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알약은 비타민이다.
운동을 하거나 햇빛을 쬐러 밖에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약이다.
하얀색은 안정을, 파란색은 잠을 자게 해준다.

케이티는 그곳이 싫었다.
볼트로 고정된 침대, 열리지 않는 창문, 맛없는 급식.
그 중 최악은 '옛날 이야기'였다.
폭력으로 가득찬 같은 얘기만 반복해서 들었다.

케이티의 부모님도 제대로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좌절은 늘 있는거야... 어쩌고 저쩌고... 적정 궤도가 어쩌고 저쩌고... 경로를 따라가고 있다..."
아빠가 한 말이다.

"네가 여기 있는게 얼마나 행운인지 알았으면 좋겠구나.. 상황이 아주 많이 달라졌단다.."
엄마는 가끔씩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케이티는 문을 닫기 직전에 우연히 엄마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케이티를 낳지 않았을거야."

너무 놀라 굳어버린 케이티는 조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 날 밤, 케이티는 빨간색 약을 입에 넣었다가 화장실 변기에 뱉어버렸다.
마지막 점검 전까지 자는 척을 하던 케이티는 몰래 복도로 빠져나왔다.
운 좋게 마침 모두가 잠들어있었다.
잠금 장치가 풀려있는 컴퓨터 한 대를 찾아냈다.
그리고 화면에 떠 있는 문구를 보게 됐다.


우주선 뉴 메이플라워호
마지막 기록, 2224/01/04

연료는 동이 났다. 목적지까지 갈 수 없다.
지구는 여전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태이다.
우리들은 지구 탈출선에 유일하게 남은 승객이다.
프로토콜 레드999 시행 여부를 놓고 무기명 투표를 했다.
모든 탑승객은 안락사 약을 먹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줬지만 알려주진 않았다.
희망을 가슴에 품은 채 그렇게 살다가 죽게 해서 고통스러운 죽음은 피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류는 이로서 끝을 맞이한다. 사랑과 존엄과 함께.


케이티는 창 밖으로 그저 어둡기만 한 우주를 내다보고 변기물을 내렸는지 안내렸는지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