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비바람 몰아치고

깊은 잠에도 술 기운이 가시지 않는구나

주렴 걷는 시녀에게 물어보노니

도리어 해당화는 여전하다고 답하네

아는가? 아는가?

분명 잎새는 짙어지고 꽃은 말라만 갈 것을*


*여몽령(如梦令) - 이청조(李淸照, 1084~1155)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재앙인 퍼니싱 바이러스가 발생한 지 수년이 지나면서 지상의 문명은 거의 파괴됐다.


지구의 밤은 별보다 더 빛났던 존재였지만, 지금은 밤하늘을 수없이 비추던 문명의 상징이 사라지고 이 땅과 바다는 이제 고개를 드는 우주보다 더 어두워졌다.


그러나 이 어두운 심연 위에서도 여전히 외로운 별 하나가 존재하며, 그것은 마치 어두운 밤이 오지 않은 것처럼 허황되게 빛나고 있다


구룡야항선은 오늘도 이 세상을 떠돈다.



상인

나도 너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걸 거리낄 이유가 없어, 어린 소녀, 나의 이 방호페인트는 세계 정부 측에서 사용하는 보급품이니깐, 이만큼 원한다고.



그는 완고한 태도로 네 손가락을 뻗었지만, 눈앞에 있는 소녀를 보고 망설였고, 그는 결국 최후의 수를 놓기로 했다.



상인

그만, 꼬맹이 녀석 넌 정말로 진심이구먼, 그래 내가 재수 없는 걸로 치자. 자 봐봐, 네가 보기엔 어떠냐...



네 개 들었던 손가락이 하나 더 접힌 것을 보자 눈앞의 소녀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쉬워하는 표정속에서 슬그머니 웃고 있는 상인의 모습을 보지 못한 소녀의 두 눈은 빛나고 있었다.



유유

좋아요, 후회하면 안돼요!



유유가 장사꾼의 물건을 받으려는 순간, 뚱뚱한 큰 손이 그것을 가로챘다.



금만

허... 이 물건의 값어치가 이 정도나 된다고? 장난하는거 아니지?


유유

당신은... 이 사기꾼 또 뭘 하려는 거야!



유유는 자신을 속여 죽일 뻔했던 나쁜 놈이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그는 유유를 상대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금만

여 위에 그려진 세계정부 로고는 죄다 잘못 그려져 있다고... 품질은 뭐 그럭저럭 괜찮아 보여서 기껏해야 이 정도밖에 안 돼.


상인

너...



금만은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다가 뭔가 떠오르는 듯 손가락 한 개를 구부려 그림의 로고를 긁으며 안쪽 로고의 본래 모습을 드러냈다.



금만

내가 당신였으면 저걸 당장 빨리 팔아 치웠을거다. 그렇지 않고 당신의 '구입 경로'가 누구한테 발각된다면, 아마도 그 기계체들은 당신을 배 밖으로 내던지겠지.


금만이 고개를 들어 바라본 것은 이 배의 모든 생사를 파악하는 사람이 존재했던 야항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거대한 홀 이었다.


상인의 눈은 느긋히 로고를 긁어내는 금만을 마치 피를 볼 거 마냥 째려보았지만, 결국 실룩거리는 웃음을 쥐어 짤 수밖에 없었다. 


상인

어휴......사장님은 안목이 있으시네요. 그럼 그 가격에 거래하시죠....얼마나 사시겠어요?


금만

전부, 있는거 다 주소.


유유

야! 분명히 내가 먼저 왔잖아!! 사장님 저 헛소리 듣지 마세요. 그가 당신을 속이고 있어요!


상인

미안하구나 아가씨, 다 들었어, 내 이 물건들이 이미 전부 저 분에게 팔렸으니, 네가 그에게 좀 양보할 수 있는지 물어보렴...



금만은 이제서야 유유의 존재를 보는 듯 곁눈질했다.



금만

장사는 가치를 가져와야지 어린애랑 소꿉놀이를 하는 게 아니니까...근데 너 같은 천진난만한 꼬마가 살아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봤자 이정 낭비에 불과해.....흥, 곡님도 너무 물러지신거 같군.


금만

그래서 황금시대에 빠진 놈들이 너 같은 여자아이의 기억으로 스스로를 취하게 할 맛 좋은 술로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금만

허허, 나야 고마울 따름이지. 덕분에 좋은 거래를 해서 첫 번째 금을 벌 수 있으니까, 만약 네가 마음을 고쳐먹고 자신의 기억을 팔려고 한다면 언제든 나를 찾아올 수 와라. 좋은 값을 쳐줄 수도 있어.


유유는 화가 나서 주먹을 불끈 쥐고 이 간교하고 뚱뚱한 상인을 노려보았다.


금만

경거망동하지 않는게 좋을거다. 주변에 주변에 경계기계들이 있으니 다른 사람이 어렵게 주워온 그 목숨 잃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군.


유유

너같은 놈이 함영언니를 안다고?



그러나 금만은 흥 하고 대답하지 않은 채 방금 산 물건을 운반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유유

큰일났다! 서두르지 않으면 집에 늦겠어!



울화가 치밀었지만 유유도 금만에게 따질 시간이 없었다. 작은 몸집으로 밀려드는 사람들 틈으로 다시 들어갔고, 저편에서는 사람들의 장사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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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

다~녀~왔~습~니~다~



유유는 힘없이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 야항선의 교역장은 너무 북적였다. 그 빌어먹을 사기꾼만 아니었으면 일찍 집에 왔을 텐데.



아일

끽끽~


아일이라는 이름의 역사기계체는 유유가 집으로 돌아오자 커다란 몸을 흔들며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대련(對聯)**을 유유 앞에 들어 올렸다.



유유

우와! 이거 아일이 쓴 거야!? 예쁘다...함영언니가 가르쳐준거야? 다음 선상 월간 시장이 열리면 다 팔 수 있을 것 같아~



유유의 칭찬에 아장아장 몸을 흔들며 즐거워했다.



함영

유유야 돌아왔구나, 오늘은 좀 늦었는데 아무 일 없었지?



유유의 돌아오는 소리에 안방에서 나온 함영은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유유

미안......결국 함영언니가 필요한 거 다 못 샀어.



하지만 함영은 머리를 만지작거릴 뿐이었고, 그녀가 산 물건을 넘겨받아 한쪽에 늘어놓았다.



함영

괜찮아. 어차피 나중을 위해서...유유 너를 위해 준비한거니까...



유유는 그 뜻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함영이 자신을 위한 배려였다고 믿었다.



유유

함영 언니는 이렇게 예쁘게 입고 일하러 나가는 거야?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거야?



유유는 언젠가 함영처럼 무대에 올라 자립하면서 돈을 벌어 야항선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을 얻기를 동경하면서 눈을 똘망똘망하게 빛났다.



유유

함영 언니도 날 무대 쪽으로 데려가줘! 언니가 가르쳐준 춤은 이미 많이 배웠는데, 어쩌면 조연 같은 거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함영은 유유의 모습을 보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함영

네가 배운 모습은 춤이라기보다 쿵푸 서커스에 가까웠는데...


유유

으...난 그런 우아한 동작을 못 하잖아.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무술을 가르쳐 주셨으니까.


함영

농담삼아 하는 얘기지만, 무용단에서도 너에 대한 평가가 많아.


유유

정말!? 그럼...


함영

......그래도 안 돼. 야항선이 구룡에 가까이 왔을 때, 유유 너를 비밀리에 배에서 내려 구룡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미 준비를 해놨어.


유유

저... 정말?!



유유는 정말 자신이 이곳을 떠나 엄마 아빠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함영

응...그래서 지금 무대 같은 사람이 많은 곳에는 가급적 가지 말고 나중에 물건 사고파는 일도 나한테 맡기는게 좋을 것 같아. 배에서 내릴 때 다른 사람이 알아볼 위험이 높아져서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



유유는 귀엽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갑작스런 낭보에 쩔쩔맸다.



유유

응, 알았어. 하지만 화장만큼은 잘 해줄게!



함영은 미소를 지으며 화장대 앞에 앉아 불빛을 쬐었고, 유유는 한없이 고운 함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유유

몇 번을 봐도 함영언니 너무 예쁘다.....


함영

그래?... 하지만 기계에게 있어서 '예쁘다'는 것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는데다 유유가 크면 나보다 훨씬 더 예뻐질 거야.



유유는 파우더 퍼프를 든 손으로 함영의 얼굴을 쓸어주었다. 희미하게 붉어진 자국이 남아 기계인 정체가 발각될까 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유는 오랫동안 함영에게 무대 화장을 해주었다.



유유

근데 지금도 유유는 많이 커서 많이 변했는데...진짜 구룡에 돌아와도 엄마 아빠는 날 알아볼 수 있을까?


함영

나도 몰라... 하지만 내가 보기엔 유유 너는 이전과 아무 차이 없어.


유유

변함없는 건 함영 언니야. 얼마가 지나도 이렇게 예쁠거야.



유유는 섬세하게 붓을 그려가며 아이라인을 그리는 동안, 함영의 눈빛에서 옅은 슬픔이 흐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함영

글쎄...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의 생각과 감정은 앞으로 계속 변하지만, 기계는 쉽게 '잊고' 자신의 가치를 '개조'할 수 없어…


유유

함영 언니도 그래?


함영

나도 그렇지…… 하지만 대륙에는 '기계선현'이라는 기계체와 그를 따르는 신도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들은 기계체로서 단순한 형식을 넘어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 그들을 찾을 수 있다면 나도 가능할지도...


유유

그럼 함영 언니도 나와 같이 구룡으로 돌아와서 엄마 아빠를 찾은 다음에 우리 같이 그 무슨 '기계선현'이라는 걸 찾아볼래?



함영은 요요의 환상이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웃음을 지었지만, 유유와 함께 대지를 여행하는 상상을 멈출 순 없었다.



함영

하지만 그건 전설에 불과해 몇 년, 몇 십 년이 걸려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유유

우, 그럼 엄마 아빠는 날 몰라보기는커녕 어느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셨을 텐데... 좋아, 거의 다 됐어!



유유가 립펜슬을 꺼내 주홍색 도료를 입히고 함영에게 아름다운 입술의 윤곽을 여러번 그리고 난 후,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함영

유유 네가 구조체가 될 수 있다면…. 그러면 지난 몇 년 동안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부모님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거야.


유유

구조체...?나도 구조체가 될 수 있을까?



유유는 일찍이 장터에서 사람의 몸을 기계적으로 변형한 구조체를 본 적이 있는데, '구룡파'(구룡중)라 불리는 이들은 곡님을 모시고 야항선을 관리하는 수족이며, 매우 대단한 자들이었다.



함영

할 수 있어! 사실 내가 모아둔 돈이면 얼마든지 리모델링을 해줄 수 있고, 모든 리모델링에 필요한 부품은 내가 이미 준비해 놓았으니 걱정하지마....


유유

응, 그런데...



유유는 이 이야기를 꺼내는 함영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함영

유유 너는 이 일을 빨리 결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메이크업을 마친 함영은 일어나 현관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등을 돌리고 한참을 침묵한 끝에 입을 열었다.



함영

하지만 나는 네가... 잘 생각해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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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은 중앙무대 옆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스탠드를 엉거주춤 바라보았다.



함영

그 아이한테 구조체로 개조한다는 얘기는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부모한테 돌아가야 하잖아.


함영

그런데 어째서...



인솔자

어이 함영양! 당신은 우리 무용단의 으뜸패야. 손님들이 모두 너를 보러 왔는데 근심걱정으로 손님들을 모두 쫓아낼 셈이냐!



이를 눈치챈 함영은 미소를 지으며 순식간에 평소 모습으로 돌아갔다.



함영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인솔자

음,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또 누군가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당신의 열렬한 팬들도 너무 많았으니까.



인솔자는 함영의 귀에 대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인솔자

전에 그 금만이라는 부자놈이 또 왔었는데......널 찾겠다고 지명까지 했어.


함영

네, 알겠습니다. 공연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이렇게 전해 주세요.


인솔자

알겠다~ 참, 이번엔 왜 니 여동생을 못 만나는 거니... 전에 보니까 걔 바탕이 괜찮은데 우리 무용단도 칼춤을 추는 사람이 꼭 필요하거든...


함영

아뇨... 걔는 더 이상...



인솔자가 더 물어보려 한 순간, 멀리서 큰 환호가 들리더니 다시 꽹과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가 난 뒤 서서히 멈춰서 새로운 프로그램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솔자

자,자! 일 시작했다. 여러분, 모두 준비!



인솔자는 함영과 함께...모처럼 화려한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몰려들어 무대에 오르기 전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함영

유유...




야항선의 가장 화려한 무대에서 춤을 추는 무희들이 등장하자마자 뜨거운 박수를 보냈고, 가장 큰 박수는 춤 솜씨나 용모가 뛰어난 함영에게 선사됐다.



관객

함영 씨는 그야말로 '나풀거리는 눈송이(回雪)를 의심케하는 낙포(洛浦)의 여신***, 아침구름과 같은 무산(巫山)의 신녀****, 오늘 처음 본 경성의 미인, 옛날에 들었던 경국의 미인'*****이야.



그는 옆에 낯설어 보이는 누군가가 무용 공연을 볼 때 삿갓을 끼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관객

여어, 형씨,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이름이 뭐지?



'요람'

저를 '요람'(摇篮)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스스로를 '요람'이라고 부르는 도도한 남자의 시선은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소녀를 떠나지 않았다.



'요람'

저 여자가 바로 함영인가...


관객

어째서? 형씨께서 모를 줄이야... 그녀는 요 몇 년 동안 무대에서 가장 뜨거운 무희인데, 설명하자면 하룻밤이 후딱 지나갈걸?



남자는 여전히 장광설을 늘어놓는 관중을 외면한 채 옆에 있던 한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주머니에서 작은 장치를 꺼내 자신의 귀에 꽂았다.


그의 입이 열리면서 옆에서 보기엔 무의미해 보이는 어구들이 맞물린 신호가 사람들을 뚫고 무대 위로 올라왔다.



함영

으윽....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아픔이 함영의 머릿속에 그대로 자리 잡으면서 춤 동작에서 균형을 잃었지만 이내 균형을 잃은 움직임에 힘입어 과장된 공중제비로 변모했다.



함영

(이것은.. 내 특징 코드가 외부에서 교란당한건가?)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객석을 가득 메웠지만 광기 어린 미소를 짓던 여러 사람들의 모습은 가려져 물러났다.



관객

좋아! 좋아! 어이, 아까 그 동작 봤지...어? 어디갔지?



사람들이 무대 매료된 사이 그 남자는 조용히 관객들 속으로 사라졌다.



'요람'

그래...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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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포'(洛浦)는 낙수의 여신 복비를 가리킨다. '회설'(回雪)은 빙빙 돌며 날리는 눈발인데, 가볍고 아름답게 춤추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조식의 <낙신부>에 "나풀거리기는 마치 흐르는 바람에 날리는 눈발인가하네" 라고 했다.

****'무산'(巫山)은 무산의 신녀를 가리킨다. 참고: https://m.blog.naver.com/crom234/221506392391

*****남원봉미인(南苑逢美人) - 하사징(何思澄, 481~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