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니나는 주민들에 둘러싸여있는 와중에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세다.


카레니나

너희들을 내쫓으려는 게 아니라 이 건물은 이미 사람이 살기 적합하지 않으니까 제때 철거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뜻이야.


카레니나

후속 재건축 작업은 엔지니어 부대에게 인계될 거라고...


부랑자

농담하지 마! 말은 참 쉽게 하는데...여기를 허물어버리면 우리더러 어디로 가라는 거야?


부랑자

이 구역이 수복되었을 때부터 우리는 여기에서 머물러왔고 아무런 위험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우리가 어떻게 네 말만 믿고 옮길 수 있겠어?


부랑자

밖을 좀 봐봐…이 보육 구역에 우리를 수용할 만한 곳이 또 있을 것 같아?


침울한 얼굴을 한 부랑자는 임시로 지은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카레니나

우리는 이곳의 담당자들과 조율해서 너희들을 위한 새로운 거처를 마련할 거야.


보육구역 주민

머물 곳이 있었다면...처음부터 여기에 오지도 않았지....


보육구역 주민

공중정원은 우리를 구해 주겠다고 말했었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수송기가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려갔는데, 우리 차례는 도대체 언제 올까?


보육구역 주민

우리 공중정원에게 버림받은 거 아닐까...


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무심코 던진 말이 일파 만파로 번지면서 방의 곳곳에서 회의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랑자

요즘 의료구역에 부상자가 많이 수용된다던데......그런데 공중정원 쪽에선 보급이 계속 안되고 있고........


부랑자

재건하러 온다는 공사부대도 구조체 하나밖에 안 왔는데 정말 문제없을까...


카레니나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카레니나

【삐ㅡㅡ】, 남의 말을 듣고 있긴 한 거야?!


카레니나

만약 공중 정원이 정말 포기했다면, 나는 여기에 오지도 않았어!


카레니나는 인파를 제쳐두고 방 한구석으로 걸어가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갔다. 외벽에서부터 방까지 손가락만한 틈이 벌어져서 번져가고 있었고, 일용품으로 가득 찬 임시 수납대에 가려졌다.


카레니나

이 건물 자체가 이미 이합생명체와의 전투에서 영향을 받아 구조물이 부서졌어.


카레니나

이런 상황에서 너희들은 하중을 견뎌내야 하는 벽까지 뚫어버렸다고.


보육구역 주민

우리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카레니나

하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뜻이잖아. 시멘트 밑에 다 파묻히고 싶어?!


카레니나

아직 무너지지 않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너희들이 운이 좋아서 그랬다는 걸 모르는거냐고?!


보육구역 주민

...


보육구역 주민

그럼 우린 어디로 가야 돼...


지휘관

공중정원은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육구역 주민

당신은 누구죠?


지휘관

공중정원의 지휘관입니다.


앞으로 나와 카레니나의 곁에 섰다.


지휘관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이 새로운 거처를 확보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지휘관

저희는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엔지니어 부대의 다른 대원들도 이미 이 보육구역으로 가는 길임을 방금 담당자와 확인했다.


수개월 동안 곳곳에서 재난의 고통이 계속돼 공중정원이 피해를 입은 민간인들을 모두 온전히 수용할 수 없었고, 지상과의 연결도 전례 없는 혼란에 빠졌었다.


물자 보급이 부족해 언제라도 몸둘 곳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의심과 공포 역시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자랄 수밖에 없다.


카레니나도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게 악착같이 재건을 추진한 것이었다.



카레니나

...틀림없어.


카레니나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시선은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그것과 교차했다.


카레니나

엔지니어 부대의 재건팀은 이를 위해 존재하는 거야. 우리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고, 우리의 사명을 결코 포기할 수도 없어.


카레니나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이 건물은 굳이 복구할 필요가 없어. 오히려 뒤집어엎어 다시 짓는게 훨씬 더 빨라.


카레니나

하루빨리 모두가 안전한 장소에 정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니까, 나의 결정을 결코 바꿀 수 없어.


사방은 고요했고 아무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얼마쯤 지나자 늙은 부랑자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노년의 부랑자

흠흠...이 소녀의 말대로 이사를 준비합세.



보육구역 종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 건물에 살던 주민들은 생활용품 전부를 곧바로 밖으로 뺐다.


이들은 대부분 종말 위를 떠돌아다니며 이주해온 부랑자들로,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짐을 챙기고 더욱 살기 좋은 곳을 떠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담당자들과 함께 주민 정보를 모두 확인해 보육구역 곳곳에 임시 배치했고, 격리 및 요양이 필요한 환자들은 자신이 가져온 군용 텐트로 옮겨졌다.


얼룩덜룩한 벽구석에는 숯펜으로 그린 벽화가 있었고, 앳된 솜씨로 그린 이름 모를 꽃 그림이 있었으며, 그 옆에는 날짜를 세었던 흔적이 있었고, 위쪽에는 희미한 기도문이 적혀 있었다.


카레니나

뭐 보는 거야?


지휘관

(1)(삶의 흔적)

(2)(별거 아냐)


카레니나

...그렇구나.


카레니나는 손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고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리며 벽 모퉁이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담벼락 모퉁이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조용히 서로를 마주보았다.


카레니나

...


카레니나

그래서 왜 왔어?


지휘관

임무 수행하러


카레니나

분명히 얼마전까지 반죽음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깨어나지도 못했잖아...




지휘관

(1)(그 상태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났어)

(2)(너 나 보러 왔었어?)


(1)

카레니나

아? 그래? 너무 기억에 남아서 그런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더라고.


(2)

카레니나

그럴 시간 없었어! 다른 사람한테 들은 거야!



지휘관

난 더 이상 문제없다고 말하려고 여기로 온 거야.


카레니나

흥...엄청 좋은가 보네.


카레니나

그 뭐...오늘, 나를 도와 말해줘서 고마웠어.


지휘관

(1)(난 아무 것도 안 했어)

(2)(이건 카렌이 스스로 해낸 거야)



카레니나

그런가...


카레니나

...내가 이렇게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카레니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기도 전에 고개를 저으며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카레니나

아아아! 이렇게 우유부단한 건 나답지 않아!


카레니나

갈게! 아직 못한 일이 많아!


그녀는 일어서서 입구로 향하여 두어 걸음 걷다가 무슨 생각이 난 듯 멈추었다.


카레니나

그러고보니 너, 텐트 다른 주민에게 양보했어?


지휘관

끄덕


카레니나

그럼 어디서 머물려고?


지휘관

(1)(저쪽에 있는 나무 가장자리가 눕기 좋아보이는데)

(2)(노숙해야지)


카레니나

너 바보야?!


뜻밖에도 카레니나가 포효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휘관

농담이야


지휘관

상관없어, 지금보다 더 열악한 환경도 겪어봤어


지휘관

며칠 후면 공중정원에서 보급이 올 거야


카레니나

하여간 넌 진짜...됐어, 따라와.



카레니나를 따라 보육구역 동쪽 한 구석에 이르자 소형 군용 텐트가 하나 보였다.


지휘관

여기는?


카레니나

...내 텐트, 여기 아니면 잘 곳 없잖아.


카레니나

그냥 내 근거지에서 네가 아파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지휘관

고마워, 카레니나.


다만 보육구역에는 통상 구조체를 비치할 휴게실이 있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런 작은 텐트 하나뿐이다.


지휘관

너 휴게실은?


카레니나

아픈 아이에게 빌려줬어. 병상도 지금 꽉 차있으니가 휴게실이라면 걔네들이 조금이라도 더 잠을 잘 수 있겠지.


지휘관

...


그녀는 방금까지 누구더러 바보라고 한 거지?








그냥 여친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