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이 여과탑의 내부는 예상보다 훨씬 깨끗했다. 이합생명체와 기계의 잔해는 없었고, 종횡무진하며 교차하는 괴이한 식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육구역이 수복된 뒤 이미 집행부대원들이 이 탑을 철저히 점검했었다. 탑 안에 퍼니싱 신호가 전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총에 매달려 있던 손이 옆으로 젖혀졌다.


승강기를 타고 여과탑 중앙부에 도착해 여과탑의 중앙 통제실에 도착하자 카레니나는 곧바로 작업 모드로 들어가 거대한 콘솔 앞에서 여과탑의 작동 현황을 하나하나 점검했다.



카레니나

여과 상태...정상, 주 에너지 시스템과의 연결 이상 없음....


중앙통제실 유리에는 다른 여과탑과 같은 아치형 공간이 보였고, 돔의 철골 구조물에서 햇빛이 쏟아져 내부를 비추었다. 아무런 차폐 없이 눈앞에 있는 이 여과탑은 밝고 넓어 보였다.


카레니나

너 눈썹이 오그라드려고 하는데.


에너지 시스템을 점검하고 있던 카레니나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지휘관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비슷한 곳에서 별로 안 좋은 추억이 있었거든.


카레니나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은 언제나 그랬듯이 제멋대로였지.


카레니나는 고개를 돌리고 작업을 계속했다. 투박하게 말했지만 그녀의 어조에는 비난이나 빈정거림이 없었다. 그녀는 40번 여과탑에서 일어난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6장 영야태동 참고


지휘관

(1)(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어)

(2)(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카레니나

... 그 선택으로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카레니나는 갑자기 손놀림을 멈추고 돌아섰다.


카레니나

자신의 결단에 대해 의심해 본 적 있어?


카레니나

그리고 자신이 내린 결단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한 거야?


지휘관

나는...


삐삐ㅡㅡ


자신의 대답을 끊은 것은 단말기에서 들려오는 경고음이었다.


시스템

경고. C 섹터 원심분리기 전열에 이상이 생겼으니 작업자는 즉시 이동하십시오.


카레니나

찾았어...역시 여기가 문제였구나.


카레니나

지금 당장 내려가자!



원심분리기는 지하 깊숙이 배치돼 있어 식별 등급이 높은 또 다른 승강기를 이용해야 도달할 수 있다.


승강기가 천천히 내려가는 동안 귀에 이상을 알리는 규칙적인 음성이 울렸고 강철에 부딪힐 때 나는 듯한 소리가 작고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또렷해졌다.


지휘관

카레니나


카레니나

잠깐만...너 혹시 뭔가 느꼈어?...


지휘관

승강기가 고장난 것 같아.


말을 마치자마자 승강기는 두 사람의 추측을 뒷받침하듯 고장 경보를 울렸고, 다음 순간 익숙한 무중력감이 몸을 감쌌다.


지휘관

(1)(조심해!!)

(2)(비상제동!)


머리 위에서 강철 붕괴를 방불케 하는 소리가 계속 들리자 카레니나는 곧바로 승강기 콘솔로 달려들어 비상제동 레버를 내렸다.


카레니나

충격에 대비해!






5장



승강기의 비상제동 시스템은 중앙 한가운데 승강기 전체를 멈춰세웠고, 두 사람은 구석에 기대 앉았다.


다행히 통신이 제대로 연결돼 담당자에게 상황을 전했고, 곧 구조요청을 하겠다고 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하염없이 구조만 기다렸고, 카레니나는 마치 고장 원인을 조사하는 것마냥 전광판에 있는 여과탑의 청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카레니나

【삐ㅡㅡ】, 나는 왜 이렇게 사소한 문제도 못 알아차렸지?


지휘관

카레니나, 편하게 있어.


제아무리 구조체라고 해도 카렌처럼 강도 높은 작업을 계속 수행하면 의식의 바다가 오버로드 상태에 도달하는 데다가 보육구역의 아이들에게 임시휴게실마저 양보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휘관

(1)(요즘 너무 악착같은데)

(2)(그렇게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돼)


카레니나

그 사람들 못 봤어?


카레니나

퍼니싱의 재앙을 가까스로 피해 적조와 이합생명체로부터 살아남았지만 재건 작업이 늦춰지고 물자 부족으로 다시 생명의 위험을 겪고 있어.


카레니나

아무리 많은 감염체를 죽여도, 아무리 많은 괴물을 없애도...


카렌은 이를 악물고 옆의 난간에 주먹질을 했다.


카레니나

이미 그들을 구했다고 해도...생명이 사라지는 걸 막을 방법이 없어!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


카레니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한 빨리 재건해서 모두가 최소한 안식처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뿐이야.


카레니나

...멈출래야...멈출 틈이 전혀 없다고.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두 팔로 무릎을 감고 목소리도 약해졌다.


지휘관

그치만 너의 의식의 바다에 점점 더 부담이 커지고 있어...



카레니나

내가 아직 강하지 못해서야...


카레니나

싸움이든 연구든...나는 항상 과격한 방법을 써. 결코 내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에게 1분 1초는 너무나 소중해.


카레니나

내 행동에 항상 위험이 뒤따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그래서 예전의 나는 혼자라면 잘못을 저질러도 그 결과를 떠안는 것은 나 혼자뿐이라고 생각해왔었어.


카레니나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더 많은 책임을 짊어졌기 때문에 그 결정의 결과는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이 아니야.


카레니나

내 선택이 옳은 것인지, 모두에게 불행이 찾아오지 않는지, 소중한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으로 상처받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게 되었어.


지휘관

카레니나...


카레니나

...꼴사납지, 내가 이렇게 나약한 생각을 하다니, 이건 나답지 않아.


지휘관

아니


지휘관

(1)(나도 그럴 때가 있었어)

(2)(너의 심정은 잘 알고 있어)


카레니나

너가? 장난치지 마...넌 나보다 더 막무가내잖아...


곁에 있는 인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카레니나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고, 무시할 수 없는 피로함이 점점 밀려왔다.



지휘관

(1)(나도 불안에 떨 줄 알아)

(2)(나도 두려워할 줄 알아)


자신의 전술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자신 때문에 상처받을 것인지, 두려울 것이다.


단지 선택이라도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감수해야 하지만 카레니나는 그것을 피하려 한 적이 없었다.


지휘관

그래서 과학자로서도, 전사로서도...


지휘관

내가 보는 넌 언제나 강인했어.


지휘관

...


지휘관

카레니나?


오랜만에 카레니나의 대답을 듣더니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고 뭔가 폭신폭신한 것이 기대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카레니나의 감은 눈과 부드러운 속눈썹이 보였다. 호흡은 안정되었고, 그녀는 단기 수면 상태에 들어갔다.


지휘관

(역시 엄청 피곤했었나 보네...)


카레니나의 어깨를 살짝 잡아주며 더욱 편안한 자세를 잡아줬다.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이렇게 푹 쉬어볼까.



얼마나 지났는지, 통신 단말기에서 갑자기 통신 접속 알림음이 울렸다.


기계 엔지니어

카레니나 대장! 그리고 지휘관님! 괜찮으십니까?


지휘관

카레니나, 일어나.



카레니나

음...응? 내가 왜...


인간에게 거의 온몸을 기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카레니나는 이내 휴면 상태에서 벗어나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휘관

거의 구조된 것 같아.


통신단말기의 영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한 엔지니어 부대원이 승강기 CCTV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카레니나

너였어?


기계 엔지니어

대장님 드디어 절 기억하신 겁니까...?


카레니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상황은 어때? 어떻게 뭐 할 수 있어?


기계 엔지니어

사소한 문제입니다, 저한테 맡기세요!


테디베어

...우리 위대한 카레니나 대장께서 승강기에 같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


통신 중에 갑자기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레니나

...왜 너까지 있어? 넌 공중정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카렌은 이 말을 할 때 내내 이를 악물었던 것 같다.


기계 엔지니어

그게...저는 방금 이 보육구역에 도착해서 부대장님과 상황을 동기화하고 있었는데, 담당자가 달려와서 우리 대장님이 여과탑에 갇혀있다고 하면서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기계 엔지니어

부대장님은 대장님의 상황에 대해 크게 우려하셔서 저와 계속 통신 연결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테디베어

우려하는 게 아니라, 걔가 울적해지는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어.


카레니나

테! 디! 베! 어!


카레니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머리 위로 처져 있던 역원장치도 동시에 벌떡 일어나면서 통신이 아닌 듯이 주먹을 꽉 쥐고 상대방의 옷깃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힘이 너무 세서 그녀의 움직임에 승강기도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


지휘관

(1)(진정해! 카레니나!)

(2)(잠깐만! 승강기가 흔들려!)


테디베어

네가 이렇게 활기찬 걸 보니 정말 다행이야.


테디베어

그래도 시간 내서 틈틈히 푹 자둬.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한테 기대면서 입을 딱 벌리고 자는 모습은 진짜 바보같아 보인다구.


단말기에서 통신이 끝나는 소리가 들렸고, 카레니나의 분노의 외침도 더 이상 상대방에게 들리지 않았다.


기계 엔지니어

아하하하....대장님, 지휘관님, 제가 수동으로 릴레이를 연결하겠습니다. 문에 너무 가까이 있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담당자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여과탑을 나서자마자 담당자와 보육구역 주민들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휘관

왜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셨는지...


담당자

다들 걱정하고 계셔서...다행히도 별일 없었지만요.


지휘관

(1)(구조가 제때 이뤄졌거든요)

(2)(믿음직스러운 동료들 덕분입니다)


담당자

그렇군요...



기계 엔지니어

대장님, 서쪽 거점의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쉴새없이 바로 달려왔습니다. 공중정원에 요청한 물자도 내일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재건팀은 이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기계 엔지니어

또한 여과탑이 성공적으로 재가동된 것으로 확인돼 2시간 정도 지나면 원래의 출력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카레니나

좋아, 다른 예비 전열 그룹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마. C 섹터 3번과 6번의 동작 파라미터에 문제가 있어...


지휘관

카레니나.


카레니나

왜?


지휘관

우선 좀 쉬어.


카레니나

알았어! 등 뒤에서 귀신처럼 웅웅거리지 마!


기계 엔지니어

그래요, 대장님, 이런 건 저희한테 맡기면 바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카레니나

자, 그러면 여과탑 관리도 있고....


지휘관

너 지금 여과탑 옆에서 바로 휴면 모드로 들어가려고 하는 거야?


카레니나

난...


지휘관

적어도 이럴 때는


지휘관

모두에게 조금만 기대어 봐.


카레니나

...



카레니나

정말이지, 너한테 져버렸네...알았어.


카레니나

그럼 너희들에게 맡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