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번 도시보육구역 지하실


"기쁨과 슬픔은 함께 온다. 어느 하나가 그대의 식탁에 앉아 있을 때, 다른 하나는 그대의 침대에 잠들어 있음을 기억하라."*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 -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On Joy and Sorrow)



어둠이 다시 땅으로 내려앉자 리브는 두 지휘관이 있는 칸막이에서 나와 지하실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리브

...어떻게 해야... 【지휘관 이름】이 깨어날 수 있을까요...?


어두컴컴한 달빛이 만신창이가 된 대지에 평화로운 베일을 씌워, 아직 밖으로 뛰쳐나오는 생명들로 하여금 산과 들에 가득 찬 죽음을 직시할 필요가 없게 하였다.


탐사자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떠나있는지 계산하는 게 아니라면, 보육구역의 폐쇄된 지하실에 숨어 있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서 분과 초를 재는 참조물은 시계가 아니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배고픔이다.



사람들이 생체시계를 따라 잠자리에 들 때 043번 도시 보육구역을 지키는 구조체는 쉬지 않는다.


보육구역 밖을 지키고, 구출작업에 여전히 매달려 있는 리브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 새 구조소대가 부상자를 몇 명 데리고 왔는데, 새로운 생존자를 발견해 기뻐해야 했지만, 갈수록 부족해지는 물자 때문에 마냥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무엇을 하고 싶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말하고 싶지만 듣는 사람은 제각각이었다.


가슴 속에 품은 유감이 바늘로 맺히기 전에 리브는 그것을 가늘게 엮어 자신의 일지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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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 환자 간호 기록


린지, 21세


높은 곳에서 떨어짐

개방성 골절, 피부 손상, 뼈가 밖으로 드러남

혈기흉, 비장파열, 간파열

감염성 쇼크


이전 병력: 없음


심폐소생술로 스스로 심장 박동 순환을 회복함

현재 대량의 AB형 수혈이 시급함

비장 절제술과 간 봉합술

현 조건 하에서 해당 수준의 수술 지원 불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


린지 양을 처음 데려왔을 때,

상황은 심각했었다.

들은 바로는 그녀는 자신의 연인을 보호하려다 고층 빌딩에서 추락했다고 한다.

금 양은 그녀의 보호 아래서 왼손과 발목만 약간 다쳤다.

그녀는 린지 양을 위해 수혈할 수 없었다.

그녀의 침대 앞에서만 기도할 수 있었다...


의료인으로서,

나는 원래 운명, 신과 같은 허황된 개념을 믿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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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

린지 양은 정오에 막 구조되어 돌아온 사람으로 매우 심하게 다친 상태였다.


리브

...이렇게 물자가 부족한 상태에서 중상을 구하려는 것은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 그녀의 아픔만 길어질 뿐 결말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리브

하지만 린지 양의 눈 밑에서 갈망과 몸부림을 보았고, 가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때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리브

일단 그녀를 찾으면, 온 힘을 다해 입을 벌리고, 떨면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리브

그녀는 분명히 전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리브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응급처치를 했고, 막연한 희망에도 기적이 일어나기를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다.


린지의 간호기록을 쓴 뒤 그녀는 글을 보며 한동안 침묵을 지켰고, 그로써 이 한정된 내용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녀의 생명을 살리거나 고통을 경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있는 모든 기회는 깊은 못 속에 가라앉은 자갈로 변해 물위에 유감의 잔물결을 남기며 어떤 곤경도 흔들지 못했다.


리브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아래를 뒤지며, 그간의 경험을 생각하며, 행간마다 글자를 탐색하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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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

리스트 씨...


중증 환자 간호 기록


리스트, 37세

이합생명체의 공경으로 복부 부상, 급성 신장 손상

퍼니싱 중증 감염, 상처 부위에 화농[1], 깨어 있는 시간이 비교적 적음

[1]고름


과거 병력:

폴리오 후유증[2], 척추 측만증, 오른쪽 다리 내번[3] 있음.

[2]소아마비 바이러스 후유증        [3]안쪽으로 휨(内翻, varus)

장기간의 영양 실조


보액[4] 유지, 감염 검사

[4]환자의 부족한 체액을 보충




리스트 씨는 어제 42번 도시에서 새로 온 부상자이다.

그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른다.

단맛 과자를 싫어하시는 것은 알고 있다.

새벽 2-4시에 꺠어나 눈물을 흘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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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번 여과탑에서 철수할 때 우리는 아직 구조할 시간이 남아 있고 많은 소대가 함께 있다고 믿었었다.


그래서 분명 반전의 계기 될 것이고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생명들이 과거에 머물며 추억의 허영으로 변해갔다.


굶주림과 병든 벌레알이 생존자의 몸뚱이를 가득 메우고, 미래로 뻗어가는 시간은 더 이상 기쁨을 의미하지 않고, 고난의 부화, 고통의 온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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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 환자 간호 기록


라실리아, 21세

높은 곳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 골절, 혈기흉

퍼니싱 중도 감염, 하체에 비교적 다량의 화농 발생, 의식명료


과거 병력:

감염성 심낭삼출[5]

[5]심장을 싸고 있는 막인 심낭의 두 층 사이에 수분이 쌓이는 질병


수술 여건이 부족하여 응급처치를 실시함

배농[6] 유지, 감염 검사

[6]고름을 빼냄


흉부쪽 통증을 참기 어려워 함, 진통제 비축량 부족




라실리아 양은 플란넬로 만든 토끼 인형을 들고 다니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듣자 하니 그녀의 여동생의 유품이라고 한다.

통증이 발작할 때, 그녀와 함께 이 이야기를 나누면

통증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다.

그녀가 일찍 나았으면 좋겠다.

...지휘관도 일찍 깨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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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 환자 간호 기록


칼리, 79세

분문부 위암 말기, 식도암 동시 발병, 심한 빈혈 증세

퍼니싱 경도 감염


과거 병력:

없음


대두 알레르기


리브

뭔가 더 할 수 있다면...




나는 그가 요구한 대로

병세를 사실대로 어르신에게 알려드렸다.

그가 확진 소식을 듣고 식사를 거부하기 시작한 지 3일이 지났다.

이 기간 동안 소량의 맑은 물을 마셨는데....

...정말로 그에게 말했어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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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 환자 간호 기록


카나타, 의식 연령 47세


구조 임무 중에 습격을 받아 역원 장치가 손상됨

온몸의 뼈가 골절되어 인공피부가 크게 타버림




기존 보급품으로는 카나타씨의 골절을 복구할 수 없다.

지나친 통증으로 통각 모듈을 차단하고,

휴식을 취해 의식 이탈을 피했다.

그가 다름 사람에게 휴면석을 양보해야 할 때는,

잠시나마 통각 모듈을 켜야 했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나타씨를 루시아에게 데려왔을 때, 매우 분노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줄곧 자신이 전쟁터에서 죽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우리에게 누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루시아는 오히려 그에게 말했다: "누를 끼치는 것은 상처가 아니라 당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난 후 카나타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휘관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똑같은 말을 하셨을 것이다.

지휘관이 일찍 깨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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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 환자 간호 기록


장설, 의식 연령 17세

구조 임무 중에 습격을 받아 역원 장치가 손상됨

좌측 지체가 완전히 손상, 의식의 바다가 불안정함


의식의 바다 불안정 증상은 바네사의 도움이 필요함

감염 증상 소실, 현존하는 물자로는 역원 장치 복구 불가

좌측 지체의 손상으로 인하여 의식의 바다 불안정 증상이 자주 발생



장설 양의 동료들은 이번 구조 작전 중 모두 희생되었다.

기체뿐 아니라 그녀의 의식의 바다 손상도 심각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를 소망한다...

그녀는 음악을 좋아했고,

난민 무리 중 몇몇 연주가들이 부르는 노래가 그녀를 진정시켜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주가들은 분명 악의는 없었으나,

그녀의 상처를 두려워했다.

현재는 그들의 옆방에서 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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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 환자 간호 기록


아카네, 12세


중증 퍼니싱 감염, 등 부위 여러 곳에 외상 있음


과거 병력:

양극성 정동장애[7]

[7]조울증


외상뿐만 아니라,

아카네가 가진 마음의 병은 내가 그녀를 중증 간호 대상에 넣은 주요 원인이다.

보육구역 내에는 이런 병에 대한 약물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녀가 보인 태도에 대해 편견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악의적인 목소리로부터 떠나야 할 필요가 있지만,

지하실 공간은 그녀 혼자 있을 수 없었다.

현재 나는 아카네를 장설 양에게 데려왔다.

그녀들은 그런대로 화기애애한 편이지만, 여전히 더 많은 주의를 필요로 한다.

그녀는 라실리아 양의 플란넬 토끼를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그것을 몰래 가져갈 때도 있고,

갑자기 자신의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나는 그녀에게 재료만 구하면 똑같은 토끼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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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 환자 간호 기록


제인, 51세


물자와 아이를 보호할 때 다른 사람에게 맞아서 두개골이 손상됨.

의식불명


과거 병력:

그녀의 아이는 관련 정보를 모름



그녀의 증상은 지휘관과 매우 유사했는데,

모두 외상으로 인한 출혈과 혼수상태였다.

이로 인해 지휘관과 같은 처지에 놓였고,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리 씨는 구조 당시 세 명의 목숨을 잃은 사람을 발견했고,

그들의 곁에서 제인 여사와 그녀의 아이, 물자를 찾았었다.

얼마 남아있지 않았지만,

리 씨는 그것을 아이에게 돌려주었다.

이 잔혹한 세계는,

무기를 들고 있다고 해서 그에게 특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로 뭉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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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 환자 간호 기록


바흐, 19세

이합생명체의 공격으로 양 다리가 절단됨

등 여러 곳이 예리한 무기에 찔림

중증 퍼니싱 감염, 절단면에 화종이 생겨 유합[8]이 어려움

[8]癒合, 상처가 아묾

빈혈


과거 병력: 없음


페니실린 알레르기

진통제 부족, 환부의 화농에 소독 실시

환자에게 더 큰 고통을 야기할 수 있음

감염 상황은 혈청의 도움으로 다소 호전됨



바흐씨는 낙천적인 사람이다. 고통이 심해 울부짖는 소리가 입가에 닿을 때마다,

그것을 억지 웃음으로 변하게 만드려고 한다.

바흐 씨의 동료도 그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바흐 씨가 사망했다.

사인은 등의 상처로 인한 파상풍이었다.

동반자는 그를 보육구역 뒤편 언덕에 안장했다.


...미안해, 내가 좀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다면,

...물자도 좀 더 풍부해졌을 거야.

...하지만 만약은 없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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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 환자 간호 기록


오르페, 45세


이합생명체의 공격으로 흉강 및 복강 여러 곳이 찢어짐

중증 퍼니싱 감염, 복부에 심한 화농

장기간 영양실조, 빈혈


과거 병력

공혈[9]

[9]공능성자궁출혈 혹은 기능성자궁출혈, 비정상적으로 자궁 출혈이 일어나는 질병



수술 전 출혈성 쇼크가 발생했었음

다행히 누군가 그녀를 위해 헌혈하기로 동의했고, 죽음에서 회복할 수 있었음

그러나 수술 후에도 유합되지 않아 지속적인 간병이 필요함



그녀는 43번 도시 보육 구역의 간호사였고,

여러 차례 응급 구조를 경험했었다.

상처가 심했지만 약을 갈아 끼우는 내내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다고 해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잃지 말고,

누군가를 구하지 못했다고 해서 자신에게 실망하지 말라고 말했다.

의료인은 반드시 한을 내려놓고 미래로 나아가야,

새로운 한이 생기지 않는다.

...나는 오르페 부인에게 아무 것도 털어놓지 않았는데,

모든 걸 꿰뚫어 보셨다.



리브

....


오르페 부인이 돌아가셨다.

43번 도시 보육 구역에서,

그녀에게 구조됐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임종하기 전에,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를 에워싼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마지막 한마디를 건냈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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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기무기가 강림한 날 밤, 043번 보육구역 직원과 주민들은 더 남쪽에 있는 044번 도시로 이동하려 했다.


피난 도중 이합생명체의 습격을 받아 길을 되돌아가야 했고, 뒤늦게 도착한 그레이 레이븐 소대와 함께 남았다.


043번 도시보육구역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곳의 원 거주민들에게 감사해야 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튼튼한 보호소도 없었을 것이고, 리브도 지휘관의 혈종 제거 수술을 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르페의 목숨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 소중한 생명의 물을 그릇 없이 손바닥에 안고 계속 떨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슬픔이 그대들의 가슴에 새겨진 흔적이 깊을수록 그대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기쁨은 더욱 많아진다.'


'기쁨과 슬픔은 함께 온다. 어느 하나가 그대의 식탁에 앉아 있을 때, 다른 하나는 그대의 침대에 잠들어 있음을 기억하라.'


'그대들은 슬픔과 기쁨 사이에 저울처럼 매달려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오직 그대들이 스스로 자신을 비웠을 때, 그대의 영혼은 멈추어 균형을 이루리라.'*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 -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On Joy and Sorrow)


그녀는 생이별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고, 그들의 담담하고 냉정한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리브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고, 더 서툴러 보이는 길을 택했다.


무수히 무력한 밤, 그녀는 소리 없는 눈물을 자신의 상처와 아픔에 태우고, 그것을 동력으로 하여 내일을 더욱 열심히 구축하였다.


'기쁨과 슬픔이 함께 오는 것'이라면, 이 동력이 밀어올린 결과는 그녀가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인간보다 더 강한 전투와 생존력을 가진 구조체는 여전히 종말의 재난에서 스스로만을 위할 수 없다.


퍼니싱 감염, 전투의 손실, 정비실과 에너지 부족, 고칠 수 없는 기체...


이런 뻔한 곤경을 제외하면 구조체의 마음은 기체에 의해 달라지지 않는다.


몸에 상처가 없어도 루시아는 사람들 틈에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리 씨는 구출과 임무 소통 외에는 거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인간형 생물체가 강생하는 순간,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중합 모체와 그들에게 두 배의 이상 영향을 받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지휘관이 없었다면 이곳 세 사람은 추모의 이름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네사는 지휘관의 행동을 알고 코웃음을 쳤다.


'살아있을 때 아무리 큰 기여를 했다 해도 한번 죽으면 무가치해지잖아'


그녀가 이 말을 할 때, 눈 밑에는 말할 수 없는 어떤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났었는데, 일종의 분노, 혹은…슬픔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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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

....


중증 환자 간호 기록


푸나나, 13세

독우산광대버섯 섭취로 인한 급성 간부전증

퍼니싱 경도 감염, 우발적인 혼수 상태 발생


과거 병력:

없음





응급성 간부전에 대처할 수 있는 약이 없어서,

루시아는 다른 보육시설로 도움을 청하러 가고 있다.

약을 구하지 못하면 그는 사흘도 못버틸 가능성이 높다.


....

그런데 루시아가 도움을 청하러 간 그 보육 구역에서도,

급성 간부전 환자가 있었다.

지휘관은 여전히 식사를 할 수 없었고,

생명 유지에 사용할 영양액도 부족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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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페이지 중상자 명단을 보며 소녀는 생각에 잠겼다.


중상자 기록이 겨우 11명밖에 안 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원의 순간을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앞에 푸나나라는 13살짜리 아이도 그제 밤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리브의 바쁜 나날 때문에 이 기록은 그가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남겨져 있었다.


리브는 오래 전에 피난민들의 웃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독버섯을 먹으면 환상이 온다! 뭐든지 재미있는게 다 보여요. 기회가 되면 꼭 먹어보세요!'


그녀는 웃으며 이야기하는 난민들에게, '재미로' 독이 든 균류를 먹는 것을 시도하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난민

'하! 무슨 버섯이든 간에 상관없어, 굶어 죽나 독올라서 죽나, 어쨌든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도록 해야겠지!'


'재미있는 환각'이라는 가능성에 파묻힌 현실은 쇠약으로 찾아오는 고통만이 아니라 '안나'의 죽음이었다.


그래서 너도 먹은거니? 푸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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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는 부상자 기록


당분간 생명에 지장은 없으나, 철수 시 많은 케어가 필요한 명단


브론트, 왼쪽 다리 사형 골절

소이어, 발목 힘줄 끊어짐

샘슨, 골반 골절

고스, 왼발바닥 자상 (아스피린 알레르기)

카트린, 양 눈 실명

코켈, 무릎 관절 분쇄

안나, 위출혈 및 발열

버사, 작년에 왼쪽 다리가 절단됨, 기유합, 의족 없음

호일, 심한 빈혈 및 저혈당

조앤, 골반 골절 (혈액형 P형[10])    [10]ABO혈액형 이외에 존재하는 희귀 혈액형 중 하나

산과, 발목 염좌, 왼손 골절상

무어, 왼쪽 허벅지 자상

도, 중도의 퍼니싱 감염, 양 다리에 화농

부니안, 빛 알레르기

모엠, 중도의 퍼니싱 감염, 왼쪽 다리 아킬레스건까지 화농 번짐

스트롱, 복수 팽창

우드, 요추 손상 (땅콩 알레르기 주의)

샤피르, 하지동맥경화

아드라, 중증 관절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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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떠난 사람을 향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리브는 고개를 저으며 물자 재고를 회수하는 기록에 주의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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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티, 파킨슨

다니엘, 중독증

카르멘, 저칼륨으로 인한 근무력증

버나드버, 농아

그린, 퍼니싱 감염, 다리 화종

엠마, 퍼니싱 감염, 오른쪽 신체 화종

스콧, 퍼니싱 감염, 발바닥 화종

에디슨, 만성 신부전증 중기

켄, 췌장염

(그와 그의 동료를 잠시 떼어 놓아야 하는데, 두 사람이 오기 전에 물자로 인해 갈등을 빚었기 때문임)

제이미, 이합생명체의 공격으로 인한 복부 관통상

톰슨, 실명 (밀 알레르기)

도드, 퍼니싱 감염, 종아리 화종

브라우닝, 퍼니싱 감염, 오른쪽 허벅지 화종

볼드, 복부 자상

에드워드, 외상성 기흉

프랭크, 이합생명체 공격으로 인한 무릎관절 손상

가브리, 이합생명체 공격으로 인한 양손 절단, 험한 지형 보행 시 케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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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확인하고 뒤적여도 이 기록은 늘지 않았고 모든 생기는 한결같이 물자 부족으로부터 재촉받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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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 우심부전

예일, 이합생명체 공격으로 인한 여러 곳의 외상

홀트, 이합생명체 공격으로 인한 오른쪽 복부 관통상

에디슨, 이합생명체 공격으로 인한 실명

에머슨, 이합생명체 공격으로 인한 왼쪽 다리 절단

딕, 간이보호복을 입은 채 부주의하게 적조를 밟음, 두 다리에 화종

사손, 이합생명체 공격으로 인한 왼쪽 종아리 아킬레스 건 파열

알, 폐렴, 반복적 발열

리나, 연로해서 거동이 불편함

가신, 퍼니싱 감염, 다리에 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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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연일 최소량에 맞춰 복방[11] 배합한 전해질 주사액을 투여해도 마지막 이틀치만 남을 정도로 지휘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1] 두 가지 이상의 약재를 섞어서 약을 조제함



어이! 의사 양반!


지하실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부르는 소리에 리브는 생각을 끊고, 손에 들고 있던 기록을 그대로 둔 채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어디서 아카네가 우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가서 확인 해볼래?


리브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능한 한 걸음을 빨리하여 아카네와 장설이 있는 옆방으로 걸어갔다.



리브

...아카네...



아카네

리브 언니...


리브의 품에 안겨 스스로를 고립시킨 아카네의 울음소리도 위로와 함께 풀려났다.


그러나 그녀의 울음소리는 홀 안으로 흘러들어 슬픔을 자아냈다.


세찬 재난 속에서 저마다 홍수의 자갈이 되어 자신을 파묻어가는 절망감에 물러설 길이 없었다.


공중정원의 다음 구원도 무용지물로 돌아간다면 과연 이곳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과 지휘관들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


리브는 펑펑 울고 있는 아카네를 안고 그녀의 손을 자신의 아픈 가슴에 눌렀다.


리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녀는 반전을 간절히 바라고 시련을 바꿀 힘이 있길 기원했지만 또 다시 변할 수 없는 현실에 패배했다.


리브는 아카네의 등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이 침통한 절망을 깨기 위해 오래도록 노래를 불렀다.



리브

'...바람의 시선이 되길 바라...'


리브

'...호수를 감싸는 삼천일의 밤...너의 흔적을 스치고...잠시 머물러...'


아카네

…. 리브 언니, 무슨 노래야?


리브

음… 옛날에 야전 병원에서 떠돌던 노래였는데 그때 다들 부르곤 했어.


이 노래! 인상 깊은데!


그는 자신의 기타를 안고 문으로 비집고 들어왔는데, 깊은 생각에 잠긴 장설을 보고 부들부들 떨었지만 이내 표정을 되찾고 아카네와 리브의 곁에 앉았다.


면역시대의 한 작곡가가 친구를 기리기 위해 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 노래가 퍼졌었다지.


리브

그렇군요.


노인에게는 마음을 달래는 힘을 주었어.


뭐야, 꼬맹아, 삼촌이 가르쳐 줄게~ 이 노래 불러봐~


아카네

...어, 리브 언니한테 배울래.


난 어디에서든 의사 선생님들한테 이 노래를 가르쳐줬거든.


그는 기타의 줄을 돌려 몇 개의 음절을 연주하여 노래의 첫 단락을 부르기 시작했다.


리브

기억났어...


바로 그거야.


연주가1

아니 왜 여기서 연주하고 있는 거야?


연주가2

어이.


척의 기타 소리가 옆방의 연주가들을 매료시켜 차례로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이들은 호기심과 두려운 표정으로 격리병동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의사 선생님과 노래 한 곡 얘기해봤는데 어때, 한번 해볼래?


연주가2

좋아, 불러볼래?


물론 의사가 부를거야.



리브

네? 저요...?


아카네

리브 언니가 불러주세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마음을 여는 건 기적뿐이야~


리브

...네, 좋아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지만 분출하는 게 참는 것보다 나을거야.


~우리의 노래는~울음소리를 대신할 수 있을 거야~


리브

네...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다소 서툰 목소리로 그리운 노래를 불렀다.



리브

...이 호수는... 광활하고 고요해...


리브의 노래에 악기 없는 몇몇 연주가들이 자신의 손으로 리듬을 치며 척의 기타 소리도 가미됐다.


바람의 시선처럼, 죽어버린 동료….


이 추모의 노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의 상처를 아로새긴 것이다.


아카네는 노래를 들으며 자신의 눈물을 닦고 얌전하게 장설의 침대 옆에 앉았다.


방 안의 사람들은 연주에 열중했고, 아무도 그 뒤에 호기심 어린 두 눈이 몰려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지난 시간을 그리워하며 침묵 속에서 음악을 감상하고 있다.


ㅡㅡ우리는 생명이라는 둥근 호수 옆에 흩어진 영혼이야.


ㅡㅡ다시 한번 접점을 찾을 수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어.


리브

...우리 모두가 변하더라도...


햇살, 저녁 바람, 너와 그림자,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이 되어도...


리브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 믿어….


리브

…믿을게요…찰나의 작별일 뿐이라고.


마지막 음절이 걷히고 사방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자 리브는 뒤에 많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을 알았다.


난민3

너무 그리워요, 아무도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기왕에 모처럼 기회가 왔으니, 차라리 함께 부르도록 가르치자!


난민4

환자는 쉬면 안되나요?



장설

저는 괜찮아요. 노래도 많이 듣고 싶어요.



아카네

나도!


자~ 우리의 노래는~ 울음소리 대신할 수 있을 거야~



루시아

045번과 044번 도시 순찰을 마쳤습니다. 물자를 구하지 못했지만 폐허 속에서 무르익은 밭벼를 발견했어요.


다음날 오후, 루시아는 무거운 주머니를 들고 다른 구조체와 함께 봉쇄문을 통해 비집고 들어왔다.


루시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먼저 선실에 가서 좀 쉬세요.


구조체대원

네, 당신들도 좀 쉬세요, 루시아.


손을 흔들어 지하실 왼쪽 칸막이 공간으로 향했고 현관에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 3명만 남았다.


루시아

네가 말했던 몇 가지 약은 가서 물어보았지만 거기에는 이미 비축해 둔 것도 없었어.


리브

다른 구역은요?


다 알아봤지만 다른 보육구역은 우리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았어.


리브

오늘 아주 심각한 환자가 왔어요…. 이러다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에게 물자를 가져가든 달라지는 건 없어.


리브

...


루시아

...미안해.


리브

루시아...


그녀는 루시아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리브

지금 이 상황…. 우리는 확실히, 모두를 구할 수 없어요.


리브는 마치 가시가 돋친 수면을 건너는 것처럼 힘겹게 말했다.


리브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는 수밖에 없어요.


루시아

응.


루시아

전에 말했던 플란넬이랑 솜은 좀 찾았는데, 너에게 줄게.


리브

...고마워요.


루시아

그것 말고도 안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어.


루시아

044번 보육구역도 다수의 이합생명체에게 습격당했어.


리브

…제가 본 피난민도 이 얘기를 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루시아

일부 이합생명체는 집단전술을 익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어.


루시아

우리는 그곳에서 온종일 머무른 후에야 이합생명체를 깨끗이 처리할 수 있었어.


루시아

하지만 044번 보육구역도 파괴돼 구조체만 남아 여과탑을 보수하고 인파를 대피시킨 상황이야.


리브

…모두가 잠시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점점 줄어들고 있네요.


인간형 생명체는 아직 041번 도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의 처지는 매우 위험한 상태야.


만약 공중정원의 구조가 계속 실패한다면 미리 피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현재 이 보육구역에는 다른 곳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 대피도 어려워.


서해안부터 북쪽 방향까지, 아직 파괴되지 않은 목적지는 얼마 남지 않았어.


그리고 그 두 인간형 생명체든 무리를 이룬 이합생명체든, 어느 한 쪽이 고개를 돌려 습격하면 우리는 난관에 봉착하게 돼.


리브

공중 정원의 구조가 계속 실패한다면….


세 사람은 이 가정의 문 앞에 서서 침묵을 지키며 아무도 그 배후에 있는 미래를 열지 못했다.


처음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돕고 지휘관에게 회복 시간을 주기 위해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지상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어둠 속 깊은 곳에 한 줄기 생기가 남아 있어 적은 패배할 것이고, 사람들은 살아남을 것이며, 지휘관은 다시 소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런 바람, 몸부림, 반격의 기도는 굴러떨어지는 절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루시아

실패라고 단정하기는 아직 일러. 우리가 믿을건 공중...


그녀는 '믿음'이라는 두 글자를 읽다가 갑자기 고개를 떨구고 무슨 아픈 기억이 떠오른 듯 얼굴을 숙였고, 말끝을 흐리며 소리를 잃었다.


리브

...루시아?


루시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들이 기존 전술을 그대로 유지한 채 구원을 계속한다면 더 많은 희생자를 낼 수밖에 없어.


루시아

전술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몰라.


루시아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멀지 않은 칸막이를 바라보았고, 그곳에서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이 잠들어 있었다.


루시아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직면할 수 있는 준비도 해야 해, 일단 구조를 하려면...



난민청년

와, 이 묵직한 자루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어요?


눈치가 빠른 피난민이 루시아가 가져온 벼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루시아

이건 제가 폐쇄된 도시에서 찾아낸 벼에요. 오늘 밤 그것으로 죽을 지을 거에요.


난민청년

그렇군요! 퀴나! 네가 가지고 온 냄비 꺼내봐! 이 자루에 있는 걸로 죽을 만들 수 있다면 오늘 우리 백여 명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부르는 소리에 옆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샌디

정말 다행이네요...


보육구역 주민B

오늘 죽을 좀 먹을 수 있을 것 같네.


보육구역 주민C

어쨌든 좀 좋은 소식이 있었구만!


보육구역 주민B

제가 죽 끓이는 거 도와드릴까요? 그 위에 있는 비축창고에는 휴대용 가스버너가 남아 있을 텐데, 지금 이곳 가스버너에 연료가 부족하니 가져올 수 있다면 여기서 끓여 보겠습니다.


루시아

네, 제가 가서 들어 드릴게요.


루시아

정화시킨 빗물도 수집하러 갔는데 비가 계속 오니까 물이 좀 남아 있을 것 같아요.


난민 수장

우리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 앉아서 벼 이삭을 손으로 문질러 껍질을 벗기는 일을 도와주마.


퀴나

어? 이게 쌀이 아니었네.


난민 수장

자루의 겉모습만 봐도 알 수 있는데다 구조체들도 싸우느라 벼 한 자루를 가져오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가공할 틈이 있겠는가.


퀴나

역시 대장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난민18

퀴나 녀석, 대장 말만큼은 찰떡같이 알아듣네.


퀴나

저리 가! 하루 종일 남의 등 뒤에서 지껄이고는, 귀찮지도 않냐!



군중들은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줄지어 벼 이삭 두세 그루를 수령하고 병상 틈바구니에 아무렇게나 앉아 서로 기대어 벼 이삭을 비비기 바빴다.


얼마쯤 지나 물과 정화도구, 조리도구가 준비되었고, 모두들 자신의 손에 비벼 놓은 쌀을 물에 넣고 그것이 걸러지기를 기다렸다가 불 위에 올려놓고 끓였다.


여전히 손에 든 벼 이삭을 들고 있는 노인은 손에 든 지팡이를 들고 허약하게 몸을 일으켜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지만 목소리는 힘이 없어 아무에게도 주목을 끌지 못했다.


리브

칼리 씨... 무슨 문제있나요?


그는 바로 암으로 인해 식사를 거부한 그 노인이다.


칼리

...나 이거 받아도 되나?


리브

물론이에요. 원래 모두들 먹으라고 만든 거에요.


칼리

...안 먹어. 그냥 받기만 할 게.


온 힘을 다해 리브에게 소리쳤지만 입술 언저리에서 나오는 것은 끊어진 음절뿐, 단식을 시작하기도 전에 영양실조에 시달리다가 지금은 바람 속 잔등불처럼 다음 순간 꺼질 것만 같았다.


리브

...물론...이에요.


요 며칠 이 노인이 자신의 것, 혹은 받을 수 있는 양식을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이 유일한 요구였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그 노인이 힘겹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 리브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침대 옆에 부축해 앉아 마누라와 나란히 앉았다.


노부인

고맙네 아가씨. 내가 다리가 좋지 않긴 한데 저 양반더러 굳이 일어나서 갖고 오지 말라고 충고해도 영 듣질 않아서 말이지.


두 노인은 나란히 앉아 벼 이삭을 들고 큰 솥 옆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벙글벙글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절망과 흐린 비에 의해 꺼졌던 불길이 다시 타오르고, 끓어오르는 증기와 함께 지하실에서 약동하며 연일 계속되는 억압과 어둠을 몰아냈다.


방 안에서 맴돌던 흐느낌이 멎고, 자리에 누워 있던 사람들도 천천히 눈을 뜨고 어두운 시야에서 빛의 방향을 포착했다.


어둠에 가려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둘러앉아 조그만 휴대용 가스버너와 미음 냄새가 나는 깊은 냄비를 바라보았다.


희망이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과 같을 것이다.


?

...



리브는 연인의 곁을 지키던 여성도 침대 곁에서 군중 속으로 걸어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가스버너 속의 불길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리브

금 양.



네.


그녀는 의례적인 웃음을 짜내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린지는 방금 깨어났었어요.


죽도 먹어보고 싶다며 저도 여기 모이러 오라고 했는데, 이 말을 마치고……그녀는…….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방바닥에 주르르 떨어뜨렸다.



...당신 말대로 오늘 밤을 버티지 못했어요.


그녀의 흐느낌은 점점 커지고 주변 사람들도 잠잠해지며 그 울음소리에 싸늘한 현실로 되돌아왔다.



노부인

하…어떤 이는 이 순간까지 견디지 못하고, 어떤 이는 다음 순간까지 견디지 못하겠지.


어떤 이는 병원 벽에서 교회보다 더 많은 후회와 기도를 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생명 앞에서는 아무리 기도해도 결말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린지는 왜 나를 보호하려고 자신을 저렇게 만들었는지…이렇게 되면 나는 차라리…그녀와 함께…


리브는 금의 곁으로 다가가 떨고 있는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금이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다 해도 사람들의 처지를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사의 이별 앞에서 위로의 말은 아무런 생기도 없을 뿐이었다.


생존자들이 모닥불을 둘러싸며 웃고 이야기할 때, 그들의 등 뒤에 드리워진 그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빛과 그림자는 함께한다. 어떤 이가 떠난다는 것은 그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사람, 특히 의사 한 사람이 생이별에 냉정하게 임하지 못하는 것은 언젠가 자신의 유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리브는 자신이 이성을 가지고 이 상황에 임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명랑한 교수가 이 얘기를 하다가 드물게 한숨을 쉬었었다.


???

낙관, 냉정, 생사를 희석시키는 것… 이런 생각들은 좋아.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를 타이를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요구해서는 안 돼.


???

남의 슬픔을 빼앗을 권리를 남기려 하지 말고, 남의 눈물을 너무 말리려고 하지 마. 틀어막는 것보다 전부 터뜨리는 게 더 유용하기 때문이야.


???

특히 너, 리브, 네가 죽게 될 생명을 냉담하게 대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말도 너에게 강조해서 하는 말이야.


???

자신의 슬픔을 허락하고 가슴속에 쌓인 아쉬움을 만회할 수 있는 사람을 위해 사용하길 바라.


???

일종의 '위로가 안 되는 사람에게 해주는 위로'이기도 해.




'틀어막는 것보다 전부 터뜨리는 것이 더 유용하다.'


리브

하지만... 어떻게 해야...


고개를 들었을 때 척과 그의 기타를 안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암시한다.


리브

...'울음소리 대신 노래를'?


상대방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은 채 기타 현을 울렸다.


연주가들도 척의 장단에 맞춰 연주를 섞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 노래를 배우던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인파

[~삶은 동그란 호수와 같아~너와 나는 호숫가를 서성거리는 나그네~]


인파

[~때로는 날아가는 새를 쫓아가고~ 때로는 수렁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네~]


인파

[~아무리 나아가도 나 홀로 남아있네~너는 어디에~]


모두의 합창에 리브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합류했다.


리브&인파

[~바람의 시선이 되길 바라~호수를 감싸는 삼천일밤~]


리브&인파

[~너의 흔적을 스치고~잠시 머물러~]


리브&인파

[~소리없이 저 멀리~]


루시아

... 이 노래 ...


루시아

좋은 노래네. 지휘관님도 여기 계셨으면 좋았을텐데…


그 양반 일어나면 리브한테 한 번 불러달라고 하면 돼.


루시아

그래, 그때는... 우리 넷이서 이 노래를 불러보자.


...나는 빼줄래.


루시아

음... 지휘관은 네가 노래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을 것 같은데.


...


억눌린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음악과 뜨거운 죽에 따뜻해져 합창과 손뼉을 쳤다.


노래의 가사가 그리 희망찬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짓된 즐거움도 아니다.


울분을 토해낸 뒤, 그들의 눈물도 이 노래처럼 흩어져 여운을 남겼다.


어때, 내가 말했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지만 분출하는 것이 참는 것보다 낫다고.


칼리

이 노래...


노인은 입술을 떨며 목소리가 말로 엮이기도 전에 눈물을 흘렸다.


리브

왜 그러세요?


노부인

냅 둬, 영감님... 아마 옛날 생각이 좀 난 모양이야.


노부인

나이 먹을수록 하필 집착은 점점 더 뚜렷해지는데, 이 노래나 이 벼이삭에 대한 집념은 다 똑같거든…….


이 노부인은 귀중한 자작 궐련 담배에 몸을 떨며 눈빛을 추억에 담갔다.


노부인

일찍이 황금시대, 영점원자로가 막 고장 났을 때, 목축이건 농경지건 기계로 다 돌봤었지. 그것들이 없어지니깐 식량 자원도 싹 다 끊겨버렸어.


노부인

이렇게 오래간만에, 인류가 농사랑 목축을 다시 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는데, 누군가는 해냈었지.


노부인

농·목축을 배운 사람이 많지 않고 양식기지에 출몰하는 감염체에도 저항해야 하니 사람들은 종자를 가져와 안전한 곳을 찾아 심을 것을 의논했지.


노부인

하지만 당장은 감염체를 몰아내도 굶주린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성과를 빼앗았어.


그녀는 세월의 풍파가 가득한 눈꺼풀을 들어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노부인

인류의 역사에서 보듯이 겨울에 발생한 대기근처럼 오랜 기간동안 사람들은 안정적으로 생산을 할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붙잡을 수 있는 모든 곳에 손을 뻗치는 것뿐이었어.


노부인

하늘의 새도, 땅바닥에 뛰는 쥐도 닥치는대로 잡아 입에 넣었다. 더군다나 소와 돼지, 개, 밭에 심은 벼나물은 말할 것도 없었지.


노부인

많은 감염체가 헤매는 곳에서도 목숨을 걸고 싸운 이들은 많았지만 살아 돌아온 사람은 별로 없었네.


노부인

그래서 생육은 빠르되 사람들이 싫어할만한 것들을 키우게 되었지.


그녀는 담배를 직접 입에 물고 손으로 4cm 정도의 길이를 그리며 비록 그 몇 글자는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그녀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깨달았다.


노부인

그러나 먹일 것도 얼마 남지 않았고, 이 혐오스런 벌레들은 황금시대 영화처럼 단백질 덩어리를 만들 수 있는 양만큼 생육하지 못했네.**


**영화 설국열차


노부인

비록 이것은 평소에 사람들이 혐오하는 것이라서 도둑맞지 않고 지킬 수 있었지만 사고가 나면 그마저도 동이 나기 일쑤였네.


노부인

이러다가는 모든 것이 사람들의 뱃속에 들어가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될 판이니, 그래서 우리는 그 시대를 살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게 된 수칙을 정했단다.


노부인

씨앗은 남길 것. 치어나 어린 동물은 먹지 말 것. 식물을 뿌리째 뽑지 않을 것. 새끼를 밴 동물은 잘 대할 것. 긴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것들을 방해하거나 먹이를 뺏지 말 것.


노부인

이 수칙이 퍼진 후 확실히 일부는 개선되었고, 산림에서는 살아있는 동물이 보이게 되었고 수확하는 곳에서도 새싹이 자랐었네.


노부인

그 시대를 살아온 노인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시간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줬지.


노부인

하지만 재난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았고, 상황은 매일 더 심각해지고…때로는 살기 위해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버릇을 깨뜨릴 때가 있었단다.


노부인

규칙이 한번 파괴되면 그 손실을 감수하는 나머지 사람들도 규칙을 깨뜨려야만 살 수 있는 법.


노부인

우리는 바로 그때 '치즈'를 알게 되었는데, 하... 지금도 그 이의 진짜 이름을 모르겠어. 왜냐하면 그를 만났을 때, 그는 한창 치즈 한 덩어리를 먹고 있었거든. 그 음식은 정말 보기 드물어서 우리는 줄곧 그를 이렇게 불렀지.


담배를 깊이 들이마시자 재떨이가 손가락을 타고 굴러 떨어졌지만 노파는 개의치 않고 연기 속에서 깊은 한숨만 쉬었다.


노부인

...그다지 명예로운 일은 아니었어.


노부인

그가 치즈를 먹으면서 밭가에 사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가 그런대로 넉넉하게 사는 줄만 알았다.


노부인

노친네는 살기 위해 밭에 있는 것들을 훔쳐다가 씨앗 한 톨 남기지 않아 치즈네 식구들이 겨울을 못 나게 하고, 결국 그것 때문에 하마터면 아내를 죽이고 뱃속의 아이를 잃어버릴 뻔했다.


노부인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건 아무것도 없는 밭에서… 기절한 아내를 안고 울면서 그가 부른 거였어.


노부인

우리는 감히 다가가 잘못을 시인하지 못했어. 단지 그에게 물자를 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이사를 가버렸지.


노부인

그 후로 이 습관이 남아서 무엇을 먹든지 씨를 남겨야 하는거야. 아무도 이 규칙에 연연하지 않더라도 우리 자신은 더 이상 그것을 파괴해서는 안 돼.


노부인

비록 지금은 보육구역이라는게 세워져서 거기에 어떤 농작물과 동물이든 넣어 키울 수 있지만 말이야.


노부인

그런데 너희들이 보기에 일단 무슨 일이 생기면 요런 것들은 며칠 동안 먹을 수 있을 것 같니?


그녀는 머리를 흔들어 이미 다 타버린 담배를 껐다.


노부인

됐다, 내 얘기 계속 들으면 이런 사소한 것도 재미없어. 죽 다 식겠다. 어서 먹자.


난민 어린이

네!


오랜 시간 기다리던 사람들이 노파의 이야기를 무심히 지켜보다가 순식간에 솥 속 죽보다 더 끓어올랐다.


선실에서 쉬던 구조체들도 이 소리에 놀라 칸막이에서 나왔다.


구조체 대원

저희도 여러분들의 죽을 떠드리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리브

네.


구조체 대원

밀지 말고 한 명씩 오세요.


난민 어린이

알겠어요~


각자 차례가 되었을 때 숟가락에 담긴 쌀알의 비율에 특히 신경을 쓰는 것은 물론, 냄비의 용량에 대해 낙관적인 태도로 각자의 그릇을 들고 순서대로 줄을 섰다.


금 양은 조심스럽게 죽을 받쳐들고 구조체 대원들과 리브 등에게 인사를 하고 린지의 침대로 돌아갔다.


사흘 동안 식사를 하지 않은 칼리 영감도 부인의 권유로 그녀의 사발에 담긴 죽을 한 모금 맛보았다.


샌디, 슈렉, 팡틴…. 아직 의식불명 상태인 부상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따뜻한 죽 한 그릇을 받는다.


그것은 사람들의 손바닥에 맞닿았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이끌려 모두들 자리에 앉아 모처럼의 맛을 한입 한입 맛보았다.


루시아

리브...


사람들이 손에 쥔 음식에 시선을 빼앗기는 사이 루시아는 작은 목소리로 리브를 불렀다.


리브

네?


루시아

잠깐 따라와 볼래?


리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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