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는 지옥에 갔는가?


 

 

0.문제의 제기

 

 배신자의 가장 전형적인 아이콘을 꼽으라면 아마 서양인의 관점에선 두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자신을 키워준 양아버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e Caesar)를 살해한 부르투스(Burtus) 일 것이며, 또 하나는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인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이라는 헐값에 팔아 넘긴 가룟 유다(Iscariote Jude)일 것이다. 가장 자신과 친밀한 위치에 있었던 자들을 적의 손에 넘겨주었던 사상 최강의 배신자들 중에서 가룟 유다에 관하여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단테의 『신곡』에서 표현하기를 가룟 유다는 지옥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거기서 가룟 유다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로 지옥 중 가장 깊은 지하 9층의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다. 꼭 단테 신곡이 아닐지라도 보통 신자들이 생각하는 가룟 유다에 대한 관념은 영영 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임에 틀림없다. 어떻게 자기 스승을 노예의 값어치에 해당하는 은화 30개에 팔아 넘길 수 있는가? 아니 그 이전에, 인류를 구원하러 온 구세주를 팔아 넘겨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자들의 눈에 있어서는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죄인임에 틀림없는 것이며, 이런 끔찍하고 패륜적인 죄를 저지른 가룟 유다가 지옥에 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반적인 신자들의 통념과는 반대로 가룟 유다가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가룟 유다의 존재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가능하게 했다고 하는 가룟 유다의 ‘역할’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새로운 관점이 제시된 것이다. 그러한 기존의 통념이 최근 반전되었던 것의 시작은 66장의 파피루스 때문이었다.

 

1.유다복음

 

 1976년 이집트의 Al Minya 인근 사막의 어느 동굴에서 한 농부에 의해 66장의 파피루스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콥트어로 쓰인 이 파피루스 문서는 동굴을 나온 이후 30년동안 세계를 떠돌며 여러 수집가들과 문화재 밀매꾼들의 손을 왔다갔다 하다가 이후 한 스위스의 골동품 수집가에 의해 정식으로 고고학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 복원 조사 과정에서 아주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이 66장의 파피루스가 교부 이레니우스가 『이단 논박』에서 거론하였던 ‘영지주의적인 이단의 책’ 유다복음이었던 것이다.

 전통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지도 모르는 이 책의 내용은 일반적인 사복음서 전통인 ‘베드로 수제자설’을 거부하며 가룟 유다를 예수를 가장 잘 이해하고, 모든 열두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처럼 묘사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육신을 벗어야만 부활할 수 있다는 영지주의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어 기존 기독교 전통과는 전혀 다른 글을 쓰고 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일반적인 사복음서가 말하는 대로 가룟 유다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넘긴 것이라는 내용을 거부하고, 가룟 유다는 예수의 명령대로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마치 사전에 예수의 지령대로 행동하는 비밀 요원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새로운 담론, 즉 예수의 십자가 구속사를 위해 가룟 유다가 사용되었고, 그러하기 때문에 유다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구속사를 완성하는 배역으로써 사용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는 많은 반기독교 세력들의 호평을 받아가면서 마치 기존 교회가 주장하는 선악의 문제가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많이 이야기되면서 기존 성도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단 짚고 넘어갈 것은 유다복음은 완전히 성경 사복음서와 동떨어진 영지주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육신을 벗어내야만 부활할 수 있으며.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이원론적인 영지주의적인 입장을 기본적으로 취한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이후 사흘 후 다시 부활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서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적인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과 동시에 그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순간부터가 그들이 말하는 ‘부활’이기 때문이다. 정통적인 사도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가르침을 전승하면서 흔히 말하는 사도의 전통에서 벗어났기에 이는 완전한 위경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김기현 목사의 저서 『가룟유다 딜레마』에서는 유다복음에 대해서 ‘영지주의자들의 복음이며, 유다 변명에 불과하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지옥에 갔는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이는 유다가 유다복음에서 말하는 대로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령을 받은 자’는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이룩하는 데에 도움을 준 ‘소극적인 조력자’의 위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질문이 따라오게 되며,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사를 완성하는데에 쓰인 배역인 가룟 유다가 과연 지옥에 떨어졌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2.트릭스터

 

 아마 독자의 눈치가 빠르다면 앞에서부터 가룟 유다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완성에서의 입장을 자꾸 ‘배역’ 이나 ‘역할’과도 같은 문학적인 단어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는 일부러 그러한 단어를 사용한 것인데, 왜냐하면 이번 챕터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문학적 관점에서 가룟 유다의 입장 바라보기.’ 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하나의 문학 장르로서 이해한다면 가룟 유다는 악역인가 아니면 악역이 아닌가에 대한 관점으로 이해해보자는 것이 이번 챕터의 주요 골자이다.

 캐릭터의 역할 중에서 독특한 소재 중 하나는 바로 트릭스터(Trickster)라는 캐릭터들일 것이다. 이들은 반동적인 입장에 서있으면서, 항상 트러블메이커이며 악역을 자처하는 입장에 서있다. 게르만 신화의 로키신이나 여러 민담에 나오는 토끼와 여우같은 존재가 이러한 캐릭터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데, 트릭스터라는 캐릭터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자기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악한 일을 행한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선한 일에 도움을 주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마치 게르만 신화의 로키가 계속 의지적으로 나쁜 일을 시도한다고 해도 결과적으론 모든 신들의 유익으로 수렴된다는 점이 트릭스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게르만 신화의 최후의 전쟁인 라그나뢰크 일을 제외하고) 자기 스스로의 꾀에 빠지게 되어 결국 권선징악으로 끝나게 되는 일본 설화 ‘이나바의 토끼’ 에서의 이나바 토끼 역시 트릭스터의 이러한 속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복음서에서의 가룟 유다의 위치 역시 이러한 트릭스터의 속성을 많이 닮아 있다. 가룟 유다는 분명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악한 일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온 인류 구원의 사건인 선한 일을 도와주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룟 유다는 트릭스터적 캐릭터이다. 이러한 트릭스터 캐릭터의 특징은 바로 ‘의지로 행하는 악’이라는 점이다.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악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라, 더욱 커다랗고 선한 목적을 위한 ‘필요악’을 행하는 것도 아니라 오로지 순수한 ‘의지적인 악행’을 저지른다는 점이다. 트릭스터적 캐릭터는 그 뒤에 올 ‘선한 일을 조력하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순수한 악행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나, 기타 이기적이거나 사리사욕적인 ‘악행을 위한 악행’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가룟 유다도 역시 이러한 악행을 위해 예수를 은 30에 팔아넘겼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인류 구속이라는 커다란 선으로 환원될 줄은 모른 채 가룟 유다는 순수한 악행을 행했던 트릭스터적인 캐릭터 였던 것이다. 

 

3.자유 의지와 죄악의 문제

 

 가룟 유다가 구속사 가운데서 트릭스터적인 캐릭터로 사용이 되었다는 점,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살펴본다면 결국 ‘하나님의 섭리’라는 하나의 측면에서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져 시장에 팔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냥꾼은 자기 의지로 활 시위를 당기고 화살을 놓았지만 사냥감을 떨어트리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짐과 같이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팔아 넘겼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은 삼십에 팔리는 것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럼 의문점이 하나 나오는, 어쩌면 무신론자나 반기독교주의자들이 항상 걸고 넘어지는 문제가 하나 생긴다. 바로 하나님이 악을 조장하시는 분인가? 라는 문제점이 그것인데, 그들의 논리는 그렇다. 가룟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파는 죄를 저질렀다.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가룟 유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파는 죄를 저지르게 조장한 것이나 다름 없다. 라는 논리를 펼쳐 마치 하나님을 가리켜 하나님이 직접 악한 일을 조장하는 죄의 조성자, 즉 악신과도 다름없는 그러한 위치로 하나님의 위상을 격하시켜 하나님을 조롱하는 일에 이러한 논리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다. 그분에게서 악이 나온다는 것은 그의 거룩하신 성품상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인 것이다.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입장이 참이거나, 혹은 이러한 모순을 가진 하나님의 모습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다거나 둘 중 하나의 입장으로 굳혀지게 된다. 반기독교주의자나 무신론자라면 저 문제에 대한 심층적인 고찰 없이 바로 후자의 입장을 취하고야 만다. 하지만 하나님이 명백히 살아계심을 느끼는 우리 신자들은 전자의 입장을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명백히 섭리하심을 통해 이끌어감이 분명한데, 악의 문제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5장 4항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죄는 오직 피조물에게서 난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고 의로우시므로 그 자신이 죄의 조성자나 승인자가 아니며 결코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이는 죄악의 문제를 인간의 자유 의지로부터 찾고 있다. 칼빈이 말한 그대로를 인용하자면 ‘자유의지를 통해 저지르는 인간의 죄악을 하나님은 방관하신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그대로 말하자면 인간이 죄악을 저지를 때는 어떠한 타의적이고 강제적인 어떤 힘에 의해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자기의 자유 의지대로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자유 의지에서 나오는 죄악을 막지 않으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죄악의 조성자가 아니신 것이며, 죄는 피조물로부터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자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선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마치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버렸던 것은 어떤 타자적인 강제력이 가해져 불가항력적인 죄악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동생을 시기하는 죄악된 본성대로 저지른 일이지만,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막지 않으시고 그러한 일을 방관함과 동시에 이집트에 팔려간 요셉을 통해 하나님은 흉년에서부터 이삭과 그의 가족들을 살리시고, 더욱 나아가 이집트 고센 땅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을 키워나갈 계획을 진행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가룟 유다가 자기 욕심과 마음의 완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삽십에 팔아 넘기는 죄악을 저지르지만, 하나님은 그걸 막지 않으시고 구속사의 완성이라는 커다란 하나님의 계획하심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4.결론. 악을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

 

 가룟 유다는 분명 죄인이었다. 그가 자기 스승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배신 행위는 유다복음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속사를 이룩하려는 숭고한 목적이란 하나도 없는 이기적이고 욕심 가득한 완악함으로 이루어진 일이기에, 아무리 결과론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 완성에 도움을 주었다 할지라도 그는 자기 의지대로 죄악을 저지르는 일을 범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룟 유다에게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 좋았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라는 말씀들은 가룟 유다가 얼마나 악한 동기로 그러한 일을 시행하는 죄인임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러한 악한 일들을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돋보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도 인간들은 자기 판단대로 죄악을 저지르며 살아간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막지 않으신다. 방관하신다. 대신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선행이 더욱 하나님 나라에선 빛이 나게 된다. 그 후, 최후의 날에 심판대에 서 계신 하나님 앞에서 양과 염소로 나뉘어질 때, 하나님의 영광은 죄악을 행했던 백성들을 심판함으로 인해 그의 공의로우심이 칭송받게 되고, 하나님의 도를 따르던 백성들을 구원함으로 인해 그의 사랑을 높여 칭송받는 섭리를 보여 주실 것이다.


(위 글은 본인이 2015년에 조직신학 수업 중 발표한 짧은 레포트이며 출처만 표기하는 조건 하에 배포 가능함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