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046번 도시로 이전함


동 틀녘 흰 빛은 그들이 도시의 비탈길이 이미 용솟음치는 적홍색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바라 보게 비추었다.



5:38 a.m.


이합생명체의 광풍이 보육구역으로 밀려들기 직전에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구급차 두 대를 몰고 먼저 뛰어들었다.


이미 길을 익혔기 때문에 차에서도 추가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아 그들이 가는 길을 질주해서 돌아오는 데 3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루시아

돌아왔습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3명이 차량을 운전하던 산데카와 함께 폐쇄된 지하실에 뛰어들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구획 깊숙한 곳에서 간간이 들려왔고, 처참한 고통은 화재 때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매캐하게 코끝을 찡하게 한다.


리브가 구획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핏자국이 낭자한 병상에 생기를 잃은 한 사람이 누워 있었고, 금은 그녀의 곁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다.



리브

...


팡틴

리브.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소리 없이 뻔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ㅡㅡ 린지가 죽었다.


리브

금 양...


고개를 든 상대의 눈빛은 죽은 자와 다를 바 없었다.


리브

곧 이합생명체가 몰려 올 거예요. 어서 가야돼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이미 싸늘해진 린지의 손목을 꼭 쥐었다.


리브

...



전 항상... 린지가 왜 절 구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린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한순간 당신을 원망하기도 했어요...


우리 모두 그때 떠나버렸다면 이별과 부상에 시달릴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하면서요.


'가망 없는 환자를 치료한다는 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리브는 받은 적이 있다.


평온한 죽음을 앞두고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고통의 연장이다.


그러나 그녀는 생명에 대한 갈망, 입 밖에 내지 못한 린지의 몸부림을 봤다.


그래서 리브는 이 '잔인함'을 선택했다.


리브

...그 이후로 린지 양이 깨어났던 적 있었나요?


떠나기 전에 깨어난 적이 있지만 몇 마디만 하고...


팡틴

어떤 말을 했나요?


'괜찮아 보여서 너무 기뻐, 내 목숨이 낭비된 게 아니었어...'


'급하게 따라오지 마'...


'나는 겁쟁이니까'...라고요.


저는 그녀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저를 구했어야 됐냐고 물어보려고 했어요.


...왜 이렇게 되버린거냐고!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린지!


그녀의 눈물은 끊임없이 내리는 빗방울처럼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리브

...겁쟁이...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그런데 여기 혼자 죽음을 맞더라도 다른 사람을 지키겠다는 겁쟁이가 있다.



리브

아직 린지 양을 잘 모르지만….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남을 구하려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상대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리브

그녀는 틀림없이…당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그 말을 당신에게 전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몸부림쳤을 거예요.


...그런가요...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잖아, 린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통에 젖은 것처럼 금은 리브의 가슴에 안겨 흐느꼈다.


리브

그러니까…꼭 살아주세요…. 그것도 린지씨의 바람이에요.


네...


그녀는 울음소리를 내면서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

이러다 늦겠어, 리브, 어서 모두를 데리고 떠나자.


리브

금 양, 따라오세요...!


...


그녀는 여전히 흐느낌을 멈추지 못했지만 린지의 침대 옆에서 일어나 리브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팡틴

네, 갑시다.



바네사

어째서 굳이 죽고 싶어하는 사람을 설득하려는 거야? 설마 그 두 대의 차가 이곳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많은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바네사의 말은 모두를 현실로 끌어들였다.


바네사

더구나 우리에겐 예상치 못한 사람과 개 한 마리가 있어.



소년B

저, 저는 이런저런 이유로 후퇴하는 행렬을 따라잡지 못했어요. 발을 삐기도 했는데….


소년은 주위 사람들과 샌디 옆에 있는 성냥을 둘러보았다.


소년B

...저 탈 수 있을까요?


바네사

그럼 그들이 아직 한 번 더 올지 안 올지를 봐야되겠는데.


루시아

하지만...


바네사

이제 곧 이합생명체가 오겠지?


루시아

네, 현재 관측되는 양이 엄청나서 저희의 힘만으로는 사람들을 보호하면서 대응할 수 없습니다.


바네사

그런고로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지하실 안은 조용했고, 저마다 신경을 곤두세우며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네사

먼저 너네 지휘관을 데려가고, 그 다음 나머지 사람들은 형편이 되는대로 집어넣고, 탑승할 수 없는 사람은 여기에 남겨.


바네사

그리고 누가 부축해야되는 중상자들도 있는데...


사람들은 그녀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지하실 출구로 우르르 달려들어 하마터면 바네사를 쓰러뜨릴 뻔했다.


바네사

...하, 좋아. 너희들은 어서 가서 지휘관을 구해.



세 사람이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을 데리고 지상으로 나왔을 때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리브

밀지마세요...!


이합생명체의 소리는 이미 점차 들려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때문에 긴장에 빠졌다. 리브는 혼잡한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어 차량이 전복되지 않도록 보호했다.


리브

줄을 서주세요!


상처의 영향으로 리브의 모습이 사람들 사이에서 흔들렸다.


일부는 그녀의 저지로 간신히 질서를 회복했지만 여전히 부상 부위를 끌고 앞 다퉈 차량 문을 밀고 들어가 구급차 전체가 흔들렸다.


부상난민23

밀지 못할리 없잖아!! 이걸로는 저 많은 사람들을 다 태울 수 없어!!


부상난민24

밀치긴 뭘 밀쳐?! 너 이 정도밖에 안다쳤으면서! 내 자리까지 뺏을 셈이냐!


부상난민25

당연히 뺏어야지! 이 소리좀 들어봐, 지진이라도 오는 것 같은데! 얘네들 온다!!!


부상난민26

그거 너네들이 밟아서 나는 기척이야! 넌 그러고도 사람이야?! 저기 올라가려고 내 어깨도 밟는거냐!!


부상난민27

이 몸은 오늘 인간을 그만두겠다! 어이쿠! 올라갔다!


어지럽고 혼잡한 가운데, 사람들은 서로의 상처에 신경쓰지 않았고, 그들은 짐짝처럼 객차를 가득 채웠다.


그럼에도 구급차에 오르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칼리&금

...



소년B

저도 자리 좀 비켜주세요!


부상난민27

꺼져! 애초에 부상자도 아닌데 자업자득인 놈까지 돌볼 여유 없어.


부상난민35

그런데 이 객차 안에 개가 한 마리 있는데, 아니면 이 개를 내려보내서 쟤랑 바꿔 태울까?



바네사

정말 장관이네. 고기로 가득 채운 샌드위치 두 개를 보는 줄 알았잖아.


바네사는 지하실 입구에 서서 조롱하는 태도로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바네사

그렇다면 이렇게 과적된 차량은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이합생명체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차량에 탄 이들은 감히 대답하지 못했고, 모두 숨을 죽였다.


바네사

여러분들은 다른 몇 명의 중상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그만이겠죠. 그런데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의 자리도 없는데,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당신들을 위해 봉사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리브

지휘관은 제가 맡을 수 있습니다. 제 무기는 손으로 통제할 필요가 없어 다른 사람보다 편해요.


그냥 나한테 맡겨. 넌 자신 먼저 돌보고 있어. 더구나 부상자들도 있잖아.


바네사

그래, 네가 말한 대로 하자.


바네사

그럼, 타지 못한 사람들, 유감스럽게도 당신들은 여기에 머무르게 될 거예요. 우리 다음 생에 다시 만나요.


소년B

싫어!! 날 버리지마!!! 우리 형도 찾아야 해!! 난 반드시 형을 찾아야 돼!!!


소년B

미안해요!! 무모하게 굴지 말았어야 했어요! 제발 아무데나 좋으니 날 좀 데려다줘요!!



샌디

...


그는 절망적으로 구급차에 무릎을 꿇은 뒤 객차를 가득 메우고 차창과 지붕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고개를 들어 간청했지만 모두들 얼굴을 돌리지 않고 울음소리를 무시했다.


소년B

제발 마지막 소원이에요!! 죽기 싫어요!!


리브

두려워하지 마, 너는 보호복을 입고 숨어, 우리는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거야, 반드시 널 데리러 올게!


소년B

아, 아니, 절 버리지 마요, 제발! 제발!!!


리브

...난...


샌디

리브 누나, 정말 다시 올 거예요?


리브

...반드시 올거야!



샌디

그럼... 제가 자리를 비킬게요.


샌디는 성냥을 가지고 혼잡한 객차 속을 뚫고 나왔다.


샌디

….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먼저 가.


소년B

샌디…! 고마워…그래, 미안해…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너를 오해했어.


그는 샌디를 끌어안고 눈물을 콧물과 함께 멈추지 않았다.


샌디

아니…괜찮아.


바네사

결정됐나요? 다른 분들은?


리브

금 양...


괜찮아요. 여기 남아서 린지와 함께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요 녀석아!


늙은 목소리의 주인이 객차 안을 비집고 나왔다.



노부인

너는 가라, 얘야, 너는 아직 젊고…그리고 너를 위해 목숨을 건 사람이 있잖니.


아주머니...


노부인

나도 늙어서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이 영감탱이 홀로 두기 아까우니 그냥 남아서 같이 있겠네.


칼리

...


하지만...


노부인

만약 이 아주머니에게 미안하다면,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마.


그녀는 품속에서 그녀와 칼리가 죽을 끓일 때 남긴 벼이삭이 들어있는 빽빽한 포장을 꺼냈다.


노부인

언젠가는 네가 나가면, 이 벼 이삭을 심을 곳을 찾아줘…. 더 바라는 게 있다면, 앞으로 무엇을 먹든지 씨앗을 남겨서 우리가 입으로 전해왔던 수칙들을 모두에게 전해주렴.


....네.


노부인

착한 아가씨, 그럼으로써 우리는 가치가 있는거야.


그녀는 주머니를 금의 손에 건네주고 어깨를 두드렸다.


노부인

가자, 그래 얘야, 가자.


금은 고개를 끄덕이고 벼 이삭이 든 자루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객차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산데카

갑시다. 장설은 제가 업겠습니다. 카나타는 대장이 맡아주세요.


구조체 대장

알았다.


노파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소년은 떠나기 직전 자신의 노트를 꺼내 마지막 여백을 찢어 펜과 함께 샌디에게 건넸다.


소년B

이거 선물이야. 이건 너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


샌디

고마워... 잘 가.


이곳에 남은 세 사람은 루시아와 바네사를 운전석에 태워줬고, 과적된 차량들은 무거운 소리를 내며 결코 낙관적이지 않은 속도로 멀리 떠났다.


차량이 보육구역을 빠져나가는 순간, 그곳에 남겨진 사람과 린지가 있는 쪽을 돌아볼 때 문득 든 냉담한 생각이 리브의 가슴에 불쑥 꽂혔다.


ㅡㅡ정말 늦은걸까?


리브

...


ㅡㅡ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리브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어......


한 명이라도 더 실을 수 있었다면…. 그러나 이제 다른 선택지가 없다.


리브는 괴로운 듯 고개를 돌리라고 스스로에게 강요하며 앞길 위로 시선을 옮겼고, 부러진 다리는 한 걸음 한 걸음씩 극심한 통증을 주면서도 차량을 따라갈 정도의 속도를 유지하며 달렸다.


리브

빨리 돌아올 수만 있다면… 모든걸 다 할 수 있어!



5:58 a.m.


적재량을 초과한 구급차 두 대가 6분 동안이나 전속력으로 달려갔지만 돌아보니 여전히 보육구역의 완전한 윤곽이 보였다.


바네사가 계기판의 주행속도를 확인해 보니 시속 37km에 그쳤었다.


이 무의미한 도주를 바로잡기 위해 먼저 달리던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바네사

이 속도로 달리면 우리는 이합생명체의 광풍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객차를 가득 메운 사람들, 객차 밖을 구경하는 사람들, 역시 인간인 만큼 입장이 같았어야 했지만 객차 안의 눈은 공포로 가득 찼다.


바네사

객차 한 칸에 15명이 남을 때까지 내려오도록 하죠.


부상난민35

15명이라니!! 장관님!! 우리 여기 40명 넘게 껴있는데!! 나머지 사람더러 죽으라는 거예요?


바네사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여기서 죽을 걸요.


붐비는 객차 안에서 터져 나오는 고막을 찢을 듯한 항의 소리가 바네사의 눈에는 여분의 입이 수없이 자라고 있는 일그러진 상자처럼 보였다.



루시아

이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바네사

어? 그럼 어떻게 할 거야?


루시아는 즉답을 피했고 옆에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리브와 리의 동의를 구했다.


루시아

저희는 이곳에 남아 이합생명체를 막고 다른 한쪽으로 유도해 철수할 시간을 벌겠습니다.


바네사

정말 놀랍지도 않은 대답이네, 【지휘관 이름】이 가르친 인형다워.


바네사

너흰 이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는 있어? 너희들의 순진함은 지휘관의 목숨을 잃게 할 거야.


루시아

그 위험성을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실력을 믿고 싶습니다.


바네사

실력? 피로에 찌든 구조체 세 개, 심지어 하나는 또 다쳤지.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천진함과 오만함은 참으로 일맥상통하네.


루시아

우리는 이미 많은 사람을 잃었고...그렇기에 위험하더라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바네사

이게 바로 '수석'이 멘토링한 내용이야? 네 품안에 있는 이 바보는 자신의 실력을 잘못 헤아렸기 때문에 너희같은 폐물들을 구하려 한 거야.



루시아

지휘관을 모욕하지 마세요!



그 '바보'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지 않았으면 당신의 목숨도 보전할 수 없었겠죠.


바네사

...


바네사

...허, 그러니까 지휘관이 간신히 지켜준 목숨을 버리고 이런 가치 없는 피난민을 구하시겠다?


리브

목숨이 있는 것은 모두 가치가 있습니다.



리브

우리는 함께 똘똘 뭉쳐 수많은 장애물을 뛰어넘을 것이며, 어려움과 두려움 때문에 전쟁터에서 도망치지 않을 겁니다!


바네사

...도망치지 않겠다...하...


이 말을 듣고 그녀는 실종된 테시우를 떠올렸다.


그가 중상을 입고 돌아오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탈영병들과 같은 길을 걸은 것인지 바네사는 몰랐고 굳이 알고픈 흥미도 없었다.


일찍이 청정백로소대는 전술과 이익 극대화 수단으로 대열 사상률이 낮아 목숨을 아끼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승리할 수 없는 전투라면 중상이든 탈주든 가능성이 있다.


인형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을 한 두번 봐온 것은 아니었지만, 도망치려 하고 주인의 명령을 거역하는 인형들은 예외없이 바네사의 조련을 받았었다.


'주인을 거역하는 인형은 교훈을 새길 수 있도록 형벌을 줘야 한다.'


그녀는 시종일관 그 도리를 굳게 믿고 있으면서도 수하의 인형의 반란을 막지 못했는데, 그때 그녀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비열함과 삶에 대한 탐욕,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뼈에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시각에서, 【지휘관 이름】이 정신을 잃었다면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살아남기 위해 탈출할 기회를 노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레이 레이븐은 그러지 않았고 도리어 그녀와 인근 피난민을 구조했고, 주인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기도 했다.


해리조, 시몬....야타, 옐레나 등도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임무를 완수하고 가능한 한 구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구한 후에야 공중정원으로 돌아갔다.



바네사

도대체 뭘 위해...



파오스를 졸업하기 전, 그녀가 보기에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한 교관이 한 마디 했다.


???

모든 생명은 특수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들은 이 세계를 이루는 사람이다.


???

최고의 지휘관이 되고자 생명을 경멸하고 무가치한 것을 지양하면, 언젠가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이 교관이 철두철미한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했었다. '우호협력'을 주창하기 위해 교실에서 으름장을 놓기까지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술이 실패하고 곤경에 처했을 때 그녀는 지금까지 '우호협조를 주창한다'는 말을 떠올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보기에 어울리지도 않는 '바보'가 구조체의 품에 가만히 누워 있었고, 잠에서 깨지 않고 아무 말을 하지 않는데도 '인형'들이 묵묵히 규율을 준수하고 있는 이 때....


그녀는 오히려 그 말을 떠올렸다.


바네사

...그게 우리의 다른 점일까?


그녀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어떤 환영을 잡으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바네사

너희들은 가라, 전속력으로 철수하고, 이합생명체는 청정백로소대가 맡는다.


루시아

...뭐라고요? 하지만 당신들은...


바네사

네네, 밤비나타와 저만 남았네요, 하지만 대책이 없는건 아니야.


그녀는 자신의 전술 배낭을 흔들었는데, 거기에는 그녀의 마지막 승부수가 놓여 있었다.


밤비나타는 이런 상황에 낯선 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인형'이 실종을 바탕으로, 최소의 희생으로 승리한 공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목표를 뛰어넘어 인형을 곁에 두는 '동료'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바네사는 밤비나타에게 배낭 속의 물건을 넘기지 않고 자신 스스로를 체스판 위에 올려놓았다.


루시아

당신이 무엇을 준비했든 간에 수천 수만 마리의 이합생명체를 상대하고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바네사

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죽도록 순진한 그 지휘관과 달리 자신의 실력을 오판하지 않아.


바네사

【지휘관 이름】을 데리고 이 사람들과 함께 가, 내가 요 성가신 일을 다 끝낼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너희들 아직 도착한거 아니야.


리브

...하지만...


바네사

혹시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을까봐?


바네사

너희들이 여기 남아도 폭발에 휘말려서 화염의 잿더미로 변하는 것밖에 없어.


루시아

그럼 당신은요?


바네사

나는 나만의 방법이 있지.


바네사

안심해, 나는 여기서 죽지 않을 테니까, 나를 대신해서 그쪽 인사불성 수석에게 전하기나 해...


바네사

오늘의 내가 준 생명의 은혜를 꼭 명심하고, 내가 돌아올 때 모든 것에 다 감사해야 한다고.


리브

바네사...


가자, 이건 그녀가 결정한 거야.


루시아

감사합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사람들에게 나른하게 손을 흔들었고, 침묵 속에 두 대의 차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와 밤비나타의 시선 끝으로 차량이 서서히 사라지자 이합생물 군체의 발자국 소리도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네사

먼저 주의를 끌어.


밤비나타

네, 주인님.


밤비나타는 바네사를 안고 단거리 비행체를 향해 뛰어 올랐다.


동이 트는 흰 빛에 힘입어 그녀들은 도시의 비탈길이 이미 용솟음치는 적홍색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