. 호브는... 연구하느라 바쁠지도 몰라. 스마트로토무가 없는 이상 외부와는 일절 연락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소식불통이 되면 누군가가 의아해 할 법도 한데, 금랑 씨의 사전 공작이 주도면밀한지 이 부자연스러운 활동정지는 더 이상 세간의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금랑 씨와의 생활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상했다.


마치 꿀에 절여 불어나는 듯한, 끝이 보이지 않는 매일매일이 계속됐다.

우선, 온갖 옷을 가져다 바친다. 결코 밖에는 내보내지 않는 주제에 방에서 입기에는 아까울 정도 좋은 옷을 차례차례 사온다. 그렇게까진 필요 없다고 호소해도 "너,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근래 보기 드문 성장기야. 몸에 맞는 옷을 입어야지" 라고 매번 말해왔고 이제는 사오는대로 내버려두고있다. 식사에 관해서도 불편함은 없었고 영양 밸런스를 맞춘 메뉴가 매일 나온다. 한 번은 수면제를 탄 전적 때문에 먹는 것을 거부했더니 입에서 입으로 먹여줬다. 그 이후로 가만히 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루의 끝, 잠들기 전에 반복되는 의식이 있다.


"—우리"


...아, 이 낮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불릴 때에는. 뒤돌아보면 턱을 붙잡고 입술을 맞춘다. 쪽 쪽, 하고 각도를 바꿔서 몇 번이나 입술을 파묻고 생리적인 눈물이 눈가에 고인다. 연인 사이도 아닌데 퍼부어진 키스에 처음엔 날뛰기도 했지만 어렵지 않게 제압 당하고, 거꾸로 물어뜯는 듯한 키스를 당했기 때문에 쓸데없는 저항은 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엔 쪼는 듯한, 어린애 장난같은 키스였다. 그것이 횟수를 거듭할수록 보다 깊고 오래 입술을 빼앗기게 되었고 이것이 성적인 행위라는 것을 조금씩 배워갔다.

성장기, 내 몸이 어린아이에서 어른... 여자가 되어 가면서 키스 도중 어깨에 놓여있기만 했던 손은, 천천히 몸을 덧그리듯이 미끄러트리면서 허리를 어루만졌다. 여자의 본능이 남자의 요구에 화답하듯 떨려왔다.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떨어트렸다.


"...좋은 얼굴을 하게 됐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뒤로 팔을 돌렸다. 그대로, 하고 아랫배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조금만 더" 라고 중얼거렸다. 무엇, 이었을까.






***






비록 나는 활동을 중지하고 있지만 금랑 씨는 체육관 관장으로서 일이 있다. 낮에는 집에 가만히 내버려 둔다. 처음에는 그가 없는 사이에 탈출할 것이라 다짐했지만 최근에는 포기하고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곳에는 안쪽에서 열 수 없는 인증 잠금 기능이 있어서 바깥으로 통하는 유일한 문인 현관은 열지 못했다. 베란다로 가는 창문에는 잠금이 없지만 고층인 여기서 뛰어내리면 즉사할 것이다.

드디어 내년으로 다가온 짐 챌린지의 개최를 앞두고 텔레비전에서는 역대 명배틀 장면을 재방송하고 있었다.

...아, 배틀, 하고 싶어.

오래 전에 빼앗긴 그 아이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빼앗기고 나서야 포켓몬의 힘의 크기를 알았다.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하더라도 포켓몬들이 있으면 나는 외롭지 않았고 바다도, 하늘도, 어디에라도 갈 수 있었다.


...포켓몬만 있으면 어디든지.


마음 속으로 되새기고 깜짝 놀랐다. 못할 것도 없어. 텔레비전의 채널을 바꾸고 한 쪽에서 경품 추첨 방송을 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찾았다.


『 편리한 가전 당첨!』 『 매일 추첨하는 해피 캠페인 』 『 신오 지방의 유적을 돌아보는 여행 』 『 호연 지방 여행 캠페인!』 『 7일 간의 여행을 선물합니다!』 『 응모 방법은 리모컨 버튼을...』 『 계정 등록 업체의 주소로 상품을 보냅니다...』


기회는 한 번뿐, 이 방법 밖에 없었다.







***






계획은 성공이었다.

며칠 뒤, 금랑 씨가 없는 낮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배달물이 도착했다. 급히 받아 내용물을 열자, 닥치는 대로 응모한 경품이 몇 가지 들어있었다. 수중에 들어온 것은 호연 지방행 티켓과 몬스터볼 3개. 여행 당첨은 어려울거라고 생각했는데 운이 좋았다. 1등상은 당첨되지 않더라도, 참가상은 몬스터볼인 것이 많다. 보통이라면 실망할만도 하지만 나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등 경품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몬스터볼을 꺼내서 베란다에 달려갔다.

여기서부터 순전히 운이다. 바람이 부는 가운데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고 베란다에서 끈기있게 포켓몬을 찾았다. 다행히 이곳은 너클 시티. 와일드 에리어가 근접해 있는 발전한 도시면서 야생의 포켓몬과 함께 살아가는 곳.


....찾았다!!

베란다에서 조금 위를 유유히 날고있는 칠흑 같은 새의 무리. 아머까오였다. 거리는 가깝다. 심호흡을 한 뒤 몬스터볼을 움켜쥐고 무리에 겨누어 던졌다. 볼은 간신히 1마리를 맞췄고 주위가 눈부신 빛에 휩싸였다.


부탁,이야...!!

약해지지도 않은 체력 만땅의 포켓몬이 한 방에 몬스터 볼에 들어갈 확률은 매우 낮았다. 하지만 제로가 아니다. 손을 잡고 기도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달콤하지 않았다. 파삭, 단단한 것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빛이 확산한다.


"가아ー!!"


찢는 듯한 울음 소리가 울려퍼지고 볼에서 나온 아머까오는 던진 사람이 있는 이쪽을 보더니 일직선으로 베란다까지 날아왔다. ...좋지 않았다. 나는 싸울 수 있는 포켓몬이 없었다. 이 무섭도록 거대한 새에게 습격당하면 최악의 경우 갈갈이 찢겨 잡아먹혀 버릴지도 몰랐다.

가악!!!! 베란다의 난간에 내려선 아머까오의 모습에 각오를 다지고 다시 돌아섰다. 언제 강건한 부리로 쪼아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하늘의 왕자라고 불리는 위엄 있는 모습 그대로 아머까오는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내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걸까.

포켓몬은 트레이너를 가늠한다. 포켓몬이 공에 들어가 잡히는 것은 단순한 포획이 아니다. 동료가 되어 따라가겠다는 그들 종족의 의지 표시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공을 던진다는 것은 포켓몬을 동료로 삼고싶다고 요구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알고있다.

동료로서, 너의 바람이 뭐야. 장갑에서 들여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나에게 묻고 있었다.


"...아머까오, 내게 날개를 빌려줘. 난 여기서 나가야 해. 약해서, 싫어하는 것에서 등을 돌리고 달아났어... 내밀어진 친절에 어리광 부리다 갇혀 버린거야. 하지만 변하고 싶어. 변하지 않으면 안돼... 부탁이야 내게 힘을 빌려줘!!"


마지막을 외치듯 전하자 아머까오가 승낙했다는 듯이 한바탕 울었고, 내 몬스터볼에 스스로 들어갔다. 빛이 빨려 들어가며 달그락 달그락 포획 성공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고마워..."


오랜만에 느낀 포켓몬과의 인연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하지만 울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






"날자, 아머까오!"

검은 장갑에 매달려 아득한 가라르의 상공을 날았다. 몇달 만에 나온 바깥 세상에 가슴이 울렁거렸지만 지금은 그럴때가 아니었다. 목적지는 슛 시티의 항구. 티켓 무늬와 같은 배에 타면 호연 지방으로 갈 수 있다.

속마음은 어쨌든 초조해하고 있었다. 상품 추첨은 당첨 되었을 때 배송과 동시에 계정 소유자에게 메일이 간다. 오늘 정오에 배달물이 도착했고 지금은 해질녘. 금랑 씨가 일하는 사이에 메일을 체크하면 내가 하려는 일은 단번에 들킬 것이다.

아머까오는 사람을 태우고 안전하게 운반해주는 포켓몬이지만 그만큼 초고속으로 날수 있는 건 아니다. 그에 비해 금랑 씨가 조종하는 것은 드래곤 타입의 포켓몬이었다. 쫓아온다면 전광 석화의 속도로 거리를 좁혀올 것이다. 속도에서 차이가 난다면 어떻게 리드하느냐에 달려있었다.


한참 더 날아가자 구름 사이로 로즈 타워가 보인다. 좋아, 얼마 안남았어. 목적인 배가 보이지 않을까 몸을 내밀자 불길한 화염의 덩어리가 뒤에서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용의 파동이다.


"──── 우리이이이이이!!"

"──!"


격한 노호에 뒤를 돌아보니 약 100m 뒤에서 금랑 씨를 태운 플라이곤이 다가오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키이이이잉, 에너지를 충전하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연거푸 두 번째가 날아왔다. 아머까오에게 지시를 내려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이 아이가 보유한 원거리 공격은 없다. 이대로 공중전으로 넘어가면 틀림없이 격추되고 말것이다.

세 번째도, 네 번째도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는 것에 정신이 팔린 아머까오는 단숨에 거리가 줄어들었고 플라이곤과 일렬로 늘어섰다. 금랑 씨의 얼굴이 맹렬한 분노로 일그러져 있있다. 용의 역린을 건드린 것처럼 광기마저 배어나오는 형상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상공임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의 노호가 공기를 찢었다.


"놓칠 것 같냐, 우리!! 와일드 에리어에서부터 단델의 동생, 그 다음은 가라르의 밖! 넌 나에게서 달아날 수가 없다니까, 우리!!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아머까오"

나는 개의치 않았다.

"강철 날개!"


지시를 들은 아머까오는 나를 등에 태운 채 회전하는 단단한 날개로 플라이곤에 큰 타격을 입혔다. 기습이 먹혔는지 플라이곤의 몸이 튕겨져나갔고 거리가 크게 벌어졌다.


"놓칠까보냐!! 와라, 우리!"


성난 용처럼 울부짖는 금랑 씨의 목소리에 울 것 같았다. 뒤돌아보면 안 된다. 매달리는 몸을 낮추고 조금이라도 공기 저항을 덜 받는 자세를 취하다. 기온이 낮다. 진로가 어긋나서 키르쿠스 마을 쪽의 하늘에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구름에 들어가!! 아머까오!"


대답을 하듯 한 번 울고는 고도를 높여 눈구름 속으로 섞여들어갔다. 땅과 드래곤의 복합 타입인 플라이곤은 얼음에 유난히 약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추위에 손이 곱아들어갔만, 이대로 우회하면서 항구로 향하면 금랑 씨가 쫓아올 수 없을 것이다.


"...금랑, 씨..."


...스스로 도망쳐 놓고선 한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하고 다정하게 나를 불러주고 힘들 때에는 항상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커다란 손을 떠올렸다. 그 애정은 일그러졌지만 외로운 나를 도와줬다.

고마워요. 그렇지만, 미안해요.

꽉 닫힌 눈꺼풀에서 흘러넘친 물방울이 아머까오의 갑옷에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