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카마는 오랫동안 혼자 걸었다.

가는 길 곳곳에 벽화와 낙서가 눈에 띄었고, 그녀는 잇달아 멈춰 서서 분석을 기록했다.

어떤 낙서는 순수한 감정을 표현했다.

ㅡㅡ기쁨, 소망, 호기심, 의문… 어떤 속박도 존재하지 않고, 마치 화가가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을 화필로 다 쏟아부은 것 같았고, 어떤 설교적 의미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 어떠한 기법조차 초월해 불가사의할 정도로 자유로웠다.

기계들이 언급한 '계시'는 이러한 낙서가 주는 단순한 결과에 가까우며, 흑백의 세계로 채색의 불길이 번져가듯아 그것들은 자신이 태동하는 '감정'을 도구를 이용해 표현하기 시작하며 의문과 미망을 기록했다.

낙서 속에 슬픔, 막막함, 증오, 두려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카마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녀가 본 낙서는 점차 풍부해져 도시의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거나 자연과 통합되거나 매우 눈에 띄는 장소에 등장했다.

하카마는 점차 어떤 낙서가 '선현'의 손에서 나왔는지, 또 어떤 그림이 '선현'의 추종자들의 흉내인지 판별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녀 자신도 그녀가 가려내는 기준을 명확히 정의할 수 없었다.

'선현'의 모습은 그녀의 마음 속에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낙서의 끝없는 연신을 따라가면서 그녀는 시종일관 그 환영의 뒤를 밟으며 걸어갔다.

낙서의 위치는 불규칙적이지만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니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낙서가 있는 한 이 지역의 감염자 수가 상대적으로 적고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카마는 모퉁이에서 멈추었다. 그녀는 한 벽면에 친숙한 낙서가 조그맣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의미는 간단했다.

'앞에 보물이 있다.'

하카마가 글씨를 따라 올려다보니 황금시대 인류가 그들의 사상을 펜 끝에 옮긴 뒤 책으로 만들어 한곳에 모아 팔았던 책방이었다.

서점 간판은 이미 오래 전에 떨어져 진흙 속에 부서져 있었고, 깨진 유리창에는 휘청거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처마의 그늘에 남겨진 글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페이지를 다시 만지는 느낌', '본점에서는 AI가 만든 책을 팔지 않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하카마가 녹슨 대문을 밀자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문 전체가 부서졌고 처마 위에 머무는 새들이 놀라 일어났다.

하카마

...미안합니다.

하카마는 문짝을 살짝 옆에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식물의 덩굴이 책꽂이에 올라가 책을 밀치고, 어두운 구석에서 번져 뻗어나가 햇빛을 쫓으며 폐허 속에서 왕성한 생명력을 꽃피웠다.

인류가 떠난 후에도 바람은 씨앗을 사방으로 가져가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다.

한때 인간이 머무른 것으로 보였다. 방 한구석에는 책꽂이에 있는 책들에 의해 연료를 공급받은 몇 개의 불씨가 남아있었다.

하카마

이것은...

손은 책장 위를 한 줄 한 줄 훑어보다가 책 한 권을 꺼내더니 책의 움직임과 함께 먼지를 들어올리며 오후의 공기중으로 흩어졌다.

하카마

...그녀가 언급했던 만화.

책장은 눅눅했으며 세월의 침식에 의해 극도로 취약했었고, 단순히 뒤집기만 해도 누렇게 물든 종이가 찢어질 수 있었다.

하카마

너무 오래되어서...내용이 잘 보이지 않아.

하카마가 능동적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책장을 뒤척이며 지나간 기억은 계속 쏟아져 나왔다.

하카마

만화 말입니까?

하카마

물론 현재 발행되고 있는 만화 작품 전체를 포함해 필요한 어떤 자료라도 찾아 드릴 수 있습니다.

나나미

나나미는 하카마한테 그런 거 본 적 있냐고 물어본 거야! 나나미는 그런 거 정말 좋아해, 멋있는게 많거든!

하카마

좋아한다...

나나미

하카마도 볼 수 있잖아... 이거 진짜 재밌어!

나나미

참, 그 만화 제목은...

???

반갑습니다. 그 <스타더스트 나이트의 새벽 모험>을 제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녀를 추억에서 끌어낸 것은 한 기계체의 소리였다.

하카마는 목소리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낡은 모형의 운반기계가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그것은 만화 더미를 들고 정중하게 물으면서, 카메라는 하카마의 손에 있는 책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운반기계

그것은 제가 모으고 있던 공물입니다.

하카마

공물?

운반기계

네, 충분한 수량이 모이면 선현이 꼭 다시 찾아올 겁니다.

하카마

...그런가요.

하카마는 쭈그리고 앉아 높이 쌓인 책 꼭대기에 만화를 올려놓았다.

운반기계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물품은 이미 수령 서명했습니다!

무언가 미리 설정된 명령어가 촉발된 듯 운반 기계는 손에 들고 있던 '공물'을 신나게 들었다.

하카마

그 말은, '선현'이 여기에 왔다는 뜻입니까?

운반기계

네, '선현'이 저희 '본부'에 왔었는데, 새로운 지시를 해주시고 몸도 고쳐주셨습니다.

운반기계

선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선현이 사랑할 수 있는 물건들, 예를 들어 인간이 만들어낸 '쿨한 것들' 같은 것들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운반기계

리스트에 있는 마지막 만화인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전 '본부'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운반기계는 흔들리며 돌아섰고, 그것이 앞을 향해 꼿꼿이 행진하다가 무너진 책꽂이에 머리를 부딪쳤다.

운반기계

...장애물 감지…진행경로 조정…

그것은 다른 한쪽 벽에 툭 부딪혔다.

운반기계

...

운반기계가 멈추고 머리 위의 표시등이 끝없이 깜박이는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운반기계

진행경로 재설정...

하카마는 운반기계의 몸통에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인 얼룩과 움푹 패인 자국이 있음을 발견했다. 바닥에도 흔적이 뚜렷한 발자국이 여러 줄 남아 있어 서점 바닥에 비슷한 굽이굽이한 궤적을 남기고 있다.

이런 흔적들을 보아 이 기계는 계속 여기서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

운반기계

제 2378번째... 경로 조정 실패...

운반기계가 고개를 떨구고 있는 걸 보니 낙담한 듯 하다. 자신에 대한 정비를 마치기에는 지능이 부족했고, 이곳을 지나칠지도 모르는 동료를 마냥 기다려야 했다.

갑자기 한 손이 자신의 머리 위에 덮이는 것을 느꼈고, 이내 차분한 두 눈이 보였다.

하카마

당신의 내비게이션 기능이 고장났습니다.

하카마

제가 복구와 교정을 해드리지요.

이 기계는 도움이 필요했고, 하카마의 명령 범위 안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운반 기계를 향해 다가왔다.

명령 없이도 그녀는 나나미가 했던 것처럼, 도움이 필요한 대상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을 수 있었다.

운반기계는 정연하게 앞에 있는 인간형 기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종일관 표정을 바꾸지 않았지만, 그녀의 몸에서는 선현에게 쓰다듬힐 때와 비슷한 '감각'이 느껴졌다.

운반기계

...고맙습니다. 모자 쓴 누님.

하카마

이것은 저에 대한 호칭입니까?

운반기계

네, 선현의 가르침에 따라 외형적인 특징과 합쳐서 그렇게 결론지었습니다.

하카마

저를...하카마라고 불러도 됩니다.

운반기계

좋습니다, 하카마. 당신은 저를 꼬마 운반자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하카마

그러면 당분간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운반 기계가 다시 일어서서 팔다리를 움직였다.

꼬마 운반자

기본 기능이 회복됐습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카마

…여건에 한계가 있어 내비게이션을 잠시 교정을 했지만 완전히 복구할 수 없었습니다.

꼬마 운반자

이걸로 충분합니다.

꼬마 운반자

실례지만… 하카마, 저와 함께 돌아가 주실 수 있습니까?

꼬마 운반자

당신이 저를 도와줬으니 마땅히 '보답'을 해야 하지만… 저희가 모은 물품들은 모두 '본부'에 보관돼 있습니다.

꼬마 운반자

보답으로... 그 중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고를 수 있습니다.

하카마

대가를 바라고 당신을 도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운반기계는 '선현'이 그곳에 간 적이 있고, 그곳에도 그녀에 대한 단서가 존재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하카마

...알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동행하길 바랍니다.

그러자 운반기계의 안내에 따라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은 두 모습이 본부로 향하는 길을 향해 나아갔다.

전투 개시

하카마

"백화점", 인간이 쇼핑하고 즐기는 구역...

하카마

정보에 따르면 376번의 미완 임무에 필요한 "선물"은 이런 곳에서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운반기계

끼익끼익ㅡㅡ

운반기계

끼익끼익ㅡㅡ 시스템 이상, 동료의 위치 특정 불가능...

하카마

내비게이션 시스템...이상 없음, 정상적으로 작동 가능.

하카마

지도 정보를 요청합니다.

운반기계

저희 본부가 이 근처에 있는데 요즘 이 안에 감염체가 많아지고… 다들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운반기계

만약 '공물'이 파괴되기라도 한다면…덜덜덜.

하카마

창고 위치가 특정되었습니다.

도움말

대량의 감염체 신호 검출, 운반 기계를 보호하여 창고로 나아가십시오.

도움말

운반기계 근처에서 기능이 강화됩니다.

운반기계

저기입니다!

하카마

조심하세요.

하카마

(창고에 감염체 다수가 존재, 하지만...)

운반기계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하카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면 돌파(전투 촉발)    잠입 작전(주변 조사) ← 선택

하카마

후송 대상자의 안전을 위하여 가급적 교전을 피해야 함.

하카마

주변을 수색하여 사용 가능한 자원을 찾겠습니다.

도움말

격파된 감염 기계체로부터 식별 데이터 획득

하카마

감염 기계체의 식별 신호를 이용해 위장할 수 있음.

하카마

제 뒤를 따라오세요.

운반기계

도착했습니다! 바로 이곳입니다!

운반기계

이상해... 다들 어디 갔지?

하카마

인식 물품: <스타워즈>

운반기계

이것은 인류 박물관에서 찾은 것입니다. 비록 잘 알지는 못하지만요.

운반기계

하지만 '박물관'에 놓여 있는 것이라면 모두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카마

인식 물품: <은하 돌파, 나선의 눈>

운반기계

이것은 대형 기계체로부터 탈취한 것입니다.

하카마

탈취...

운반기계

네, 탈취입니다.

하카마

인식물품: <정상을 넘어서>

하카마

두툼한 레트로 CD 묶음으로 그 위의 '주년 소장'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음. 파손된 부분이 수차례 재결합된 흔적이 있음.

하카마

이것이 바로..."공물"입니까?

운반기계

그렇습니다!

운반기계는 원래 물류회사에서 만든 신에너지 운반기계였지만, 투입되기 전 이미 퍼니싱 바이러스가 그 구역까지 퍼졌다.

그것은 창고 깊숙한 곳에 버려졌다가 보급을 찾으러 온 인간이 창고 문을 비틀어 열고 나서야 비로소 잠에서 깨어났다.

그것은 재난 이전 명령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더 이상 배달을 원하는 인간은 없다. 그럼에도 그것은 인간에 의해 훼손된 몸을 이끌고 도시를 질주하며 운반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 했다.

그것은 벽에 나타난 벽화에 매료됐고, 기계들은 그것이 '선현'이 남긴 계시라고 입을 모았다.

한 번은 미완성 벽화 앞에 기이한 기계체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흥겹게 벽에 현란한 선을 그은 후 완성되자 반갑게 손뼉을 치며 환호했었다.

소녀는 구석에 숨어 있는 운반기계를 보자 손을 뻗어 머리 위를 쓰다듬었고, 그 순간 운반기계는 처음으로 '따뜻함'이라는 느낌을 깨달았다.

소녀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더라도, 운반 기계는 그녀가 기계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는 '선현'이라고 확신했다.

인류의 유산에 깊은 관심을 가진 '선현'은 하루 종일 백화점을 탐색하며 '보물'을 찾고 백화점 안에 다른 기계들을 모은 뒤 '롤플레잉'이라는 게임을 신나게 즐겼다.

운반기계는 이런 게임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지만, 소녀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을 느낄 수 있었으며 이런 종류의 감정은 너무 충만해 공허한 마음까지 채워주었다.

하지만 소녀는 이내 자리를 떴고, 그녀는 손을 흔들며 기계들에게 '안녕, 나나미 잘 놀았어'라고 말한 뒤 눈부신 햇살 속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모으면 그녀는 언젠가는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도시의 인간이 남긴 예술 작품, 책, 게임, 장난감을 수집하여… 거점으로 데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아진 이 '공물'들은 이처럼 창고에 가지런히 쌓여 주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꼬마 운반자

이제 이런 것들이 선현이 왔을 때보다 훨씬 많아졌으니 전보다 더 재밌게 놀 수 있을 것입니다.

꼬마 운반자

그렇지만 선현이 계속 오지 않는 이유는 또 어떤 '키 아이템'이 수집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꼬마 운반자

그리고 저의 동료는...그들은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운반 기계가 곤혹스럽게 '공물'과 기계의 잔해 속에 서 있었다.

하카마

...당신의 동료, 어떻게 생겼습니까?

꼬마 운반자

저와 같은 모델의 운반 기계입니다.

매장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녀는 운반기계의 이상을 발견했었다.

고장 난 건 내비게이션뿐 아니라 다른 기계 동료에 대한 인식 능력이었다.

퍼니싱에 침식된 기계는 더 이상 그와 동일한 식별신호를 낼 수 없어 운반기계 앞에 서도 옛 동반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

하카마는 이 감염된 기계체들을 운반 기계 앞에서 손수 파괴했고, 그 잔해들은 이곳에 흩어져 있었다.

하카마

...

꼬마 운반자

실례지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눈앞의 기계에 알려야 했지만 도저히 입을 열 수 없었다.

하카마

...아닙니다. 이런 것들...그녀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카마

저 또한 '선현'의 흔적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사명입니다.

하카마는 창고 한구석에 와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벽 모서리에 있는 '공물'로 둘러싸인 벽화를 쓰다듬었다.

벽화의 흔적은 새것과 옛것이 혼재돼 있었고, 약간 오래된 붓놀림 속에 순수한 기쁨이 담겨 있었다. 그림을 통해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것 같았다.

새 벽화에는 작은 소녀와 한 무리의 기계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하카마는 나나미가 그렸던 그림과 그때의 그녀가 지었던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떤 일을 당했을까?

하카마는 눈을 감고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자신의 의식을 지배하게 두었다.

꼬마 운반자

만약 당신이 그녀를 찾으면, 그녀에게 우리가 여기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 줄 수 있습니까?

하카마

그럴게요, 꼬마 운반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녀에게 전하겠습니다.

꼬마 운반자

고맙습니다! 저는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항상 여기에 머무를 것입니다!

하카마는 손을 뻗어 기계 머리 위를 더듬었다.

꼬마 운반자가 가만히 하카마를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투명한 렌즈 유리 속에 그리운 모습이 비친 것처럼 보였다.

떠나기 전 하카마는 꼬마 운반자를 도와 싸움으로 생긴 창고 내 아수라장을 정리하고, 다른 운반 기계의 잔해를 함께 놓았다. 크고 작은 기계들이 부드러운 스펀지 매트 위에 우글우글 누워 마치 평온한 휴면에 들어간 것 같았다.

유일하게 서 있던 운반기계가 하카마를 향해 연신 손을 흔들며 그녀가 자신의 턱을 향해 인사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것은 여성의 모습이 멀어져가는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녀는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