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평범하고, 특별한 게 없다는 이유로… 무기력한 느낌에 떠밀려 더 나쁜 길로 가기 쉬울지도 몰라.



별일 없는 하루였다.


소년은 레이첼이나 그녀의 팀원들이 보내는 '귀대 암호'를 좀처럼 듣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서고에 홀로 남아 있었다.


단말기에 표시된 시간이 새벽 4시를 넘어서자 소년은 마침내 마음속의 불안을 누르지 못하고 통풍관을 타고 그와 어머니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문틈을 열어보니 그녀의 사무실 칸막이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늘 듬직하던 레이첼은 온 몸에 상처가 나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어머니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

수송부대가 화물을 잃어버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레이첼

이번에는 내가 한 거 아냐.


어머니

이전에는?


레이첼

...그럴 리가 있나?


레이첼

이전에 몇 명이 목숨을 걸고 물건에 손을 대려고 했지만, 모두 나에게 붙잡혔지. 너는 그 사람들이 모두 누구인지 알아야 해.


어머니

알고 있어, 하지만 이번에 그들은 네가 그 물건들을 가져갔다고 말했어.


레이첼

너는 날 믿어?


어머니

...


레이첼

믿지 않는게 정상이야...나만 아니었으면 너도 지금 더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텐데.


???

...?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지? 소년은 입을 열어 묻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어머니

후회해?


레이첼

아니, 그 폭동은 반드시 필요했었으니까.


어머니

...


레이첼

하지만...미안해.


어머니

그이는 네가 죽인 게 아니야. 범인이 단지 그 폭동을 이용했을 뿐이었어.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가 또 한마디 덧붙였다.


어머니

...우리는 모두 오슬란에게 이용당했어.


레이첼

...


레이첼

이용이라, 하...


레이첼

나도 그 녀석이랑 그 쓰레기 황족들을 이용하고 있지.


그녀는 이를 갈며 이 말을 뱉었다.


레이첼

다만 지금은 오슬란과 '대립'할 준비가 안 돼 있고, 아직 많은 일들이... 그를 통해서만 할 수 있어.


어머니

...


레이첼

하지만 안심해, 나는 결코 귀족의 앞잡이따위 될 수 없다고...!


어머니

...


어머니와 레이첼이 한 말을 소년 또한 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들이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과 계속 협력하는 것 같고, 수송대에도 늘 화물이 사라지게 하는 도둑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만을 알았다.


그런 화약 냄새가 나는 대화는 처음이 아니었고, 대화의 의미를 묻고 싶을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판에 박힌 듯한 얼버무림이었다.


어머니가 얼마 전에야 '너는 이미 11살 어른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대답하기 싫은 질문을 받으면 여전히 '너는 아직 어려서, 이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뿐이었다.


어머니

아사는 어떻게 되었지?


그녀는 방금 그 화제에 관해 더 이상 논의하지 않고 레이첼의 친구에게로 눈을 돌렸다.



소년은 그 이름을 기억한다, 아사. 그는 레이첼과 사이가 좋아 일을 하든 술을 마시든 언제나 함께한다.


두 사람의 친밀한 모습이 보이자 하층칸 노동자들 사이에서 놀리는 일이 잦았다.



???

너희 둘 말이야, 얘는 언제 낳을거냐?


그런 말을 듣자 아사도 제일 먼저 크게 웃으면서 반박했다.


아사

됐네요. 난 그래도 좀 부드러운 아가씨가 더 좋거든.



레이첼

그도 부상을 입어서 쉬러 갔어.


두 사람은 열차가 덜컹덜컹 흔들리는 가운데 침묵을 지켰다.


레이첼

오늘...고마웠어.


레이첼

앞으로는 좀 더 주의할게.


어머니

응.


레이첼은 몸을 일으켜 칸막이 커튼을 열고 나서야 뒤에 숨어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레이첼

【ㅡㅡ】?


???

...안녕하세요.


레이첼

...


레이첼

【ㅡㅡ】, 방금 우리가 한 말 절대 입 밖에 내지 마.


???

응.


어머니

...


???

얘기하지 않을 거야.


어머니

...


레이첼

줄리, 너도 얘 혼내지 마.


어머니

...어서 와, 【ㅡㅡ】, 잘 시간이야.


???

...



???

엄마...


???

레이첼 이모가 전에 무슨 미안한 일 있었어?


그는 방금 들은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

이모가 말한 그 폭동...아빠가 죽었을 때 얘기야...?


어머니

넌 아직 어리니까 지금은...


???

어린 얘 아니야!


그는 목소리를 낮춘 채 항의했다.


???

이미 혼자서 정비 부대에서 일할 수 있어!


그것이 거짓말일지라도 진실을 절실히 알고 있는 소년은 무모하게 그것을 자신의 칩으로 삼았다. 다만 어머니는 이미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어머니

일?


어머니

너는 엄마가 어디로 다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머니

단지 레이첼은 아홉 살 때 수송대에 가는 게 너무 위험하고, 책은 독학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었어. 그리고… 그곳에선 네가 경비병과 접촉하는 것을 피할 수 있으니까 나는 그녀의 제안을 묵인한 거였어.


???

...


어머니

이제 자렴.


???

하지만...


어머니

자.


???

...


오랜 세월의 자질구레한 억압이 마침내 다독이는 듯한 이 명령에 의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

엄마.


어머니

왜 그러니?


???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우리를 이런 곳에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어.


???

그리고 엄마는 마녀라고 불리지도 않았을 거고, 사람들이 엄마에 대해...



???

엄마는 그런 말 들어본 적 있어?


어머니

들으면 뭐 어떠니, 바빠서 그런 헛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단다.


???

하지만 그런 말...듣고 나면...괴롭지 않아?


어머니

괴로워도 그게 무슨 소용이니? 괴로워한다고 지금의 상황이 바뀌겠니?


???

소용없다고 해서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


어머니

...


어머니

어쩌겠어...이런 감정을 품어서는 우리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단다.


어머니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어...엄마는 더 이상 그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슬퍼할 권리도 없어.


소년의 굳은 표정을 보며 어머니는 처음으로 참을성 있게 현 상황을 설명했다.


어머니

오셀람 호는 항상 혼란 속에 있었고,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왔었지.


어머니

어떤 사람은 폭력을 휘두르고 어떤 사람은 계략을 쓰고 어떤 사람은…… 남에게 빌붙을 수밖에 없어.


어머니

그들이 어떤 길을 선택했든지 간에 모두 무너질 가능성이 있어. 그렇기에 무너진 후 그 대가를 감수해야만 해.


어머니는 가면 가장자리를 매만지며 손끝을 떨었다.


어머니

레이첼이 그걸 타개하려고 했던 그 당시, 네 아버지는 상층칸의 귀족으로서 부패의 근원 중 하나였단다.


어머니

나도 그이에게 변화를 권했지만, 계획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고, 그이를 죽인 사람은 레이첼이 아니었어. 범인은 그녀가 만든 혼란만 빌렸을 뿐이야.


???

...


어머니

너의 아버지 혹은 그보다 더한 사람은 아직 상층부에 많이 남아있어.


어머니

그이는 자신의 변화를 증명하지 못하고 죽었어. 내가 아무리 괴로워해도 아래층 객차는 아무도 내 기분을 봐주지 않았었지.


어머니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귀족의 '방조자'이기 때문에 나에 대한 그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어.


???

...엄마.


어머니

엄마가 밉지? 【ㅡㅡ】.


어머니

만약 네가 다른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하층칸에 있더라도 느끼는 악의는 지금보다 훨씬 적었을 텐데...


???

...


???

우린 여길 떠날 수 없는 거야?


어머니

밖에는 더 가혹한 세계만이 있을 뿐이야. 퍼니싱 바이러스는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을 빼앗았고 단지 여과탑 근처만 안전해.


어머니

나는 여기에서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서 너는 여기에 머무를 수 있어. 만일 내가 언제 없어지거나, 또 네가 자신을 부양할 능력이 없다면, 돌아갈 집도 없는 황무지로 떠날 수밖에 없을 거야.


어머니

그날이 오면... 넌 음식을 구하지 못하고 거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감염될 수 있어. 네가 쉬려고 할 때마다 사방을 떠도는 침식체와 강도가 너를 찾아낼 거야.


???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돼?


어머니

레이첼을 믿어줘. 레이첼은 지금 상류층 귀족들의 억압을 타파할 계획을 세우고 있어.


???

이모가 모두의 지도자가 되고 싶어한다고? 책 속의 영웅처럼?


어머니

...그래...


어머니의 한숨 속에는 수많은 말들이 숨어 있었다.


???

엄마도 도와주고 있어?


어머니

응, 도와주고 있는데.....수법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문제 삼을 자격은 없어.


어머니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것만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녀는 자신의 가면을 다시 한 번 만졌고, 그것이 얼굴에 듬직하게 붙어있음을 확인했다.


어머니

너만한 나이였을 때 엄마의 가장 큰 꿈은 상인이 되어 그들에게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었단다.


어머니

다만...마지막에 와서...


어머니

...내가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있는 건...나 자신의 미래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

미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세월을 가라앉힌 이야기를 가면 밑에 묻고는 구체적인 줄거리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

왜 자신의 미래를 팔려고 하는 거야?


어머니

엄마가 갖지 말아야 할 것을 사기 위해서란다.


어머니

속수무책인 평범한 사람이 영웅이 되려면 주위 사람들까지 지칠 정도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경우가 많아.


그 말은 예리한 칼날처럼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

...엄마...


어머니

【ㅡㅡ】, 엄마도 요즘에서야 깨달았어. 너는 천재가 아니야. 네가 스스로 기술을 독학하는 것은 여전히 너무나 어려워. 너에겐 선생님이 필요해.


어머니

13번째 생일이 지나면 레이첼은 널 수송대로 데려가 줄 거야.


어머니

아무리 싫더라도 배워서 살아남아야 한단다. 너무 늦었구나, 이제 자렴. 


???

..싫어, 방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미래를 팔았다는 게 무슨 뜻이야?? 엄마 어디로 가는 거야??


어머니

자렴.


그녀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단지 낡은 담요를 끌어와 소년의 몸을 덮었다.


???

안 돼, 아직 나한테 말 안했잖아...!


어머니

자.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었고 말투는 이미 경고하는 듯한 엄격함으로 가득 찼다.


???

...엄마는? 오늘 여기에 머무를 거지?


어머니는 아무런 감정도 알아볼 수 없는 가면 너머로 낮은 소리로 응수하더니, 뒤이어 또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

감기 걸렸어?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소년의 곁에 누워서 살짝 손을 들어 옆에 있는 아이를 어루만지면서 먼 옛날처럼 부드러운 자장가를 불렀다.



어머니

[~어둠을 무서워하는 아이들은 곧 잠이 들죠~]


어머니

[~반딧불이 반짝반짝 빛나며 따라와~]


어머니

[~달빛은 가려져도 땅에는 별이 총총해~]



[~너의 꿈이 여름밤처럼 편안하길 바라~]


[~언제나 곁에 있어주길 바라~]



[~반딧불이는 대지를 날아다니는 빛이란다~]


[~그리움을 수놓으며~]



[~외로운 아이야~걱정하지 마~]


[~긴 밤을 같이 지새워 줄게~]



??

[~날이 밝을 때까지 잘 자렴~]


??

[~그럼 안녕~]



청년A

...


긴 추억에서 깨어나 보니 청년은 어젯밤 구조체 소대와 지휘관이 모두 떠난 것을 발견했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구조체 소녀가 자신의 노래를 부르며 손에 든 부품을 조립하며 장난감을 고치고 있다.


??

아, 미안해. 나 때문에 깼어?


청년A

어라, 내가 펜을 든 채 잠에 들었었나?


??

응, 벌써 아침이야.


청년A

다른 사람들은?


??

모두 나가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어.



릴리안

참, 내 이름은 릴리안이야. 그 사람한테 네가 기억을 잃었다고 들었어. 이따가 나와 함께 09번 의료 구역으로 가게 될 거야.


청년A

09번 의료 구역? 어제는 좀 더 나은 곳에 가서 추가 검사와 치료를 받으라곤 했지만 09번 의료 구역이라는 말은 없었는데.


릴리안

근처에 더 나은 곳은 거기밖에 없어. 수송차량이 오면 우리 함께 가자.


릴리안

지금 무슨 생각 나는 거 있어? 자기 이름 같은 거?


청년A

사실 생각나는 건 많지만 이름 만큼은...


릴리안

기억을 잃기 전에 이름을 싫어했나 보네.


청년A

왜 그렇게 생각하지?


릴리안

우리 교관이 원래 피하고 싶었던 기억 데이터가 상처받았을 때 깊이 가라앉기 쉽다고 말했었어.


릴리안

혹시 너도 그런 거 아니야?


청년A

...


만약 정말로 그녀가 말한 것이 옳다면, 왜 가장 기억하기 싫은 것이 자신의 이름일까?


릴리안

...괜히 이상한 말을 했나?


청년A

괜찮아. 다만 갈피를 잡지 못하겠어.


릴리안

하지만 이미 많은 것들이 생각난다고 말했잖아.


청년A

맞아. 그런데 전부 12살 전의 일들이었어. 가족과 어른, 그리고...


ㅡㅡ그림책과 만화책을 보았다.


청년A

(왜 책 내용이 몽땅 생각나는 거지...)


릴리안

그리고?


청년A

사소한 일이야.


릴리안

너가 나쁜 사람이 되는 부분에 대한 것도 있어?


청년A

...안타깝게도 없어.


청년A

돌이킬 수 없는 처지,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는 취미, 가끔 와서 도와주는 이모, 기본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는 엄마.


릴리안

너무 평범하잖아. 게임으로 치자면 이미지도 없는 엑스트라일게 틀림없어.


청년A

그렇다고 해도 맞는 것 같은데... 그럼 평범한 사람도 악역이 될 수 있을까?


릴리안

...


릴리안

단지 평범하고 특별한 게 없다는 이유로… 무기력한 느낌에 떠밀려 더 나쁜 길로 가기 쉬울지도 몰라.



어머니

속수무책인 평범한 사람이 영웅이 되려면 주위 사람들까지 지칠 정도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경우가 많아.



그는 어머니의 말씀을 새삼 떠올렸다.


남아 있는 기억 속에서 그가 죽음을 겪으면서도 이제는 낯선 몸으로 멀쩡하게 서 있는 이 기적의 대가는 과연 무엇일까.


청년A

...


릴리안

수송차량이 온 것 같아. 그 사람들이 너의 무기를 여기에 두고 갔으니까 같이 챙겨. 어서 가자.


릴리안은 반쯤 손질한 장난감을 움켜쥐고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그제서야 청년은 부품으로 엮은 반딧불이임을 알아차렸다.


청년A

잠깐, 네 손에 있는 그거...어디서 가져온 거야?


릴리안

반딧불이 장난감?


릴리안

여기 올 때 가져왔어. 밖에 떨어져 있었거든.


청년A

혹시 보여줄 수 있어? 아무래도 이거...너무 익숙해 보여...


릴리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보다가 손에서 고장난 반딧불이를 그의 손에 놓았다.


청년A

...


이 장난감은 톱니바퀴와 폐전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를 한 번 돌리면 반딧불이의 날개가 날갯짓을 한다.


그러나 지금은 날개를 연결한 몸이 마치 무엇에 맞은 듯 부자연스럽게 활처럼 휘어졌다.


청년A

이 흔적...



???

상처 또한 기억의 일부지.



청년A

?!


가슴의 극심한 통증과 함께 말할 수 없는 악의가 이 순간 퍼졌다.


그가 막 깨어났을 때 강렬하게 느꼈던 것처럼.


ㅡㅡ어떤 것들은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페도픽 추가됐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