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얀데레
어느 날 갑작스레 들려온 노크소리에 문을 연 남자는 놀라고 말았다.
“도와…….”
문 앞에서 웬 소녀가 울고 있었으니까.
움츠러든 어깨와 꽉 쥔 주먹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심상치 않다.
더구나 개목걸이처럼 착용한 가죽 초커에는 ‘캬루’라는 이름이 선명히 새겨져 있어 이질감이 배가 되었다.
남자가 잠시 당황하는 사이, 수인 특유의 고양이 귀를 푹 숙인 채 울먹거리던 캬루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게워내듯 말을 이었다.
“도와주세요…….”
말의 끝자락에 아주 희미하게 ‘제발’이라는 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무엇이 이 소녀를 이리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을까. 의문 속에서 천천히 시선을 내리던 남자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왜인지 캬루가 입고 있는 옷의 이곳저곳이 훼손되어 있었다.
가슴 언저리가 찢어져 속살이 드러나 보이고, 치마 부분은 거의 뜯겨나가다시피 하여 그리 공들이지 않아도 소녀가 무슨 팬티를 입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의복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옷을 입고 도시의 외곽까지 온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지만, 캬루가 무언가 위험한 일에 휘말렸다는 것 정도는 인지할 수 있었다.
적당히 선량한 삶을 살아오던 남자에게 있어서 눈앞의 불의는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캬루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몰라 주변을 살피던 남자가 캬루의 어깨를 꼭 붙잡고 잡아당겼다.
“들어와. 어서.”
듬직한 목소리에 이끌린 캬루가 남자의 집에 들어선다.
남자는 캬루를 의자에 앉힌 다음 따스한 차와 음식을 내오며 상황 설명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캬루는 말할 수 없다는 듯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어깨를 가늘게 떨 뿐이었다.
이래서야 더 물어봤자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동안 우리 집에서 머물러도 돼. 말하고 싶어지면 그때 말하렴.”
남자의 인정에 캬루는 눈물을 훔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 *
뜬금없이 객식구가 한 명 늘어나버렸지만 남자는 캬루에게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었다.
따스한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삼시 세끼 밥을 먹여주었으며, 시장에 나가 캬루에게 맞는 옷을 사와서 선물해주었다.
그러며 남자는 자신의 딸아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한테 너만 한 딸이 있는데 지금 대도시인 랜드솔에서 열심히 기사과정을 밟고 있단다. 아마 조금만 더 노력하면 정식 기사가 되어 황제 폐하를 보좌할 수 있을 거야.”
황제 폐하라는 말에 캬루의 어깨가 움찔 떨려간다.
허나 남자는 그 미약한 반응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좋은 세상이 왔지. 패동 황제가 물러나고 적법한 후계자이신 유스티아나 황제께서 즉위하셨으니. 이제 세상에는 평화가……?”
남자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안정을 되찾아가던 캬루의 손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얘야. 어디 아프니?”
걱정되어 묻는 말에 캬루는 애써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아무것도…….”
내일 나갈게요. 내일, 나갈게요. 심호흡 끝에 병적으로 중얼거린 캬루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캬루가 왜 저러는 건지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 *
새벽.
“끄아아악!”
소름끼치는 비명소리에 캬루의 눈이 번뜩 떠진다.
창가에서 흘러들어오는 달빛이 사색이 된 캬루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캬루는 저도 모르게 벌벌 떨다가 침을 꿀꺽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해야……?’
혼란으로 점철된 머릿속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든다.
열린 창문 너머로 도망칠까 싶었지만 그래서야 저 비명소리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게 된다.
아무리 공포스럽다지만 캬루는 남자의 따스함을 배반할 순 없었다.
울먹거리며 한발 한발 내딛던 캬루가 방문의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손을 비튼다.
끼이익…….
이윽고 열린 문틈으로 캬루가 얼굴을 들이밀며 떨리는 가슴을 꾹 붙잡았다.
“폐하…… 어, 어째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잘린 손목을 억척스럽게 붙잡은 채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무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앞에서 금의를 입은 페코린느가 웃는 낯으로 제식 장검을 늘어뜨린다.
금의에 매달린 온갖 장신구들이 달빛을 머금어 은연중에 빛을 발한다.
“그 손으로 캬루의 몸을 더듬었을 테니까요. 저는 불경한 짓을 저지른 자를 가만히 목도할 정도로 인자한 사람이 아니라서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저는 맹세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페코린느가 장검을 역수로 붙잡아 내리찍었다.
푹!
피가 튀고 남자의 몸이 활어처럼 펄떡인다. 남자가 핏발 친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페코린느의 발목을 붙잡았으나,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짓이었다.
“잘도 거짓말을!”
페코린느가 다시금 장검을 내려찍는다. 한 번, 두 번, 세 번. 장검이 남자의 등을 연이어 꿰뚫을 때마다 핏물은 좀 더 거세게 터져 나왔으며, 비명소리는 옅게 희석되어갔다.
페코린느의 발목을 붙잡은 남자의 손이 태양을 맞이한 꽃봉오리처럼 스르르 펼쳐지고,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는 삶에 대한 미련이 점차 사라져갔다.
그럼에도 페코린느는 남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말란 말이에요!”
쿵!
힘주어 내려찍은 장검이 남자의 등을 박살내고 마룻바닥을 꿰뚫는다.
거칠어진 호흡이 페코린느의 입술을 통해 한기가 되어 퍼져 오른다.
이제 육편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남자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페코린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공포에 질려있는 캬루의 시선과 페코린느의 권위어린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친다.
짧은 침묵 끝에, 캬루를 발견한 페코린느의 눈매가 매력적인 호선을 이루었다.
거기 있었구나.
입술을 작게 달싹인 페코린느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캬루는 놀라 딸꾹질을 흘리면서도 문을 닫을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눈앞에서 남자가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해버린 탓에 사고가 마비된 탓이다.
캬루는 그저 두려웠다. 페코린느의 저 광기어린 집착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그래서 바보처럼 가만히 서 있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공포에 짓눌러진 몸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캬루!”
성큼성큼 다가온 페코린느가 문의 손잡이를 붙잡고 거칠게 밀친다.
“힉!”
페코린느의 완력에 당해내지 못한 캬루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몸을 떨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호흡이 단락처럼 끊겨서 쉬어진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목을 옥죄어오는 느낌이었다.
“죄, 죄송, 죄…….”
말이 나오다가 무너진다. 끔찍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짧은 문장조차 완성시키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페코린느는 그런 캬루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녹음을 닮은 캬루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려간다.
“캬루.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피 묻은 얼굴에 사나운 미소가 번져나간다.
“죄소, 죄송…….”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러 온 게 아니잖아요. 바보처럼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죄송해…… 해요…….”
“이런. 제가 너무 겁을 줘버린 걸까요?”
걱정스러운 낯으로 캬루를 바라보던 페코린느가 손을 들어 캬루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캬루쨩. 다시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말하셨잖아요. 저는 그걸 믿었는데……. 또 배신인가요?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저도 정말 참을 수가 없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게, 불편한 게 있으면 뭐든 말씀해달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캬루쨩은 제 배려를 모두 무시하시고서 도망가고 말이에요. 그건 정말 슬프답니다.”
눈가를 닦던 손이 스르르 내려가 캬루의 뺨을 움켜쥔다.
“다시는 저를 슬프게 하지 말아요.”
손은 계속해서 내려가, 캬루의 목덜미를 살며시 움켜쥐었다.
“저는 유스티아나 폰 아스트라이아.”
랜드솔의 유일무이한 황제.
“그러니 도망치는 건 단념하시길.”
페코린느가 천천히 상체를 숙인다. 윤기어린 머릿결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고, 둘 사이의 거리가 점차 좁혀진다.
페코린느는 캬루와 가슴을 맞댄 상태에서 고개를 숙여 캬루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
“히윽……!”
흐느낌 속에서 묘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페코린느가 캬루의 귀에다 대고 조곤이 속삭였다.
“이 세상에서 당신이 도망쳐 살 수 있는 곳은 없답니다.”
희망을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말에 캬루의 눈동자가 무채색으로 물들어간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캬루를 애정어린 눈빛으로 지켜보던 페코린느가 캬루의 뺨을 붙잡고 불시에 입을 맞추었다.
“흐, 읍……!”
저항할 의사마저 없어져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게 고작.
서로의 입술이 비벼지고 혀가 뒤섞이는 동안 비릿한 혈향이 올라온다.
“하아…….”
잠시간의 입맞춤 끝에 고개를 든 페코린느가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더는 제게서 떨어지지 말아요. 캬루쨩.”
“아, 으…….”
서늘한 시선이 두렵다.
정박아처럼 신음을 흘리던 캬루는, 망석중마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원본
https://m.dcinside.com/board/purikone_redive/4446991?recommen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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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룽 노루룽
갤펌) "캬루쨩, 망가져버린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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