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의 마지막 1일


유일한 빛을 잡기 위해 소녀는 상냥한 괴물이 되었다.




리브

으...!


의식의 바다가 찢어지듯 심한 통증이 들려왔고, 리브는 시야가 흐릿해지며 벽 쪽에 몸을 기대고 다시 일으켜서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았다.


공중정원으로 돌아간 지 28일 만이다.


신형 특화 기체에 적응하는 횟수가 많을수록 의식의 바다의 통증이 두드러졌다. 그녀는 그것이 아시모프가 처음부터 이야기했던 '의식의 바다의 은은한 통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히포크라테스 교수의 도움으로 통증의 빈도는 줄었지만 통증의 깊이는 줄어들지 않았고, 매번 머리가 뚫리는 것처럼 느껴져 집중을 어렵게 했다.


리브

적응에서 희생된 구조체들은 바로 이런 증상 때문이었을까….


리브

아니, 아마 이것보다 훨씬 더…….


리브는 슬픈 듯이 두 눈을 감고 자신의 의식의 바다를 안정시키려고 애썼다.


리브

어서 일어나, 환자가 기다리고 있잖아...


지금은 오전 6시.


한 달 가까이 지상 구조 작전이 없었음에도 생명의 별의 새벽은 여전히 분주하다.


미리 수습에 들어간 수많은 구조체와 의료진들은 어떤 경우엔 도리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일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기에, 이 어려운 시기에 부상자들은 비로소 죽음에서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보조형 구조체

좋은 아침이에요, 리브 선배님.


네... 좋은 아침.


보조형 구조체

참, 방금 왔을 때 연락 담당자를 만났어요.


보조형 구조체

어젯밤에 소식이 없었으니 찾아올 필요 없다고 전해달래요.


리브

...네, 고마워요.


오늘도 동료들의 소식이 없었다. 지난번 임무에서 복귀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공중정원 복귀 15일 전까지도 임무보고는 주기적으로 들려왔었고, 내용은 대부분 47번 도시의 지하 거점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잘 지낸다고 할 순 없었지만 그들이 무사하기만 하다면 리브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15일이 지난 후 3일 동안 그레이 레이븐 소대와의 교신이 끊겼었다. 다시 보고를 받았을 때, 루시아와 리, 크롬은 이미 소수의 생존자들과 함께 교회에 숨어 있었다.


보고를 받은 당시 이들은 교회의 폐허 속에서 전투를 치렀었고, 여러 사실들을 밝히지 못한 채 Ω 2형 무기 실험보고서만 황급히 보냈을 뿐이라 아시모프는 상세 데이터조차 수집하지 못했다.


이어 동료와 지상의 상황을 물었지만 '아직 새로운 보고가 없다'는 답변만 받았다.


추궁하려 해도, '위치상으로는 아직 활동 중인 것이 확인 됐고, 나쁜 소식이 없으면 좋은 것이다', '당신은 무거운 사명을 띠고 인내심을 갖고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다'는 이유로 떠밀리게 된다.


리브

...


정말 일이 잘 풀려서 그런걸까?


리브는 생명의 별 복도를 바라보며 그녀가 리의 동생 모리를 만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평소 웃음이 가득하던 그 청년은 초조해 하며 히포크라테스 교수를 찾아가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녀는 히포크라테스에게 묻고 싶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리브

...루시아...리...


의식의 바다에서의 계속되는 통증 속에서 리브는 그들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방식을 고민했다.



히포크라테스

어이, 무슨 생각 해? 왜 이리 넋이 나갔어.


따뜻한 손이 갑자기 등 뒤에서 리브를 툭 쳤다.


리브

앗....!


히포크라테스

하하 깜짝 놀랐지?


리브

교수님...


히포크라테스

응, 따라와. 너한테 할 말이 있어.



히포크라테스는 리브를 데리고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


히포크라테스

이변이 없는 한 마지막, 어…. 출발 전 마지막 24시간이야.


리브

정말인가요? 드디어...


리브의 무거운 마음은 당장이라도 위태로운 동료와 합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누그러졌다.


히포크라테스

허? 드디어?


히포크라테스

다른 할 말은 없어?


리브

...죄송해요, 교수님, 저...


앞에 있는 교수가 무엇을 묻고 싶어하는지 눈치채고도 리브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별을 피할 수 없는 마당에 또 다시 눈물로 남을 태울 필요가 있을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리브를 보며 히포크라테스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히포크라테스

네가 학생일 때 나와 다른 선생들이 널 어떻게 바라봤는지 알고 있었니?


그녀는 막연히 교수를 쳐다보기도 하고, 평가 매뉴얼의 글들을 외워야 할지 망설이기도 했다.


히포크라테스

성실하고, 노력하고, 배우기를 좋아한다?


히포크라테스

아니, 바보같다고 했어.


리브

...네.


리브

저도 알고 있어요. 여러 사람의 보조를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았으까요.


히포크라테스

불과 반 년 전, 너에게 임상 간호를 가르쳤던 선생님이 돌아가셨어.


리브

...


히포크라테스

너무 괴로워하지 마. 그 연세면 언제 가도 이상하지 않으셨어. 다만 작고하시기 전에 내게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어.


히포크라테스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씩 꺼내 지휘관【지휘관 이름】의 병상에 던졌다.


그녀는 슬픈 눈빛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리브를 바라보았다.


리브

이건...


리브가 봉투를 뜯어보니 용도가 다른 의료용 주사 일곱 개가 들어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왔는지 잠시 생각이 나지 않았다.



히포크라테스

이것은 네가 의료병 시절에 자신의 치료를 위해 사용했던 거야.


히포크라테스

그녀는 너에게 왜 이렇게 혼자서 하냐고 물었고, 너는 뭐라고 대답했지.


리브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고 자신의 주사 수법이 얼마나 아플지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면서요.


히포크라테스

연습용 장비도 있었잖아? 억지로 느끼려고 했던 거지.


노교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지휘관 이름】시트를 들추고 촉진을 겸했다.


히포크라테스

그 선생님은 너같은 바보는 처음 보셨어. 피를 뽑고, 바늘을 꿰매고, 주사를 맞는 걸... 죄다 자기에게 했던 게 그 분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었거든….


히포크라테스

그러다가 그 분은 네가 쓰던 물건을 소독해서 거두어 들였어. 자기 경각을 위해서라고 말했는데, 너무 많은 사상자들을 봤다고 해서 그것에 무감각해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


히포크라테스

....하, '너무 많은 사상자를 봤다고 무감각해져서는 안 된다'라.


히포크라테스

일찍이 황금시대에 진통 치료가 본격화되었지만, 기계에 의존하여 생산하던 정밀기기는 이 재앙으로 인해 모두 원형으로 돌아갔어.


히포크라테스

퍼니싱 바이러스 발병 이후 대부분의 의료인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고, 학생들도 장비의 피드백을 참고해 수법을 익히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히포크라테스

일부 생산 라인을 복구하더라도 작전에서 필요한 장비를 공급하는 것이 통증 제거와 치료 효과에 유용한 장비를 공급하는 것보다 우선시 될 수 밖에 없었어.


히포크라테스

일단 전투와 생존이 가장 시급한 문제가 되면 죽음조차도 너무 많이 목격해서 무감각해지는데, 주사할 때의 작은 아픔따위가 과연 얼마나 중요할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지휘관 이름】의 손에서 손을 거둬 시트를 덮었다.


히포크라테스

그래서 난 말했어, 바보같다고.


히포크라테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은퇴를 하더라도 네가 요즘 또 무슨 엉뚱한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안 볼 수가 없더라.


히포크라테스

이전에 너가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안심이 됐었는데.


히포크라테스

....이 세상은 그 누구도 화를 피할 수 없나봐.


히포크라테스는 고개를 숙였고 리브는 그녀의 눈 밑의 감정을 볼 수 없었다.


히포크라테스

예전에 남들이 '엉뚱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면 얼빠진 사람은 후방에 남아 전선에 나가 죽지 않는다는 뜻이었거든.


히포크라테스

...하지만 너무 많은 학생들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고, 이젠 너마저 떠나려고 하는구나.


붙잡을 수 없는 사람을 만류하듯 늙은 교수는 리브의 손목을 잡고 다소 울먹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리브

....교수님.... 저...


히포크라테스

많은 방법을 시도했지만 널 희생시킬 계획을 바꾸지 못했어.


히포크라테스

...앞에 있는 지휘관도 깨우지 못했어.


히포크라테스

...내 실패야. 너무 일찍 은퇴한 바람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어.


히포크라테스

우린 이제 【지휘관 이름】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해.


히포크라테스

...난 그 사람들까지 설득해봤었어. 며칠만 더 기다려주면 너의 지휘관이 깨어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히포크라테스

하지만…이 세상에서 매일같이 수많은 사람이 죽고 있으니 더 이상 연구개발을 늦출 수 없겠지….


히포크라테스

정말 미안해, 널 붙잡지 못했어...


리브

교수님…. 괴로워하지 마세요. 예나 지금이나 교수님이 가르쳐 준 지식이 저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하...과거와 현재...


히포크라테스

나는 너에게 미래를 주고 싶었는데...


그녀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흔들었던 슬픔을 가슴속에 가두고는 그대로 일어나 병실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히포크라테스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이미 늦었지.


히포크라테스

가자, 아시모프가 거의 다 준비했대.



아시모프

....


히포크라테스를 따라 아시모프의 연구실로 돌아왔을 때 이곳은 평소보다 더 썰렁했다.


대형 스크린과 장비가 쌓여 있는 방에는 아시모프와 로사만 남아 있었다.


리브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어린 조수가 인사를 하고 잡동사니 한 상자를 들고 떠났다.


아시모프

이 기체가 희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퍼니싱을 '정화'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야. 인류가 실제로 퍼니싱을 사라지게 한 것은 역사 이래 처음있는 일이었어.


아시모프

이 때문에 기체 교체는 극비사항이라 이번에는 나와 히포크라테스 교수만 알고 있어.


아시모프는 앞의 문서에 시선을 두고 잠시 침묵했다.


아시모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


아시모프

대행자를 모티브로 한 데이터가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이 기체의 능력도 대행자에 가까워.


아시모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조품'일 뿐, 너도 자료기록상 알 수 없는 선별이라는 것을 거친게 아니잖아.


아시모프

실전에 돌입하면 넌 금방 한계상황에 도달해 각종 통제불능 상태를 겪게 될 거야.


아시모프

이전 루시아나 크롬의 특화 기체와 달리…. 이번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어.


리브

네, 알고 있어요.


아시모프

이것은 아직 확인할 수 없는 추측일 뿐이지만.


아시모프

특화 기체가 끌어당긴 퍼니싱 바이러스가 Ω무기에 '흡수'될 틈도 없이 너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었을 때.


아시모프

…넌 이 특화기체의 도움을 받아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로 승격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을 거야.


리브

승격 네트워크요?


아시모프

맞아. 이 가설이 실제로 실현된다면 이것은 아주 드문 기회가 될 수도 있어.


리브

그럼 전 무엇을 해야 되나요?


아시모프

각오만 하면 돼. 의식의 바다 감시기가 있기 때문에 네가 만나는 모든 것을 우리도 볼 수 있어.


아시모프

옛 자료의 기록에 따르면 승격 네트워크는 수많은 감염체 사이에 구축된 일종의 네트워크로 이를 통해 서로 간의 정보를 공유하지.


아시모프

그러나 대행자, 적조와 이합생명체를 만나본 뒤 그들의 배후관계를 더 알아본 적은 아직 없어.


아시모프는 미처 갱신하지 못한 자료에 지친 듯 눈을 감았다. 그에게나 종말을 기다리는 생명에나 현재의 과학기술과 자료 업데이트는 너무 느렸다.



히포크라테스

시작하자, 아시모프.


히포크라테스

우리에겐 또 하나의 좋은 소식이 있어. 지금은 크롬 때와는 달리 리브가 다치지 않았고,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거야.


히포크라테스

이번에 기체를 교체하면 지휘관은 필요하지 않아.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 합류하기 전에는 무슨 일이든 쓰러지는 순간까지 혼자 버텼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 온 뒤 지휘관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지휘관과 동료가 항상 곁에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리브

네.


그녀는 한때 혼자였다면, 이제는 혼자라도 좋다.


대재앙의 고통에 비하면 그녀가 감내한 고통과 마음속의 고독은 전혀 보잘것없다.


리브

...이제 우리는 서광의 한줄기를 잡아야 합니다.


정비소 쪽에서 굉음이 울리고, 조명이 하나 둘 켜지면서 어두컴컴한 연구실에 약간의 온화함을 더했다.


두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브는 희미한 빛으로 둘러싸인 결승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