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과 라미아는 몇몇 글자가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는, "어서오세요!"라고 적혀있는 환영 간판을 지나쳐 검은 벨벳 같은 수풀로 둘러싸인 마을로 들어섰다.


아침 이슬이 공기를 적시고 잎맥을 따라 롤랑과 라미아의 인조 피부로 물들며 감각기가 의식의 바다에 차가운 신호를 보냈다.


작은 마을 근처에 온 순간, 그는 익숙한 힘의 파동을 알아차렸다


대행자가 그에게 부여한 힘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즉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루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었다.



라미아

...여기는...


롤랑

흥미로운 장소지.


라미아

어?


롤랑

이곳에 모든 것의 해답이 있을 수도 있고, 단지 우리를 위한 함정이 있을 수도 있어.


라미아에게 모든 진실을 말하지 않고, 롤랑은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다른 승격자의 흔적은 없지만… 하긴 확실한 단서가 없다면 여기도 결국 과거의 잔재일 뿐이다.


롤랑은 손가락을 튕겨 총을 다른 손으로 총을 빙빙 돌렸다.


그는 돌연 기계 프레임을 세게 받쳐 낫총을 멈추면서 동시에 총알을 약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라미아

...뭐야?


롤랑

이곳이 이렇게 지나치게 조용할 리 없잖아.


롤랑

황금시대에 스마트기계가 보급된 만큼 인류가 밀집하게 공동체를 형성했던 곳이라면 아무리 기계가 제공하는 편리함을 거부하더라도 공공서비스용 기계 정도는 있어야 해.


롤랑

지금의 이 곳은 너무나 조용해서, 부랑자들이 이곳의 감염체를 제거해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롤랑

지나치게 조용한 곳은 정상이 아닌 곳이고, 곧 적이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지.


롤랑의 말대로, 하나 둘씩 검은 그림자가 마을 내 곳곳의 건물 잔해 속에서 나타났다.


검은 그림자들은 포복에서 서기까지 비인간적인 걸음걸이로 비뚤비뚤하게 마을 안의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롤랑

보아하니, 방해를 받지 않고 이 마을을 탐색하려면 여전히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네.


롤랑

가엾어라, 주인에게 버림받은 레고 장난감과 인형처럼 무너진 집으로부터 버림 받고, 또 다른 타인에게 끌려나와 마음대로 부려지는 신세라니.


롤랑

너희들의 '엄마 아빠'는 너희를 버릴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롤랑

모든 배후에서 너희들을 조종하고 있는 놈들, 너희는 또 그의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본 적은 있기라도 할까?


침식체

...


침식체는 롤랑에게 침묵으로 대답했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롤랑

흥, 나도 똑같아.


롤랑

애초에 너희들과 이치를 따지지 말았어야 했어.


롤랑

하지만 이런 조무래기들이 우리를 막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ㅡㅡ


롤랑

라미아, 내가 저 녀석들을 돌파할게. 너는 먼저 마을로 진입해.


라미아

?


롤랑

감히 이런 우스꽝스러운 걸 가지고 이곳을 어지럽히다니.. '약간의 청소'를 해야겠어.


라미아

음...알았어.


롤랑은 몸의 전면을 보호하는 낫 아래에서 산탄총을 꺼내 사격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라미아는 비인간적인 유연성으로 높은 건물의 벽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몇 기의 침식체가 벽 위로 뛰어오르는 순간 롤랑의 산탄총이 불을 뿜었다.


롤랑

너희들, 날 무시하지 말라고?


롤랑

손님을 무시하는 나쁜 아이는 엄마 아빠한테 혼난단다...아, 너희들에게 진작부터 없었다는 걸 잊고 있었네.


롤랑

그럼 어쩔 수 없구만. 내가 대신 해줄게. 영혼 없는 아이라도 예의가 없으면 안 되지.


롤랑?

너는 네가 이 다음에 할 일을 예의라고 하는 건가?


롤랑

예의가 안될 거 뭐 있어?


롤랑

영혼이 없는데도 세상을 걸어다니는 것에 집착하는 놈에게 흙으로 돌아가게 해준다. 오히려 예의를 다한 것 아니겠어?


그는 양손무기를 들어 침식체 중 약간 앞서 가는 것을 겨냥하여 앞으로 돌진했다.



오이와 채소를 썰기 위한 전투마냥, 롤랑은 다시 한번 쉽게 침식체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전투 중 몸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이제 마을의 깊숙한 곳은 그에게 열려있었다.


그러나 롤랑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그는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롤랑?

왜?


롤랑

...아니, 이만 가자. 


롤랑

라미아, 있어?


라미아

...여기 있어.


롤랑

나는 아래쪽 길을 통해 마을에 들어가 반대편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살펴볼 거야.


롤랑

위쪽과 경계를 너에게 맡겨도 별 문제는 없겠지?


라미아

으..알았어.


그리고 마치 방금 전의 잠깐의 망설임이 없었던 것처럼, 롤랑은 작은 마을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전투 개시





롤랑

응?



롤랑

쳇, 알고 있어.




롤랑

이 물건... 아직 쓸만한 것 같군.



롤랑

돌아가, 너희들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어.


롤랑

이 모든 것은 어쩌면 너희들의 상급자가 네놈들을 한 번 희롱한 것에 지나지 않아.



롤랑

...결국 마음이 없는 놈들인가.




롤랑

이렇게 하면 끝이겠지.




롤랑

쳇...끝나지 않았었나?


롤랑

...휴



롤랑

그렇게 나오시겠다..


롤랑

끝도 없어, 정말 짜증나...이렇게 된 이상, 네놈들에게 족쇄를 채워주마.




롤랑

이렇게 하면 되겠지, 뇌관에 접촉하도록 만들어 놓으면...



롤랑

잠깐...저건...



전투 종료




멀리서 들리는 미세한 기계 관절 간 마찰음을 들은 롤랑은 그 '불청객'들이 이미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롤랑

(이제 떠날 때가 된 건가ㅡㅡ아니면, 아직인가?)


롤랑?

왜, 너는 아직도 그 집행부대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거야?


롤랑

(정답이야)


롤랑

(사람을 가리면서 사귀는 타입은 아니거든)


롤랑?

...마음대로 해.


롤랑은 옛 주민들이 남기고 간 화약통을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한 곳에 진열했지만, 갑자기 풀잎이 밟혀 끊어지는 촉촉하고 바삭바삭한 소리가 들려와 거리 한켠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세 사람의 그림자가 롤랑의 시야에 나타났다.


롤랑

(케르베로스 소대...)


롤랑

(예상보다 속도가 좀 더디군...)



롤랑

다가가면 너에게 공격당하겠지? 너에게 들킬 줄은 몰랐어, 여태 차징팔콘만 피하면 되는 줄 알았거든.


롤랑

그리고 그런 미친 전투 방식은...공중정원보다 이쪽과 더 잘 맞을지도 몰라. 어때, 퍼니싱에 감염되어 보는 건?



롤랑?

너는 그 무리들에 대해 괜찮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이 기회를 틈타 한패로 끌어들여 볼래?


롤랑

(흥미는 있지만, 지금은 당장은 필요 없어.)


롤랑

(우리는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다시 한 번 손님의 신원을 확인한 후 롤랑은 그곳을 떠났다.


롤랑?

그나저나...넌 왜 이렇게 라미아에 대해 마음을 놓고 있는 거지?


롤랑

마음을 놓지 않으면 뭘 할 수 있는데? 혼자 놔둬봤자 기껏해야 도망치겠지. 하지만 다른 의도가 있는데도 억지로 자신과 묶어놓는다면….


환영의 얼굴에 '그렇구나'라는 가벼운 미소가 나타났다.


롤랑?

그래, 이번엔 네가 이겼어.


잠시 머물며 엿본 후, 롤랑은 돌아섰다.



건물 옥상에 올라선 라미아는 뒤에서 총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들었고, 지금 그녀의 마음 속은...


라미아

(이제... 어떡하지?)


어째서인지 라미아의 마음은 이대로 떠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녀는 항상 롤랑을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미아는 여기서 다시 롤랑과 떨어지게 되면 그들 사이에 다시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라미아

(왜?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결과잖아? 어째서야, 여기서 헤어지면 아쉬울 것 같아서? )


라미아는 약간의 망설임이 생겼는데, 그녀는 시종일관 자신의 마음속에 얽혀 있던 '그 일'을 생각했다.


물론 떠나는 게 가장 편하지만 루나를 찾는 과정에서 롤랑의 관심을 '그 장소'로 유도할 수 있다면….


'루나 아가씨'의 일이든...아니면 라미아의 일이든, 롤랑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라미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오므렸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라미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도망치고 싶으면 언제든지 좋지만 강력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을 것이다.


라미아는 일찍이 자비로운 자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결과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롤랑, 아마도 그녀가 '그 일'을 이루게 해줄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이런 생각에 다다른 라미아는 마을 내 가장자리의 숲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가뿐하게 마을 깊숙한 곳을 향해 뛰어갔다



이 황폐한 작은 마을을 걸으며 주변의 경치를 보면서, 롤랑은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앤티크한 거리, 벽돌로 지은 오두막집, 시멘트 길 위에 마차 바퀴의 미끄럼 방지 철판이 누른 듯한 바퀴 자국이 어렴풋이 보였다.


이것은 롤랑에게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30분 전에 소품팀이 이 피해의 흔적을 새로 추가한 건 아닐까, 이 침식체들이 '퍼니싱'에 침식된 것이 아니라 이런 장면을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된 지능적인 기계였을까?


왠지 롤랑은 이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루나 아가씨'가 한때 그에게 진실을 믿게 만든 적도 있지만, 지금은 여기 없다.


롤랑?

꽤 불편해 보이네.


롤랑

지켜봤군, hermano, 무엇을 봤지?


롤랑

괴물? 죽은 사람? 약자? 길 잃은 어린 양?


롤랑?

내가 다음에 할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은데.


롤랑

원래 너더러 말을 시키려고 나타나게 한 건 아니었지만, 무슨 말이든 기쁘게 받아들어주지.


롤랑

'내'가 내 앞에서까지 시치미를 떼야 할 정도로 비뚤어진 거야?


롤랑?

그럼 너는, 너도 내 앞에서 계속 약한 척 할 거야?


롤랑

말해.


롤랑?

넌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주인을 찾아야만 하는 거야? 진실과 거짓을 불문하고, 너 자신에게 답을 줄 수 있는 상대가 있어야만 하는 걸까?


롤랑?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적어도 《맨더스티 리얼 파크》를 떠난 이후에는 말이야.


롤랑

...


롤랑?

넌 그대로야.


롤랑?

늘 의식적으로 등대를 찾고, 네가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무언가를 찾지.


롤랑?

넌 항상 목적을 찾는 길을 걷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롤랑?

너나 할 것 없이 요 몇 년 동안 네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다 알고 있잖아, 너는 전혀 이런 사람이 아니었어.


롤랑?

거울을 한번 찾아서 자신을 잘 들여다 봐.


롤랑

...우리가 이 재미없는 폐허에서 찾을 수 있다면.


롤랑

거울 속에는...무엇이 있을까?


롤랑?

알아맞혀봐.


롤랑

...네가 천천히 알아맞혀봐, 난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야.


롤랑은 낫총으로 벽에 기대어 있는 침식체의 잔해를 벽에다 박았다.


잔해 속의 일부 전자구조가 롤랑의 이번 찌르기에 격렬하게 밀렸고, 일부 케이블은 합선된 탓인지 잔해들이 떨면서 일부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롤랑의 길지 않은 '지난 삶'에서, 혹은 《맨더스티 리얼 파크》에서 이미 이런 일을 많이 경험했다.


가상의 부상 판정을 받은 듯 훈련/조정된 자세로 과장되고 일그러진 채 '주인공' 앞에서 쓰러진 거짓된 죽은 사람들...


생리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든 기능적으로 살아있어 다음 씬에 등장할 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죽음의 모습을 연기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연기하는 역할은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역할'이 죽었다는 것을 결정지었다.


죽어야 할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에 그들은 살아있는 상태로 연기할 수 없고, 배우처럼 리얼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다.


'배우답게 리얼하게' 벽에 박힌 로봇의 잔해가 롤랑의 눈꺼풀을 쉴 새 없이 깜빡이게 만들었다.


데자뷰처럼, 마치 운명 순환을 예고한 것 같은 모든 것이 너무 허황됐다.


허황되게 낫총을 휘두를 때마다 무의미해 보인다.


어차피 그것들이 두려움 때문에 멈출 일은 없다.


어차피 그것들이 동료의 죽음 때문에 광분할 일은 없다.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모두 어떤 무의미한 순환의 일부일 뿐이다.


컷(cut) 후, 승자의 마음 속엔 아무런 성취감도 느낄 수 없었고 남은 한 켠의 아수라장만이 있을 뿐이었다.


허망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옛날 상대도 일찍이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롤랑

(허... 어떻게 생각해?)


그래서 그는 잔해와 폐허를 건너 건물이 교차하는 장소로 걸어 들어갔다.


롤랑?

너 꽤 괜찮아 보이네.


롤랑

...아직 할 일이 남았잖아.


롤랑?

그러면 여기서 전투가 끝났는데, 다음 단계는 어떻게 하지?


롤랑은 환영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앞쪽 길모퉁이를 바라보았다.


롤랑

이 문제는 내가 생각할 필요가 없어. 우리의 상대는 이미 우리를 위해 손님맞이용 레드카펫을 깔아뒀거든.


롤랑은 먼 곳의 벽 모퉁이를 돌아보았는데, 더러운 벽에는 새빨간 페인트로 이쪽으로 오라는 한 줄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롤랑?

...?


롤랑

이런 장난을 친 놈의 머릿속에 뭐가 박혔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의미는 잘 전달된 셈이지.


롤랑?

이건 함정 같아 보여


롤랑

...그래.


앞이 알 수 없는 함정임을 알지만, 롤랑은 이제 칩 없는 도박꾼이다.


그렇다면 일단 자신을 걸고, 백만 분의 일의 승기를 잡는 수밖에 없다.


 

회언

당신은 두 번이나 정기 연락을 하지 않았어요.


'부두'

내…의식통제 임계치가…예상대로…


회언

...아닌 것 같은데요.


'부두'

아니...맞아! 재미있었어! 저 계집년! 똑같이 동요하는 의식의 바다! 비슷한 안정장애! 재밌었어! 재밌었어!


회언

...(한숨) '로키'.


'부두'?

아...! 회언인가? 정...정말 신기하군! 선생께서 나와 협력하라고 하셨겠지!


'부두'

통제권 다툼 중... '로키' 너… 생각하지 마… 왜 이럴 때… 통제하는 거야!


회언

...


'로키'

당연! 당연하잖아! 임무...임무! 그런데...우리 손님 많이 불러...같이 놀자, 괜찮아! 괜찮아!


회언

가장 중요한 임무를 지체하지 않는다면요.


통신 링크를 닫자, 회언이라는 이름의 소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회언

부두와 로키 씨...둘이 이런 식으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면,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