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계들은 나나미를 '기계선현'이라 불렀지만 나나미는 이런 전쟁을 바란 적 없었어...



높은 탑 너머 광장에는 수백여 개의 건조된 소형 건설기계가 얼음과 눈을 쓸고 바닥을 보강하고 있었다.


그것들의 동작은 빠르고 일사불란했다. 서로간의 의사 소통을 하지 않았지만 절대적인 암묵적 이해를 유지했다.


본관은 지하 배후지에서 지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땅속에 묻혀 있던 우주선 한 척의 원래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함선은 마치 금속으로 주조된 탑이 자라는 나무의 뿌리와 같이 땅을 꿰뚫고 하늘을 가리켰다.


기계의 강철같은 계획과 노동력은 이 광경을 황무지에 불현듯 드러내게 만들었다.


기계는 햇빛을 필요로 하지 않아서 건물에는 창이 없었고, 내부 회로의 배선이 원활하며, 공간의 구분이 일사불란하면서도 어둡고 차갑게 보였다.



건물 중앙에 있는 홀만이 유일하게 빛나는 곳이었다.


천정 중앙에 걸려 있는 광원은 아직 완공되지 않은 톱니바퀴 모양의 천장이었다.


하나뿐인 그 빛 속에는 희미한 초록빛이 섞여 반짝이고, 마치 잎 사이로 비치는 한낮의 햇살과 같았다. 나나미마저 멈칫하고 고개를 들어 그 천장을 바라보았다.


???

선현님...돌아오셨군요.


낯선 남성 목소리가 나나미의 이목을 끌었다.


뒤에 나타난 수인 기계체는 나나미가 여지껏 볼 수 없었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칼 모양의 머리와 간결한 도색을 한 그의 두 손은 부식성 불로 구운 듯 검게 그을린 흔적들로 가득했다.



하카마

스푸너?... 함부를 자리를 비우지 마십시오, '톱니바퀴'[기어]에게 적발되면 불필요한 충돌이 발생합니다.


나나미

'톱니바퀴'는 또 뭐야?


이곳에 도착하는 동안 하카마와 나나미는 간략하게 정보를 교환했지만 기계교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직 하지 못했다.


스푸너

...선현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스푸너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하카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카마

'선현의 실종'.


하카마

나나미님, 스푸너는 믿을 만한 동료입니다.


나나미

전에는 강림이라고 부르더니, 지금은 실종이라고 하는 거야?


나나미의 중얼거림은 수인 기계에 들리지 않았고, 수인은 무거운 고개를 끄덕이며 나나미의 의문을 따라 풀어갔다.


스푸너

'톱니바퀴'는 교회의 군대로 말 그대로 전쟁이나 이 물건이나 모두 '톱니바퀴'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수인 기계가 손가락을 들어 화려한 천장을 가리켰다.


스푸너

기호 사용, 진풍경 조성, 군대 규합, 질서 수호…. 모두 저열한 모방에 불과합니다.


스푸너

...이곳은 본디 유토피아가 됐어야 했습니다.


스푸너는 고개를 저으며 작은 소리로 뭐라고 말하고는 몸을 돌려 매달린 물건의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

스푸너 씨, 물건이 도착했어요. 확인하고 돌아가지 않을래요?


몇 대의 짐을 수레로 호위하는 병사 모양의 기계 무리가 입구에 나타났고, 머리 부분의 기계 본체는 밝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으며 가슴 부분의 하트 모양의 문양은 새빨간 색으로 맥동하고 있었다.



??

...어, 분명 봤어, 선현님을 봤다고!


붉은 기계체가 달려와서 나나미를 껴안는 포즈를 취했다.



나나미

너도 나나미의 친구야?



??

...친구요? 선현님이 이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그게 뭔지 공부를 좀 해야 할지도...

 

??

아, 하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뭐니해도 포옹 아닐까요? 선현님, 제가 전체 '톱니바퀴'를 대표해서, 사랑해요!


낯선 기계체의 뜨거운 포옹을 억지로 받아내며 나나미는 머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의 비스듬한 뒤편에 선 하카마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나나미의 손등을 가리고 말을 아꼈다.



하카마

제로...일은 다 마무리했습니까?



제로

아아, 선현님을 만져보니 정말 부드럽네요...


나나미

야, 너 말야, 적당히 해!


상대의 희롱을 견디지 못한 나나미가 상대의 손을 툭툭 쳤다.


제로

선현님은 오늘도 힘이 넘치시네요.... 너무 좋아요. 선현님이 계속 시무룩해 하는 걸 보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아요....


그녀 앞에 있는 기계는 분명히 하카마가 말한 교회 분열의 원흉으로서, 그녀는 마지못해 나나미를 감싼 두 손을 풀었는데, 그녀의 어조는 과장되지만 진심이었다.


제로

참, 선현님, 이 '친구'분은 오늘도 계십니다.


제로는 손을 뻗어 소대의 다른 기계를 끌어당기며 '친구'라는 단어를 학습해 사용하였다.


운명의 수레바퀴

기이익ㅡㅡ 친구, 친구!


제로

이 천장이 마음에 드시나요? 이 성당이 마음에 드나요? 모두 '톱니바퀴'가 선물한 것들이에요. '사랑'이 가득합니다.


제로

이걸 완성이 되지 않은 채로 보신게 참 아쉽네요. 스푸너, 당신 잘못이죠?


스푸너

흥...


제로

인류 영역의 북쪽 라인에 있는 호프하임 요새가 정리되었습니다. 이 재료들은 연산 후 가장 먼저 사용되었고, 마지막 남은 레프트하임까지 더하면 충분하답니다~


러버즈는 입구 옆에 있는 상자를 열었다.


나나미

이건...


스푸너

생물의 골격입니다. 천장에 있는 녹색의 인광은 여기에서 추출됩니다.


제로

네네, 보통 사냥을 하고 나면 그 먹잇감을 박제로 장식하지 않습니까? 폐품을 보배로 만드는 것은 저열한 종의 최후이자 가장 의미 있는 공헌이죠.


나나미

가공...'예쁘게' 만들어 선물하기... 이게 '사랑'의 표현... 맞아?


이 순간 나나미는 '저열한 모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이해했다. '톱니바퀴'가 생각하는 감탄과 사랑, 그들은 '마음'과 힘을 사용하여 선현에게 선물했지만, 이런 모습은 나나미에게 불쾌함만을 느끼게 했을 뿐이었다.


제로

우… 선현님은 역시 선현님이네요. 우리 '마음'을 다 알아맞혀서 앞으로 깜짝 이벤트를 준비할 때 조심할게요.


제로

그럼, 먼저 레프트하임 대청소를 준비하러 갈게요! '톱니바퀴', 너무 한가하게 굴지 마세요. 그러다가 '병'에 걸릴지도 몰라요~


제로

최후의 인류가 선현님에게 '놀라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랄게요.


제로는 나나미가 만진 손목 부분을 매혹적으로 문질렀다.


제로

이러면 선현님도 내 사랑을 느낄 수 있겠지...



제로가 톱니바퀴를 이끌고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하카마는 나나미에게 발길을 돌렸다.


하카마

...


하카마

나나미님...?


소녀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나나미

나나미는 저런 녀석들 싫어.


나나미

인간의 창조에서 태어났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졸렬하게 흉내만 내잖아…. 그리고 그런 '애정'을 내게 강요하고 있어.


나나미

아니, 나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그 녀석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기계 선현에게 강요하는 거겠지.


나나미

나나미는 신이 아니야…. 나나미는 처음부터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이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려고 했어.


나나미

기계들이나 인간들이나...


천장에서 새어나온 빛이 나나미의 얼굴에 내려앉았고, 그 말과 달리 이 순간의 나나미는 세상에 내려온 신의 아이처럼 보였다.


나나미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싸움을 멈출 수 있을까?


하카마

'톱니바퀴'의 군사행동 중지를 강행하는 것은 일부 기계 논리에 혼란을 초래해 불필요한 희생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소멸도 결국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나나미

나나미가 이곳에 온 목적은 단 하나, 기계체의 분열로 인류의 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야.


나나미

나나미는 이것이 모두가 밟아야 할 길이 아니라고 확신해.


스푸너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나나미

나나미는 너희들의 걱정을 잘 알고 있어. 이런 문제를 해결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하카마 언니랑…. 그리고 나나미를 도와줄 큰 멍멍이도 필요해.


언제나 침착했던 수인 기계 뒤의 꼬리가 흔들렸다.

 

스푸너

나나미님, 드디어 저를 이렇게 부르셨군요. 아까부터 왠지 모를 서먹함이 저를 좀 불안하게 만들었는데...


나나미가 손을 내밀자 수인은 스스로 몸을 구부려 마치 수만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받는 포즈를 취했다.


소녀는 미소를 지었다.



나나미

나나미가 여기서 너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나나미에게 왠지 친숙하게 느껴져...


나나미

너희들과 나란히 싸우는 것이 나나미의 만남의 운명인 것 같아!


나나미

좋아, 나나미는 지금 의욕이 넘쳐!


나나미

나나미가 또 알아야 할 것들이 있는데…전쟁은 도대체 어떻게 일어난거야?




하카마

인간과 기계는 공존할 수 없는 법입니다. 일단 기계가 인간의 인식 이상으로 진화한다는 이론은 일찍이 황금시대부터 인류 과학자들에 의해 제안되었고 중요하게 다루었던 부분이었습니다.


하카마

인간의 문명과 역사 속에서 인간은 이미 확립된 '도덕규범'으로 인해 기존의 입장과 신념까지도 배신하면서 변화를 추구하는 데 아주 능했지요.


하카마

암흑시대부터 황금시대로의 격변은 시간과 자원을 포함한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


하카마

기계는 오로지 '0'과 '1'만을 따릅니다. 무즉무, 유즉유, 0으로 시작하여 1로 끝납니다.


하카마

인류는 역사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변혁을 일으켜 그 잘못을 바로잡게 마련이었습니다.



나나미

하지만 기계는 마음에 따라 잘못을 고칠 수 없어….


나나미

인간은 나쁜 부분도 있지만 좋은 부분도 있어. 너희들은 아직도 인간이 왜 그러는지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잘못을 배제하거나, 아니면 영원히 그 잘못을 이어나가게 될 거야...


스푸너

네…. 이 전쟁은 누군가의 잘못이 아닙니다.


나나미

모두가 하카마나 스푸너처럼만 된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카마

'어머니'는 기계선현으로서 당신의 각성 정도가 최상의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나나미

그녀가 기계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다면 왜 그녀를 직접 찾아가지 못했던 거야?


하카마

...소용없어요.


하카마

'어머니'는 우리를 마치 어머니처럼, 교회의 모든 기계들을 부드럽게 감싸안고, 모두의 기도와 기원을 들으며 안식처를 제공해 줍니다. '어머니' 앞에서는 모두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하카마

하지만 '어머니'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적도 없었고, 기계의 분열을 막지도 않았습니다.


스푸너

오히려 아르카나님이야 말로 게슈탈트의 추론 연산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기계교회의 앞날이 보장되고 파벌이 갈라지는 한, 그것을 아르카나님에게 말해도 위로와 설득만을 받을 뿐입니다.


나나미

하지만... 비극은 항상 일어나고 있잖아!



스푸너

비극의 원인은 각성기계의 미숙함...


스푸너

옛날에 건설기계에는 제지(造纸)연역모형이 있었는데, 기계에 '제지'라는 명령어를 입력하면 '제지기'로 탄생했었지요. 그런데 제지 기계가 충분히 강력해지고 이 프로그램이 영구적으로 작동하게된 그 때...


스푸너

추론에서 이 제지기계는 자신을 창조한 인류를 죽이고 인류를 종이로 만든 뒤 모든 초목을 베어내고 다른 생물을 멸종시켜 모두 종이로 만들었습니다.


스푸너

결국 종이로 된 대지, 종이로 된 별, 더 나아가 종이 우주를 만들었습니다.


스푸너

기계는 그저 그런 줄만 알면 되고, 까닭을 알 필요 없고, 쓸데없는 사상숙고도 필요 없고, 해나가기만 하면 되니까요.


스푸너

나나미님이 가져온 '계몽'은 인간의 본성인 감정, 욕망, 애증, 희악에서 비롯되며, 여기서는 기계의 절대이성과 절대질서에 의해 무한대로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스푸너

'잘못된 길'에 능한 인류 문명은 이미 이 홍수 속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가치를 극대화할 수 없는 유일한 이단적 존재지요.


스푸너

그들은 이미 기계의 장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스푸너

기계의 힘은 인간에게 있어 막을 수 없고 파괴적입니다. 승리는 '톱니바퀴'에게 있어 '지루한', 자명한 상식인 셈입니다.


스푸너

인간의 시각에서 보면 기계는 분명 잔학하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계 안에서 깨어난 광풍으로부터 두 문명은 비슷하고도 상반된 길을 걷게 되었죠.


나나미

...나나미는 자유를 가르쳐주지 못했어...


하카마

자책할 필요 없습니다.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하카마

기계는 온화하게 인도되어야 했으나 퍼니싱이 지구를 강타하는 환경에서 불확실한 요소가 너무 많았습니다.


하카마

인간은 스스로 돌볼 겨를도 없었고, 더구나 전혀 낯선 종족의 굴기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카마

인간의 사회체제는 현 상황을 직시하고 통제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으며 퍼니싱과 기계 각성이라는 두 물결 속에서 인간은 너무나 취약했습니다.


용광로는 아직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각종 가연성 물질이 화염에 던져져 고온의 자양분이 되었다. 이어 각종 금속, 장갑 파편, 탄피, 병사패 등이 있었다.


인간의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지워지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재료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나미

나나미는 이제 다 알겠어.


나나미

하지만 인간이 없었다면 나나미도, '계몽'도 없었을 거야.


나나미

이들이 인간의 행동을 맹목적으로 흉내만 내고 있다면 너희들만의 의미를 찾을 방법은 없어질 거야...


나나미

나나미가 여기에 온 것은 답을 보기 위해서였고, 이미 답을 보았으니…그것을 수정해야겠어.


나나미

나나미는 이미 그럴 준비가 되어있어. 그래서 지금 1순위에 있는 임무는 제로의 최후의 일전을 막는거야!


하카마

나나미님, 당신은 이미 저의 대답을 알고 있겠지요.


스푸너

왜 저를 쳐다보십니까? 당연히 저도 포함되어 있겠죠?


나나미

고마워. 하지만... 그 다음에는 번거로울 수 있어. 나나미는 더 이상의 동료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그것만으로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