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다 쓴 다음에 느끼는 점이지만, 생물학자들 중에서 포덕들이 많긴 한가보다.


특히 계통분류학자들같은 경우는 새로운 종을 발견하면 이름을 붙일 수 있는데, 여기서 이들의 덕후스러움이 드러남. 포켓몬 이름을 딴 학명은 무려 17개나 있다.


다만 아쉬운 건 포켓몬과 실제 생물이 유사하게 생긴 경우는 손에 꼽는다는 거. 그리고 계속 읽으면 알겠지만 벌레들(벌, 거미, 딱정벌레 등)이 대부분이다.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음. 동물 종 중에선 벌레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벌레들한텐 벌레타입 포켓몬들의 이름만 따서 붙인 것도 아니고.


각 종들의 사진이 있으면 넣었고 이름을 따온 포켓몬의 공식삽화도 같이 넣어둠. 벌레 사진 많다. 진짜 많다.


분명 경고했음.













첫놈부터 벌레네 (리자몽 말하는 거 아님. 사실 맞을수도)










1. Chilicola charizard <- 리자몽(charizard)



2016년 칠레에서 스펜서 몽크턴이라는 곤충학자가 발견하고 명명함. 석사논문을 Chilicola속의 새로운 분류법에 대해서 썼는데 이때 새롭게 발견해서 Chilicola속으로 넣은 벌 8종 중 하나가 이거. (나머지 7종의 학명은 포켓몬과 별다른 관련이 없음.) 본인피셜 하고많은 포켓몬 중 리자몽을 고른 이유는 자기가 처음으로 고른 스타터가 파이리라서.



2. Aerodactylus scolopaciceps <- 프테라 (aerodactyl)


약 1.5억년 전에 살았던 익룡. 사실 화석 자체는 19세기에 이미 발견됐지만 본래는 Pterodactylus속으로 분류되었는데, 2014년 들어 여타 Pterodactylus속 종과는 충분한 차이를 보인다는 주장이 스티븐 비도비치와 데이비드 마르틸이라는 공룡학자들에 의해 논문으로 발표됨. 그리고 이 종을 다시 분류하기 위해 새로운 속명을 만들면서 프테라의 영어이름 aerodactyl을 따옴.


여담으로 (1세대 화석몬이자 익룡을 모티프로 한 것 말고도) 프테라에서 이름을 따온 이유가 있는데, 프테라 자체가 다양한 익룡들의 특징들을 섞어서 디자인한 포켓몬이니만큼 Pterodactylus속 종과 유사한 특징들을 공유했던 (그래서 Pterodactylus속으로 분류되었었던) 이 익룡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함. 



3. Stentorceps weedlei <- 뿔충이(weedle)



2011년 매튜 닐슨과 매튜 버핑턴이라는 곤충학자들에 의해 명명. 여타 Stentorceps속 말벌들과 쉽게 구별할 수 있다는데, 바로 머리 정중앙에 달린 가시 때문. 크기가 아주 아주 작은 독침붕이라고 생각해도 될듯.



4. Rathalos treecko, Anyphaena grovyle, Anyphaena sceptile <- 나무지기(treecko), 나무돌이(grovyle), 나무킹(sceptile)




2021년에 쓰촨성의 한 중국 연구팀에 의해 명명.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파충류도 아닌 거미의 일종임. 세 거미는 속명을 공유하지만 (Rathalos treecko의 경우 2022년 전까진 Anyphaena속으로 분류됐었음) 나무지기->나무돌이->나무킹처럼 직선적인 진화관계는 아님. 명명 이유는 단순히 나무지기같이 숲속에 산다는 이유로.



5. Alistra pikachu, Dicranocentrus pikachu, Epicratinus pikachu, Hiperantha pikachu <- 말해 뭐함


이 3종은 전부 다른 연구팀에 의해 명명됨.


Alistra pikachu는 거미인데, 앞서 4번 항목의 연구진이 동일 논문에서 명명함. (어지간한 포덕들이다.) 사유는 피카츄처럼 노랗다는 이유로. 사진은 없음.



Dicranocentrus pikachu는 톡토기의 일종. 이것도 그냥 노란색이라서 피카츄가 붙음.




Epicratinus pikachu 역시 거미. 2020년 두 명의 브라질 곤충학자들에 의해 명명. 사유는 암컷 개체 아랫배의 모습이 피카츄의 얼굴과 닮았다는 이유로. (나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Hiperantha pikachu는 딱정벌레의 일종인데, 윗날개의 색깔이 피카츄처럼 노란색과 검은색의 혼합이라서 그렇게 명명했다고 함.



6. Herduris dratini <- 미뇽(dratini), Parapharyngodon politoedi <- 왕구리(politoed)




이 두 종은 선충의 일종임. Parapharyngodon politoedi는 개구리를 감염시키는 선충이라서 왕구리를 딴 이름이 붙었음. Herdurius dratini는... 사실 논문 자체에서 포켓몬에 대한 언급은 없고 이름에 대해선 "두 개의 단어(dragon+tiny)를 임의로 합쳐서 만들었다"라고 써있긴 하지만, 그걸 믿는 사람이 어딨음?



7. Nocticola pheromosa <- 페로코체(pheromosa)



2016년에 발견되고 2023년에 명명된 바퀴벌레. 기다란 더듬이, 얇은 다리, 망토같은 날개 등 페로코체와 여러 면에서 유사함. 이를 명명한 싱가포르 곤충학자 마오쉥 푸는 스스로를 곤충을 잡으러 다니는 벌레타입 트레이너라 부를 정도로 상당한 포덕임.



8. Binburrum articuno, Binburrum zapdos, Binburrum moltres <- 프리져(articuno), 썬더(zapdos), 파이어(moltres)



호주에서 발견된 3종의 딱정벌레. 본래 Binburrum속은 100년 동안 5종만 발견됐던 드문 속이었는데, 2020년에 3종이 새로 발견됨. 명명자 왈 이 딱정벌레들은 잡기 어려운 전설의 포켓몬과 같아서 관동지방 전포들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함. 여담으로 이 분은 디지몬 이름을 딴 딱정벌레 (Demyrsus digmon) 도 명명한 바 있음.



9. Bulbasaurus phylloxyron <- 이상해씨(bulbasaur)



가장 재밌는 건 마지막으로 남겨둠.


Bulbasaurus phylloxyron은 중생대에 살았던 디키노돈트(dicynodont)의 일종임. 코끼리처럼 돋아나온 두 개의 이빨이 특징적인 파충류형 초식동물. (위의 상상화를 보면 쉽게 와닿을 거.) 크기는 다양하지만 Bulbasaurus phylloxyron의 경우는 두개골 길이가 16cm 정도로 중형 디키노돈트에 속함. 도감에 기록된 이상해씨의 크기와 꽤 비슷하다.


원래는 Tropidostoma속으로 분류됐지만, 21세기 초에 발견된 여러 개의 화석표본을 근거로 다른 디키노돈트류와 구분되는 종이 있다는 주장이 2017년 논문으로 발표됨. 새로운 속의 이름은 Bulbasaurus인데, 이는 다른 디키노돈트와 달리 Bulbasaurus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높고 둥근 (bulbous) 콧등뼈의 구조 때문...이라고 함. 포켓몬 이름이 아니고.


하지만 이게 과연 우연일까?


종명까지 잠깐 보자면 phylloxyron은 라틴어 phyllos(나뭇잎)와 xyron(자르다)의 혼합이라는데, 논문에서는 이를 "나뭇잎을 자르기에 적합한 턱구조"에 착안하여 이름붙였다고 함. 그런데 나뭇잎 자르기라고? 1세대 이래 렙업을 통해 배울 수 있었던 이상해씨 계열의 기술 중 '잎날가르기'를 연상케 하는 이름 아닌가?


이렇게 이상해씨와 이 생물의 연관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명명자인 크리스천 캐머러는 트위터에 한마디를 남김. 논문상으론 포켓몬과 관련이 없지만... 이런저런 유사점을 잡아내고 싶다면, 자기는 말리지 않겠다고.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