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의 마지막 9시간


"새벽빛에 흩어지고 이슬만 남은 밭의 안개꽃과 노을이 구름에 맺혀 가랑비가 되어 돌아오리라."*


*한샤오공(韩少功 1953.1.1~)의 소설 '옛 추억'(旧忆)



특화 기체를 교체하는데 평소보다 더 긴 시간이 소요된 것은 그녀 역시 어느정도 예상했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브는 깊은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옆에서 도란도란한 속삭임이 넘쳤다.



의식의 바다에서 심한 은통이 들려왔고, 리브는 눈을 뜬 채 시야의 어둑함을 넘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낯익은 지도자들이 그녀 앞에 서서 배려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낯설거나 낯익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그들 대부분은 의원이었다.



생명의 별의 관계자와 비앙카를 제외하면 리브는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어느 부처 의원인지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기쁨, 도취, 평가... 기타 등등의 감정을 품은 채 그녀에게 관중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들은 마치 값비싼 예술품을 훑어보듯 열정적으로 바라보았지만, 기체 속 리브의 본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들 가운데 감사원 소속의 여성이 다가와 정교한 금색 옷깃 바늘을 가슴에 달아주었다.



???

안개 속에서 이것이 당신의 길을 부디 인도해 주기를, 리브.


리브

감사합니다.


군중들의 환호를 들은 그녀는 환호 속에 새 기체의 이름을 들었고, 은통을 숨긴 채 영원한 밤을 밝힐 이름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군중들이 흩어지고 아시모프의 연구실이 예전과 같이 어둡고 차갑게 돌아왔을 때, 스크린의 어두운 빛을 빌려 그녀는 그 교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았다.


리브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입을 열어 물어보려 했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시모프

이제 마지막 디버깅을 준비하려면 두 시간은 더 걸릴 거야.


히포크라테스

난 이번 디버깅에서 의식의 바다의 은통 증상을 최소화할게.


히포크라테스

우리가 아직 준비하고 있는 동안 너의 지휘관과 작별인사를 하렴.


히포크라테스

더 이상 후회하면 안 돼... 리브.


리브

....



그러나 리브는 작별의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녀의 머릿속엔 지휘관은 이 순간까지도 깨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리브

...


뒤엉킨 상념 속에서 그는 낯설고 온화한 여성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

후회하지 않는 결정이었으면 좋겠어.


그날,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구룡야항선의 한 행사에 초청되었다.


승선 전 부두에서 '한가하게 잡담을 나누고 싶다'는 여성을 만나 '어떤 가능성'을 이야기하며 어떻게 선택할지 물었다.


그러다가 기계 배우들의 연극을 본 후, 이 배에서 '하나가 되어버린' 비리야와 화서의 이야기를 꺼냈었다.



리브

이것이 자유인가요?


'그들이 한 선택이야.' ㅡㅡ그때 지휘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리브

이런 결말을 맞이한다고 하더라도요?


'응'.



그 여성이 이야기한 할 수 있는 가능성과 선택은 물론 지휘관의 말까지도 무심한 잡담에 불과했었다.


무심코 말하는 자, 의식하여 들은 자, 리브는 그 말의 수면 너머로 자신을 보았다.


ㅡㅡ그녀도 비슷한 날이 온다면 기꺼이 목숨을 걸었을까?


그녀는 차마 이 순간이 밟혀 부서질 그날을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잡담을 듣기 전까지는 확실하지 않은 결심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 날의 고난과 재난이 일어난 뒤, 무성하게 자라 마치 덩굴처럼 울타리를 덮고 점점 높은 담을 넘어갔다.



리브

그것이 나의 선택...


수많은 죽음과 이별을 목격한 리브는 미련을 떨쳐버렸다.


아직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생명들을 위해 스스로를 버릴 수 있는 체스말로 삼아 재난으로 빚어낸 체스판 위에 올려놓기로 했다.


'머무를 곳 없는 아이들은 언제나 귀착점이 될 장소를 찾는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평생 사랑의 대체품을 추구한다.'


그녀는 이미 그레이 레이븐이라는 이름의 귀착점을 찾았었고 이곳에서 따뜻한 정을 얻었지만 리브는 이곳을 자신의 종착지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루시아가 그와 같은 고난을 겪지 않기 위해 칼을 움켜쥐듯, 리브가 아직도 떠돌아다니는 이들에게 돌아갈 집을 마련해주고 싶어하는 것이 지금까지 싸워온 이유다.


그것은 의식 속에 각인된 충동처럼 그녀를 전선에 나서게 하였고, 언젠가는 그녀의 말로를 지켜보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머뭇거릴 것 없이 앞으로 나아가 기진맥진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면 된다.


리브는 자신의 속마음을 거듭 확인하며 실전 돌입 후 3시간의 계획을 거듭 확인했다.


일단 지상에 도착하면 목숨이 세 시간밖에 남지 않아 매초 긴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리브

이미 준비 됐어.


굳은 마음을 다시 한 번 점검했고, 그 굳건한 마음이 단단한 비늘 갑옷으로 만들어져 그녀의 마음속에는 절대적인 방패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깊은 곳을 찌르는 바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리브

...후회 일까?


병상의 창백하고 여윈 인간을 지켜보던 그녀는 생명감시기의 안내에 한참 동안 침묵했다.


결국 소녀는 손을 살짝 들어 새 기체의 차가운 손으로 규칙적으로 출렁이고 있는 인간의 가슴을 건드렸다.


그녀는 이 위치를 기억한다.


시트를 들지 않고 환자복 가슴의 끈을 풀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이 자리를 기억했다.


【지휘관 이름】이 처음 치명상을 입은 자리였다. 그날 바로 근처에 있었지만 그 상처를 막지 못했다.


소녀는 가만히 자신의 손을 움직였고, 그 자리를 확인하듯 손끝으로 인간의 가슴 너머를 쓰다듬었다.


075번 도시에서 무너진 슬레이트에 깔려 상처를 치료했던 곳이다. 그녀도 따라가려 했지만 결국 가로막혔었다.


이어 긴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인간의 근육이 위축되었고, 두 다리가 이완됐다.


지휘관의 연약한 목덜미, 뺨, 그리고 머리 위의 희석된 흉터를 쓰다듬어 보았다.


이런 흔적은 의학의 발전 덕분에 지휘관이 원하면 모두 지울 수 있었을 터였다.


리브

...





새하얀 소녀는 몸을 숙여 모두에게 따뜻했던 손을 잡았다.


리브

하지만 전 기억해요, 지휘관.


리브

상처에 찍힌 낙인이 아직도 그대에게 남아 있든 없든, 전 기억할 거예요.


리브

당신의 상처 하나, 당신의 아픔, 당신의 그리움을 간직할 거예요…. 발버둥과 나약함도.


리브

앞으로 나아가는 당신의 뒷모습, 당신의 두 손의 따뜻함, 그리고 당신의 이상을 기억할 겁니다. 우리 모두의 이상을요.


리브

당신이 겪는 고난은 모두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임을 알고 있어요.


리브

이제 저도 같은 목표를 위해, 당신과 같이 종말과 고통에 사로잡힌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이 길을 밟을 것입니다.


리브

저는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마침내 무력감을 이겨냈어요.


리브

...전 이미 해냈어요…. 부디 이런 저를 바라보고 기뻐해주세요, 지휘관님.


리브

...하지만...


소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가냘프지만 지울 수 없는 아픔이 남아 있었다.


리브

지휘관님…. 당신과 여러분이 함께 있는 날들에 대해 어떻게 감사의 말을 남겨야 할지 모르겠어요.


리브

저는 지금까지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행운 때문에 이곳에 머물 수 있었고, 당신과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동료들에 의해 지켜져왔을 뿐이에요.


다락방에 떨어지는 햇살, 폐허를 헤치고 지나가는 저녁 바람, 잠자코 있는 그림자처럼.


리브

제 자신 말고는, 전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리브

...그리고 또 무엇이 저를 대신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오직 저의 기억, 당신과 사람들의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햇빛이 꽃을 품었을 때, 빛은 꽃의 향기를 지니고 있듯이;


저녁 바람이 군중을 스쳐가면 바람은 그들의 속삭이는 목소리를 배울 수 있듯이;


ㅡㅡ이것이 저의 모든 것, 제가 남길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그녀는 품에 안고 일찍이 접었던 돛 없는 종이배를 침대 옆에 놓았다.


이 종이배는 그녀의 일기였다. 그녀가 이 석 달 동안 계속 썼던 편지이다.


흙먼지와 핏자국, 사라지는 자들의 비명을 담고 있다.


리브

...이런 작별 선물을 보면 지휘관은 실망할까요...


가진 게 없는 소녀는 교수에게서 되찾은 의료용 바늘 일곱 개를 꺼냈고, 그녀는 이 종이배들을 한데 모아 바늘로 피어나는 종이 우담화[월하미인]를 만들었다.


창백한 종이 우담화, 한순간 피었다가 덧없이 죽어가는 생명.


그러나 돛 없는 종이배는 더 이상 멀리 항해하지 않을 기억이다.



종이 우담화를 【지휘관 이름】의 머리맡에 놓고 리브는 다시 힘없는 손을 잡으며 이별의 키스를 새겼다.


리브

생명의 덧없음을 슬퍼하지 마세요.


리브

이 순간을 기억한다면, 단 세 시간 동안 피어나는 우담화도 영원할 거예요.


리브

용서해주세요…지휘관님…


걷잡을 수 없는 슬픔 속에서 소녀는 이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리브

분명히 전 희생할 준비가 돼 있는데…. 의료인으로서 허무한 환상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리브

그런데 유독 지금 이 순간만은….


리브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는 절 용서해 주세요…. 터무니없이 내세가 있기를 빌다니….



더 이상 가슴의 통증을 주체할 수 없어 리브의 뺨은 비 오는 날 유리창처럼 눈물로 범벅이 됐다.


 


리브

지휘관...


아무런 감각도 없는 손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붕대 한구석을 적셨다.


리브

저는 지구가 생명을 되찾는 그날을 기다려왔어요. 폐허에 꽃이 만발하고, 사람들은 더 이상 떠돌아다니지 않고 다시 태어난 집 옆에서 웃을 수 있는, 그 날을요.


리브

저는 이 세계를 사랑하며, 여러분의 웃음을 사랑합니다.


리브

인간도, 구조체도, 기계도, 식물도, 동물도, 곤충도, 균류도…. 그들의 존재는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리브

이런 생명의 성화가 모여 있기 때문에 캄캄한 밤을 밝힐 수 있었어요.


리브

재앙을 구축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누군가 첫발을 내딛어야 해요.


리브

비록 그 대가가 저의 목숨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우리가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라도, 저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리브

퍼니싱을 완전히 구축해야 지휘관 같은 수많은 인류에게 살아날 기회가 주어진답니다.


리브

그래서…그것이 저의 결정이고, 후회가 남더라도 떠나야 해요.


리브

하지만 괜찮아요... 당신과 모두가 무사히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리브

그것은 제가 리브로서, 그리고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일원으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싸웠다는 증거일 테니까요.


그녀는 잠든 이에게 하고싶은 말을 쏟아내며 가슴속에 숨겨둔 눈물을 모두 흘려냈다.


마지막 눈물이 시간의 바다로 떨어지자 병실에서도 이별을 알리는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리브

…시간이 됐어요. 마지막 디버깅을 마치면, 이제 곧 출발할 거예요.


소녀는 다시 머리맡의 종이 우담화를 정리하고 병상 앞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떨쳐낼 수 없는 그리움을 안고 여전히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 깊이 절을 했다.



리브

그 동안 여러분의 가르침과 비호를 받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리브

하지만…죄송합니다. 이만 그레이 레이븐 소대를 떠나겠습니다.


리브

...지휘관, 그간 고마웠습니다... 리브는 먼저 떠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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