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이름 수정: 아딜레 -> 아질(Asyl)


#1 하이에나

목숨을 걸고 훔친 식량. 내일도 안전할 거라는 보장이 없는 피난처. 이게 ‘하이에나’라 불린 소녀의 세계.

 


영구열차 '아질(Asyl)', 평민 차량의 한 구석... 


고함치는 남성

어이, 기다려!!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넌 이제 끝이다!

 

여성

그건 귀족분께 바칠 물건이야! 이 ‘하이에나’! 돌려줘!


 

‘하이에나’

……

 

‘하이에나’라고 불린 소녀는, 쫓아오는 남녀의 욕설에도 상관않고 차량 천장의 들보로 뛰어올랐다.

 

‘하이에나’

317… 317…

찾았다, 317. 그 다음… B통기구

 

‘하이에나’는 능숙하게 통기구의 나사를 풀고, 통기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이에나’의 기척은 눈 깜짝할 사이에 통기관 깊숙한 곳으로 사라져, 그녀를 쫓던 사람들은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그저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하이에나’

317-B를 돌아서 2219로… 2219에서 밑으로 갈 것. 그 다음, 기계실을 지나…

기계실 오른쪽 위에 있는 응축수 배관… B구간의 공기조절 시스템은 수리중이니까, 안쪽은 물이 없는 상태일 터…

응축수 배관 속을 45m 나아간 후… 여기다. 이 점검구가 틀림없어.

 

‘하이에나’는 점검구에서 뛰어내렸다. 이곳은 오래 전부터 사용되지 않은 점검실인 듯하다.

 

‘하이에나’

하아…

 

…!

 

문 밖에서 나는 소리

> 대체 왜 이러지? 문이 안 열려! 누가 좀 도와줘!

> 칼리아리, 오늘은 이만 포기하자. 내일 다시 도면을 챙겨와서 여러가지로 시험해 보자고.

> 이 구획은 오늘 중으로 전부 정리하라고 반장이 말했잖아.

> 그런 말 안했어. 만에 하나라도 이전의 점검반이 폐연료전지를 깜빡 두고 갔다거나 했다면 그 전동가위를 쓰는 순간 쾅 폭발한다고!

> …뭐, 어쩔 수 없나. 그럼 일단 기계실에 있는 쓰레기를 정리하자. 가자!

 

문 밖에서 나는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 ‘하이에나’는 코와 입을 누르고 있던 손을 내렸다.

 

‘하이에나’

여기도 안전하지 않은 것 같네…

내일 아침 일찍, 다른 장소로 이동하자

……

 


‘하이에나’는 식품 패키지를 난폭하게 뜯으려 한다. 과대 포장된 음식에 서투른 것이다.

이 말끔한 포장용기와 음식을 교환할 수 있었으면…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음식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상황이다.

‘하이에나’는 손과 이를 사용해서 간신히 패키지를 뜯었다. 그 속에는 자그마한 빵이 들어있었다.

 

‘하이에나’

…패키지도 먹는 거였다면 좋았을 텐데

 

‘하이에나’는 빵을 잘게 찢어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는 무언가를 먹고 있는 때만이 충만한 순간이었다. 하루 중에서 가장 큰 고난을 뛰어넘은 것을 실감할 수 있고, 내일 필요할 에너지도 보장되기 때문이다.

 

‘하이에나’

…배 불러

이동해야 해

 

‘하이에나’는 침낭을 허리에 싸매고, 주변 물품을 재빠르게 한데 모았다. 그리고 소리도 없이 점검구로 들어가, 점검실을 떠났다.

평민 차량의 밤은 언제나 어둡다. 그 덕에 ‘하이에나’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차량을 지나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는 것이 가능하다.

‘하이에나’는 지저분한 생활구획을 지나가려다, 비닐 시트로 된 작은 텐트를 발견했다.

 


‘하이에나’

본 적 없는 텐트… 어느 차량에서 온 거지?

 

그 때였다. 텐트에서 뚜렷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꼬르륵…’ 갑작스러운 소리에 ‘하이에나’는 깜짝 놀랐다.

 

남자 아이

조용히 해!

 

여자 아이

오빠, 배고파… 더 이상 못 참겠어… 흑…

 

남자 아이

조용히 해. 날이 밝으면 오빠가 배급을 받아올 테니까!

 

텐트 안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하이에나’는 알고 있다. 다른 차량에서 옮겨온 자에게, 배급품을 받을 자격은 없는 것이다…

 

‘하이에나’

……

 

‘하이에나’는 조금 주저한 후에 조용히 그 장소를 떠났다.

작은 텐트 앞에는 식료 팩이 몇 개인가 놓여 있었다.

 



 


#2 렌치

‘하이에나’가 피난처 바깥의 소란을 알아차렸다. 어쩌면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하루가 될 지도 모른다.

 


‘하이에나’는 낮동안 여간해서는 은신처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날은 특별했다. 평소답지 않은 술렁임에, 그 ‘하이에나’조차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이에나’

(정비부대가 출동할 때도 소란스럽긴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야…)

(무슨 일이 있었나…)

 

평소에는 인기척 없는 차량 앞쪽 끝자락이, 지금은 갑자기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여러 사람들이 노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을 둘러 싸고 있다.

 

제복차림의 인원 A

어이, 밀지 마! 어차피 심사가 있다! 억지로 밀어도 소용없어!

 

제복차림의 인원 B

그래! 차량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사람들은 앞으로 나가려고 필사적이다. 수습되지 않는 상황에 귀족의 호위가 총을 겨누었다.

그러자, 또 다른 제복차림의 키 큰 남성이 귀족의 호위를 밀어젖히고 앞으로 나갔다.

 


듬직한 체구의 남성

뭘 하고 있지? 겨우 신입 모집하는데 이게 무슨 소란이냐?

 

제복차림의 인원 A&B

…대장님!

 

제복차림의 인원 A

죄송합니다, 이 자식들,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아서… 한 입이라도 밥을 먹을 수 있다면 내일 죽어도 상관없다느니…

 

듬직한 체구의 남성

웃기지도 않는 소릴!

내일 죽어도 상관없다고? 네놈들의 목숨은 그렇게 값싼 건가!?

 

남자의 굵은 목소리에 압도되어 사람들은 일제히 조용해졌다.

 

듬직한 체구의 남성

밥을 먹고 싶어? 매일 배불리 먹고 싶다고? 좋다!

만약 내가 내는 문제에 대답할 수 있다면 밥을 먹여주마!

이 정비부대대장 안드레이 스미르노프가 보증해주지!

 

사람들은 재차 웅성이기 시작했으나 10분정도 지나 조용해졌다.

 

안드레이

좋아. 아직 사람말은 알아들을 수 있는 모양이군.

우선은 이거다. 내가 들고 있는 이 물건의 이름이 뭐지?

 

안드레이의 손에는 렌치 같은 것이 쥐어져있다. 자세히 보니 렌치와는 살짝 모양이 다른 듯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외친다. ‘렌치!’ ‘병따개!’ ‘철봉!’……

 

안드레이

좋아, ‘렌치’ 또는 ‘라쳇 렌치’라고 대답한 놈은 남아라. 그 이외는 돌아가. 어물쩍 속여 넘길 수 있다 생각하지 마라. 난 귀가 좋거든.

 

사람들은 다시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드레이의 말을 믿은 건지, 아니면 귀족의 호위가 들고 있는 기관단총에 겁을 먹은 건지, 머지 않아 3분의 2 정도되는 인원 수가 그 자리를 떠났다.

 

안드레이

다음 문제다. 평민 차량 1량 주변에, 공기조절 시스템은 몇 개 있지? 통기구는 몇 개냐?

 

주위가 조용해졌다. 이따금,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아무런 숫자를 내뱉는다.

 

안드레이

…적당히 내뱉지 마라.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해.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안드레이

…미안하지만, 네 녀석들은 밥을 먹일 가치가 없다. 이 모양이어서야, 오늘 신입을 찾기는 글렀군. 해산한다.

 

군중은 잠시 주저했으나 모두 떠나갔다.

 

제복차림의 인원 A

대장님… 가뜩이나 사람이 부족한데, 이대로는 곤란합니다…

 

안드레이

그렇다고 해서, 기초 중의 기초도 없는 녀석들을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야. 간단한 일이라 하더라도 리스크는 있다.

 

제복차림의 인원 A

그치만, 저희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든 귀족 놈들은 장비를 보충해주지도 않는 데다, 저 탐욕스러운 놈들은 언젠가는 만족을 모르게 될 겁니다…

 

안드레이

아직 다른 차량이 있지 않은가. 거기에 인재가 있기를 바라지.

 

그 때, 안드레이는 어느샌가 눈 앞에 체구가 작은 소녀가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안드레이

뭐냐? 정비부대의 일은 애들한테는 무리다.

 


‘하이에나’

평민 차량의 공기조절 시스템은 4세트. 한 세트 당 통기구는 16개씩, 총합 64개.

당신이 가지고 있었던 건 코스모스 중공업의 NT64형 라쳇 렌치. 톱니는 32개.

 

안드레이는 눈을 크게 떴다.

 


안드레이

잘 알고 있군. 하지만, 꼬맹이가 하는 말이다.

어디서 배웠지?

 

‘하이에나’

64군데의 통기구, 난 전부 들어간 적이 있어.

 

안드레이

농담하지 마라. 나조차 모든 통기구를 열어봤는지 아닌지 따위는 모르는데.

 

‘하이에나’

…못 믿겠는 거야?

 

안드레이

되는 대로 지껄이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어. 믿을 수 있을 리가.

다만, 만약 그게 진짜라면, 꼬맹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너한테 밥을 먹여주지.

 

‘하이에나’

……

…4번 공기 시스템을 점검해봐.

 

안드레이

이유는?

 

‘하이에나’

당신들은 요즘 가스 역류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데, 그거 에어덕트가 고장난 거야.

 

안드레이

바보 같은 소릴. 4번 에어덕트는 바로 얼마 전에 교환한 참이다.

 

‘하이에나’

확실히 덕트는 새 거고, 문제는 일시적으로 개선됐어. 그래도 하루라도 빨리 필터에 있는 쥐를 내쫓지 않으면 쥐의 배설물때문에 가스는 다시 역류할 거야.

 

안드레이

…칼리아리, 보고 와라.

 

제복차림의 인원 A

예.

 

……

 


제복차림의 인원 A

정말이지, 불쾌하기 짝이 없네…

 

안드레이

어땠나?

 

제복차림의 인원 A

전부 저 꼬마가 말한 대로였습니다. 커버를 열어서 쥐를 쫓아 냈습니다.

쥐를 찾아내려면 망을 펼쳐도 1주일은 걸리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안드레이는 소녀의 허름한 옷을 보았다. 어깨나 등쪽에 대량의 먼지가 묻어 있고, 거기에 스친 자국이 있다.

 

안드레이

정말로 통기구에 들어갔구나? 무얼 위해서지?

 

‘하이에나’

항상 있는 일이야. 먹을 걸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안드레이

…따라와라.

 



 

 

#3 소피아

‘하이에나’는 더 이상 ‘하이에나’가 아니다. 그녀가 다정함을 깨닫고, 귀여움을 받은 것은… ‘가족’덕분이다.

 


안드레이

소개하지, 이번에 들어온 신입이다.

이름은… 아직 모른다만, 스스로 말할 수 있지?

 


‘하이에나’

…’하이에나’라고 불렸어

 

폭소하는 인간

‘하이에나’? 뭐냐 그게!?


 

안드레이

이유도 없이 이런 조그만 애를 ‘하이에나’따위로 부르진 않겠지

 

‘하이에나’

……

 

폭소하는 인간

대장님, 점점 조건이 낮아지고 있지 않아요? 이번이 꼬맹이면, 다음 번은 다친 사람이라도 데려오실 겁니까?

 

‘하이에나’

……

 

‘하이에나’의 노기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다. 안드레이는 살짝 그 어깨를 눌렀다.

 

안드레이

미안, 저 녀석한테 악의는 없어. 

 

‘하이에나’

……

 

‘하이에나’의 어깨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고, 안드레이는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손을 뗐다.

 

안드레이

어이, 크레그. 내 안목을 의심하는 거냐?

아아, 그런가. 즉, 네놈이 내가 잘못 보고 고른 인간이란 건가. 아니면 설마, 다른 녀석을 말하는 거냐?

 

크레그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안드레이

그럼 문제없겠지. 잘 된 일 아니냐. 혹시라도 이 꼬마 덕에 만년 꼴찌에서 탈출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

 

크레그

너무하십니다. 그런 꼬마한텐 절대 안 지거든요.

 

안드레이

오, 그렇게 말했겠다.

 

안드레이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하이에나’의 등을 떠밀었다.

 

안드레이

오늘부터는 동력반의 일원이다. 크레그, 네가 가르쳐라!

 

크레그

정말이지… 대장은 뭐든지 나한테 떠넘긴다니까…

어이! 너! 나를 꼴찌라고 얕보지 마! 동력반의 일은 제일 중노동이야!

갑작스럽지만, 오늘 B구획의 폐가스 회수 시스템의 배관이 고장났어. 네가 보고 와라.

 


‘하이에나’

…알았어.

 

크레그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으면 그 자리에서 처리해. 무리일 것 같으면 돌아와서 나한테 말해라.

 

‘하이에나’

…메인터넌스용 공구는 어딨어?

 

크레그

오, 알고 있구만. 우리가 하는 작업을 본 적 있는 건가? 저쪽 선반에 있는 대걸레 바께쓰 옆에 있다.

 

‘하이에나’

……

 

‘하이에나’는 말없이 공구 세트를 메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정비부 대원

크레그, 지나치잖아.

부대 규칙으로는 폐가스 회수 관련 작업은 3개월을 빡세게 트레이닝하고 나서야 하기로 되어있는데…

 

크레그

그건 생판 아무것도 모르는, 독가스를 살짝 마셔도 죽지는 않을 초짜한테나 써먹는 규칙이야.

대장이 왜 저런 꼬맹이를 데려왔는지…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만에 하나 대장이 잘못 본 거라면, 대장 대신에 꼴찌인 내가 악역이 될 거야.

물론, 그 또래의 꼬맹이처럼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주는 게 제일 좋지. 저 공구 세트를 팔면 며칠 동안은 입에 풀칠할 수 있으니, 저 녀석한테도 나쁠 건 없어.

 

정비부 대원

대장한테 혼나면 어쩔 건데…

 

크레그

어쩔 수 없잖아. 대장도 신입이 일 째고 탈주하면, 뭐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만…

우악! 깜짝이야! …폐가스 회수 시스템은 어땠어?


 


하이에나’

…배관에, 이게 끼어 있었어.

 

‘하이에나’는 기름투성이인 천을 크레그에게 던졌다. 프린트된 정비부대의 문장을 가까스로 식별할 수 있었다.

 

크레그

꽤 깊숙한 곳에 넣을 작정이었는데… 설마 찾아낼 줄이야.

 

하이에나’

왜 이런 짓을 했어?

내가, 싫어?

 

크레그

싫은 것은 아니지만, 내력도 모르는 녀석을 맡아 버렸잖아. 써먹을 수 있을지 어떨지 시험해봐야지…

뭐, 미안했어. 대장한테 보고할 거면 가.

 

하이에나’

……

 

크레그와 ‘하이에나’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의중을 살폈다. 그 때, 안드레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드레이

크레그! 아주 제법이군. 신입한테 폐가스 회수 시스템을 수리하도록 시켰다고?

 

두 사람

…!

 

안드레이

그래서, 어땠지? 목숨을 걸 법한 녀석이 아니면 넌 인정하지 않잖아? 그러니 너한테 맡긴 거다.

 

크레그는 항복한다는 듯이 양 손을 올리고 ‘하이에나’로부터 시선을 피했다.

 

크레그

합격입니다. 아무래도 꼴찌의 ‘명예’는 당분간 지킬 수 있을 것 같네요.

 


안드레이

그러냐, 네가 그리 말한다면 나도 안심이 되는군. 이 녀석에 대해서 무엇보다 걱정되었던 것은 네 태도였으니까 말이지

좋아, 만사 오케이로군! 어이 꼬마, 네가 입을 제복이다! …빨리 샤워하러 가서 지저분한 것 좀 닦고 와라! 부대 전체가 널 위해 샤워룸을 비워놨다고!

 

‘하이에나’가 정비부대에 들어온 후로 197일이 지났다. 그 전까지는 시간이란 것을 헤아린 적이 없었으나, 지금의 그녀에게는 매일이 기억해둘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강철판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푹신한 침대, 배가 부를 정도의 식사. 매일 6시간은 잘 수 있는데다 이틀에 한 번은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할 수 있다…

안드레이 대장은 겉보기에 데면데면할 것 같아서는, 사실 섬세한 사람이었다. 맛있는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 수 있고, 언제나 옷을 조그만 여자 아이에게 맞게 수선해준다.

그리고, 그가 아주 소중히 여기는 ‘왕가의 증표’인 배지(듣기로는 진짜로 진품이라는 듯하다)를 무시당하지 않는 한은 무슨 일이든 크게 개의치 않는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크레그 반장은, 트레이닝 성적만은 뒤에서 1등을 유지하고 있지만, 온갖 비품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다. 완고하고 쩨쩨하고, 그리고 눈이 나쁘다.

이웃 구조(構造)반의 카튜샤 반장은 세 명밖에 없는 여성 대원 중 한 명이다. 무거운 물건을 짊어지고 누구보다도 빠르게 10km를 달릴 수 있다.

그리고 ‘하이에나’… 아니, 더 이상 그녀를 ‘하이에나’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구조반의 레나가 ‘소피아’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었기 때문이다.

‘소피아’는 안드레이 대장의 고향의 이름이라는 듯하다. 황금시대의 말로, ‘하늘에서 보낸 선물’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어딘가에서 입수한 황금시대의 영화를 다 함께 보았다.

그리고, 안드레이 대장은 크레그가 그러하듯, 소피아에게도 ‘대장님’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소피아가 정비부대에 들어오고 나서 198일째 되는 날이었다.

‘오늘은… 소피아가 정비부데에 드러온지…’ 글자를 모르겠다. 일단 여기는 비워 놓자.

 


소피아

‘오늘은, 소피아는… 처음으로… 안드레이, 데장이랑 가치 자겁…’ 모르겠어, 지워야지… 다시 일하러 가야 돼.

그렇지… ‘소피아가, 처음으로… 부데랑, 가치… 차량밖께서, 자겁을…’

 

안드레이

소피아! 슬슬 출발하자!

 

소피아

…나머지는 돌아와서 쓰자.

네!

 

 


 


#4 재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겨우 수 시간만에 모두의 운명이 크게 바뀌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일의 태양을 못 보게 되겠지.

 


안드레이

다들 가자! 전 부대, 차량 외부 점검하러 출발! 밖으로 나가는 녀석들은 전원 버클이 고정되어 있는지 확인해라!

이 차량 뒤쪽 표면의 흠집이 귀족 차량의 테라스에서 보이고 있다. 용접공구와 보수용 패치를 잘 챙겨라!

 

이것이 정비부대의 새로운 하루…라고도 할 수 있고, 평소와 같은 하루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이 귀족의 명령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은 거부권이나 교섭권이 없다는 것도.

모든 버클을 꼼꼼하게 잠그고, 세월에 걸쳐 길들여진 공구를 신중하게 점검하고, 준비에 만전을 기할 뿐이다.

 

귀족

뭘 꾸물거리고 있나! 빨리 가!

 

안드레이

……

 


평소와 다름없는, 차량의 보수일 터였다.

 

두 소대로 나뉘어 밖으로 나가, 흠집을 찾으면 바깥으로 돌출된 부분을 도려내고서, 패치 플레이트를 붙여 용접한다.

 


정비부대원

대장님, A구간의 외관점검 완료했습니다. 파손된 부분은 없었습니다.

 

안드레이

여기는 안드레이, 알았다. 너희는 그 장소에서 대기, 전위는 나와 함께 앞으로 간다. 후위는 평면 초음파탐상기로 다시 체크해봐라.

 


소피아

후위 확인. 5분 이내로 스캔이 완료됩니다. 끝나는 대로 전위에서 50m 거리까지 전진하겠습니다.

 

안드레이

소피아.

 

소피아

네.

 

안드레이

20분 기다렸다가 부대를 전진시켜라.

 

소피아

왜 그러십니까? 초음파 수집시간을 보태도, 7분이면 충분…

 

안드레이

오늘 작업은 천천히 하는 게 좋겠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소피아

…날씨도 좋고, 시야도 나쁘지 않은데, 왜…

 

안드레이

그렇군. 날씨도 좋고, 시야도 양호. 풍속도 마침 딱 좋아.

이런 날에 산책이라도 할 수 있으면 기분 좋겠지.

그런 날인데 왜, 흠집이 생겼지?

 

소피아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날씨에도 표면이 파손될 수 있는 원인을 4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비부대원

대장님, C구간 점검 소대입니다. 파손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안드레이

…여기는 안드레이. 알았다. 2분 후 도착한다.

어쨌든 후위는 주의하도록. 그 자리에서 조금 대기했다가 지정된 위치로 가라.

밖에 나와있는 건 우수한 대원뿐이다. 누가 되었든 간에 잃는 것은 뼈아프다.

 


소피아

…알겠습니다.



소피아

대장님, 여기는 후위. 평면 초음파 측정치는 안정되어 있습니다.

…대장님?

…안드레이 대장님?

 

안드레이

……

 

소피아

어떻게 된 거지? 신호가 이상한 거야?

이렇게 날씨 좋은 날에 그럴 일은… 설마…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 비참한 사고에 익숙해진 소피아조차, 눈 앞의 참상에 숨을 삼켰다.

전위는 침식체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까마득히 보이는 안드레이는 눈 앞의 침식체를 걷어 차, 이미 의식을 잃은 크레그를 필사적으로 방위 라인까지 끌어가려 하고 있다.

소피아는 조건반사적으로 포위망을 향해 달려들었다. 뒤를 이은 대원과 함께 전위를 원호하려 한다.

 

소피아

대장님! 빨리!

 


안드레이

소피아! 후퇴해라! 이건 함정이야!

 

순식간에 대량의 침식체가 열차에 기어올라와, 소피아 일행도 둘러싸이고 말았다.

퇴로가 막힌 후위는 어쩔 수 없이 전위와 합류한다.

 

안드레이

증원이 오지 않는 이상, 우리는 여기서 죽는 수밖에 없다.

 


소피아

그럼, 목숨 걸고 싸울게요.

 


안드레이

아아, 그래.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저놈들을 깡그리 해치워버리자!

 

--------------------전투 진입--------------------

 


소피아

이번에야말로 모두를 지킬게…!

 


(적이 진로를 방해!)

(적을 격파하고 이 곳에서 탈출하라!) x 2



히든 조건 충족 시



(소……아……도망……

……

……누군가……귀족……생일 파티……)

(말소리가 사라졌다. 공허한 바람 소리만이 남았다.)

 


(전투)

 


(애……턴 님……괜찮……

……폭발……

……당신……과 지도자에게……보고……)

(말소리가 사라졌다. 둔탁한 기계음만이 들린다.)

 


소피아

마지막 한 마리… 이걸로 한동안은 괜찮아!

아까, 빨리 도망치란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이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모두, 빨리 철수를……… 어라?

 

--------------------전투 종료--------------------

 



 

 

#5 원수

금박이 입혀진 편지지로부터 원수가 밝혀졌지만, 정말로 이렇게 단순한 일인 것일까?

 


그 날…

배후에서 침식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소피아는 계속해서 달렸다.

이윽고 어렴풋이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차량에 도달하자, 마지막 힘을 짜내 안으로 뛰어 들었다.

 


소피아

살려줘… 평민 차량에… 침…식……

…체가…

 

 


낮은 목소리

상황은?

 

날카로운 목소리

전부 정리됐습니다. 정비부대에 생존자가 없어서 다행이군요. 그런데, 소란이 너무 커졌습니다. 완전히 숨기는 건 어렵겠지요.

만약 ‘그 분’에게 알려진다면…

 

낮은 목소리

흥… 알려진다면 어떻다는 거지?

 

날카로운 목소리

그건… ‘그 분’을 따르지 말라고 명받은 것은 귀하시지요…

아마 무력행사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귀하의 면종복배는 주지의 사실. 어떠한 압력은 가해 오겠지요.

 

낮은 목소리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원래부터 나는 역대 에밀을 섬겨온 몸. 총을 쥐는 법도 모르는 그 아가씨가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뻔하다.

그보다는…

 

날카로운 목소리

무엇 말씀이십니까?

 

낮은 목소리

어제, 나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에 굴러들어온 그 계집아이는… 어떻게 되었나?

 

날카로운 목소리

보는 눈이 많아 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의사를 수배했습니다.

하반신이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 앞으로 이틀도 못 버틸 것이라고…

고로, 애써 입막음을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낮은 목소리

아니, 그렇지 않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내라.

 

날카로운 목소리

…뭐라고 하셨습니까?

 

낮은 목소리

다시는 없을 ‘원한’의 씨앗이다. 제대로 키우지 않으면 아까워.

 

날카로운 목소리

설마, 즉…

 

낮은 목소리

준비해라. 서둘러,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가끔은 왕좌에 앉아 으스대는 ‘지도자’인지 뭔지에게 도리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날카로운 목소리

해야 할 일은 알고 있겠지?

필요한 설비와 자재를 갖추는 게 꽤 수고스러웠다. 게다가 4시간 이내로, 였다고…

만약 이걸로 실패라도 한다면…

 

기술자

예, 물론입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처자식에게는…

 

날카로운 목소리

흥, 그건 너희 하기 나름에 달렸다.

‘히스’ 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신다!

 

기술자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구조체 개조수술 준비를.

 


소피아

……

 

기술자

Ta치환 프로그램 준비, NECMO 접속, 심폐 치환…

강심제, 기준치를 투여. 장기 치환 수술을 개시합니다.

 

날카로운 목소리

과연, 이게 173호 도시의 기술이란 건가.

 

기술자

아니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저희는 ‘그 때’의 경험을 거쳐 공중정원의 구조체 잔해에서 얻은 기술에 의한 보완도 이루었습니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슬슬 골격 치환에 들어가겠습니다. 어이, 빨리 와! 혼자서는 못 옮겨!

> 그래, 금방 간다!

…바이탈 안정, 2차 ‘심장’과 Ta ‘소뇌’도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성공했습니다.

 


소피아

……

 

날카로운 목소리

아마도, 이 녀석이 침식체의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던 건 많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원호했기 때문이겠지.

그 몸에 받은 정만큼, 그 이상의 원한을 폭발시켜 준다면 좋겠건만… 크크크…

 

기술자

그럼, 저희는 이만…

 

날카로운 목소리

얼른 가라, 너희들의 일은 끝났다.

 

기술자

가, 감사합니다!

 

날카로운 목소리

다음은, 이 원한의 씨앗을 ‘개화’시킨다… 최고의 타이밍을 생각해둬야겠군.

 

 


수 개월 후

 

날카로운 목소리

소피아? 있느냐?

 


소피아

…네.

이건?

 

날카로운 목소리

이번 달 보급품과 메인터넌스 작업에 필요한 자재다.

 

소피아

…너무 많아.

 

날카로운 목소리

너는 그 정비부대의 유일한 생존자니, 소중히 대해야지.

 

소피아

새 정비부대의 후보생 연수도 끝났으니, 이젠 다들 차량을 점검할 수 있어.

 

날카로운 목소리

정말로 잘 했다. 설마 한 때 ‘하이에나’였던 네가, 귀족 차량의 개인실에 살면서 정비부대의 후보생을 훈련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소피아

……

 

날카로운 목소리

모두 ‘히스’ 님의 온정 덕분이다. 결코 잊지 말거라.

 

소피아

알고 있어. 언제라도 ‘히스’ 님께 갚을 수 있어.

 

날카로운 목소리

호오, 정말인가?

 

소피아

응.

 

날카로운 목소리

그럼, 마침 잘 됐군. 살짝… 내부 정보를 알려주마.

 

소피아

?

 

날카로운 목소리

스스로 읽거라.

 

만듦새가 정교한 봉투가, 살짝 소피아의 앞에 던져졌다.

 

날카로운 목소리

슬슬 돌아가지. 오늘 나와 만난 건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된다.

 

소피아

……

 

소피아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봉투를 펼쳤다.

 

편지

잔혹한 지도자 아딜레 · 자밀라는, 우리의 왕권의 초석을 전면적으로 파괴할 작정이다.

자밀라는 그 때 증원을 거절하고, 네가 있었던 차량을 폭파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아딜레 · 자밀라에게, 더는 아딜레의 지도자로서의 자격은 없다. 무자비한 명령을 내리고 실행을 강요한 순간, 그녀는 아딜레 전체의 적이 되었다.

한시라도 빨리 숭고한 사명을 완수하기를 바란다. 선두 차량에 침입해서, 극악무도한 악마인 아딜레 · 자밀라를 죽여라.

우리와 같은 원한을 가진 너는, 이 중요한 사명을 맡기에 걸맞다. 구조체인 너의 신체도, 이 순간을 위한 것이다.

사명을 완수하여 아딜레 · 자밀라를 죽이면, 너는 자신이 원하는 생활을 손에 넣고 아딜레는 영원한 평화를 손에 넣을 수 있다.

ㅡㅡ 히스

 


소피아

…과연

 

편지는 기계 암에 의해 조각조각 찢어졌다.

 

소피아

알았어, 할 게.

‘히스’ 님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6 진상

그것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소피아

2266에서 10번째의 교차점에서 왼쪽으로

여기다

 

통기구 너머로 아래의 상황을 슬쩍 살핀다. 왕족 차량의 호화로운 카펫이 눈에 들어온다.

예전의 자신이 떠올라, 소피아의 마음 속 분노가 크게 타올랐다.

 

소피아

…스읍…

…하아…

자밀라만 없애면…

전부, 끝나.

 

--------------------전투 진입--------------------

 


소피아

호화로운 차량…

자밀라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귀족차량에 침입, 자밀라의 행방을 쫓아라)

 


소피아

자밀라, 찾았다.

찾았긴 한데, 저 호위를… 내버려 둘 수도 없어.

 

히든 조건 충족 시



(가드의 동작에선 살의가 느껴지지 않아…)

 


전투 후 가드와 상호작용



호위

> ……

> 자밀라 님은 옳았던 거야…

> 너…

 

--------------------전투 종료--------------------

 


왕족의 호위에게 구속된 소피아는, 왕족 차량의 안쪽으로 연행되었다.

홀 중앙에 한 사람의 인물이 서 있다.

 


???

……

무모하구나.

나를 죽이러 오는 사람들이 전부 너같이 무모하다면…

…아니, 그것도 좋은 일은 아니야.

 


소피아

……

 

자밀라

왜 그러니? 죽이고 싶은 상대가 눈 앞에 있는데, 입 다물고 있어도 괜찮겠어?

 

소피아

…시체랑은 얘기 안 해.

 

자밀라

지금 너는 전자 섀클로 엄중하게 구속되어 있는데, 그런데도 나는 오늘 시체가 되는 걸까?

 

소피아

……

 

자밀라

괜찮아. 나는 귀여운 아이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거란다.

애스턴.

 


애스턴

자밀라 님,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저희는 아직…

 

자밀라

애스턴, 몇 번이고 말하게 하지 말아줘.

 

애스턴

알겠습니다.

 

전자음이 울리고, 소피아의 신체가 해방되었다.

 


소피아

……!

 

그 찰나에, 소피아는 숨겨두었던 권총을 꺼내 자밀라에게 겨눈다.

 

소피아

어째서야?

 

자밀라

…역시,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 거구나.

 

소피아

왜냐고, 물었어.

 

자밀라

그런 식으로 대답을 바라니까, 나를 쏠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거란다.

 

소피아

몇 번이고 말하게 하지 마

 

자밀라

…좋아.

그렇네… 오늘의 호위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편인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니?

 

소피아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자밀라

반은 정답. 오늘 ‘누군가가 온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어.

그래도, 그게 너라는 건 몰랐어.

 

소피아

…나에 대해 알고 있어?

 

자밀라

그럼, 물론이지. ‘그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 귀족의 보고서에는 무엇 하나 언급되지 않았지만, 나는 줄곧 너를 찾고 있었는걸.

 

소피아

당신한테 ‘그 사고’에 대해 말할 자격은 없어.

 

자밀라

그들에게 이렇게 들은 거구나? 내가 증원을 거부해 47명의 정비부대원과 336명의 평민을 죽인 원흉이라고.

만약, 여기에 다른 사연이 있다고 한다면?

 

소피아

안 믿어.

 

자밀라

그렇겠지. 안드레이의 편지에 써있던 대로야.

 

소피아

…어?

 

자밀라

안드레이. 네가 따르던 정비부대장은, 내가 평민차량에 보낸 가장 우수한 스파이였어ㅡㅡ

그는, 죽기 직전까지 같은 말을 반복했어. 너를 찾아내서, 잘 보살펴 달라고.

 

소피아

그럴 리 없어, 왜냐하면 모두, 이미…!

 

자밀라

그래, 죽었어.

이런 건 취미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걸로 믿어줄 수 있을까?

 

자밀라는 살짝 손을 내밀었다. 그 손바닥에는, ㅡㅡ왕가의 증표인 배지. 살짝 그을린 자국이 보인다.

 

소피아

…!!

 

자밀라

미안해. 그래도, 안드레이가 아픔을 느끼는 일 없이 죽었다는 것만은 단언할 수 있어. 유일하게 쓸 수 있는 약이... 모르핀밖에 없었거든…

 

소피아

……

 

자밀라

안드레이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단다.

 

소피아

…왜? 당신,이 아닌 거야?

 

자밀라

믿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내가 아니야.

 


소피아

…계속 해. 총은 내릴 테니까.

 


자밀라

…말해야 할 건, 전부 말했어.

이게 진실이야. 저들에게, 너의 원한은 이용가치가 있었어.

귀족 차량의 종자의 증언과, 죽은 기술자들이 보내준 이 녹음이 결정적인 증거야.

 

소피아

그렇구나… 나, 뭐하고 있는 걸까…

 

자밀라

괜찮아, 누구도 너를 비난하지 않을 거야.

 

소피아

……

 

자밀라

허상만을 보여지고, 화장품 밖에 만지지 못하게 하는, 이름뿐인 왕녀가…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 같은 사람을 한 명씩 찾아내서, 이야기를 듣는 것뿐. 진실을 알기 위해서.

이대로 간다면, 머지 않아 ‘그 사람들’은 반드시 나의 목숨을 빼앗을 거야. 아아… 머지 않아, 라는 건 정확하지 않았네.

나는 ‘명색’에 만족할 수 있는 천성이 아니야. 나도… 아버님과 똑같이, 만사를 본래 있어야 할 모습으로 되돌리고 싶어.

 


애스턴

자밀라 님, 언젠가 반드시 그 날이 올 겁니다.

 

자밀라

겉치레는 됐어, 애스턴. 이제 시간이 없어. 이 전장에서 살아남는 것은 어느 한 쪽뿐.

그 전에 지금, 마무리 지어야만 하는 문제가 있어.

소피아. 모든 것을 듣고 나서도 여전히 나를 죽이고 싶다면, 그렇게 하렴.

 

애스턴

에밀!!!

 

소피아

…모르겠어.

 

자밀라

그래…

애스턴. 소피아에게 안정을 취할 장소를 부탁해. 날이 밝아버리면 두 번 다시 히스의 밑으로는 돌아갈 수 없겠지.

 

소피아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자밀라

왕실의 적녀인 나에게, 인생의 선택 같은 건 없었어. 좋든 싫든 관계없이, 왕홀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나의 운명.

암군이든, 명군이든, 나 같이 명색뿐인 왕이든, 왕홀이 왕의 자격을 묻는 일은 없어.

그래도 말이야, 나는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선택의 여지를 가졌으면 좋겠어.

그러면, 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나타날 지도 몰라.

…너무 오래 이야기한 것 같네. 애스턴을 따라 가렴. 오늘 밤 네가 잘 장소를 준비해 줄게.

 

 



 

#히든 그 후 어느 날

하산 의장의 데스크에는, 아딜레의 봉랍이 찍힌 편지가…

 


자밀라의 편지

반왕정파는, 제 소관이 아닌 곳에서 아딜레 왕가의 위광에 먹칠을 한다면 저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약하지도 않고, 그저 왕좌의 상징으로서 좋을 대로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도 아닙니다.


소피아가 제 앞에 나타난 밤… 저는 그저, 앞을 향해, 가슴을 펴고 진실을 전했습니다.


조금 시간은 걸렸지만, 최후에는 그녀도 ‘선택’해주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거절당할까봐 걱정하고 있었지만요.


소피아를 보살펴 주는 것이, 안드레이의 생전의 바람이었습니다. 홀몸인 그에게, 소피아는 딸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겠죠.


그건 그렇고… 결혼조차 하지 않은 저에게 ‘딸’을 보살펴 달라니. 최대한 노력했지만 신하를 대하듯 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소피아라면 제 장기말, 아니, 저의 검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성장에 따라, 제 마음에는 새로운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저는 소피아를 ‘자립’시키고 싶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히스 일행의 덕을 본 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는 데 뛰어났습니다. 그렇지만, 그 부하가 전부 제 스파이였다고 한다면, 무엇 하나 저에게 숨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진상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소피아는 그날 밤 이후, 바로 제 호위부대에 들어왔습니다.


소피아를 공중정원으로 보내는 것은, ‘거래’를 하려는 것도, 하물며 ‘인질’로서 이용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열차를 떠난 적이 없는 여자 아이에게 바깥 세상을 볼 기회를 주고 싶은 것입니다.


소피아에게 직접 사죄할 수는 없지만, 그 사랑스러운 손을 피로 물들여버린 것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필요한 희생’이 있고서야, 지금의 아딜레의 평화가 성립되었습니다.


줄곧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보다 강한 검이 되기를 바라는 동시에, 한 사람의 여자 아이로서 행복한 생활을 보내기를 바랐습니다.


…지금의 저에게, 그 모두를 이루어 줄 방도는 없습니다.


외람된 부탁을 드리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부디, 소피아를 관대하게 다뤄 주시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부디, ‘딸’을 잘 부탁드립니다.


ㅡㅡ아딜레 · 자밀라

 


……

 



하산

아딜레의 에밀이 직접 하는 부탁이어서야, 어쩔 수 없군.

마침 적임자도 있으니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