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깔리자 여과탑은 고요함 속에서 움직였다. 재건축이 안정적으로 추진되고 물자가 전달되면서 보육구역 주민들은 더 이상 공포와 걱정 없이 잠들 수 있었다.


보름달이 뜬 오늘 밤은 여느 때보다 밝은 밤이어서 어른들은 아이들이 밖에서 더 놀 수 있도록 묵인하고 하루의 재건을 마친 주민들이 간이 캠프파이어를 둘러싸고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어느새 주위에 아이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들은 모두 눈을 깜박이며 집행부대의 전투와 자신의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만 그간 겪어왔던 모든 경험이 아이에게 들려주기 적합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이 보육구역의 아이들도 충분히 참혹한 현실을 목격한 적이 있다 할지라도.


케리

그리고요? 그 괴물이 그렇게나 강했는데 카레니나 언니한테 어떻게 상대한 거예요?


지휘관

그 다음은...


담당자

무슨 이야기 하나요? 다들 즐거워 보이는데 저도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보육구역 담당자는 식은 찌개 한 그릇을 안고 다가와 아이들 곁에 앉았다.


지휘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조나단

리 형은 400km 밖에서 총 두개만으로도 감염체의 자동포탑을 명중시킬 수 있대요!


조나단은 펄쩍 뛰며 손에 들고 있던 플라스틱 권총을 들고 총을 돌리는 손짓을 한 뒤 멋지게 총구에 대고 바람을 불었다.


케리

루시아 언니의 칼춤은 공간을 얼릴 수 있어요!


케리는 나무칼을 손에 들고 그럴듯하게 폼을 잡았다. 아이가 구조된 뒤부터 열심히 전투기술을 익혔다고 담당자가 말해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버튼

리브 누나는 날아가면서 8개의 부유포를 동시에 조종할 수 있대요!


아이들은 눈에 띄게 부풀린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일화를 담당자에게 복창했고, 이를 들은 담당자는 빙긋 웃었다. 얼굴에 역력했던 피로는 캠프파이어의 따사로운 빛으로 싹 가셨다.


다만...


지휘관

(1)(내가 그렇게 이야기했었나?!)

(2)(다소 과장된 것입니다)


아이들의 상상력이 정말 풍부하다고 감탄할 수밖에...


그래도 자신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웃음을 터뜨렸다.


라이트

그리고 그리고, 큰누나는 대포로 아주 멋진 불꽃놀이를 할 수 있대!


지휘관

그건 팩트야.


라이트

큰누나가 한가해지면, 우리랑 함께 가서 누나에게 보여 달라고 부탁해줘!


라이트는 자신의 드론을 안고 앉아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드론의 몸체에 사나운 표정의 토끼가 그려진 것을 알아차렸다.


이내 머릿속에는 누군가의 험상궂은 표정과 위아래로 펄럭이는 토끼 귀 모양의 역원 장치가 떠올랐다.


지휘관

좀 비슷한 것 같은데...


???

뭐랑?


지휘관

카렌이랑...


???

하?!


화내는 소리도 비슷하고...아니.



고개를 홱 돌리더니 카레니나가 드론에 달린 토끼와 다를 바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조나단

카레니나 누나 왔다!


지휘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카레니나가 돌풍을 일으키기 전에 부랴부랴 부인했지만 다행히 화는 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의심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기계 엔지니어가 슬쩍 웃기 시작했고, 자신의 눈빛을 알아차리자 능청스럽게 기침을 두 번 하고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지휘관

...


카레니나

뜬금없기는...됐어!


카레니나

담당자한테 듣기로 날 찾고 있다고 하던데?


지휘관

응, 기다리고 있었어.


지휘관

널 데리고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라이트

어디가? 나도 갈래, 나도 같이 갈래...


라이트는 펄쩍 뛰었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엔지니어에게 눌렸다.


기계 엔지니어

둘이서 데이트 하러 간다는데 어디서 애가 끼어드려고 하니, 앉아 있어.


카레니나

...데...


카레니나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그녀는 정색을 하며 얼굴에 명백하게 "해명 좀 해줘"라고 쓰여있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지휘관

(1)(그게 아니라...)

(2)(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지)


(1)

...어.


화가 날까봐 해명하려 했는데 오히려 더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2)

카레니나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머리 위의 역원장치가 벌떡 세워졌다.



.


카레니나

진짜! 어디 가! 빨리 와!


자포자기라도 한 듯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아끌고 캠프파이어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약간 붉어진 귀만 보일 뿐이었다.


지휘관

그게...


카레니나

뭐!


카레니나는 돌아서지 않고 자신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지휘관

방향이 틀렸어... 저기야.


카레니나

...


카레니나

일찍 좀 얘기 해!



카레니나를 데리고 놀이공원 광장에 나와 관람차 앞에 섰다.


카레니나

여긴 왜 데려왔어?


지휘관

기다려봐.


컨트롤러에 와서 안전점검을 하고, 단계별로 관람차의 동력 시스템을 한 단계씩 작동시켰다.


엔지니어와 함께 몰래 한 차례 예행연습을 해봤지만 아직은 긴장될 수밖에 없다.


지휘관

(시작버튼을 누르다)


카레니나에게 이미 익숙한 대형 장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의 눈앞이 갑자기 밝아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관람차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고,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하나 둘씩 켜지며 쓸쓸했던 광장을 환하게 비추었다.


밤바람이 카레니나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눈앞의 모든 것이 마치 동화에 비친 듯 환상적이었다.



카레니나

이, 이거 네가 만든 거야?!


지휘관

프로페셔널한 전문가의 지원 덕분이야.






기계 엔지니어

그렇군요...관람차 복구라...


지휘관

가능합니까?


기계 엔지니어

네...대장 말이 틀림 없어요. 이런 소형 관람차는 보통 배전시설이 따로 있거든요.


기계 엔지니어

관람차의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구조도 탄탄해서 재가동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지휘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겠어요?


기계 엔지니어

물론 문제없습니다.


기계 엔지니어

다 함께 대장님을 깜짝 놀라게 합시다!


지휘관

죄송합니다. 다들 바쁜 시기에...


기계 엔지니어

괜찮습니다. 이건 귀찮은 일조차도 아니에요.


기계 엔지니어

게다가 대장이 혼자서 며칠간 재건 계획을 다 마무리해놔서...저희는 아직 여유가 있거든요.


기계 엔지니어가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겸손하게 웃었다.


...





관람차의 객실 앞에 이르자 카레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휘관

재개장한 기념으로 첫 관광객이 되어 줄래?


카레니나

네가 그렇게 부탁했으니까 마지못해서라도 타 볼게!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소녀는 억지부리는 기색도 없이 먼저 자신을 좌석으로 밀어넣기 위해 뛰어들었다.



관람차가 천천히 올라가면서 시야도 넓어졌다.


아래의 보육구역은 블록같은 크기로 변했고, 저멀리 지평선이 어둠 속에 보일 듯 말 듯했다. 수송기를 타고 지표면을 오가면서 내려다보는 것이 습관이 돼서도, 느리고 평화로운 상승이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졌다.


바로 이 순간, 그런 자그마한 세상에서의 모든 위험과 걱정으로부터 잠시 멀어졌다.



카레니나

왜 이 관람차를 고칠 생각을 한 거야?


지휘관

너에게 이런 걸 보여주고 싶었어.


손을 뻗어 먼 지평선을 가리켰다.


발 아래 보육구역부터 우뚝 솟은 여과탑, 복구된 도로 가로등, 복구된 공사현장까지…. 따뜻한 색채의 불빛은 사람이 있는 곳마다 반짝이고, 마치 별빛처럼, 가늘고 질긴 그물처럼, 서로 연결돼 시야의 끝으로 이어진다.


지휘관

불빛이야.


카레니나

불빛...


지휘관

전보다 더 밝아졌어, 안 그래?


카레니나는 발 밑의 별빛을 응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깨달았다.


카레니나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어. 황금시대 도시는 밤에도 불이 켜져 있고, 어두운 밤을 밝히는 불빛들은 우주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고.


카레니나

하지만 구조체가 되어 공중정원에서 바라본 지구는 암흑이었어....


지휘관

하지만 이제 달라지기 시작했어.


관람차가 맨 꼭대기에 잠시 머물자 도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고, 카레니나는 객실 난간에 손을 짚고 고개를 내밀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카레니나

아! 저기 봐!


카레니나

그 도로가 건설된 후에 우리는 세 노드 사이의 물자 교류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어.


카레니나

73번 보육구역에는 거대한 규모의 농장이 들어서 있고, 이곳 임시병원도 곧 완공될 예정이고, 서부 거점의 에너지 발전소도 가동을 재개할 예정이야.


카레니나

그렇다면 모두가 각 노드의 자원 교환에 의해 자급자족할 수 있게 돼.


카레니나

점이 선으로 이어지고… 선이 모여 면을 이루면, 횃불을 전하듯 지구 곳곳에는 다시 불이 켜질 거야.


그 바닥의 빛의 점을 잡으려는 듯 손을 내밀며 카레니나는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눈에서 자랑스러운 빛을 발했다.


카레니나

근데...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아!


카레니나

언젠가는 우리는 다시 집을 탈환해서 도시의 모든 곳에 불이 켜질 수 있도록 할 거야. 현재나 미래나 엔지니어 부대는 계속 싸워나갈 거야!


자신의 기대를 거침없이 말하는 카레니나의 눈에는 그 어떤 등불보다 밝은 빛이 빛나고 있었다.


카레니나

왜...왜 그렇게 쳐다봐!


지휘관

(1)(이런 모습의 카렌이 참 멋있다고 느껴서)

(2)(이런 모습의 카렌이 참 귀엽다고 느껴서)


카레니나

흥...이제야 안 거야? 하지만 늦지 않았어.


카레니나

난 더 잘 해낼 테니까, 계속 지켜보라고!


지휘관

보고만 있는 게 아니라


지휘관

나도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낼 거야.



카레니나

...


카레니나의 뺨에 진홍색이 번져 있는 모습이 달빛으로 선명하게 보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결국 귀가 새빨개진 채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바보.


그녀가 얼굴을 완전히 돌리기 전에 그런 입 모양이 보였던 것 같다.




관람차는 곧 지상으로 내려갔고, 멀리서 몇몇 아이들이 엔지니어와 담당자를 끌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관람차가 다시 작동하는 불빛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카레니나

너무 빠르잖아...


지휘관

뭐가?


카레니나

관람차의 회전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조금 있으면 끝나는데 전혀 만족하지 못했거든!


카레니나

난 아직...아아아, 내일 다시 시간 맞춰 놔! 너도 같이 와야 돼!


지휘관

응.


카레니나

빨리 가서 쉬어. 내일 또 할 일이 있잖아. 괜히 졸려서 내 발목이나 잡지 말라고.


카레니나는 객실을 박차고 나와 늠름한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그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