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부상자들은 043번 도시 보육 구역에 남아 있다


사람들로 붐비던 지하실에는 수십 명이 남아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귀환 소식을 기다렸다.



043번 도시 보육 구역 폐쇄된 지하실 구획 3:00 a.m.


리브 등이 출발한 지 5시간 가까이 지났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난민들은 모두 대피했다.


이들은 도보로 5시간을 걸었지만 전체적인 움직인 속도가 느려 043호 보육구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수많은 이합생명체가 예정에 따라 이곳으로 향하고 있고, 3시간 후면 보육구역이 있는 곳으로 진입한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지하실에는 수십 명만 산발적으로 남아있었다. 보육구역에 있던 모든 구조체가 지상을 지키고 있었고, 지하실에는 사람들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귀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바네사는 어두운 칸막이에 홀로 앉아 수많은 전광판 사이로 이합생명체의 흐름을 모니터링하고 분석하여 보고서로 작성해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 공중정원에 보냈다.


이어 보육구역에 구조체의 전술 배치와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복귀한 후의 최적의 퇴각로를 재확인하고, 이합생명체의 움직임에 맞춰 새로운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에야 스크린에서 일어나 천천히 옆 병상으로 향했다.



바네사

...하, 수석.


그녀는 조롱 섞인 미소를 지으며 '수석'으로 불리는 사람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바네사

만약 그날, 자신의 무모함이 스스로를 이 지경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바네사는 마치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손으로 귓가를 살며시 문질렀다.


바네사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고 말했었지?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귓가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손끝을 따라가며 상대방의 목덜미에 손을 조른다.


바네사

네가 아직 깨어 있다면, 지금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혐오스럽겠지.


바네사

지금 이 순간의 너는 이렇게 연약하고, 일격을 가할 수도 없고, 내 손을 밀어주는 것마저도 할 수가 없네.


바네사

인형 몇 개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바람 속 등불로 만들다니. 처음에 널 칭찬했던 교관이 지금 이 모습을 보고 무슨 말을 할 것 같아?


지하실 곰팡이 냄새와 어울리지 않는 향을 풍기며 몸을 숙인 그녀는 정신을 잃은 사람의 귀에 기대며 속삭였다.


바네사

틀림없이 너에게 했던 찬사를 거두어들일거야, 【지휘관 이름】,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미련한 인간이니까.


바네사는 뜨지 않은 두 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앓아 누웠기 때문에 영양이 좋지 않았던 얼굴은 어두운 불빛에 사색을 띠고 있었다.


바네사

지금 깨어난다 해도 아틀란티스 사건 이후 모니터를 통해 너를 지켜봤던 사람들은 지금 너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거야.


비아냥거림이 상대의 귀에 전달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부질없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바네사

하지만 내 잘못은 없어.


바네사

이 어처구니 없는 촌극이 시작되기 전에, 너의 뒷모습은 하나의 목표였고, 반드시 격파해야 할 상대였고, 그리고…. 허무한 환상이었어...


바네사

하, 지금은 널 목표로 삼았던 내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바네사

그거 알아? 【지휘관 이름】, 난 지금 널 이렇게 죽일 수 있어.


상대방의 목을 조였던 손이 갑자기 조여졌다가 이내 풀렸다. 그녀는 웃으며 자신의 따뜻한 손바닥으로 환자의 창백한 피부를 달래듯 덮었다.


바네사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바네사

네가 정신을 잃기 전에, 나는 널 비웃었어. 왜냐하면 너무 순진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돌보고 싶을 정도로 순진하기 때문이었어.


바네사

네가 곧 패배를 경험할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자신의 천진한 이상과 이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지.


바네사

그리 빠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결국 네가 현실을 잘 깨달을 수 있는 싸움을 경험한 셈이야.


환자의 차가운 목덜미가 그녀의 손바닥 온도에 따라 따뜻해지지 않자 손을 들어 경동맥이 뛰는 빈도를 손끝으로 확인했다.


바네사

단순한 전투였어, 하마터면 명을 재촉할 뻔했지. 수석... 도대체 무엇이 네 마음을 앗아간거지?


바네사

아니면 예전에 너에게 관심을 기울이던 시간이 헛된 것이었을까? 넌 수석이 될 자격이 전혀 없었고 다른 사람의 본보기와 목표가 될 자격이 없었던걸까?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멀지 않은 곳에 놓인 전광판과 한쪽에 놓인 접이식 거울을 바라보았다.


바네사

3시간만 더 있으면 이합생명체가 보육구역에 진입하는데 그때까지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넌 여기서 완전히 죽게 될 거야.


바네사

난 밤비나타를 데리고 가면 언제든 안전하게 떠날 수 있어.


거울에 비친 사람의 그림자는 머리카락을 다시 한번 단정하게 빗어올렸지만, 눈빛은 그 정교함과는 전혀 맞지 않았고, 공허하고 목적 없이 그림자 속을 헤매고 있었다.


바네사

그건 지휘관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바네사

파오스에서 가르쳐 준 전술과 신념은 언제나 적에 맞서 살아 있는 사람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잖아.


고독한 중얼거림이 적막한 지하실 구획에 메아리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바네사

전장은 모든 사람을 돌볼 만큼 인자하지 못해. 누구든 희생을 치르고, 너도 예외는 아니야, 수석.


바네사

인간은 죽으면 명예도 권리도…. 혹은 우스운 속박도 물거품이 되버려.


바네사

넌 아무것도 얻지 못해. 네가 지켜온 사람들도 곧 널 잊게 될 거야.


바네사는 전광판이 수북히 쌓여 있는 간이 사각 테이블로 향하면서도 자신의 관심의 한 구석을 자신의 등뒤에 드리운 그늘 속에 잃어버렸다.


주워 담기 위해 다시 몸을 돌려 변함없는 병상을 바라봤다.



바네사

【지휘관 이름】, 미련하고 순진한 사람. 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너의 이상에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야.


바네사

이제 의지할 곳도 없어졌으니 내가 알려줄게. 생존자의 가치를 어떻게 극대화시키는지.



4:30 a.m.


이합생명체의 보육구역 진입이 1.5시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지휘관 바네사와 보육구역에 주둔하고 있는 4개 구조체는 모두 지표로 나가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폐쇄 지하실에는 아직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 【지휘관 이름】과 거동이 불편한 경상자 41명, 장설·카나타·린지·칼리 등 4명의 중증 환자가 남아 있었다.


그들 말고도 또 한 명의 예상치 못한 사람이 있다.



소년B

...


소년B

왜 날 쳐다봐? 계단에서 미끄러진 거 처음 봐?


샌디

...아, 아니야.


이 소년은 여러 사람과 함께 대피했어야 했는데 떠나기 직전에 혼자 지하 3층 창고로 들어가 급히 올라가다가 넘어져 자신의 뒤통수를 불룩한 계단에 부딪혔다.


발목을 삐었을 뿐 아니라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무려 한 시간 동안 의식을 잃었고, 성냥이 발견한 덕에 구조됐지만 사람들을 따라 떠날 타이밍도 놓쳤다.


소년B

네 강아지는 역시 이럴때마다 창고에 들어가는구나!


샌디

...성냥은 그냥 인기척을 느껴서 거기로 간거야. 근데 넌? 너 왜 창고에 있어?


소년B

당연히 너와 니네 개가 창고에 들어갔는지 보기 위해서 온거야!


샌디

...철수 타이밍을 놓친다고 해도?


소년B

나 그냥 보려고 올라왔는데!


그는 뒤통수와 삔 발목을 주물렀다.


소년B

넌 분명 믿지 않았겠지.


샌디

...


샌디

왜 이렇게 나를 경계하는 거야?


소녀B

네 강아지가 내 통조림을 다 먹어 치웠으니까! 그건 내 친구가 죽기 전에 나한테 남겨준거였는데...그런데 그 개가 그걸 먹어버렸다고!


슬픈 일을 말하자 소년은 울먹였다.


샌디

내가 말했잖아, 성냥이 한게 아니라고!


성냥

...끼잉.


소년B

누가 뭐라 그래! 내가 본 것만 믿을거야!


소년B

그 빌어먹을 보육구역, 이곳이 밤을 지내기 안전한 곳만 아니었어도 들어오지 않았을 거야!


소년B

'모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같이 돕자'며 내 통조림을 창고에 압수하고 너 같은 가진 것 없는 놈을 들여놓다니!


샌디

...


소년B

흑흑…그 깡통 몇 개로 버티면서 꼭 우리 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소년은 쓰러져 아무도 없는 병상에서 목놓아 울었다.


샌디

...너한테 형이 하나 더 있구나.


소년B

맞아...세상에서 제일 좋은 형이었어...


소년이 흐느끼며 품에서 꺼낸 허름한 메모의 절반은 페이지가 떨어져 나갔고, 남은 종이도 겹겹이 쌓인 종이테이프에 의지해야 겨우 메모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소년B

형은 나에게 매일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그려주고...


그는 손으로 얼마 남지 않은 종이를 쓰다듬어 주었고, 그 위에는 다양한 종류의 것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푸짐한 구운 닭, 새 옷, 온전한 오두막, 침대, 축구, 꽃밭…. 상냥한 여성도 있다.


그림뿐 아니라 글씨도 여러 개 적혀 있지만 같은 말이 반복되어 있었다.


소년B

글자 읽을 줄 알아?


샌디

조금밖에, 너는?


소년B

나도, 엄마가 우리에게 글씨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고 가버렸어. 나와 형은 아직도 글자를 잘 몰라.


그는 흐느낌을 멈추려고 애쓰며 콧물을 들이마시고 페이지의 상냥한 여성과 그의 옆 글자를 가리켰다.


소년B

형은 이 노트가 하늘에 있는 엄마에게 소원을 전달해 줄 수 있다고 말했어.


소년B

봐봐, 엄마가 형과 나에게 가르쳐 준 주문인데, 그림 옆에 이것만 써주면 엄마는 내 소원을 들을 수 있대.


샌디는 소년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지만 주문은 아니었다.



샌디

....'미안해'...


소년B

뭐?



샌디

...'널 낳아서 미안해.'


소년B

무슨 소리야?


샌디는 입을 딱 벌리고 빽빽한 글씨들을 읽어내려다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숙였다.


샌디

아, 아니야. 헛것을 봤어.


소년B

치, 난 한 번도 이 소원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준 적이 없었는데. 모처럼 너에게 보여줬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구나.


샌디

미안…그런데 왜 보여줬어?


소년B

왜냐면... 날 구했으니까?


그는 어색하게 담요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몸을 돌려 웅크렸다.


소년B

됐어, 엄마도 없고 가족도 없는 너 같은 놈한테 이런 거 뭐 하는 거야, 어쨌든 넌 개한테 가서 훔쳐 먹으라고 하는 김에 나를 본거잖아.


샌디

...성냥이 아니라...


소년B

짜증나!


소년B

...난 이미 알고 있어.


소년B

...며칠 동안 너와 그것만 보고 있었어. 난 이미.... 알고 있어.


그는 이미 진실을 알아차렸을까? 샌디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을 잘못 본 줄 알면서도 사과도, 잘못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소년B

빨리 자!


그는 초조하게 침대에서 몸을 뒤척였는데 다친 뒤통수와 발목까지 아팠다.


샌디

응.


샌디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지하실 깊숙한 곳을 바라보며 창밖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그가 비워진 침대에 누워 잠시 쉬려고 할 때 반대편 구획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안돼에에에에에에!! 가지마!!! 린지!!!


그 비통한 외침 속에 또 한 사람의 황혼이 가슴에 안겨졌다. 


...새벽이 오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