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찬바람이 몰래 섞인 4월의 봄, 시원한 경치 속 쭉 뻗은 도로를 달리는 내 자동차 두 바퀴는 지금 고향을 향해가고 있다.

" 아빠. 있지, 저번에 내가 말한 아싸 걔 있잖아! 이번에 조별과제 하는데 또 연락 씹는거 있지? 사람 짜증나게. "
 " 누구 얘기고? 성격 좀 삐리하다는 그 친구 말이가? "
" 친구는 무슨 친구야. 그냥 아싸라니까. "
" 아싸가 뭐고? "
" 아웃사이더. "
" 은따? "
" 비슷하네. "

학교, 대학, 군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세상 속 언제나 '은따'는 존재했다.
왕따, 고문관, 일못, 어떤 식으로 불려지든 꼭 한 명씩은 있었다.

딱히 잘못한 게 없더라도 은따가 될 수 있다.
은따로 낙인 찍힌 순간 생존 그 자체로 이미 잘못이 된다.
약점은 약점대로 물어뜯고, 약점이 없으면 괴롭힐만한 약점을 만들어주면 그만이다.
그 악행이 잘못인 줄 알고 있다면 사람들 중에 한 명이라도 나서서 그 고리를 끊어야 하겠지만 그런 영웅은 없다.
만약 있어도 내 이야기는 아니다. '그 시절'...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 듣고 있어? 우씨, 걔가 그렇다니깐? 완전 하는 일마다 밉상이야. 그따위니까 맨날 밥도 혼자 먹지. "
" 에이- 누가 잘 하고 못 하고 그런 문제를 떠나서 사람을 외롭게 하면 쓰나? 니라도 좀 잘 대해줘라. "
" 뭘 잘 해줘, 나만 주위에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건데. 아빠도 엄마 앞에서 상사 뒷담 맨날 하면서. "
" 그 얘기는 고마하자, 아무튼 비싼 등록금에 생활비까지 대주면서 서울에서 대학 다니게 해줬으면 남 일에
너무 열올리지말고 니 하는 공부만 열심히 해라. 최소한 니가 나서서 괴롭히지는 말고. 알겠제? "
" 당연하지, 나도 앞에선 아무 소리도 안 해. 걔한테 신경 쓸 시간이 있으면 잠이나 더 자겠다. "

그 말을 마지막으로 차 안에는 바퀴소리만 맴돌고, 핸드폰으로 뭘 보는지 깔깔 웃어대는 딸아이의 목소리가
창 밖의 고향 가는 경치에 겹치자 잊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던 옛 기억이 다시금 뇌리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2.

...

무찌르자 공산당-!

몇천만이냐 삼천만-!

대한넘어 가는 길 저기로구나-!

" 어? 누가 고무줄 짤랐노? "
" 으헤헤, 메롱메롱- 약오르제? "
" 야! 니 진짜 선생님한테 다 말할끼다! "
" 말해봐라매, 말해봐라! 우르르~ 약오르제! "
" 저 새끼가 진짜! "

여자아이들이 뛰놀던 고무줄을 끊어놓고 도망가는 땅꼬마,
처음 저지른 일이 아니었기에 참다 못한 한 아이가 쫓아가려했지만 나머지 아이들이 되려 말렸다.
그리곤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멀찍이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낄낄거리던 우리를 향해 힘껏 소리 질렀다.

" 유대준 전민재 박상우! 다 느그가 시킸제? 나쁜 놈들아, 느그들이 그러고도 머스마가? 꼬추 떼라! "
" 닥치라! 우리가 안 시킸그든! 가스나들아! "

일은 땅꼬마가 저질렀지만 사주한 쪽은 우리 3인방이라는 걸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멀리 한 바퀴를 돌고 돌아 땅꼬마는 우리 앞에 도착했다. 가쁜 숨을 헉헉대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형석이, 우리가 갖고 놀다시피 하는 녀석의 이름이다.

" 헥헥, 대준이, 내 잘 했제. 성공이제. "
" 마, 장난하나? 아이스께끼는 왜 안 하는데. "
" 아 맞다.. 아이스께끼.. 미안. "

대준이는 우리 3인방의 우두머리로, 동네에서도 골목대장을 하며 넘긴 달력이 몇 장씩이나 되는 녀석이었다.
키도 덩치도 중학생 수준이라 웬만한 남자애들은 대준이 앞에선 우물쭈물 말도 제대로 못 하기 일쑤였다.
민재는 눈치가 빠르고 영악한 면이 있어서 부족한 덩치를 대준이 옆에 붙어다니는 걸로 만회하는 놈이었고,
나는 대준이와 어릴 적부터 친했던 터라 남자들끼리의 서열 경쟁에서 운좋게 빠져나와있는 놈이었다.
같은 학교면서 한 동네에 사는 우리였으니 매일 어울려노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나 문제는 놀 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여름엔 멱 감고 겨울엔 썰매를 끌며 온갖 놀이를 하고 또 하다보니 학년이 올라갈수록 재미가 뚝 떨어졌다.
그러다 재미를 들인 것이 바로 형석이 괴롭히기,

일명 '마루타 놀이'였다.

" 가만히 있어라, 움직이면 두 대다. 알았나. "
" 미안, 진짜 미안, 함만 봐주라.. "
"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러다 눈 맞는다. "

여름이면 땟국물이 줄줄 흘렀고, 겨울엔 무릎과 팔꿈치 밑이 하얗게 피어올라있던 형석이.
머리엔 커다란 땜빵이 있고 사이사이 이가 살고있던, 길에 떨어진 사탕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주워빨던,
모두 어렵고 배 굶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이 혀를 끌끌 차는 살림살이 아래에서 자라던 형석이.

" 민재! 상우! 임마 잡아봐봐. "
" 대준이- 아이스께끼 잘 할게, 미안, 미안- "

딱,딱,따악-
아파서 고개를 이리 돌려도 한 방, 저리 돌려도 한 방, 한 방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어른이 맞아도 아플 딱밤이 몇 번씩이나 날아들었다. 기어코 눈물이 터졌다. 빨리 운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우리는 울 때까지 때릴 셈이었다.

" 으허억- 끄윽. 끄윽. "
" 마. 어른들한테 고자질 하면 뒤진다. 알았나. 쳐울지마라. 머스마가 그것도 못 참나? "

울리려고 때려놓고 울면 그치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게 떳떳하지 못 한 일인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생각은 없었다.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단지 선생이나 어른들에게 들키면 혼나기 때문에 몰래 갖고 놀아야하는 긴장감 있는 놀이일뿐.

형석이는 울며 온몸을 들썩였지만 양옆에서 단단히 붙잡고 있었기에 우리로부터 벗어나지 못 했고,
몇 번을 더 꿈틀대다 대준이에게 멱살을 잡히고서야 힘이 빠진듯 늘어졌다.

여전히 울고 있었지만 소리는 속으로 삼켰다.

이 이상 대준이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딱밤이 아니라 주먹이 날아온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3.
시간이 제법 흘러 어느덧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또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곧 해가 자취를 감추면 마을 곳곳에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겠지만 형석이네와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진작에 집을 나가시고, 술주정뱅이가 되어버린 아버지와 형석이 단둘이 사는 형석이네.
그나마 마을 토박이로 자라며 이 집 저 집에 쌓아온 공덕이 있어 아예 외면받지는 않았기에 마을 사람들이
곡식철이면 곡식에, 김치 담근 날엔 김치, 아버지와 아들내미가 굶어죽진 않을만큼 슬그머니 밀어넣어줬고,
그렇기에 담장 너머로 형석이네 집을 훔쳐보면 김치며, 나물을 척척 올린 밥숟가락을 입이 미어터져라
쑤셔넣곤 쩝쩝대는 형석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도 눈칫밥 먹어가며 학교 다니는 마당에 밥 짓는 연기 하나 피어오르지 않는 집에서,

동네에 밥을 빌어먹으며 돈까지 받아 같은 학교에 다니는 형석이였기에 우리가 더욱 괴롭혔는지도 모른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 집만해도 여태껏 그 집에 갖다준 반찬거리가 부식으로 치면 고기 한 근 값어치는 했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밥 시간을 앞두곤 형석이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비록 빌어먹는 집이라 욕할 지언정,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한 한 끼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었을까.
밥 한 술 뜬다는 게 얼마나 신성한 행위인지 누가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꼬르륵거리는 배꼽이 말해주는 시대였다.

논둑 앞에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는 우리 앞으론 그렇게 얼마간의 평화를 허락받은 형석이가
혼자 신난 채로 논두렁을 헤집고 있었다. 혼자 하는 공기놀이가 끝난 뒤론 갑자기 우렁이를 잡겠다더니
젖기는 싫은 모양인지 바지를 훌렁 벗어던지고 고추를 덜렁거리며 물 위를 찰박찰박 뛰어다녔다.

" 점마 저게 냅두니까-.. "
" 대준이, 참아라. 저녁이다이가. "

내 만류에 대준이는 혀를 쯧쯧 차며 자리에 앉았지만 막상 그러고나니 이번엔 내가 심심함을 견딜 수 없었다.
재밌을만한 게 어디 없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솜털 같은 씨앗이 바람에 실려 날아다니고 있었다.
무심코 손으로 잡는 순간 굉장히 간질간질한 느낌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화들짝 놀라 손을 흔드니 씨앗은 어느새 날개를 모두 잃고 아주 얇은 도깨비풀 같은 모양이 되어 땅으로 떨어졌다.

" 으앗, 이기 뭐꼬! "
" 와? 와? 뭔데? "
" ... 어데서 날라온거지? "

영문을 모르는 표정의 대준이와 민재를 놔두고 씨앗이 날아온 방향으로 땅을 살피며 천천히 걸어가보니
드문드문 민들레를 닮은 독특한 씨앗이 자라있는 걸 발견했다.

" 대준이! 민재! 와봐! 이거 민들레가? 아이제? "
" 민들레 아이네. 잎이 빨갛다이가. "

조금 전 겪었던 기묘한 느낌을 아무리 설명해도 '에이' 하는 녀석들의 반응에 발끈한 나는 씨앗이 달린 줄기를 꺾어든 뒤

발가벗은 채 우렁이를 찾아다니고 있는 형석이를 향해 있는 힘껏 씨앗에 대고 바람을 불었다.
후우! 그러자 내가 봤던 씨앗과 똑같은 씨앗들이 저마다 날개를 달고 형석이의 맨등으로 날아갔다.

" 으힉! "

형석이는 허리를 활처럼 튕기며 제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했다.

" 봐라! 내 말 맞제? "

으쓱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우와 진짜였네'하고 나를 추켜세워주긴 커녕 녀석들은 배를 부여잡고 푸하하
한바탕 웃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곤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씨앗을 하나씩 꺾어왔다.

" 후우-! "
" 푸후우-! "
" 푸푸푸우! "

" 으갸악, 으햐햐! "

무너질 모래성을 하루종일 쌓고 부수는 게 아직까진 놀이가 되는 나이의 우리였기에,

씨앗을 불면 기묘한 웃음을 흘리며 춤을 추는 광경은 충분히 우리에게 재미를 가져다주었다.

어느새 나도 씨앗의 기묘한 느낌을 보여주기 위해 형석이에게 불었던 처음의 목적을 망각한 채,

형석이의 그러한 반응 자체를 즐기기 위해 씨앗을 따오고 있었다.
제일 많이 부는 사람이 오늘의 영웅이라도 될 것처럼 우리는 곳곳에 있던 씨앗을 모두 가져다 불었다.

" 야! 민재! 상우! 내 봐봐! "

호기롭게 외치는 대준이를 쳐다보니 언제 그리도 모았는지 열 송이도 넘게 씨앗을 따와선,

" 하압- 우푸푸! "

마침 논두렁 쪽으로 쌀쌀하게 불어주는 바람을 타고 씨앗이 날아가 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양이 달라붙었다.
형석이의 등에 마치 모자이크를 해놓은듯 온통 도깨비풀 같은 씨앗이 달라붙어있었다.

" 으히이잇! 으햐아! "

그 모습에 대준이가 으쓱거리자 민재와 나도 '기다리봐!'하곤 한 번에 더 많은 양을 불기 위해 채집에 나섰다.
그때 이미 해는 저물어 고개를 거의 땅에 쳐박지 않으면 씨앗을 찾기 힘들 정도로 어둠이 깊었다.

" 전민재! 니 밥 무러 안 오고 여기서 뭐하노! "
" 어, 엄마.. "
" 빨리 안 오나! "
" 대준이, 상우, 내 갈게.. 내일 보자. "

... 열다섯개 한 번에 불기를 목표로 손에 모으고 있던 세 송이를 땅에 버리고,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이미 달이 노랗게 떠있었다.

그제서야 두려움이 밀려왔다. 밥 짓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먹고 치웠을 시간이다.
혹시 우리 엄마도 날 찾으러 오신 건 아닐까, 주위를 둘러보니 그새 더 높아진 달이 논둑을 비췄다.
처음엔 드문드문 보이는 수준이던 씨앗이 아예 찾기 힘들 지경이 되어있었고,

그 와중에 보이던 한 송이는 대준이가 뚝 끊어가버렸다.

" 야, 대준이, 우리도 인자 집에 가자. "
" 이것까지만 불고. "

내 두려운 마음과는 달리 대준이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했다.
몇 마리 잡지도 못한 우렁이를 손에 든 채 어디 놔뒀는지 모를 바지를 찾아다니는 형석이에게 마지막 씨앗이 날아갔다.

" 히이익-! "

달빛 아래 춤추듯 경련하는 그림자가 일으킨 물장구가 방울마다 빛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 아..! '

그제서야 보는 내가 따끔할 정도로 처참한 형석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름이 끼쳤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 때,

" 야이 자식아, 지금이 몇 시인데 놀고 있노! 어! "
" 어무이, 그게 아니구요.. "
" 아니긴 뭐가 아이라! 집에서 걱정한단 생각은 안 하나? 이 자슥아, 어! "

회초리까지 들고 오신 어머니께 매질 세례을 받으며 대준이에게 안녕 한 마디 하지 못 하고 집으로 끌려갔다.
그 무거운 발걸음 때문에 형석이를 향한 걱정은 금새 불씨도 없이 꺼져버렸다.
수 백, 어쩌면 수 천 개의 씨앗이 달라붙었을 남의 아픔보단 방금 맞은 회초리로 인한 내 아픔이 더 아팠으니까.


4.

" 시간도 못 지키는 놈이 후에 커서 지랑 즈그 새끼 밥그릇은 우째 지킬라고 그라노! "

어머니께 맞은 종아리가 퉁퉁, 울다가 부은 눈도 퉁퉁,

그 꼴로 지청구를 먹어가며 찬밥을 먹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묵묵히 계시던 아버지께선 어머니를 만류하셨다.

" 고마 해라. 머스마가 한참 설칠 나이 아이가, 너무 나무라지마라. 얼라 기죽는다. "
" 그라믄 당신이 뭐라고 좀 하소. "
" 알긋다. 어데서 놀았는가 몰라도 아가 거지꼴이네. 씻김시로 내가 잘 말할구마. "

아버지 덕에 혼은 더 이상 나지 않았고, 흙을 묻혀온 터라 아버지께선 따뜻하게 데운 물에 목욕을 손수 시켜주시며
시간 약속의 중요성에 대해 천천히 읇어주셨다.

머리에 부어주시는 물 속에 몰래 눈물도 따라보냈다.

목욕을 마치고 아버지께서 내 몸의 물기를 닦아주시던 중에,

" 이게 뭐고..? "
" 와예? "
" 가만히 있으봐라. "
" 앗 따거! "
" 상우야, 이기 뭐고? "
" ... 어라? "

형석이에게 불던 씨앗이다.

" 조심하면서 놀아라. 어째 놀길래 도깨비풀이 맨살에 붙어가 들어오노. "
" 예. "

아버지 몰래 거울 앞에 서서 살피니 어깻죽지에 아주 조그맣게 동그란 자국이 남아있었다.
아직 따끔거리는 부분을 더듬거리니 무언가 손가락에 닿는 느낌이 들어 살을 주물거리니 꼬불꼬불한 흰색 돌기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 ... "

끝까지 당겨보니 새끼손톱만한 길이다.

" 으, 씨바.. "

대충 바깥에 버리곤 일찍 이부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통 오질 않았다.

' 그럼 형석이는..? 형석이는.. '


5.
형석이가 결석했다.
웬일로 형석이 아버지로부터 학교에 전화가 와서 형석이가 아파서 학교에 못 온다고 알리셨다며

담임 선생님께서는 급우들에게 무언가 아는 일이 없냐고 물어오셨다.

모두 알 턱이 없어 한 목소리로 '아니요'라고 했지만,
오직 나 혼자만 마음 속으로 무언가 찝찝한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

민재와 대준이는 아예 씨앗이 원인일 거라곤 짐작조차 하지 않는듯 오히려 '이 자슥 꾀병이네'라며 투덜대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대준이에게 다가가서 형석이 집에 가보자고 권했지만 대준이는 싫어했다.
보통 술에 절어있던 형석이 아버지로부터 몇 번 곤란을 겪었기에 그런 거겠지.
거듭 부탁하자 대준이도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금마 그거 꾀병일기다. 어제까지 설치던 놈인데. 오늘 함 가보자. 꾀병이면 그냥은 못 넘어간다. "
" 고맙다, 대준이. 근데.. 니 어제 씨앗 혹시 달라붙거나 그런 거 없었나? "
" 내? 내는 안 붙어있던데. 나도 한 번 내한테 불어볼걸 그랬네. 내도 좀 궁금했는데. 근데 와? "
" 아니다. 마치고 형석이 집에나 가보자. "
" 뭐고? 새끼.. 알았다. 민재한테도 가자고 말해놔라. "

학교를 마치자마자 우리 3인방은 각자의 집에도 들리지 않고 곧장 형석이 집으로 향했다.
엎드린 대준이 등 위를 밟고 올라서서 담벼락 너머 형석이네 집을 들여다봤다.

- 하하하핫- 우히히 !

" 야, 형석이 점마 웃는 소리 들린다. "
" 맞제? 낸 한참전부터 듣고 있었다. 봐라, 꾀병 맞다이가. "

마루 앞에 놓여진 신발을 살피니 형석이가 신고 다니는 다 떨어져가는 싸구려 고무신 하나뿐.
내 첩보를 신호탄 삼아 한 명씩 차례로 담을 넘은 뒤 형석이네 마당으로 내려섰고,
형석이의 웃음소리를 따라 미닫이식 문 앞에 살며시 도착했다.
혹시 알아채면 꾀병을 부릴까 싶어 기척을 숨긴 채, 우리는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형석이의 웃음을 듣고 있었다.


' 하나! 둘! 셋! '

숫자 셋을 셈과 동시에 문을 탁 소리가 나도록 세게 열었지만 이불 속에 들어가있는 형석이는 고개조차 내밀지 않았다.

" 이 자슥아, 학교 땡땡이 치니까 웃음이 실실 나오나? 이불 속에 숨는다고 못 찾을 거 같나, 니 바보가? "
" 힉,힉히힉! "
" 마, 돌았나? 쳐웃나? "

윽박에도 비웃듯 웃음을 날리는 형석이에게 잔뜩 화가 난 대준이가 단숨에 이불을 걷어차버렸다.

" 으아악! 씨팔! "

그와 동시에 우리 세 명은 욕을 내뱉으며 방 모서리로 달아났다.

" 혀, 형석이.. 니.. 괜찮나? 니 진짜 아픈거였나? "
" 하악, 학-..! 대..주이.. 밍..재.. 사아..앙..우.. "
" 야, 괜찮나? 아프면 말하지 마라! "

그렇게 말하면서도 셋 중 어느 누구도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 했다.
발가벗은 채 이불에 누워 끙끙 앓고 있는 형석이의 전신에 흰 돌기가 길쭉하게 튀어나와있었다.
다닥다닥, 팽이버섯 같기도 하고 콩나물 같기도 한 뿌리가 씨앗의 자리를 대신해 몸밖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 호.. 혹시 저거 씨앗 때문 아이가? "

민재의 말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학, 학! 끄윽, 끅, 하학!.. "

눈은 감아도 귀는 닫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귀를 틀어막아도 소리는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하하하' 웃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건 넘어가는 숨을 간신히 붙잡고 힘겹게 사투하는 형석이의 비참한 숨소리였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눈이 튀어나올듯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그 순간을 넘기면 몸에 진이 빠져버렸는지 창백해진 채 내쉬지 못 했던 숨이 급히 튀어나오는 소리,


'하악! 하악! 하악!..'

" 학- 학! 살려줘, 살려줘! "
" 야.. 조금만 참아봐라! "

살려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괴롭히고, 때리고, 울려도 들을 수 없었던 말을 하고 있었다.
울상을 지은 채 우리는 아직 뿌리를 내리지 않은 도깨비풀 형태의 씨앗을 손으로 집어 떼내기 시작했지만
이미 등에서 자라난 돌기가 서로 얽히며 살과 살 사이를 뚫고 이리저리 튀어나와 있었다.

" 이, 이건 어떻게 안 되나? "

민재가 살에서 나와 다른 살을 뚫고 바느질하듯 얽혀있는 뿌리 몇 개를 집어 떼내어 보려하자,

" 갸아악! "

끓는 소리를 내며 형석이가 몸을 비틀었고 그 완력에 우리 셋 모두가 뒹굴었다.
보통 기운으론 낼 수 없었을 힘이다. 평소에 이정도로 힘이 셌다면 우리 중에 누구도 형석이를 괴롭힐 수 없었다.

" 학, 하악! 하악.. 켁.. 살려..줘.. "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경련과 고통,

그 순간에도 자라나고 있을 꼬불꼬불한 돌기들,


이번만큼은 어른들에게 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듣는 이의 귀를 긁어대는 비명과, 그 뒤에 이어지는 신음에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6.
있는 힘껏 달려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보니 저녁이 깊었다.
하지만 동네 어디서도 밥 짓는 연기는 피어오르지 않았다.

발 없는 소문이 벌써 돌고 돌아 마을 사람 모두가 형석이네 집에 모여있었다.

잔칫날에도 이만한 인파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

" 아아악- 죽여줘-, 죽여줘어어! "

살려줘, 살려줘, 하던 형석이가 언제부턴가 그냥 죽여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이다.
살고 싶은 마음이 들어가버릴 정도의 고통이란 어떤 것이란 말인가.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은 얼마나 괴로워야 나오는 감정인가.
돌기는 갈수록 빨리 돋아나서 이제 전신이 하얗게 덮혀있었다.

" 형석아, 아파도 참그라! 니 낫고자 하는기다! 조금만 참아라! "

목공소 아저씨가 들고온 톱으로 형석이의 전신을 휘감은 뿌리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갈아내는 소리와 함께 흰 돌기들이 땅바닥에 쏟아졌지만 동시에 형석이도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 끄아아악! 아파-! "

돌기가 안과 밖으로 자라 근육과 내장을 잡고 있기에 돌기가 받는 충격이 그대로 살과 뼈에 전해졌던 걸까.
형석이는 괴성을 지르며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그 표정을 읽을 순 없었다.

이미 얼굴마저도 뿌리에 완전히 감겨있었다.

언제부턴가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형석이로부터 떨어져나온 조각들을 만져보곤 완전 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 아가 와 소리도 없노? 맥을 짚어야된다! 김씨, 여기 좀 쳐내봐라, 맨살이 보여야 맥을 짚지! "
" 알겠심더, 아이고.. 형석아! 들리면 들린다고 말 좀 해봐라, 정신 차리라! 아가! 형석아! "

목공소 아저씨가 형석이의 팔에 붙은 돌기를 잘라내며 계속 말을 걸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마 모두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 아가 와 이라노.. 우짜믄 좋노.. 누가 이랬노.. 어느 천벌 받을 놈의 짓이고.. "

한 할머니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내 고개는 절로 숙여졌다.
누가 그랬을까.
끝까지 형석이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우리가 친구라서? 아니면 그런 이야기조차 꺼낼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그러나 이미 답을 얻기엔 늦었다.


" …… 죽읏다… 가뿟다…. "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관세음보살 소리 속에서 형석이는 고요하게 누워있었다.

" 얼라들은 저런 거 보는 거 아이다. "

어머니께선 형석이의 주검을 바라보던 내 눈을 가리셨다.

' 어무이.. 저는 다 봤어요.. '


7.
형석이의 주검은 어른이 들어가는 크기의 관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결국 주검을 몇 번씩이나 깎아서 최대한 사람 모양을 갖추게 한 다음 관에 넣었지만
어른들이 관을 지고 산으로 올라갈 적엔 또 다시 뚜껑이 불룩히 솟아오른 느낌이 들었다.

그 뒤 소문을 통해 들은 소식으론 형석이 아버지는 형석이를 산에 묻으러 가는 길에 나타났다고 한다.
다만 산 채가 아니라 나무에 목을 매단 채로 나타났다.

하루 앞 뒤로 그렇게 형석이네 부자는 세상을 떠났다.


8.

" 으히히히! "

… 딸의 웃음소리에 기어코 또 떠올려버렸다.

이미 삼십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너무 선명해.
잊자, 제발 잊어버리자. 이미 끝난 일이다.

" 시골 다 왔는데 이상한 거 그만 보고 할머니한테 전화 한 번 해봐라. "
" 할머니? 알았어. "

점점 고향 마을에 가까워지고 있다. 조금 마음이 누그러진다.
정든 풍경이다.. 굳이 그런 일들 말고도 추억할 거리는 얼마든지 있어.
그 날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자.

" 아빠, 할머니 전화 안 받으시는데? "
" 할아버지한테 해봐라. "
" 두 분 다 안 받으셔. "
" 밭에 가셨나.. "
" 근데 아빠 지금 보니까 우리 시골 경치 진짜 좋다- "
" 도시랑 틀리제? 이런 곳이 진짜 물 좋고 공기 좋은 곳 아이가. "
" 대박, 진짠가봐~ 공기가 틀리긴 틀린건가? 아빠 저기 산에 봐봐! 4월인데 눈 쌓인 거 봐! 완전 스키장이야! "

딸의 말에 운전하느라 신경도 쓰지 않았던 뒷산을 힐끔 쳐다보자 과연 산이 계절을 잊은듯 아직 새하얗다.

" 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다른 곳엔 눈 온 데 없던데.. "
" 우와- 차 좀 세워봐, 아빠! 사진 하나 찍고가요! "
" 그래라, 올해는 눈 보기 힘들었는데 4월에 눈을 다 보네. "

사진을 찍자는 딸의 말에 겸사겸사 멀리서 고향 경치도 미리 보고 들어갈 겸 차를 세웠다.

" 후아- 공기 좋고! "

기지개를 켠 뒤 카메라로 몇 장씩이나 계속 사진을 찍는 딸 옆에서 담배 한 개피를 물려는 순간,
하하하..

'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

하하하ㅡ!

' 어디서 잔치라도 하는 모양이지. '

하, 하, 학!

' …!! '

순간 손이 떨려와 담배를 놓치고 말았다.

" 사진 그만 찍고 차에 타라! 빨리! "

- 학, 학, 히힉, 학, 학…!

" 왜에! 아빠 담배 벌써 다 폈어? 좀 기다려봐- "
" 타라고 안 카나! 빨리 타라! "
" 우씨, 아빠가 찍어도 된다며! 말이 왜 틀려? "

자초지종을 설명할 겨를도 없이 딸을 차에 태우고 난 뒤 마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고, 전염되듯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웃는 소리가 아니다. 분명하다.

- 힉, 히익, 학, 하학, 으하악-!

마을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비로소 소리의 정체가 명확해졌다.
이 소리는 형석이가 내던 절규다,

생과 사에 반쯤 걸친 채로 차라리 죽기를 소원하던 그 절망이다!
흡사 웃는 소리처럼 들렸기에 더욱 비참했던 죽음의 소리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와 서있기 힘들었다.
순간 차 문이 벌컥 열리더니 딸이 튀어나왔다.

" 아빠, 이것 좀 봐! 눈 오는데? "

4월.. 맑은 날에.. 눈..?
아니.
이건.. 눈이 아니야.
'씨앗'이다!

" 차에 들어가라고 안 하드나! "

딸을 밀치듯 좌석에 앉히고 문을 닫은 뒤 최대한 빨리 운전석으로 돌아와 시동을 걸었다.
궁시렁거리며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는 딸의 카메라를 빼앗아 급히 뒷산을 확대했다.

" … 이기 뭐고. "

뒷산은 눈에 덮혀있지 않았다.
뒷산을 하얗게 덮고 있는 건 거대한 뿌리,
형석이의 몸에 자라나던 뿌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한 뿌리가 산을 집어삼킨 채
씨앗비를 뿌리고 있다.

수 천만? 아니, 수 억? 가늠할 수조차 없는 씨앗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형석이를 괴롭히던 우리 3인방이 형석이 등 뒤로 씨앗을 후후 불어대던 그 날 처럼,
형석이가 묻혀있는 저 산이 세상을 향해 똑같은 씨앗을 바람에 실어 후후 불어대고 있다.

"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나도 모르게 어릴 적 형석이 집에서 들었던 할머니들의 불경을 따라하며 후진을 시작했다.
벗어나야 한다…! 세상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 으히익! "

순간 딸이 웃었다.

아니.

'형석이'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