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생명은 이미 썩었다. 이 썩은 것에 대하여 큰 기쁨이 있으리니, 이는 내가 이것을 통하여 그것이 공허함이 아님을 앎이니라.




내가 침묵하고 있을 때, 나는 충만함을 느꼈다.

내가 입을 열자, 동시에 공허함을 느꼈다.

과거의 생명은 이미 죽었다.

이 죽음을 큰 기쁨으로 여기니, 이는 내가 이것을 통하여 그것이 일찍이 살아났음을 앎이니라.

죽음의 생명은 이미 썩었다.

이 썩은 것에 대하여 큰 기쁨이 있으리니, 이는 내가 이것을 통하여 그것이 공허함이 아님을 앎이니라.


ㅡㅡ루쉰 『야초』(野草)



말라 썩은 야생초

ㅡ죽음에서 출발하다ㅡ



???

나는 기억한다, 나는 이미 죽었다.


???

살아 있는 동안 나는 많은 생명의 시혜를 받았고 미래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쳤으며 그들을 사랑하고 또 그들에게 사랑받았다.


???

나는 들풀처럼 썩고, 새로운 생명이 되어 모두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

본디 기뻐해야 하지만, 도무지 기뻐할 수 없었다.


???

...어째서...기억들이 비어있는 걸까...?


???

...


???

...잠깐.


???

난 '지금' 왜 죽은 거지...?



???

아마...선택을 잘못해서...오셀람호에서 누군가에게 내던져진 것 같다.


???

다른 것은...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

날이 곧 어두워질 것이라는 것만 알 뿐이다... 정말 어둡다.


???

너무 춥다.


???

고통스럽다.


ㅡㅡ나는 누구지?


혼란한 기억의 바다 속에는 무수한 이름의 허상이 스쳐지나갔지만, 손에 쥐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직 지금 몸뚱아리를 찢는 덧없는 통증만이,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익숙했다.


ㅡㅡ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니면 죽기 전에 주마등이 보인 걸까?


의식은 이미 고통과 죽음으로 가득 차서 다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ㅡㅡ깨어나야 한다....이 고통에서 깨어나야 한다.


인간형 물체는 사지의 윤곽을 찾고자 혼란 속에서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손끝은 마침내 가벼운 떨림 속에서 의식을 찾았고, 고통에 휩싸였던 생명은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는 의식 속에서 그의 무거운 두 눈을 떴다.



시각모듈을 교정하고 있습니다>>>>78.13%



???

...시각모듈?


낯선 개념이 머리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비록 이 절차가 전혀 익숙하지 않지만, 자동 교정된 시각은 그에게 '사후'(死后)의 속박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

여긴...어디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문지르고, 그는 인간형 생명체의 습관에 따라 일어나 앉아 자신의 팔다리와 옷가지를 검사하여, 매우 불확실한 결론을 얻어냈다.


???

나 아직 사람 맞아?


자신의 몸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니 생체 모방 피부와 기계 구조 모두가 낯설고 위화감 넘치는 분위기를 풍겼다.


???

음, 그런대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언제 이렇게 된 것일까?


그날 이후로?


???

...


그는 답을 찾지 못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막막한 청년은 무작정 어둠 속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굴곡이 심한 지하 터널을 따라 30분 정도 걸었을 때, 그는 마침내 출구를 넘어 도시의 윤곽을 보았다.


출구 옆의 자갈더미 속에는 깨끗한 숄더백이 하나 버려져 있고, 그 옆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검 두 자루가 놓여 있어 마치 범인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흉기처럼 눈에 띄었다.


가방을 줍자 그는 그 안에 '석능검'이라고 쓰인 설계도 한 장과 핏자국에 흠뻑 젖은 메모 한 권이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

...읏, 노트가 이미 피에 눌러붙어서...펼 수가 없어.


이를 전부 챙기자 청년은 텅 빈 것처럼 보이는 숄더백을 털었고, 옆주머니에서 또 하나의 안경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

...


그는 귀신에 홀린 듯 다소 낯익은 안경을 끌어당겨 길가의 고인 물웅덩이로 가서 수면의 그림자를 빌려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ㅡㅡ그리고, 습관처럼 얼굴에 씌웠다.



???

...


이때에 이르러서야 그는 이 몸체에서 자신에게 낯익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이 숄더백의 모든 것이 자신의 몸보다 눈에 더 익었다.


도대체 누가 그것을 여기에 남겨 둔 것일까?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그는 이런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근처에서 빙빙 돌았다.


저녁 무렵에 이르러서야 질서정연한 발자국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구조체A

어이! 저기 또 누군가 있다!


???

당신들은?


구조체B

우리는 공중 정원의 집행 부대로서 지상에서 수색 구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구조체B

혹시 집이 없다면 우선 우리와 함께 보육 구역에 가도 좋아.


구조체C

아니야. 잘 봐. 이 놈은 구조체라고.


???

구조체?


구조체 리더

너는 어느 소대의 구조체지?


???

나도 그게 궁금해. 그보다 구조체가 무엇인지 먼저 알려줘.


구조체들

...뭐?



간략한 교류를 나눈 뒤, 양측은 서로의 상황을 대강 이해했다.



구조체A

의식의 바다 이탈에 의한 기억 혼란 때문인지 요즘엔 이런 구조체가 적지 않더라고.


구조체B

하지만 이 놈은...데이터베이스에도 자료가 없는 걸.


구조체C

몸에 걸치고 있는 저거 왠지 통신 장치 같은데...좀 빌려 줘 봐.


구조체 대원은 청년이 몸에 지니고 있던 장비를 점검했다.


구조체B

어때?


구조체C

고장났어. 공중정원의 통신장치도 아닌데 버려야 되나?


구조체A

다시 돌려 주자. 혹시 단서가 될지도 모르잖아?


구조체C

혹시 구룡이나 아딜레 상업 연맹이나 북극항로연합 쪽의 미등록 구조체가 아닐까?


구조체A

그럴 수도 있어.


구조체 리더

일부 미지의 승격자들 또한 등록정보가 없기도 하지.


그가 세 글자를 읊는 순간 다른 구조체들은 무기를 들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

잠깐만, 구조체만 설명했는데 승격자는 또 뭐야?


구조체들

...


세 사람은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승격자라는 정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생하게 설명했다.


구조체C

그 녀석들 때문에 지금 상황이 이렇게 심각해진 거야.


???

다시 말해 그들은 나쁜 사람이라는 거네.


구조체C

맞아. 적조 재난, 배신한 구조체, 이 모든 것에 모두 그 녀석들의 '공로'가 있었지.


???

확실히 깨달았어.


청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조체A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다른 것들을 조사해 볼 수 있을까? 예를 들면 퍼니싱 농도?


구조체C

조사해 보니 감염도는 높지 않지만, 이는 그가 수격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뿐이야. 자료상에서 승격자는 퍼니싱을 통제할 수 있다고 되어 있어.


구조체C

엘리트 소대에 물어보자. 그들이 이 지역을 통과한다고 들었거든.


구조체 리더

그들은 단지 지나가기만 할 거다. 거점에는 오지 않을 거라고. 부대 쪽을 정리하는 일은 매우 바쁠 뿐만 아니라,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은 얼마 전에야 병이 다 나았고, 최근에도...


리더라고 불리는 구조체가 도중에 말을 끊었다. 그는 한참을 생각했지만, 그래도 앞에 있는 이 청년을 믿기로 결정했다.


구조체 리더

먼저 우리와 함께 거점으로 돌아가서 점검한 후에 다시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자.


구조체C

하지만...!


구조체 리더

게다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의구심으로 한 명이라도 덜 구하게 된다면, 내 양심이 감당할 수 없다.


구조체A

리더의 말이 맞아.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을 잃었어. 경계는 언제나 기울여야 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구해야 해.


비록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더라도, 앞에 있는 소대는 가장 근본적인 선의에 따라 움직이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

...고마워.



구원하러 온 무리를 따라 청년은 '임시 거점'이라 불리는 곳으로 향했다.


방금 찾아낸 '위험물품'인 석능검과 그것의 설계도를 상납한 후 거점 내 보조형 구조체는 그를 간단히 검사했다.



보조형 구조체

손상은 없고 의식의 바다 이탈의 후유증으로 보입니다.


???

의식의 바다 이탈?


보조형 구조체

그것 또한 모르시나 보네요.


그녀는 의식의 바다와 그로부터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하였다.


보조형 구조체

이탈의 후유증 중 하나가 바로 기억 소실입니다.


보조형 구조체

당신은 운이 좋은 것 같네요. 보아하니 기억 부분에서 몇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내부 데이터는 모두 완전합니다.


보조형 구조체

매우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그 당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고 나중에 구조도 받지 못했다면 대부분 더 큰 후유증을 남겼을 겁니다.


보조형 구조체

당신은 매우 안정적인 의식의 바다를 지니고 있나 보네요?


???

아마도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을 거야.


보조형 구조체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죠. 여기도 설비가 완벽하지 않아서 당신의 치료를 도울 방법은 없으니까 다른 곳에 가보게 좋을 것 같네요.


보조형 구조체

어쩌면 차츰 스스로 기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에 내기를 걸을 수도 있겠죠.


???

치료 없이도 회복이 가능해?


보조형 구조체

네, 당신의 의식의 바다가 충분히 안정되어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죠.


보조형 구조체

하지만 대부분의 구조체는 그럴 수 없으니까 그런 것에 기대를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그녀는 웃으며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

가려고?


보조형 구조체

뒤에 임무가 있거든요. 당신은 여기에 머무르세요.


상대방을 떠나보내는 것을 목전에 두고 청년은 망연히 방구석에 앉아 분주한 군중들 속에서 얌전히 지내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시간 정도 침묵이 흐르고, 달빛이 완전히 대지를 뒤덮자 문밖에서 갑자기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계획에 없던 자들이 이곳을 방문한 모양이다.


구조체A

갑자기 왜 왔대?


구조체D

휴식을 취하러 왔대. 몇몇 구조체와 지휘관 모두 치료가 필요한 상황인가 봐.


청년이 구조체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바라보니 군중 뒤에 한 인간이 서서 주변의 구조체에 대해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구조체A

왜 지휘관 혼자만 있는 걸까?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다른 사람들은?


구조체E

애초에 그레이 레이븐 소대 리더만 내려왔고 나머지 두 명은 안 왔어.


구조체A

리더도 지휘관을 따라오지 않았다고?


구조체E

일이 갑자기 발생해서 임시로 일정을 바꿔서 이곳에 왔는데, 그쪽에 일손이 부족해서 따로 남겼대.


정보 교환이 끝나자 그들은 재빨리 각자의 정비실로 돌아갔고, 원래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구조체 리더와 그 지휘관만 남았다.


두 사람이 테이블에 앉자 리더는 무언가를 물으며 하얀색 의료함을 열었다.



???

...이건...의료함...?



???

상처를 싸매거나 꿰매야 할 사람 있어?



과거의 장면이 갑자기 머리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

난 예전에...의사였나?


그는 멀리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인간과 하얀 약상자를 바라보며 방금 주운 기억의 파편들을 긁어모았다.



???

휴… 드디어 『외과학 제 21판』의 하권을 찾았군….



청년의 손끝은 마치 여기 존재하지 않는 책장에 닿은 듯 가볍게 실룩거렸다.


만약 그 상자를 만질 수 있다면, 더 많은 일을 기억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

실례지만...내가 싸줘도 될까?


구조체 리더

뭐?


???

나는 아마... 아니, 내가 의학을 공부한 것이 기억나는데, 내가 싸매도 괜찮겠어?


구조체 리더

어째서 또 갑자기 생각이 난 거지? 안 돼. 비록 우리가 너를 구해 왔다 하더라도 지금 너를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이해해 줘.


구조체 리더

너의 신분조차 분명치 않은데 너에게 상처 입은 인류를 만나게 할 리도 없거니와, 하물며 엘리트 소대의 지휘관이다.


구조체 대장이 청년을 밀쳐내려고 하자, 그가 '엘리트 소대의 지휘관'이라고 부르는 자가 두 손을 막았다.


지휘관

(1)(상관없어)

(2)(한번 하게 해줘)


지휘관

그를 조사하고 싶다면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봐야 하잖아.


???

...


리더는 지휘관을 보고 머뭇거리며 몸을 일으켰고, 경계하는 시선을 자리에 남겼다.


구조체 리더

...널 지켜볼 거다.


???

...


지휘관

앉아.


지휘관

(자기소개를 한다)



???

안녕,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


지휘관

이름은 어떻게 돼?


???

기억이 나지 않아.


지휘관

(1)(그가 계속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2)(별명을 물어본다)


???

...부르기 불편하다면 그냥 청년A나 A라고 불러도 돼.


지휘관

...


지휘관

실은 어째 좀 낯이 익어 보이는 것 같아.


청년A

정말로?


지휘관

(1)(하지만 기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야)

(2)(단지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어)


청년A

...


청년A

당신이 기억하는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


청년A

뭔가...모두가 경계해야 할 만한 인물이었던 거야?


지휘관

나는 그 사람에 대해 그다지 잘 아는 편은 아니야.


지휘관

그를 본 적이 없었거든.


지휘관

과거의 영상에서 보긴 했지만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었어.


지휘관

그 사람이 내가 있는 소대와 만났다는 것은 알고 있어.


지휘관

하지만 그때 나는 부상을 입었었지.


인간 지휘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고 말투가 다소 무거워졌다.


지휘관

...그 사람은 지금쯤 이미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청년A

...


지휘관

이름 말고 또 기억나는 거 있어?


청년A

응, 의료함을 봤을 때 예전에 외과 교과서를 몇 권 본 것 같고 거점에서 의사를 도와줬던 기억이 나.


지휘관

만약 네가 익숙한 것을 통해 약간의 추억을 깨울 수 있다면...


지휘관

의식의 바다의 메모리 데이터는 그런대로 온전한 편인 거야.


청년A

응, 아까 이름을 미처 묻지 못한 보조형 구조체도 그렇게 말했었어.


지휘관

공중정원으로 돌아가서 조정했으면 좋겠는데.


지휘관

안타깝게도 지금 지상과 공중을 왕복하는 데 문제가 생겼어.


지휘관

며칠 후에 돌아오는 수송기가 있어.


지휘관

우리와 함께 돌아가고 싶어?


청년A

내가 너희들과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내 신분조차...


이 말이 막 나오고 나서야 청년은 상대방도 같은 의문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만약 그가 기억을 잃은 척 하는 것이라면, 홀로 '적'의 본거지로 떠나려는 것에 동요할 것이 뻔하다.


이곳의 구조체는 그를 구했지만, 그들의 말대로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다.


그는 자신조차 스스로를 믿을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이 회의의 합리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지금 자신을 제멋대로 정의의 진영에 편입시켜 놓고 마스크를 벗는 순간이 오자 자신이 단지 위장된 악역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때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


청년A

모르겠어...생각할 시간을 줘.


지휘관

(1)(...)

(2)(그래.)


지휘관

(1)(너와 함께 돌아갈 그날이 기대돼) ← 선택

(2)(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청년A

그래?...응, 알았어.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청년은 재빨리 봉합작업을 마치고 자신의 구석으로 돌아갔다.


청년A

...


밤이 되자 거점의 분위기도 많이 고요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나라로 갔고, 원기 왕성한 소녀 한 명만이 구석에서 나직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과 무언가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연장자 남성

저건 그 사람들이 모두에게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종이잖니...! 함부로 위에다 글씨를 쓰면 안 된단다.


소녀

하지만 그 종이는 이미 버려졌잖아...나도 아무렇게나 낙서한 게 아니야...


연장자 남성

네가 무엇을 쓰고 있든지 간에 종이는 모두 그 사람들의 것이니까 가져가면 안 돼! 이쪽에 남겨진 사람은 모두 통신장비가 없어서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이 종이로 모두에게 소식을 남겨야 한다니까.


소녀

...우으으...


연장자 남성

에휴, 아빠도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빨리 가서 종이를 돌려주렴.


청년A

...


왠지 모르게 그는 다투는 두 사람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황급히 한 가닥 슬픈 그리움아 스쳐 지나갔다.


청년A

(나에게도 그런 가족이 있었을까?)


그는 소녀가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구겨진 종이를 주워서 흐느끼며 바로 지금 인간 지휘관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이 멀리서 나지막하게 무슨 말을 했는지, 지휘관은 그 종이를 받아 들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 다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공책에서 한 페이지를 찢어 그녀에게 주었다.


소녀

...고마워...!



청년A

...


소녀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보고 청년도 자신도 모르게 웃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 지휘관을 쳐다보았지만 상대방도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조용한 시선은 얼마 가지 않았고, 상대방은 두 눈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구조체 리더와 무슨 말을 나눴다.


청년A

(다음 임무를 상의하는 걸까, 아니면 나를 의심하는 걸까?)


그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청년A

...내가 정말 여기에 머무를 수 있을까?...


소외감은 난공불락의 죄수 우리처럼 벽 모퉁이를 잠갔다. 군중들이 접근할 수도, 그가 떠날 수도 없었다.


청년A

기억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기억할 수 있을까?


청년A

...


자신의 상념에 잠기기 전, 그는 옆에서 점점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ㅡㅡ그것은 지휘관이었다.


청년A

무슨 일 있어?


상대방은 가볍게 몸을 숙여 웃으며 펜 한 자루와 공책에서 떼어낸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청년A

어? 이거 왜 주는 거야?


지휘관

(1)(조금 있으면 우리는 006번 도시로 갈 거야) ← 선택

(2)(왜냐하면 네가 방금 이쪽을 보고 아주 환하게 웃었으니까)


지휘관

의식의 바다 이탈 현상이 또 다시 발생할 수도 있어.


지휘관

기억상실이 반복될 수도 있고.


지휘관

무엇이 떠오르거나 찾아봐야 할 정보가 있으면 먼저 메모해두는게 좋을 거야.


지휘관

만약 너를 도울 수 있다면, 나도 기꺼이 힘을 쓸게.


청년A

응, 고마워.


이 추가적인 선의는 청년들을 좀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그는 황급히 일어서서 두 손으로 펜과 종이를 받았다.


지휘관

(1)(천만에)

(2)(상처를 감싸는 걸 도와줘서 나도 고마워)


지휘관

자신의 기억을 되찾길 바라.


청년A

...


그는 또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앞에 있던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떠나 자신 혼자만 제자리에 서 있었다.


전쟁터를 누비는 영웅은 매일 무수히 많은 피로한 전사, 부랑자, 난민을 만나게 된다.


이런 우연한 만남은 언급할 가치도 없고, 더욱이 하나하나 따져볼 겨를도 없다. 왜냐하면 영웅은 반드시 최전선에 서서 가장 위험한 문제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청년과 그가 만나게 될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기회를 놓치는 것은 곧 심연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