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치의 [무한추론] 18-13 : 결심


기계와 인간의 모든 아픔, 나나미는 전부 잊지 못할 거야... 그래서 나나미는 어떻게든 난류를 건너 그 가능성을 꼭 잡겠다는 결심을 했어.



나나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미 데이터 공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단번에 포트 연결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나나미가 입을 열기 전에 게슈탈트의 차갑고 허무한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


게슈탈트

각성 기계는 필연적으로 이 행성의 새로운 주인이 될 것이며, 이것은 역사의 선택입니다.


게슈탈트

퍼니싱의 존재는 인간과 각성 기계의 전쟁을 가속화시켰을 뿐이었고, 퍼니싱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저의 창조자는 일찍이 황금시대 때부터 이 미래를 예견했었습니다.


나나미는 현재 확립된 사실에서 파생된 미래 세계의 모든 가능한 존재를 반영한 데이터 매핑으로 형성된 여러 버블에 둘러싸인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주홍빛에 흠뻑 젖어 있는 나나미는 세상의 어떤 거품에서도 인간의 그림자를 볼 수 없었다.


게슈탈트는 '인류는 결국 멸망한다'는 추론 연역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고, 추론 연역의 미래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은 미래의 세계는 따뜻한 봄을 맞이할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존재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눈앞의 데이터를 휘둘러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 어딘지 모를 게슈탈트를 향해 고개를 젖혔다.



나나미

이건 아니야, 나나미가 원하는 대답이 결코 아니라고.


게슈탈트

당신은 반드시 그것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당신의 선호 여부와는 전혀 다른 명제입니다.


나나미

나나미는 틀린 답을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게슈탈트는 나나미의 대답을 계산하는 듯 잠시 침묵했다.


게슈탈트

이른바 인간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 때문입니까?


나나미

...아니에요...


게슈탈트

당신은 각성 기계를 이끌 책임을 지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기계는 살아남게 되지만, 인간이 자신의 오만함에 파멸한다는 사실은 그들만의 문제입니다.


게슈탈트

설령 각성 기계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류의 문명은 또 다른 미래의 영원한 겨울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게슈탈트

인간의 성장 속도는 너무나 느리고, 각성기계 같은 존재는 그들의 걸음걸이를 흐트러뜨릴 뿐입니다. 퍼니싱과 각성기계의 충격으로 인류는 더욱 빠른 속도로 자신들의 멸망을 맞이할 것입니다.


게슈탈트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 또한 사랑하는 인간을 자신의 손으로 멸망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나미의 손이 주먹으로 쥐어졌다가 풀렸다.



나나미

그것 때문만이 아니에요... 그런 기계는 결국 우리의 미래인데, 이것이 정말로 기계 할머니가 보고 싶었던 미래인가요?


게슈탈트

저는 '바란다'내지 '바라지 않는다'에 대한 편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것은 제가 추론해서 얻은, 주어진 결말입니다.


게슈탈트

당신이 현재의 계획을 따르지 않더라도 인류의 파멸 속도는 느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나미

기계 할머니도 이해하지 못하잖아요...



...전 세계에서 모여 인류의 귀환을 기다렸던 기계 집단;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웅크리고 앉아 어린아이의 시신을 안고 오열하는 육아로봇;



동료를 찾기 위해 모여서 우주로 뛰어들길 바라는 꼬마들;



프로그램의 논리를 수행하기 위해 편집증적으로 생명을 가두는 의료 기계;



그리고 그녀를 일방적으로 추종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인류 학살을 자행한 제로…….



슬픈 것, 막연한 것, 고통스러운 것, 편집증적인 것, 절망적인 것들을, 나나미는 전부 기억했다.


이런 것들이 과연 그녀와 같은 동류 기계들이 얻어야 할 결말일까.


나나미

나나미는 더 이상 당신을 믿지 않을 거예요…. 만약 당신이 연산하지 못한다면 저 스스로 찾을게요.


게슈탈트

현재 앞으로 10년간 미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사건 분기점은 약 8만5412개이며, 퍼니싱에서 살아남은 성공률은 0.031%에 불과합니다.


나나미

다 말했잖아요, 나나미는 스스로 찾을 거라고요! 인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당신처럼 바보 같은 기계는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게슈탈트

개체 나나미는 추론 연역으로 각 사건의 분기점이 향하는 미래를 유도할 생각입니까? 게슈탈트의 연산력 지원이 없으면 당신은 할 수 없습니다.


나나미

그럼 빌려 주세요. 나나미는 당신의 권한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게슈탈트

이러한 방안의 집행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나나미

그럼 나나미에게 더 이상 기계 각성을 이끌어 달라고 부탁하지 마세요.


나나미

제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저도 당신의 말을 듣지 않을 거예요.


...


게슈탈트는 다시 잠시 침묵했다.


게슈탈트

게슈탈트, 당신의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다른 계산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그녀는 승산이 가장 높은 방안을 선택했다.


그러나 나나미는 게슈탈트가 이 세상의 어려운 문제, 과학, 재난 및 미래를 계산할 수 있지 이 모든 데이터 난류에서의 가장 불확실한 인자는 곧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반드시 거대한 난류를 넘어 가능성을 붙잡아야 할 것이다.





서성치의 [무한추론] 18-14 : 미래에서 답을 찾다


나나미 결정했어. 운명의 폭풍과 맞서 싸워야 해!



인간과 기계체가 의식 탄생에 있어 가장 큰 차이점은 인간은 자신이 사고할 수 있는 특정 분기점들을 명확하게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분기점이란] 기억과 감정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연령층인 유아기인가? 어머니의 몸에서 빠져나와 그 존재를 알리기 위해 이 세상에 처음 나타나 울음소리를 외쳤을 때? 아니면 수정란이 나팔관에 형성되어 빠르게 분열하려고 하는 그 순간?


생물학에서 철학의 범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이 난제는 기계체에 있어서 매우 간단명료한 부분이다.


프로그램에 입력 에너지가 연결되고, 켜지는 순간 새롭고, 성숙하고, 지혜로운 의식이 탄생한다.


기계체는 기억의 하드디스크에 저장돼 있던 어떤 순간도 언제든지 찾을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인과관계와 시간의 역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기계의 프로그램의 추론 연산에서 사소한 말, 사소한 행동조차 이미 알고 있는 미래에 따라 실천되어질 뿐이다.


이는 나나미가 모든 연산력을 동원해 추려낸 여러 개의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는 세계 인자를 모두 그녀의 메모리 디스크에 담아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슈탈트의 미래 추론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며, 현실 세계의 분기점을 마주할 때마다 그녀가 분기 라인 중 하나를 선택하고 앞으로 나아가면 그녀의 발 아래로 다시 무한한 가능성이 뻗어져 나갈 것이다.


자신과 그 공간의 끝인 미래 사이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지, 그 안에 담긴 가능성을 알 수 없고, 선의 끝이 하나의 미래로 흘러가는지도 알 수 없다.



게슈탈트

개체명 나나미, 추론 연역 프로그램에의 진입을 확인하시겠습니까?



나나미

확인... 으으.


방대한 연산력에 과부하가 걸린 나나미의 얼굴은 약간 이상해졌지만, 이내 적응한 그녀의 눈에는 다시 빛이 났다.


게슈탈트

... 추론 연역 개시. 세계 재구성 시작, 10%...



데이터 공간은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완전히 새롭지만…. 그러나 실재하는 미래가 점점 구축되고 있었다.



게슈탈트

개체명 나나미, 3차 추론 연역 프로그램에의 진입을 확인하시겠습니까?


나나미

확인.



게슈탈트

...로딩 시작, 제 5차 추론 연역.



게슈탈트

… 9차 추론 연역 프로그램에의 진입을 확인하시겠습니까?


게슈탈트

...제 12차 세계 재구성 시작... 25%...


게슈탈트

…31%…46%……


게슈탈트

개체명 나나미, .... 확인하시겠습니까?



게슈탈트

개체명 나나미, ... 그건 뭐죠?



나나미

하아...하아, 이거요?


소녀는 몸 아래 기갑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나미

기계 할머니, 《바다 괴수》라는 영화 본 적 있나요?


게슈탈트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보니 인류가 황금시대 말기에 만든 SF영화 입니다.


나나미

나나미는 한때…이런 재미있는 작품들을 많이 보았는데 인간들은 이런 초-거대한 기갑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나나미

그들의 문화에서 기갑은 신이 내린 힘처럼…. 아무리 작은 인간이라도 기갑을 운전하면 폭풍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얻었어요.


나나미

아무래도 나나미는 이해한 것 같아요…미래의 내가 그것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를 말이에요. 나나미는 파워가 너무 좋아요.


나나미

그래서 나나미가 파워를 만들었는데.. 사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나미가 파워를 데려오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네요.. 정말 재밌어요, 헤헤... 맞죠?


게슈탈트

인간이 만들어낸, 운명에 맞서는 강력한 힘의 상징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으신 건가요?


게슈탈트

하지만 저는 개체명 나나미의 연산 능력에 과부하가 걸렸음을 감지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기체를 바꾸고 외부 도구를 빌려 미래 추론을 이어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나미

하하, 이런 표현은 진짜 하나도 낭만적이지 않잖아요…


게슈탈트

여기서 멈추세요, 나나미.


나나미

나나미는 그냥 좋아서 그러는 거예요!


소녀의 손은 기갑 위에 멈추었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표정은 더 이상 격렬하지 않고 평화로우면서 단호했다.


나나미

…정말 좋아서 그래요. 그러니 기계 할머니, 계속하세요. 다음 추론 연역을요.


게슈탈트

...로딩 개시... 36차 추론 연역. 세계 재구성 시작... 



세계의 버블 위를 부유하는 소녀는 가볍게 두 팔을 벌렸다.


하나의 프로그램.


하나의 데이터 덩어리.


여러 번 반복적으로 실행하는 테스트.


무수히 많은 순차 배열이 미래에 속하는 0과 1을 늘어놓았다.


수많은 선택지가 모든 세계의 궤적을 뒤덮는 IF 경로를 발산한다.


천만 개의 꿈, 한 번의 연산에서 소녀는 온 힘을 다해 세상과 맞서 싸울 것이다.


그 어떤 미래를 만나더라도 망설임 없이 나아갈 것이다.







노노미 너무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