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모습은 감염체의 물결 속으로 잠겼다.



하카마

여기가 마지막 발신지...


하카마가 메모리 라이브러리에 있는 좌표지점에 도착했을 때는 사흘째였다. 좌표와 연구소 사이의 거리와 도중에 감염체들의 간섭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지의 바이러스가 폭발하자 기계를 향한 인간의 무분별한 적대 때문이기도 했다.


하카마

감정 시뮬레이션 모듈 손상 재확인…일부 관제 기능 오프라인, 상황 추론 편향률…0.023%


하카마

수용가능 범위 내에 있다고 판단함.


하카마는 뒷머리의 상처를 만지며 이미 쓸 수 없게 된 일부 부품을 떼어냈다.


거대한 상처가 후두부를 가로질렀고, 생체 공학 기낭 외피를 통째로 젖히자 정밀한 집적회로가 드러났다.


이것은 시민들을 호송하다가 그녀를 감염체로 오판한 한 병사가 남긴 것이다.


이후 하카마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람들을 피해 움직였다.


이 때문에 피난차들이 자주 통과하는 직통로는 경로 추론에서 제외됐고, 우회해서 움직인 하카마는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하카마

좌표 데이터 수집 시작... 수집 완료... 상황 추론 시작.


가상 데이터로 구성된 광경이 하카마 앞에 나타났고, 시간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거꾸로 움직였다...



살려줘...



안돼...



날 놔줘...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비명소리가 그녀의 전자 뇌에 스며들었고 수많은 인간의 그림자들이 도시 밖으로 뛰쳐나가지만, 몇몇은 인파와 등을 돌리고 있었다.


하카마에겐 자신과 같이 역주행하는 이 사람들이 마치 강에 뛰어든 돌멩이처럼 보였고, 약간의 파도가 일더니 붉은 조수에 삼켜졌다.


하카마는 이런 사람들과 관련된 인간의 지향이 '명령에 절대 복종'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과연 '명령' 때문일까? 하카마는 이내 이 판단을 거부했다. 그녀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의 기록에 인간이 절대 복종해야 하는 '명령'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양심' 때문일까? 기계가 기저 프로토콜에 따라 행동하듯이 인간도 이와 유사한 존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인가?


분명 다른 존재이고, 다른 경험을 갖고 있는데, 왜 그들은 지금 이 순간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일까? 같은 '양심'이 있어서 그런가? 그렇다면 각 개개인의 '유일성'은 또 어디에서 존재하는 것인가?


하카마는 쓰러진 모습들을 보며 며칠 전 얼굴의 절반을 잃었지만 뒤에서 사람을 보호하며 자신을 향해 포효하던 병사를 떠올렸다.



하카마

명령 없이도 할 수 있는 선택...


이것은 감정 시뮬레이션 모듈에서 볼 수 없었던 이종 데이터로, 관제 기능이 손상된 상황에서 하카마가 이를 분석 처리할 수단을 잃었다.


그래서 그녀는 감정 시뮬레이션 모듈의 모든 기능을 끄고 자신이 해왔던 일을 계속했다.


인파와 시간을 거슬러 하카마는 핏빛 바다에서 기록 속의 모습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찾아도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었고, 방대한 데이터 흐름은 그녀를 파묻으려는 듯, 또한 한 쌍의 손을 꼭 잡아당기는 듯했다.


하얀 두루마기는 점점 검붉게 물들어가며 목청껏 외치는 소리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고, 후두부의 집적 모듈은 고속 작동으로 불꽃이 튀었다.


이미 기체의 온도는 안전 임계치를 넘어선 지 오래였고, 주변의 공기는 열기에 의해 간간이 뒤틀렸지만 하카마는 여기서 추론 연역을 멈추지 않았다.


불필요한 모든 센서와 회로를 닫고 과거 추론에 모든 연산력을 집중했다.



'나나미'

...혼자가 됐어...



마침내 그녀는 바다에서 물방울을 찾아냈고, 상대의 진행 경로도 추론해냈다.


추론을 마치고, 하카마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경로로 따라갔다.



감염체는 공포에 질려 막다른 골목에 있는 어린 소녀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르네

누가 오고 있어, 누가 나좀 구해줘...


하지만 떨리는 부름에도 영웅은 찾아오지 않았고, 싸늘하고 섬뜩한 빛에 놀라 눈을 감은 그녀는 죽음의 순간이 그리 아프지 않기를 기도하는데...


감염체

끼이익!


원래 죽을 때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걸까?


???

목표 배제...아니, 음...


싸늘한 여자 목소리가 나오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환되었다.


???

꼬마야, 이제 괜찮아. 눈을 뜨렴.



르네

으아!


르네는 짧은 울음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하카마의 밖으로 드러난 전자뇌에 적잖이 놀란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지만 차가운 벽이 물러설 곳이 없음을 알렸고, 이때 그녀는 하카마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감염체를 알아차렸다.


자신의 시선을 강제로 상대의 뒤통수로부터 떼어낸 르네는 상대의 따스한 웃는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르네

너....넌 나쁜 기계가 아니야?


하카마

아니, 난 너의 가장 친절한 가정 도우미야.


르네

?


하카마는 왠지 가정부형 인격을 택했지만 감정 시뮬레이션 모듈이 오프라인인 그녀는 이제 그 인격 안에 저장된 전형적인 문구만 호출할 뿐 실시간 튜닝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르네

고...고마워, 날 살려줬어.


며칠간의 큰 변고만으로도 앳된 아이를 성숙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녀는 이내 울고 묻고 싶은 기세를 제지하여 흐느끼며 하카마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하카마

괜찮아, 자...천천히 일어나렴...옳지!


인격 시뮬레이션의 양식에 맞춰 하카마는 가볍게 박수를 쳤다.


하카마

어디 가고 싶은 데 있니?


르네

응......르네는 피난처 위치를 알고 있어, 군인 아저씨가 알려주셨거든....


하카마는 그 군인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어린 소녀의 얼굴 표정을 분석한 것만으로도 이미 군인의 결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이때 환경감시장치에서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감염체 신호가 포착됐고, 울부짖는 소리가 바람처럼 이쪽으로 밀려왔다.


어린 소녀를 데리고 나가면 감염체의 물결과 직접 부딪칠 것이 분명하며, 게다가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지 않게 해야 한다….


논리 알고리즘과 데이터 분석을 통해 하카마는 충격적인 기체 손상률이 성공 확률에 비례한다는 답을 빠르게 알 수 있었다.


하카마

...


르네

언니...?


하카마

자, 안아줄게...옳지, 착하지.


하카마는 쪼그리고 앉아 소녀의 작고 작은 몸을 안아올리고 떨고 있는 상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르네의 등을 쓰다듬고는 하카마는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묻었다.


하카마

하지만 너도 약속해야 해, 절대 고개를 들지 마.


가정부형 인격 음성이 숙연한 기류와 어울리지 않게 시뮬레이션 되었다.



낫은 감염체의 동력 척추의 빈 공간에 박혔고, 팔을 당기자 감염체가 반으로 잘려나갔다.


이미 환경감시장치에는 감염체에서 나오는 신호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하카마의 기체도 한계에 다다랐다.


레이더와 시각 모듈 모두 적지 않은 고장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기동 부품도 손상이 심해 부담스러운 소리를 냈다.


다행히 르네가 언급한 대피소까지는 상당히 가까워졌고, 남은 길은 그녀 혼자 걸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카마가 르네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이 소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고개를 들지 않았고 난리를 피우지 않으면서 말을 잘 들었다.


르네

언니...



하카마

이제…경고, 전력유출, 연산력 변화 진행중… 안전해, 넌…모듈 오프라인…문제없어.


하카마

전력으로 …이상 절차 차단… 달려가, 알겠니?


르네

아니, 언니 같이 가, 거기 어른들이 많으니까 꼭 고칠 수 있을 거야.


하카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피자 중에 과연 자신을 수리할 수 있는 기술자가 있는지는 둘째치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 감염될 수 있는 기계체가 옆에 있기에는 아무래도 적합하지 않다.


이는 하카마가 수없이 추론 연역한 결론으로, 자신의 뒤통수에 금이 간 것 또한 이것의 가장 강력한 방증이다.


하카마

피곤...강제 휴면 실행...해. 휴, 식....


인격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간신히 유지하며 상대방에게 최대한 부드러운 말을 내뱉지만 발성 모듈에서 나오는 것은 바스락거리는 전자음이었다.


르네

...내, 내가 사람을 불러올게.


하카마

음, 난...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잠깐...


멀어져 가는 르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카마는 이미 붕괴 직전이었던 회로 소자를 닫았다.


휴면 모드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순간, 그녀는 왔다 갔다 하는 발소리를 들었다.







하카마망 응애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