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청년은 릴리안에게 반딧불이 장난감을 주웠을 때 누구를 만났는지 꼬박 10분 동안 물었다.



릴리안

그러니까 전부 얘기했잖아...그냥 밖에 떨어져 있었는데 거점 안에 어떤 아이의 물건인 줄 알고 고쳐놓으려고 했었어. 네꺼였으면 너에게 줄게.


릴리안

근데 너 어른인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이런 태엽 장난감을 가지고 있던 거야?


청년A

모르겠어. 혹시 옛날의 내가... 마음 속에 동심을 조금이라도 간직하고 싶었나 봐.


곱씹어 생각해도 답이 없자 청년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간밤에 얻은 종이를 빌려 짧은 메모를 써내려갈 뿐이었다.


그가 메모지를 접고 거점 내 체류중인 구조체에 맡겼을 때, 거점 바깥쪽에 있던 수송차가 경적을 울리며 다그치기 시작했다.


ㅡㅡ적어도 처음 깨어났을 때보다 낫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적어도 많은 일들이 생각났다.


그런데, 얼굴이 생각나지 않던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노랫소리와 함께 더오른 소년은 또 누구였을까?


추억 속의 어머니와 레이첼은 어디에 있을까?


내가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사방을 떠돌고 있을 때, 그녀들은 나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청년A

아직 멀었어...


자신의 기억을 되찾지 않으면 모든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청년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구조체들의 대화로 주의를 돌렸다.



구조체 대원1

수석 지휘관은 너희들과 함께 오지 않았어?


구조체 대원2

저기에 일이 좀 생겨서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한밤중에 지원하러 나갔더라고.


구조체 대원3

무슨 일?


구조체 대원2

몰라, 원래 그 일대에 주둔하던 몇 명이 또 도망쳤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구조체 대원1

...최근 몇달 동안의 재난으로 많은 사람들의 자신감이 무너졌는데, 네 말은 즉 그들이 승격자를 찾아갔다는 건가.


구조체 대원2

승격자라니...설마.


구조체 대원1

안될 건 없지, 바이러스에 면역이 된다는 데 누가 마다하겠어? 아무나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가만히 죽는 것보다야 낫겠지.


구조체 대원3

함부로 지껄이지 마.


구조체 대원1

함부로 지껄인게 아니야.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이런 식으로 계속 싸우면 끝이 없어. 예컨대 승격자에게 가서 운을 시험해본다면, 혹시 알아?


구조체 대원2

상부에서 정화부대를 내려보낸 이유가 바로 그거였지?


구조체 대원4

그만, 그건 말하지 마. 자기 일이나 신경 쓰자고.


사람들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고 흔들리는 객차에서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이 억눌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누군가가 또 한 구석에 있는 릴리안에게 화제를 다시 돌렸다.



구조체 대원5

릴리안, 왜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어?


릴리안

같은 소대의 탤벗과 연락이 끊긴 후로 통신이 계속 연결되지 않고 있었어.


구조체 대원5

연락두절이라고? 왜 진작에 얘기하지 않은 거야?


릴리안

방금 연락이 닿긴 했는데...


구조체 대원4

그 녀석 잘 감시해. 안나가 그 사건을 겪은 이후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야. 그가 만약 어느 날 배신해서 도망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도 없지.


릴리안

...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 갈림길에서 수송차가 멈추자 구조체들이 서로 인사를 하며 내렸다.


청년은 릴리안과 함께 짝을 지어 09번 의료지구로 향했고, 두 사람은 그녀의 통신이 갑자기 울릴 때까지 쭉 걸으면서 최근 상황을 이야기했다.



탤벗

릴리안! 의료 구역에 도착했지?


조류 타입 보조기

살려줘! 살려줘!


릴리안

거의 다 왔는데 무슨 일 일어났어?


탤벗

침식체에 포위당했다! 빨리 와서 구출해줘!


조류 타입 보조기

인명을 구하다 역으로 포위당했다!


탤벗

블러셔! 입 좀 다물어!


청년A

블러셔?


블러셔

살려줘! 블러셔 살려줘!


탤벗

이 녀석은 왕관앵무새를 모티브로 한 보조기라서 블러셔라고 이름붙였어. 비록 이미 색이 바래서 분간할 수 없게 되었지만...잠깐 지금 이런 걸 설명할 때가 아니잖아!


탤벗

현재 위치를 너의 단말기에 전송했어, 빨리 와줘! 부탁할게!


블러셔

부탁할게!


릴리안

...


릴리안

저... 그게...A 군...


이 호칭에 청년은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지만, 진지하게 릴리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A

상황은 이미 들었어. 나도 가서 도울게.


릴리안

...응! 고마워! 가자!



전투 개시




청년A

아마 전방에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야.


청년A

빨리 이곳을 정리하고 구조하러 가야겠어.



청년A

내가 이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니...이것도 기억의 관성 때문인가?


청년A

그러니까...내가 이런 작전을 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던 거야?



탤벗

정말 고마워! 아직 뒤에 부상자가 있어!


릴리안

알았어, 내게 맡겨!


릴리안

어떻게 이럴 수가...


릴리안

한 명 빼고....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릴리안

으아앙!


탤벗

릴리안?! 왜 그래?!



탤벗

내가 가서 릴리안을 도와야 될 것 같아. 여기를 맡겨줄 수 있겠어?


청년A

문제 없어, 어서 가.



청년A

전투에 관한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해낼 수 있을 거야!



릴리안

A군, 부상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 우린 가야 돼.


청년A

곧 따라갈게.



청년A

어서 이곳을 빨리 정리해야겠어.




전투 종료




그것은 마치 몸속에 묻어둔 기억 같았다.


다소 특이한 구조의 석능검과 간단한 구조를 가진 또 다른 단검은 그에게 그리 낯설지 않았다.


검은 구름이 짙게 깔린 거리, 금속이 부딛히는 소리, 후각을 가득 채우는 화약 냄새...


청년A

...


틀림없다...


생각이 났다.


청년A

일찍이 전투에 익숙했던 거야.


청년A

...나는 수송부대의 일원이자...08소대의 리더였어...



아딜레 상업 연맹이라고 한다면 대부분 계급 구분을 명확히 한 객실 구조를 취한 오셀람 호의 인상을 떠올린다.

그중 가장 넓은 부지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상층'이라 불리는 귀족칸의 기능칸과 여객칸이 아니다.

그것은 '하층'의 화물칸, 서민칸, 공업칸으로 구성되어있다.

서민 객차에는 아직 솜씨가 뛰어난 일반인들이 대거 모여있다.

이들은 이곳에서 후방부대, 정비부대, 수송부대, 아딜레 상업 연맹 특유의 일벌부대를 구성했다.

일벌부대의 숫자가 팽창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셀람 호의 하층민 대부분은 수송부대의 일원이었다.

퍼니싱 바이러스의 맹독이 만연한 지금, 기계는 더 이상 만능이 아니며 원래 막힘없이 잘 통하던 도로도 침식체와 강도, 붕괴된 폐허로 가득 차 있다.

붕괴 직전의 세계가 여전히 최소한의 물자 유통과 우편 탁송을 유지하고 상거래를 재개할 수 있도록,

아딜레 상업 연맹은 수송부대에 힘입어 피땀을 흘리며 수송차량을 조합해 방대한 물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그들은 보육 구역, 거점, 일부 재건 공장에서 아직 산출할 수 있는 물자를 회수하여, 

때로는 다른 곳으로 옮겨 판매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벌 부대에 넘겨 공업 차간에서 2차 가공한 후 완제품을 가지고 와서 판매하기도 했다.

수송 부대의 활발한 모습은 많은 거점들의 희망이었다ㅡㅡ그들은 부족한 물자를 가져오고, 쌓인 화물을 거둬들일 수 있다.

그들은 무수한 유랑하는 교환 상인들을 먹여 살렸고, 위험으로 둘러싸인 많은 곳에서 목숨을 구해줬으며, 

더 나아가 상층칸에 거주하는 귀족들에게 적지 않은 이익을 얻게 하였다.

항상 위험과 스트레스가 수반되며, 자칫 강도나 침식체에 공격당할 수 있어 언제든 화물을 버리거나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ㅡㅡ그러나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 또한 원래 수많은 유랑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업이었다.



청년A

...원래...?


어떤 위화감이 마치 유리구슬처럼 의식 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수송대원들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대신 노예와 연명의 상징으로 변해가는 듯했다.


청년A

그때 무슨 일이 있었지...?


청년A

그런 일 때문에... 레이첼이 아랫칸 사람들을 위해 윗칸 귀족들에게 혁명을 일으키겠다고 한 거였어...


청년A

그럼, 그녀는 성공했을까?


그는 더듬어 생각해 보려 했지만, 기억은 여기서 끊기고 안개 속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