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류 예정 지점에 도착한 지 수십 분이 지났다.


아직 혼자다.


단말기를 통해 몇 번이고 상황을 물어봐도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토록 연락이 완전히 두절된 상황에서는 상대방이 위험에 처해 있을거란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먼저 이곳을 벗어나 바깥쪽으로 가서 구조를 부를까, 아니면 기존에 계획했던 경로를 따라 직접 상대방을 찾을까?


잠시 생각한 끝에 결론이 났다.


여기서 출구까지는 거리가 있어 현재로선 감염체 수를 파악할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방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자신이 말했듯이ㅡㅡ




(1)

지휘관

('함께 탈출해야 한다.') ← 선택

('널 버리지 않을 거야.')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의 협력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혼자라면 지금보다 더 귀찮은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지금 상대방은 위험에 처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자신은 더더욱 이대로 떠날 수 없다.




(2)

지휘관

('함께 탈출해야 한다.') 

('널 버리지 않을 거야.') ← 선택


그동안 단말기에서 대화할 때 상대방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용가치를 잃으면 버림받는다'ㅡㅡ이런 일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미 익숙하게 여기는 어조였다.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제서야 상대방의 이름조차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휘관

만날 수 있다면...


지휘관

그 사람 이름부터 물어봐야겠어.



인간은 어두운 복도를 향해 내달린다.


잿빛 머리카락의 그림자가 한 층 더 높은 복도에 서서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


이색적인 두 눈에 인간의 모습이 역력히 비쳐졌고, 피로가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지만 총을 쥔 손은 미동도 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 또한 잠시도 망설이지 않는다.


롤랑은 그동안 예상치 못한 일이 몇 번인지 세는 것을 멈췄다. 그는 그 사람이 그냥 떠날 줄 알았었다.



롤랑

정말 놀라워, 지휘관님.


롤랑

보고싶어... 당신이 배신당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롤랑

필사적으로 구하려는 것이 당신의 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롤랑

믿었던 '동반자'에게 배신당한 채 외롭게 이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이런 결말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에게는 가장 큰 아이러니가 아닐까.


시선 속의 인간은 여전히 끈질기게 전진하고 있고, 단말에서는 새로운 단문 메시지가 계속 들려온다.


인간이 나아가는 방향은 이 감옥에서 가장 많은 감염체를 가진 지역으로 한번 포위에 빠지면 절대 혼자서는 빠져나갈 수 없다.


롤랑

...


롤랑

정말 귀찮군.



단말기 화면

'이제 그만하자.'


세 번째 구역을 찾았을 때, 단말이 갑자기 다시 갱신되었다.


지휘관

(어디야?)

(괜찮아?)


단말기 화면

'당신이 찾으려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어.'




(1)

지휘관

(너 도대체 누구야?!) ← 선택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단말기 화면

'지나가던 착한 사람일 뿐이야. 당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해줬지.'


단말기 화면

'방금전의 그 사람은 당신의 적이었어. 나는 지금 당신을 위해 시간을 아끼고 있는 거야.'



(2)

지휘관

(너 도대체 누구야?!)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 선택


단말기 화면

'내가 더 분명하게 말해야 하나?'


단말기 화면

'당신이 구하려는 사람이 원래 적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렇게 집요하게 구하려 했을까?'




지휘관

적?


단말기 화면

'맞아, 적, 하지만 당신을 도와 그를 해결해 주었지.'


지휘관

너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을 거야.


단말기 화면

'그럼 얼굴도 못 본 낯선 사람은 왜 믿는 거지?'


지휘관

내가 믿는 것은 자신의 판단이야.


지휘관

그리고 내가 찾는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


단말기 화면

'왜 그렇게 하는 거지?'


맞은편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잠시 생각한 뒤 자신의 대답을 단말기를 통해 보냈다.



단말기 화면

'내가 그를 버리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단말기 화면

'네 말대로 그가 나의 적일 수 있지만, 지금 당장 사람을 구하겠다는 내 결정에 영향을 주지 않아.'


단말기 화면

'정확한 판단을 내릴 거야.'


단말기 화면

'결국 적이라는 것은 그가 내 임무의 목표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니까, 나는 더더욱 떠날 수 없어.'


롤랑은 단말기에서 온 답장을 한 글자씩 읽어낸 뒤 손을 들어 손등을 눈 위에 덮고 웃었다.



롤랑

하...하하...


그는 어깨가 떨릴 정도로 웃었다.


롤랑

과연…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야.


롤랑

여태까지...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롤랑

정말이지...하하하....



한참 만에야 롤랑은 웃음을 멈췄다.


롤랑

정말로ㅡㅡ흥미로워. 그냥 여기서 죽게 두기엔 좀 아쉬운걸.



마지막 답장을 보내자 단말기의 상대방은 다시 침묵에 잠긴 듯했다.


의문투성이지만 이미 여기서 허비할 시간은 많지 않다.


길 끝에 위험한 적이든, 구조를 기다리는 동료든 직접 확인해봐야 알 수 있는 상황이다.


현재 위치는 교도소 내 강력범들이 수감된 감방 구역으로 봉쇄가 더 심해지고 교도관형 생체공학기계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 가운데 복도를 가로막고 있는 4개 감염체가 순찰 역할을 하는 것처럼 서성거리고 있다.


지휘관

저것들을 해결할 방법을 강구해야 해.


주위를 살피다가 가장 가운데 있는 감방에다 표적을 고정시켰다.


전술배낭에서 연소봉을 꺼내 불을 붙인 뒤 정확히 각도를 잡고 집어던졌다. 연소봉이 눈부신 빛을 그리며 감방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감염체는 거세게 타오르는 강한 빛과 고온에 이끌려 일제히 뒤돌아 감방으로 들어갔다.


바로 지금이다!


지휘관

(감방 문을 닫자!)


외골격의 도움으로 철문을 다시 닫아 감염체는 좁은 감방에 갇히게 되었고, 감염체들은 연소봉 주위에 잠시 멈췄다가 돌아서서 무기를 들고 철문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철문이 충돌하는 중에 경보음이 울렸다.


경고음

시설물이 악의적인 공격을 받는 것을 감지.


경고음

스캔 시작 ㅡㅡ 교도관형 T8760, 교도관형 T8761, 교도관형 T8763, 교도관형 T8764 확인.


스캔하는 붉은 빛은 네 개의 기계를 넘어 자신의 몸으로 이동했다.


경고음

낯선 생체인식 신호, 당신의 행동은 이미 교도소 관리규정에 저촉되어 곧 강제집행 절차를 밟게 될 것입니다.


경고음

처결 목표 설정.


지휘관

젠장...!


자신의 가슴에 붉은 점이 나타나자 마음속으로 좋지 않은 예감이 떠올랐다.


몸이 먼저 반응해 좌측 후방으로 물러서자 붉은 점이 따라왔고, 자신도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로 가느다란 붉은 빛을 볼 수 있었다.


즉각 빛의 원천을 거슬러 올라가 전광석 불 사이로 시선의 왼쪽 위쪽을 지나가는 붉은 빛 한 줄기에 주목하며, 총을 들어 그 방향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

ㅡㅡ!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다면 두 발의 총성이었고 거의 동시에 울렸다.


앞의 처리 시스템은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자신이 쏜 총탄에 의해 파괴됐고, 다른 한 발의 총성은 자신의 측후방에서 나왔다.


이내 고개를 돌리자 수십m 뒤 그늘 속에 경비형 기계감염체가 서 있었다.


지휘관

(언제 여기까지 왔지?!)

(총을 들고 쏘다)


자신이 더 나아가기 전, 감염체는 던질 듯한 자세를 유지한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순간 쓰러져 있는 기계 뒤로 또 다른 검은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사람의 모습이 잘 보이기 전에 쓰러진 감염체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을 먼저 알아차렸다.


그 뒤를 이어 점점 빨라지는 비프음이 들렸다.


ㅡㅡ진동 폭탄이다!


지휘관

빌어먹을!



좁은 복도에서 굉음이 터져나오고 눈을 질끈 감고도 뜨거운 빛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