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생존자와 한 명의 죽은 사람만 남았다.


"자유를 위해 그대들이 진정 버리려 한 그 모든 것들은, 알고보니 그대 자신들의 파편 이외에 무엇이었는가?"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 - 자유에 대하여(On Freedom)




6:13 a.m.


대부분이 철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표면에서 어떤 폭발로 인한 진동과 소리가 들려왔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리가 잦아들자 순식간에 온 세상에 이합생명체의 발자국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지하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알아채지 못한 듯 보육구역을 넘어 폭발음이 들리는 쪽으로 달렸다.


발소리가 무려 30분 넘게 계속되었고 더 멀리서 또 다시 몇 번의 굉음이 들려왔다.




지하실에 남은 노인과 소년은 위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합생명체의 발자국 소리가 사라지자 모든 여과탑 표시등이 빨간색으로 변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빨간색 표시등이 어떤 손상에 반응하여 나타나는 것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그러자 안전한 공기 수송이 중단된 여과탑에서 고농도의 퍼니싱 바이러스가 쉴새없이 몰려와 보내와 지하에 숨기 시작했다.


노파는 칼리를 부축하고 지상으로 돌아갔었지만 30분 만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노부인

밖으로 나가보니 온통 적조투성이에 진흙처럼 길바닥에 발라져 있고 구덩이에 고여 있구먼.


그녀는 발목 아래 이미 적조가 가득 묻어 부식되기 시작한 자신의 다리를 가리켰다.


노부인

밖에 더 가려고 해도 이미 에워싸여서 나갈 수가 없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병상에 앉아 있었지만 칼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노부인

영감님, 좀 자.


칼리

...아파...


노부인

알아. 나도 아파. 길 안내를 하다가 적조를 밟아서 발이 썩어 버렸어. 아마 오래 살지도 못할 거야.


노부인

이제 자자, 좀 자면 아프지 않을 게야.


칼리는 떨리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텅 빈 병상에 누웠다.



11:00 a.m.


모두가 철수한 지 5시간 만이었다.


지난번 속도라면 이제 돌아오는 길이겠지?


여기까지 생각한 샌디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는 손을 들어 성냥의 머리를 문지르며 부드러운 감촉으로 위의 배고픔을 달래려 했다.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노파가 바짓가랑이를 들추자 퍼니싱 바이러스로 인해 다리를 완전히 부식되었다.


리브는 가기 전 몇 안 되는 재고에서 혈청 2개와 통조림 1개를 남겼었다.


세 사람은 서로 양보하다 결국 통조림을 샌디에게 주고 혈청은 외출한 노부부에게 주기로 했다.


하지만 샌디는 당장 통조림을 뜯지 않았고, 이 귀중한 자원을 마지못해 남겨두고 먹으려 했다.



샌디

...


자원 배정을 마친 소년은 두 노인을 떠나 옆방으로 들어갔다.


칼리가 잠든 뒤에도 그 노부인은 무언가를 회상하듯 눈을 뜨고 있었다.



4:00 p.m.


모두가 철수한 지 10시간이 지났다.


방호복을 입어도 샌디는 다리에 가뜩이나 아물지 않은 상처가 빠르게 짓물러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퍼니싱 농도 측정기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상처에서 계속 스며 나오는 고름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샌디

얼마나 남았지...?


지난번 속도라면 이미 이곳으로 돌아왔을 텐데 전혀 소식이 없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이동속도가 느린 거겠지? 샌디는 이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샌디

044번 도시 사람...


이들이 도보로 떠나기 전, 샌디는 리브에게 044번 도시의 여과탑 역시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그는 리브와 그레이 레이븐 소대 사람들이 여과탑을 잘 고칠 것이라고 믿었고, '안전 경로 선택'을 통해 적조를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 스스로 이런 안전 경로를 찾을 수 있을까?


044번 도시의 퍼니싱 농도가 여기만큼 높을까?


그는 이 두 가지 문제를 이리저리 뒤척이며 생각했지만 '아니'라는 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두 다리가 회전하는 초침을 따라 참을 수 없는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그는 시트와 베개를 잡아당겨 주의를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성냥

끼잉...


성냥은 베개 옆에 꼭 쥔 그의 손을 걱정스럽게 핥아주었다. 그것은 평소의 가장 큰 위안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런 실질적인 작용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떨리는 손을 들어 안아주려고 애썼다.


샌디

...괜찮아. 인간도 동물처럼 퍼니싱 바이러스를 견딜 수만 있었다면... 감염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샌디

하지만 괜찮아. 나도 잘 될 거라고 믿어. 리브 누나가 말했잖아.


성냥

....왈.


샌디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성냥 머리 위로 떨어졌다. 미끄러지지 않고 그대로 성냥의 부드러운 털 속에 흔적도 없이 스며들어 그의 슬픔을 하나의 비밀로 감쌌다.


샌디

잘 될 거야...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품속에서 그 소년이 선물한 펜과 종이를 꺼냈다.


샌디

정말 소원을 들어준다면...


샌디

...난...여기를 떠나고 싶어...자유를 바라...


헛수고인 줄 알면서도 환상을 품고 '소원을 이루어 주는' 종이 한 귀퉁이에 초라한 날개를 그렸다.


샌디

하늘로 날아가게 해줘...적조를 건너서...


그는 깊은 못에서 지푸라기를 잡은 사람처럼 종이 위의 날개를 또 한 번 그렸다.


샌디

성냥과 함께…여기를 떠나…우리들을 받아줄 수 있는 곳으로...


그러나 배고픔과 통증, 퍼니싱 감염에 시달리며 그려질수록 시야의 날개는 희미해져갔다.


몽롱해져가는 가운데 샌디는 선홍색 진주 한 송이가 종이에 떨어져 날개에 절망의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피였다.



9:00 p.m.


어둠이 깔리자 피에 젖은 땅도 지하실과 함께 캄캄한 사색에 잠겼다.


15시간이나 기다렸는데도 보육구역 밖에는 희망의 소식이 없었다.


긴 잠에서 깨어난 칼리는 곁에 있는 여자를 툭툭 치려 했지만 이상하리만큼 차가웠다.


칼리

...리...


그는 불명확하게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만 옆의 차가운 몸뚱이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칼리

...


시간은 결국 너무 빨리 흘렀고, 그는 그녀에게 작별을 고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황혼을 지나 평화로운 밤으로 갔다.


희미한 빛 속에서 노인은 늙은 피부, 짓무른 상처에 닿아 마치 기억 속의 윤곽을 다시 짜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고, 질병과 노쇠로 많은 추억이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졌지만, 아직 어렴풋이 남아있는 이야기들은 소리 없이 같은 이름을 속삭이고 있었다.


칼리

...리나...리나...


눈물을 사이에 두고 이름의 주인을 바라보던 그는 자신의 거친 손바닥을 차가운 손바닥에 강하게 밀어넣고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서 누웠다.


칼리

기다려...같이 집에 가자...


굶주림, 암, 감염, 노환…. 그는 티켓을 움켜쥐고 아내의 뒷모습을 향해 전력을 다해 뒤쫓아갔다.






6:00 a.m.


따스한 미풍이 아침 햇살과 함께 재난이 무성한 땅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상징은 썩어가는 소년에게 그리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그를 고통에서 탈출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밤과 함께하는 수면뿐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철수한 지 24시간이 지났는데도 지하실의 파수꾼들은 희망적인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샌디

...길에서 무엇을 만난 걸까...?


샌디

아니면...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걸까...


그는 그동안 수없이 잠을 청했지만 깊은 잠에서 통증과 배고픔에 사로잡혀 깨어났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쇠약해진 몸뚱이에 꽁꽁 묶여 실패만 할 뿐이었다.


샌디

...


샌디

따라간 사람이 많은데…문제가 생기면…안되는데…


샌디

하지만 난…괜찮아…내가 살아있기 때문에…그 자체로 좋은 일은 없어…



리브

...너 지금 무슨 말을 한건지 아는거야?


얼떨결에 리브가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그 기억은 허무의 바다에 잠겨 갈피를 잡지 못했다.


길고 절망적인 밤을 겪기 전 자신이 겪었던 고통은 그가 병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샌디

...내가 뭐라고... 했더라?


단 한 마디의 메시지를 찾던 소년은 살갗을 벗기는 고통 속에 몸을 움츠렸고, 온몸이 짓무르는 극심한 고통에 죽을 지경이었다.


…이왕 죽는게 낫다면 죽음을 껴안아라….


하지만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면 어디서도 아프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샌디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샌디

그는 자신을 타일렀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몸부림치고 있었다.


성냥

왕!


샌디는 생각이 다 흐려질 즈음 누군가 접근한 듯 지하실 문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샌디

...그들이 돌아왔어!




오랜 기다림의 실마리가 강력한 흥분제마냥 그가 몸통의 통증과 허약함에서 벗어나 몸부림치며 일어나게 하였다. 기쁨에 겨워 비틀거리며 옆방에서 자고 있는 노부부에게 다가갔다.


샌디

…칼리 할아버지…그들이 돌아왔어요!


샌디

할아버지?


성냥

끼잉...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눈치챈 샌디는 의구심을 안고 두 발짝 앞으로 나서 그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리려 했지만 핏기 없는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샌디

...


어른들의 모습을 흉내내 응급처치를 하고 싶었지만 이미 굳어버린 몸이었다.


그가 노부부의 옷 한구석을 살짝 들추자 두 사람의 피부는 이미 썩은 적조로 변해 있었다.


…자기 몸의 상처와 똑같이.


샌디

성냥...그 분들도...


성냥

...


샌디

괜찮아, 우리만이라도...꼭 여길 떠나야 해...


옷가지는 이미 고름과 함께 굳어 버려 살짝 잡아당겨도 뼈를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준다.


그러나 문을 닫은 뒤의 희망을 위해 다시 지팡이를 걸고 간신히 문을 닫았다.



무거운 굉음과 함께 폐쇄되었던 현관문이 열렸다.


새벽바람이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지하실로 스며들어 문 밖에서 부서져버린 희망을 상기시켰다.


방금 그 기척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들려왔을까? 바람과 폐허가 합쳐진 장난? 아니면 그의 환상?


샌디

다들 어디야?!


목쉰 외침이 인적이 없는 보육구역에서 울려 퍼졌지만 결국 바람과 함께 되돌아왔다.


샌디

...근처에 있겠지?


샌디

다들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무심코 이곳에 들어온 스캐빈저일 수도 있어...


희망을 버리지 않은 소년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서 지하실에서 잠든 사람들을 뒤로한 채 기어 올라깄디.



10:00 a.m.


지하실을 벗어나 보육구역 전체를 샅샅이 뒤졌지만 건물 꼭대기에 오를 때까지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출발한 지 28시간 만이었다.


샌디

...아무도 오지 않았어.


샌디

모두 죽었어.


그는 절망적으로 탑 꼭대기에 엎드려 아래쪽 회(回)자형 건물과 그윽한 천정을 바라보다가 울려고 해도 눈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샌디

...날 데리고 여길 떠나게 해줘.


넓지도 않은 이 건물을 수색하기 위해 4시간 가까이 상처가 찢어지면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그의 체력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었다.


한 달여 동안 그와 성냥은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이런 운동량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고사하고 성냥마저 기력을 다한 채 바닥에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대부분의 스캐빈저에게 있어 28시간은 방랑 중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시간의 파편일 뿐이었고, 샌디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한 달 넘게 계속된 배고픔과 병고통 끝에 24시간에 4시간을 더 한 추적은 그를 생의 끝자락까지 이끌기에 충분했다.


소년은 죽음의 구렁텅이에 서서 유일하게 희망이 될 수 있는 통조림을 바라보며 침묵에 잠겼다.


샌디

지금 성냥과 함께 먹으면 모든게 괜찮아질까?


대답은 '아니'었다.


통조림 반 개로는 체력을 회복시키지 못하고 상처가 아물지 않아 보육구역 탑 꼭대기에 갇혀 도보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얼마 안 있으면 퍼니싱 감염으로 온몸이 짓물리고 여기서 죽을 것이다.


식사는 그에게는 의미가 없어졌기에 더 필요한 생명체에게 물려주는 것이 나았다.


소년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통조림을 따서 성냥 앞에 놓았다.


샌디

먹어...


성냥이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며 그는 자신이 뜻밖에 미소를 짓고 있음을 알았다.


어째서 웃음이 나오는 걸까? 자신의 처지가 나아졌기 때문에? 물론 그렇지 않았다. 이 웃음은... 다만 성냥의 행복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만족을 느꼈다.


샌디

미안...물자를 구하지 못해 이렇게 오래 굶겨서...


고개를 들어 종이페이지에 그려진 자신의 날개 너머로 위쪽의 아득한 하늘을 바라보니 혼돈스러웠던 기억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성냥은 제 곁에 있어야 해요. 그것은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의미이자 힘이니까요.'


'언젠가 궁지에 몰리면 성냥을 위해 나 자신을 버릴 거예요.'


샌디

...


샌디

...생각났어. 그때 리브누나와 무슨말을 했었는지...


그는 종이의 날개를 품에 안고 이 허무한 환상을 꼭 껴안았다.


샌디

...성냥아… 너에게 줄 통조림이 하나 더 남아있어서 기뻤어.


샌디

...그러니까...


그는 이미 만족했다.


삶의 끝에 선 이 소년은 환상의 날개를 등에 싣고 미소지었다.



샌디

나는 이곳을 떠나 드넓은 하늘로 갈게.


성냥

왕!


샌디

미안하지만, 난 널 데리고 갈 수 없어…. 넌 내가 밉니?


성냥

...


샌디

대답하지 않는다면, 날 용서했다고 여길게.


샌디

...미안해.


그는 몸부림치며 일어서서 천천히 빌딩의 가장자리를 향해 움직였다.


샌디

....당신은... 다시 돌아온다고 말했었죠?


성냥

...


샌디

저도 돌아오길 바라지만, 보육구역을 에워싼 적조를 마주칠까 두려워요.


짓무르는 고통이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따라다녔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성냥

왈!


샌디

그들이 정말 돌아온다면……. 살아 있는 사람을 하나도 찾지 못했을 때 섭섭해 할까?


성냥

...끼잉.


샌디

결과가 뭐든 난 알 수 없을 거야...


그는 고개를 저으며 무의미한 사고를 뇌에서 떨쳐내고 그 페이지의 뒷면에 댓글을 달기로 했다.


샌디

글을 제대로 쓴건지 모르겠는데…공부할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는 작은 아쉬움도 안고 이 오타투성이 메모지를 상의의 가장 깨끗한 주머니에 넣었다.


샌디

성냥아, 난 이만 가볼 게.


성냥

...낑?


샌디

살아남아. 나를 잡아먹어서라도, 너는 살아남아야 해.


샌디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성냥

왈...! 왈!


그는 자유에 목마른 날아다니는 새처럼 환상의 날개를 펴고 하늘을 껴안으며 고개를 들고 햇빛을 쫓았다.


샌디

미안... 영원히 안녕...


소년은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ㅡㅡ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날개로는 날아갈 수 없었다.


소년의 몸은 빠르게 지상으로 추락해 산더미처럼 쌓인 빈 상자에 부딪혔다.


만약 이것이 소설이라면 그의 고통은 지금 이 순간에 그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


부서진 폐품은 죽음의 방문 속도를 늦췄고, 통증도, 기나긴 잠도 그의 생각대로 일시에 오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려 해도 스스로를 가눌 수 없이 다음 변화를 기다렸다.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흐르는 물소리였다.


빗물과 수도관에서 흘러나오는 맑고 가는 흐름과 달리 우유가 엎어질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고 아주 미세하지만 물보다 걸쭉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피라고 추측했다.


그러자 저리는 통증이 지체에 스며들어 의식을 잠식해 갔다. 온몸이 통증으로 다시 채워지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샌디는 자신이 더 이상 외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이란...희생자 명단의 숫자나 이름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담은 몸뚱이가 서서히 갈려가는 지옥이었다.


몸이 부러지는 극심한 통증은 초침의 움직임 속에서 한없이 길어지며 피가 떨어지는 리듬도 느려졌다.


샌디

....너무...아파...


소리는 이미 피로 물들어 기괴한 거품 소리를 띠고 있었다.


심장이 저려온다ㅡㅡ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최후의 순간을 앞당기려 했었을까?


죽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고, 그것은 해탈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샌디

나...후회할까...


이날이 오기 전, 그는 많은 죽음을 목격했었다.


난민 중에는 '못 움직이면 죽으면 그만이지'라는 말을 입에 담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보육구역을 지날 때 그는 안경을 쓴 한 보육구역 직원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ㅡㅡ자살의 환상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


소극적으로 보이는 이런 생각들은 사람들이 '퇴로'를 찾아 조금이나마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퇴로'가 아니었다.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만신창이가 된다.


트라우마의 고통 속에서 소년의 가슴은 큰 소리로 외치지 못하는 목구멍 대신 머릿속에서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다.


이와 함께 스스로에 대한 의문도 울음 속에 더욱 분명해지고 있었다.


ㅡㅡ나는 정말 죽음을 자유라고 생각했을까?


샌디

...아니...


어떤 노인은 그에게 자유란 속박을 가지고도 마음대로 달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자유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면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온몸의 피와 살, 고통이 그의 결정을 고발하고 있고, 극심한 고통이 당겨지고 있으니 일어나서 자활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애초에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일까.


샌디

...아니...


그는 몸부림치며 목구멍에서 변함없는 대답을 밀어냈다.


처음부터 그는 모두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럼에도 샌디는 철수 기회를 내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샌디

내가 후회했던....것은....


태어난 이래 그가 겪었던 고난, 그가 저버린 기대는 가슴에 새겨져 있다.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자신이 태어나지 않기를 원했다.


이런 회한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 끊임없이 자신을 버리고 남의 비위를 맞추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후회가 생겨도 소생의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목숨을 버리는 아이들은 죽음이 자유를 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고통스러운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수밖에 없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평생 사랑의 대체품을 추구한다.'


버림받은 이 아이는 버림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죽음의 고통과 고독을 알게 된 덕분에 삶의 소중함을 더 잘 이해하고 후회는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샌디

...그럼 된거야....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소년은 그가 찾은 해답을 위해 기도했다.


모든 피가 자아를 벗어나자 그의 몸은 침체된 감옥에 빠져들었다.


샌디

...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샌디는 느꼈다.


ㅡㅡ그의 영혼은 지상을 떠나 진흙 속에서 비상하는 법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