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방으로 가는 길은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경비로봇의 순찰을 피해 낡은 잿빛 감방 구역과 취조실을 지나는 동안 대부분의 기계는 자신의 행동을 무시한 채 기체가 완전히 파손될 때까지 기계적인 기능만 반복했다.


20분 뒤 세탁실에 홀로 서있었다.


이곳의 면적은 매우 넓고, 좌우에 4줄로 늘어선 세탁기 이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카트와 색깔을 알아볼 수 없는 찢어진 옷감만 널려 있을 뿐이었다. 사각지대를 경계하며 방 끝의 다른 문을 향해 걸어갔다.


지금의 추론이 맞다면, 자신에게 응답한 사람은 그 문 반대편에 있어야 한다.


문고리를 눌러보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교도관에게 받은 열쇠꾸러미 중엔 맞출 만한 게 없었다.


폭력 사용의 가능성을 가늠하기 시작했을 때 구석의 배관에서 갑자기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아무런 리듬도 없이 단순히 '여기에 주의하라'고 자신에게 주의를 주는 것 같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와 노크에 살짝 흔들리는 파이프를 따라 구석에 있는 한 세탁기 앞으로 갔더니 두드리는 소리가 세탁기 등 뒤쪽 벽에서 또렷하게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세탁기를 밀어내자 벽 바로 아래 쪽에서 건넌방과 연결된 듯한 조그만 구멍이 보였다.


자세히 보려고 몸을 숙이고 있는데 작고 검은 네모난 덩어리가 휙 구멍으로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공교롭게도 자신의 발 옆에 부딪혔다.




(1)

지휘관

(집다) ← 선택

(경계하다)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검은 사각형을 집어 들었다.



(2)

지휘관

(집다) 

(경계하다) ← 선택


본능은 자신을 뒤로 후퇴시키고 검은 사각형이 폭발물이 아님을 확인한 뒤 다시 앞으로 나가 주워 담았다.



교도소 사무직원이 서로 교류할 때 사용하는 PDA처럼 생겼고, 교도관 집무실에서 봤던 단말기와 거의 일치했다.


하지만 단말기는 평소처럼 손끝으로 화면의 먼지를 닦아내고 단말기 인터페이스를 깨우는 방식으로 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화면에는 간수들의 온라인 로그가 뜨는데, 대부분 데이터가 훼손되어 문자가 깨져 있었다.


자신의 주의를 끈 것은 맨 위에 있는 문자 메시지였다.


단말기 화면

'안녕, 낯선 사람.'


'이런 식으로만 소통할 수 있어서 미안하게 됐어.'


지휘관

이것은...!


몇 초 멈춘 뒤 곧 다시 업데이트 되었다..


'당신도 나처럼 여기 갇혀 있다고 믿어. 갑작스럽지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그러자 롤랑의 예상과는 또 다른 일이 벌어졌다.


그 사람은 정말 감옥의 절반을 지나 그가 신호를 보낸 지역을 향해 달려왔다.



롤랑

...하, 두 번 연속으로 틀리게 예측하다니 참으로 희한한 경험이군.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롤랑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단말기에서 방금 보낸 문자 메시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롤랑

음...이런 오프닝은 좀 드라마틱하지 않아?


롤랑

그래도 흥미로운 스토리의 시작인 것 같군.


롤랑

롤랑, 롤랑, 너의 애드리브 실력은 아무래도 죽지 않은 모양이네.


입가에 자조 섞인 쓴웃음을 지으며 롤랑은 벽 모서리에 기대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손에 든 단말기를 노려보았다.


특수 제작된 단말기를 입수한 것은 교도소 내 고정 통신시설처럼 신호가 차단된 건물 안에서도 메시지를 주고받게 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수확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롤랑은 이를 복구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오디오 소자는 완전히 망가졌지만 다른 통신 기능은 간신히 사용할 수 있었다.


롤랑

내 공연에 맞춰줄 수 있겠어?


알람이 울리며 문자 메세지가 갱신되었다.




(1)

지휘관

(걱정 마, 내가 널 구해 줄게.) ← 선택

(여기에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서 기뻐.)


롤랑

아, 걸려들었구나, 착하기도 하지.



(2)

지휘관

(걱정 마, 내가 널 구해 줄게.) 

(여기에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서 기뻐.) ← 선택


롤랑

...






단말기 사용법을 알아본 뒤 자신은 업데이트 로그 형태로 상대방에게 답장을 보냈다.


빨래방 주변에 감염체 위협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벽 모서리에 기대 앉았다.


비슷한 처지의 그 사람과 자신은 지금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두 사람은 손에 쥐어진 작은 단말기를 통해서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상대방은 자신의 사연을 간단히 설명했는데, 보급품을 찾다가 문이 갑자기 닫혀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비상계엄 모드가 작동한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없어 스스로 탈출 방법을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벽이나 대문을 파괴하는 물리력을 사용한 탈출 방법을 우선 고려했지만 다음 순간 그럴 가능성은 배제되었다.


감옥의 대문이나 벽을 무너뜨리기엔 몸에 지닌 무기로는 역부족했고 상대방은 더욱 그랬다.


합류하려면 또 다른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교도관 집무실에서 봤던 지도를 머릿속으로 훑어보다가 한 가지 정보를 알아챘다.


모든 출구를 통제하는 종합통제실은 자신의 위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고, 교도관실은 B구역 중앙에 있다.


사무실에서 폐쇄를 통제하는 명령과 관련된 단서를 찾을 수 있다면 종합통제실에서 명령을 해제해 감옥의 문을 열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지휘관

(한 가지 생각이 있어.)

(한 가지 계획이 있어.)


지휘관

우리는 협력해야 돼.


단말기 화면

'알았어, 이제 뭘 해야 될까?'


그래서 자신의 계획을 상대방에게 알렸다.




롤랑

그렇군…


롤랑

분업으로 협력하다니, 좋아. 이런 경험은 오랜만이야. 그리고 확실히 힘으로 돌파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기도 하고.


사무실로 가는 것은 롤랑에게는 손쉬운 일이지만…. 뜻밖에 갇힌 약하고 가련한 사람은 곳곳에 널려 있는 감염체를 뚫고 갈 수 없다.


롤랑

그래, 충분히 리얼하게 연출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어렵게 만들 필요가 있겠지.


롤랑

음, '하지만 사무실로 가는 길에 감염체가 많아 나 혼자서 전부 해결할 수 없어.'


롤랑

이렇게 말하자.


잠시 후 답장이 왔다.


단말기 화면

'알겠어, 내가 너희들을 도와 그 녀석들을 유인할테니 내 신호를 기다려.'


롤랑

...유인?


어떻게 해야 감염체와 접촉하지 않고도 이들을 유인할 수 있을까?


롤랑

좋아, 어떻게 하는지 보여줘.


롤랑

나는 먼저 사무실에 가서 너의 희소식을 천천히 기다릴게, 낯선 사람.

 

롤랑은 일어나서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여유롭게 가로지르는 그의 움직임은 마치 거리를 걷고 있는 것만큼 한가로웠다.


갑자기 귀에 거슬리는 전류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전류음이 아주 빠르게 작아지고 대신 피아노곡 한 곡이 흘러나왔다. 감옥의 방송 시스템은 오랫동안 유지 보수하는 사람이 없어서 뒤죽박죽한 전류음이 흘러나왔고, 느긋해야 할 피아노 곡도 기이하고 침울해졌다.


롤랑

?


피아노곡이 불과 1초 만에 우아한 첼로로 바뀐 것은 누군가 교도소 내 방송 시스템을 조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사람이 이렇게나 빨리 상황실에 도착하다니?


교도소 곳곳에서 기계가 부딪히는 소리와 파손된 발성기관이 내는 소음이 들렸고, 감염체들은 소리가 나는 위치를 알아차리고 다른 방향에서 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대방이 '유인'한다는 게 바로 이 뜻인 것 같다.


롤랑

나쁘진 않군.


라디오 속 음악은 또 달라져 이번에는 우아한 첼로 음악에서 데스, 블랙메탈로 바뀌었다


거친 그로울링은 삽시간에 감옥에 메아리쳤고, 감염체의 울부짖음과 그 어느 것보다도 더욱 끔찍했다.


롤랑

...?


감염체는 사방에 울려퍼지는 소리를 따라가 소리를 내는 음향에 계속 모여들었다.


그로울링이 어느 순간 뚝 그치고, 소박한 팝이 라디오를 강타했고 재즈, 랩, 심지어 감옥의 15번째 라디오 체조 음악이 뒤를 이었다.


...이건 뭐지, 노래가 끊겼어?


의혹은 오래 가지 않았고, 음악은 다시 바뀌었다.


플라멩코 댄스 곡이 감옥에 울려 퍼지자 롤랑은 약간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이 노래도 교도소를 주제로 한 영화에서 따온 것인데, 주인공은 교도관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집단싸움을 도발했다. 죄수들간의 치열한 대결 속에 교도관들은 이들을 막아야 했다. 그 기회를 틈타 다른 사람이 자물쇠를 따는 데 필요한 철 조각을 훔쳤다.


감독은 플라멩코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해 코믹하면서도 파워풀한 씬을 연출했다.


단말기에서 문자 메시지가 드디어 업데이트되었다.


단말기 화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이것이 바로 내가 보내는 신호야.'


단말기 화면

'이제 사무실로 가도 돼.'



롤랑

풉...하하...하하하하...


롤랑

이 인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잖아.


롤랑

여기서 나갈 때까지 심심하지 않을 것 같군.



앞으로 가는 길은 아무런 방해가 없었고, 롤라은 재빨리 사무실의 위치를 알아냈다.


명령어와 비밀번호를 찾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고, 구시대의 소형 금고는 쉽게 파괴됐고, 어떤 비밀도 롤랑 앞에서 감출 곳이 없었다.


지금 그가 더 궁금해하는 것은 그 '파트너'다.


롤랑은 찾아낸 명령어와 비밀번호를 단말기를 통해 보냈고, 맞은편에서 곧 메시지가 날아왔다.


단말기 화면

'문이 열렸어, 협조가 순조롭게 이뤄졌어.'


단말기 화면

'바깥에는 감염체가 있어. 우리는 식당 구역에서 먼저 합류한 후에 함께 돌파할 수 있을 거야. 우리가 합류하기 전의 동선을 이미 계획해놨어.'


이어진 문자메시지는 철수 방식과 동선을 간결하게 묘사해 예상 밖의 상황과 대응 방법을 제시했다.


롤랑

……그렇게까지 합류하려고 하다니, 우리의 협력관계는 여기서 끝나는 줄 알았는데.


롤랑

스스로를 귀찮게 만드는 놈은 처음 보는군.



아까의 행동이 파오스 수업에서의 전술 실천이었다면 자신의 성적 기록에는 교관들의 노여움이 담긴 0점이 나왔을 것이다.


지휘관

(가끔 이러는 것도 재밌잖아.) ← 선택

(고생 속의 즐거움거리라고 치자...)


하는 김에 겸사겸사 무해한 '답례'를 곁들였다.


통제실에 도착한 뒤 지도를 대조해 성동격서에 가장 적합한 위치를 선택한 뒤 방송을 이용해 최대한 큰 움직임을 만들어 이곳에서 사무실로 가는 동선에 있는 감염체들을 최대한 끌어들였다.


그 사람이 곧 사무실 위치를 알아냈고, 비밀번호와 명령어를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줄 알았으나, 곧 단말기에서 명령어 한 토막과 숫자가 들려왔다.


곧바로 콘솔에 정문을 여는 명령어를 내렸고 화면에는 '규제구역 정문'이라는 표시등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가장 바깥쪽의 봉쇄는 풀렸고 마침내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뻐근해진 두 다리를 쭉 뻗은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터미널을 통해 상대방에게 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문을 연다고 해서 곧바로 위기에 직면하는 것은 아니며, 감옥 곳곳을 맴도는 감염체는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먼저 회합을 제안했다.


단말기 화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지휘관

(밖은 아직 위험하니까.)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게 생존할 확률이 더 높으니까.)


단말기 화면

'내가 네 발목을 잡을지도 몰라.'


지휘관

아닐 거야.


지휘관

우린 서로 호흡이 잘 맞으니까.


지휘관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렇게 빨리 정문을 열 방법을 찾지 못했을 거야.


단말기 화면

'문은 열렸고, 지금의 나는 이용가치를 잃었지, 당신은 나를 버리고 바로 여기를 떠날 수 있어.'


단말기 화면

'왜 길을 돌아가서 나와 합류해야 하는 거지?'


지휘관

네가 나에게 도움을 청했으니까.


지휘관

게다가...


지휘관

엄밀히 말하면, 네가 먼저 나의 도움 요청에 응답해줬거든.


단말기 화면

'....'


메시지 업데이트가 잠시 멈췄다.


단말기 화면

'비인기 영화 속 어딘지 모를 멜로디라도?'




(1)

지휘관

(하지만 난 알고 있었지.) ← 선택

(확실히 간파하기 어려웠어. 다음에는 인기있는 걸로 기대할게.)


단말기 화면

'…너만이 알 수 있을 거야.'



(2)

지휘관

(하지만 난 알고 있었지.) 

(확실히 간파하기 어려웠어. 다음에는 인기있는 걸로 기대할게.) ← 선택


단말기 화면

'다시 그럴 기회는 없는 게 좋겠어.'



상대의 기색은 보이지 않지만, 지금쯤 그 사람이 쓴웃음을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휘관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지 사실 궁금했어.


단말기 화면

'나는 sos 외에는 모스 코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야.'





(1)

지휘관

(정말? 믿을 수 없군.) ← 선택

(네가 방금 명령어와 비밀번호를 풀은 걸 보면 아닌 것 같은데.)


단말기 화면

'^-^'


화면에 기호 하나로 구성된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2)

지휘관

(정말? 믿을 수 없군.) 

(네가 방금 명령어와 비밀번호를 풀은 걸 보면 아닌 것 같은데.) ← 선택


단말기 화면

'그건 비밀번호가 교도소장 책상 밑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야.'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단말기 화면

'어쩌면 우리끼리 얘기할 수 있을지도 몰라.'


단말기 화면

'그 영화에 관해 또 다른 것이 있거든.'


지휘관

(물론이야.)

(여기서 같이 탈출하고 나서 말이지.)



롤랑

...


롤랑은 무표정한 얼굴로 단말기에서 들려오는 응답을 바라보았다.


분명 단말기에서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에 충실하여 말하고 있지만 그는 어느 순간 솔직한 감정을 느꼈다.


씁쓸함과 반가움, 그리고 은근한 기대, 마치 흔들거리는 비누 거품처럼 가슴속에서 서서히 피어오르다가 롤랑의 손으로 직접 부순다.


배우는 감정을 극 밖으로 끌어내서는 안 된다.


허황 속에서 추구하는 진실은 언젠가는 자신을 찌르는 날카로운 칼이 될 것이다.


롤랑

...하.


롤랑

나는 또... 무슨 짓을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