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것이 정녕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불꽃이라면, 소년은 얼어 죽는 것과 타오르는 것, 그중에서 반드시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

...하, 그놈이 또 풀이 죽은 얼굴로 돌아왔구나...


객차로 돌아온 뒤에도 지붕으로 쏟아지는 폭우는 소년의 결심을 묻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잡음 속에 섞여 영혼을 갈기갈기 찢고 무겁고 습한 공기를 뿌린다.


???

레이첼이 왜 굳이 이런 고생을 시키는 거지? 식량이나 좀 쥐어주고, 그에게 어머니 대신 장부를 받아오라고 하면 되잖아.


???

그의 어머니가 몰래 얼마나 많은 물자를 빼돌렸는데, 레이첼은 차마 그 녀석을 그냥 둘 엄두가 나지 않을 거야.


???

상관하지 마, 이 아이는 내성적이고 고집이 세서 건드리면 다칠거야. 줄리는 항상 저 녀석더러 집에만 있으라고 했었는데... 이대로 자라면 소용없어. 레이첼이 알아서 돌보게 냅둬.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귀에 못이 박히는 이런 잡담을 황급히 흘려넘겼다.


노안

...


지금 돌이켜 보면, 그날 밤이었다.


노안은 아래층 객차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생명체를 목격헀다.


나이도 어느정도 먹은 것 같아보였고, 다리에 심한 낡은 흉터뿐 아니라 몸에 새로운 상처가 있었고, 그는 품에 안고 있던 책을 끌어안고 웅크린 채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촛불과 같았다.


폭력을 휘두른 상층 경비병은 그 소년의 상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몸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주변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아무도 돕지 않았다…. 이러다간 중상을 입고 목숨을 잃을 게 뻔하다.


경비병과 정면충돌하는 것은 결코 이성적인 처사가 아니다.


특히 상층 경비병도 행운상자로 '관계자'가 대거 혼재된 현 시점에서 양측 모두 혼란스러운 질서에 불만을 품고 분통을 터뜨려 매일같이 무력충돌이 벌어지는 실정이다.


소년은 남들처럼 흐느끼는 소리를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를 지나쳐 가보니 얼어붙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

오셀람 호는 얼음골짜기로 변모한 지 오래고 우리는 그 속에 갇혀 꺼져가는 불꽃에 불과해.


어머니

타오르지 못하면 이 추위 속에서 얼어 죽기를 기다릴 뿐이란다…. 얼어붙은 불길이 어떻게 얼음골을 녹일 수 있을까. 그때가 되면 아무도 피할 수 없단다.



노안

...엄마.


계급과 무력이 최우선이 된 아딜레 상업연맹에서 율법은 이미 무너졌고, 많은 폭행과 악의는 더 이상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그녀는 결코 정의와 온유함의 대표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독살이 널리 알려졌을 때, 다음 순간에도 이런 일이 무고한 사람에게 일어날 것을 예견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노안

...얼어 죽거나 타오르거나....


추억 속의 말을 되새기며 소년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노안

...그만해! 그만 때려!


상층 경비병

하? 이 토끼 새끼가 길 가운데 서서 내 앞을 막고 있구만, 때리는 게 뭐 어때서?


노안

저 녀석 다리에 장애가 있는 걸 모르는 거야?!


상층 경비병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그는 시큰둥하게 옆에 기대어 있는 지팡이를 한 번 보았다.


상층 경비병

수송부대에 레이첼이 버티고 있으니까 상층 경비병에게 호들갑을 떨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는 자신의 신분을 한 번 강조하고 주변에 힘없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는데, 아직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단숨에 두 아이를 '징벌'할 준비가 안 된 것 같았다.


노안

이건 레이첼 대장과 아무 관계 없어.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고.


상층 경비병

흥, 레이첼이 없다는 걸 알았다면 아무도 널 보호해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겠지?


경비병이 거칠게 멱살을 잡으려 하자 노안이 들고 있던 무기에서 화염이 치솟았고, 총탄은 상대의 방호판을 맞고 그 위에 깊은 균열을 냈다.


노안

...미안, 총 쏘는 기술이 서툴러서 그냥 놀래키기만 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맞아버렸네.


상층 경비병

이 괴물 새끼가!


노안

한 방 더 맞고 싶어?!


소년은 낮은 목소리로 분노를 표했다.


노안

제대로 보여 줘? 아까 건 그냥 협박이었어!


노안

하지만 이번에 실수로 방어복이 아닌 곳에 맞게 된다면...


상층 경비병

너 미쳤어?! 감히 상층 경비병한테 총을 쏴??


그는 참다못해 자신을 멸시하는 아이에게 마지막 경고를 보냈다.


노안

만약 너에게 있어 남의 다리를 분질러 놓은 사람이 '정상'이고, 범죄를 저지르고 상처를 입히는 것을 막는 것은 '미쳤다'고 한다면, 차라리 네 눈에 미친 사람처럼 보이겠어!


소년의 가슴속에는 오랫동안 쌓여 있던 억압이 날카롭고 연약한 창끝으로 변해 오만한 눈을 찔렀다.


노안

...어때? 한 번 더 쏴봐?


아무리 무모하고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더라도, 이때 예봉을 드러낸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상층 경비병

이 개새끼가!


경비병은 화를 내며 욕설을 내뱉고, 살인에 책임질 필요 없는 생명을 향해 무기를 들었다.



수송대장 신야

이봐, 거기까지다!


그가 무기를 휘두르던 손이 갑자기 잡히면서 허공에 멈춰섰고, 경비병이 고개를 돌리자 덩치 큰 수송대원 한 명이 십여 명을 데리고 나서는 것을 보았다.



상층 경비병

하도 배가 쳐 불러서 이젠 오지랖 부릴 여유까지 있는 건가? 요즘에도 이런 난장판에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는지 알고 있을텐데?


수송대장 세나

별말씀을요, 우리도 한 목숨이라도 더 남겨야 나으리께 일을 더 해드리기 편하고, 짐승도 새끼를 낳아야만 고기를 계속 잡아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상층 경비병

여기가 사육주의 땅인 줄 알면서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수송대장 신야

무슨 짓을 할 셈이지?!


수송대장 세나

그만 그만, 흥분하지마. 비록 처지는 다르지만 너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육하는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잖아?


수송대장 세나

'사육주'에게 있어서 우리와 당신의 차이점이라면, 즉 당신네는 좀 비싸고, 우리는 좀 싸면서도 모두 대체될 수 있다는 거 아니겠어~


세나는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수송대장 세나

오늘 왜 혼자 여기 있어? 나는 방금 저쪽 칸에서 네가 다른 몇 사람들과 같이 싸우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 사람들이 너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간 거야?


많은 사람들이 침묵 속에서 이 외톨이 경비병을 지켜보았고, 그는 자신이 외톨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비록 '상층 경비'라는 신분이 반항아에게 감당하기 힘든 결과를 가져올지라도, 그것은 그가 이곳을 떠난 후에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ㅡㅡ무사히 빠져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세나의 말처럼 '사육주'는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치에만 신경을 쓰고, 가치 뒤에 숨은 생명, 삶, 미래에 대해선…. 그들은 전혀 관심이 없다.


이들이 곧 어떤 처벌을 받든 간에, 그것이 그가 통쾌하게 여겨질 만한 것이든 간에, 지금 당장은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상층 경비병

...


상층 경비병

여기서 단합하고 우애로운 척하고 있는 거지?


상층 경비병

땅 위의 이 녀석의 아버지, 누가 소개했는지 알고 있어? 그 녀석의 가족은 오슬란 쪽 사람이다.


수송대장 신야

...


경비병은 모두가 침울한 표정을 짓자 득의만면하게 웃었다.


상층 경비병

그의 아버지도 원래 나와 같은 경비병이 되려 했지만, 단지 더 많은 '거래' 때문에 일부러 여기에 머물렀지.


상층 경비병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내부의 적을 도와줘서 자랑스러운가?


수송대장 세나

이런,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이 짧았던 모양이군요. 당신이 말한 것들을 깊이 새겨들이겠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냄새 나는 소년들을 차에서 내쫓지요.


상층 경비병

흥, 약삭빠르기는.


상대방은 침을 뱉고 욕을 하며 자리를 떴다.



경비병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신야가 성큼성큼 걸어 올라왔다.


노안의 얼굴을 향하여 뺨을 한 대 때렸다.


수송대장 신야

팔자도 좋군! 우리가 못 보고 그냥 지나쳤으면 어떻게 할 셈이었지?? 수송부대에 들어온 지 며칠만에 사고를 치다니!!


수송대장 신야

요즘 이 경비병들이 미쳐 날뛰고 있는데 그들을 막아서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본 적이 없진 않겠지? 이번 달에 겨우 한 명만 죽었지만, 그가 재빨리 행동했다면, 너와 뒤에 있는 그 녀석은 모두 죽임을 당했을 거라고!


노안

본 적이 있는데,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한 사람 더 죽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어.


수송대장 신야

설령 네가 이 경비병을 이길 수 있다 하더라도, 그놈 뒤에는 아직 한 무리가 더 있는데, 네가 다 상대할 셈이냐??


수송대장 신야

줄리랑 레이첼이 널 이렇게 키운 건, 이딴 식으로 개죽음을 당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수송대장 세나

그만 둬. 네가 이렇게 말해서 노안이 가만히 있으면 또 그런대로 불안해 할 거잖아.


수송대장 신야

쳇, 입좀 다물어.


수송대장 세나

딱히 미안해 할 일은 아니야, 나도 거기서 거기거든. 다만 이런 일이 요즘 점점 많아지고 있어. 그들과 부딪칠 때마다 더 심한 보복을 불러와. 이렇게 싸우면 될 일이 아니야.


수송대장 신야

보복은 둘째 치고 이번엔 살아남았다. 그래서 그 다음엔?!


수송대장 신야

기억을 해봐! 의로운 일을 한다지만 자기 자신을 가늠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수송대장 세나

너는 신야 오빠를 보고 놀라서 간이 터질 것 같았겠지만, 저 사람 말이야, 보복당하는 것보다 네가 사고 당하는 걸 더 두려워했어.


노안

...미안해, 신야 형.


수송대장 신야

너도 말 좀 작작 해, 세나! 그리고 아저씨나 대장으로 부르라고!


신야는 얼굴을 찡그리며 성큼성큼 이곳을 떠났다.


수송대장 세나

오늘 뭔가 배운 느낌이야. 예전에 레이첼에게 감히 9살짜리가 경비와 싸운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전혀 믿지 않았었거든.


그녀는 소년의 얇은 어깨를 두드리며 크게 웃었다.


수송대장 세나

어떻게 그동안 오래 참아왔대, 줄리가 사라져서 간섭하지 않으니까, 또다시 어릴 때의 그 횡포한 기운을 주워 담았구나.


노안

...난...


수송대장 세나

괜찮아~ 기껏해야 돌아와서 레이첼에게 혼 좀 나겠지. 이미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걸.


노안

...


수송대장 세나

신야가 한 말도 신경쓰지 마. 참 솔직하지 못한 작자라니까, 하하하. 좋아, 나는 또 일이 있으니 먼저 떠날게.



사람들이 흩어지자 찻간의 그늘진 곳에서 비틀거리는 노부인, 힐이 나타났다.


노안, 너 정말 담이 크구나...안 다쳤니?


그녀는 안쓰럽게 노안의 얼굴을 추켜들고 한 번, 또 한 번 보았다.


노안

괜찮아요, 힐 아주머니.


미안하구나, 아줌마는 겁이 많아서 너희들이 당하는 것을 보고도 감히 나서지 못하겠단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다리가 불구인 소년을 일으켜 세웠다.


이 아이도 어깨를 맞아서...


???

괜찮아요…. 아주머니, 딱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에요.


그는 고개를 돌려 노안에게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도와줘서 고마워.


노안

괜찮아, 나는 노안이라고 해. 너는?



필드

...필드, 다시 한 번 고마워, 노안.


노안

천만에, 다리는...걸을 수 없어?


필드

그냥 편안하게 걸을 수 없을 뿐이야. 얼마 전 정원사 로봇에게 다리를 다쳤거든.


필드

비록 의사가 이미 나를 도와 상처를 꿰맸지만 한계가 있어서 여전히 장애가 남아 있어.


이럴 수가...


그의 묘사를 듣고 있던 힐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너희 엄마 아빠 어디 계시니?


필드

제 아버지는 운송팀을 따라 화물을 운반하러 갔고 어머니는...저를 다치게 한 정원사 로봇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노안

...


필드

괜찮아, 아빠가 돌아오면 괜찮아질 거야.


노안

넌 이제 막 들어온 거야?


필드

응.


그럼 아주머니의 충고를 새겨들으렴. 다시는 상층의 사람들과 아무 연락도 하지 마. 그들이 우리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서 여기 사람들은 그들과 만나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거란다.


오늘 그들이 나와서 너의 이 일을 돕다가 네가 이런 관계가 있다는 것도 알았으니, 다음번에는 확실하게 말해줄 수 없을 거야...


필드

네...고맙습니다, 아주머니.


노안

...


노안

평소에는 어디서 쉬어? 내가 데려다 줄게.


필드

...미안, 아빠는 아직 정해진 침대를 받지 못하셨어. 평소에는 난 여기에 앉아있어.


아이구, 자리가 별로 없긴 한데 너가 괜찮다면 나랑 함께 걸상을 쓰자꾸나.


노안

괜찮아요. 힐 아주머니. 제가 다른 데로 데려갈 게요.


그래, 마땅한 곳이 없으면 다시 오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만의 구석으로 돌아갔다.


필드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노안

비밀기지로.


필드

비밀기지?


노안

응, 안내해 줄까?


ㅡㅡ그는 필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첼

...구체적인 얘기는 전부 들었어.


수송 임무에서 돌아온 레이첼은 눈살을 찌푸렸다.


레이첼

사과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표정이지.


노안

...아니야. 미안해.


노안

레이첼 대장, 나 때문에 귀찮은 일을 겪게 했어.


노안

하지만 이건 대장에게만 사과하는 거야. 그 경비병과는 아무 상관 없어.


레이첼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첼

됐다. 하여간 줄리랑 똑 닮았단 말야.


노안

엄마...?


노안

엄마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어?


레이첼

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2할은 걔 몫이었어.


레이첼은 멈칫했다.


레이첼

내 말은 그게 그녀가 남에게 미움을 사는 원인 중 하나였다는 걸 지적하고 싶은 거야, 그런 일을 2할이나 차지했다고.


노안

하지만 엄마가 항상 했던 말은...


레이첼

무슨 말? 현실을 똑바로 알아야 된다고? 자신의 무능에 타협하는 거?


노안

맞아.


레이첼

그 말이 옳아.


레이첼

너는 다시는 이런 사소한 일로 함부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나에게 맹세했으면 해.


노안

...하찮은 일이 아니야. 필드의 몸이 좋지 않은데, 내가 그때 그냥 지나쳤더라면 경비병들에게 두들겨 맞아 죽었을지도 몰라.


레이첼

그럼 너는 그 결과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니? 그 경비병들이 헛된 한숨만 삼키고 순순히 돌아갈까? 그들은 공무집행이라는 구실로 사적인 복수를 가해서 모든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어.


노안

...미안해.


레이첼

이번에는 따지지 않겠어. 왜냐하면 그 경비병은 사실 가짜였거든.


노안

...가짜라고?


레이첼

지금 열차에 사람이 너무 많은데다, 별의 별 인간들이 뒤섞여 있어 상대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고, 경비 쪽도 이런 비슷한 문제를 겪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야.


레이첼

그들의 방호복을 입으면 생김새로 구분하기 힘들어. 어떤 사람은 그 옷을 구해 상층의 경비를 가장하고 혼란한 틈을 타서 어부지리를 노리지.


노안

...어떻게 그럴 수가.


레이첼

괜찮아, 내가 가서 위층의 귀족에게 이야기해서 이 사건을 엄중히 조사하도록 할게.


노안

상층 귀족들과...연관되어 있는 거야?


레이첼

수송부대의 주요 임무는 역시 그들에게 보고하는 거잖아. 너는 이런 일에 신경 쓰지 마.


레이첼

다만, 기억해...다음 번엔 절대 안 돼.


레이첼

다음에 운이 나빠서 진짜 경비병을 만나면 넌 죽을 수밖에 없어.


노안

운...


노안

그 사람이 다른 경비병과 같았다면, 나와 같은 아이들을 때리지 않았겠지.


레이첼

운 때문에가 아니라 생각해 보고 행동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니?


노안

그래, 레이첼 대장. 나는 더 이상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야. 예전처럼 그 녀석들이 도발해도 억누르지 못하는 건 더더욱 아니라고.


레이첼

무슨 뜻이야? 심사숙고 했으니까 다음에 이런 일을 당해도 막아서겠다는 거야?


레이첼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첼

현실을 똑바로 봐, 노안. 자신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라고. 줄리의 말처럼 타협하는 법을 배워 자신의 안전을 지켜내는 거야, 알겠니?


노안

...


노안

타협하면 우리 엄마같은 사람이 덜 죽기라도 하는 거야? 설사 엄마가 정말 나쁜 짓을 했더라도 그 근위병이 말한 '법규'에 따라 벌을 받아야 했잖아.


노안

몰래 독살당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범인은 잡히지 않았어.


노안

살인을 해도 대가를 치르지 않고, 필드처럼 무고한 사람조차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 다음에 죽는 것은 우리 자신일 수도 있잖아.


레이첼

...


레이첼은 고개를 들어 앳돼 보이는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봤다.


그녀는 노안을 움직이게 하는 원인은 결코 어린 날의 치기가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자신의 말처럼, 그는 이미 심사숙고를 거친 것이지 결코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첼

내가 잘 설명하지 못해서 미안해. 난 단지 타협하라고 한 것이지 포기하라고 한 게 아니야.


레이첼

우리는 모두 영웅이 아니기 때문에 좀 더 매끄러운 접근이 필요해.


레이첼

너의 분노는 이해한다만, 때가 되면 물방울이 떨어지는 순간을 기다려야 해.


노안

...알겠어.


레이첼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노안.


레이첼

그 짐승들에 대한 나의 원망은 결코 너에게 뒤지지 않아.


노안

...



필드

돌아왔구나, 그 대장이란 분이 뭐라고 하셨어?


노안

...


필드

너에게 벌을 내린대?


노안

아니, 그 경비병은 가짜였어.


필드

가짜...?


필드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노안

밖에선 그런 일은 없었어?


필드

응...적어도 내가 있던 보육구역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어.


노안

보육구역은 기술 심사 합격자만 받기 때문에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들었어.


필드

...맞아, 그렇긴 한데 보육구역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그는 고개를 들어 푸른 눈으로 위쪽의 어두운 등불을 바라보았다.


필드

...3년 전 시험 통과를 위해 누군가 동기생에게 상처를 입힌 일이 있었어.


필드

보육구역을 지키던 구조체가 그를 붙잡았을 때 그는 이미 퍼니싱에 침식당해 온몸이 짓무르고…. 보육시설에 들어가지 못하면 며칠 뒤에 죽을 상황이었어.


필드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 보육구역 내에서 아무도 받아주지 않자, 차마 이대로 가는 것을 볼 수 없는 구조체가 혈청을 선물했어.


필드

결국…. 다음날 혈청을 돌려주고 그대로 죽었지.


노안

왜 그랬대?


필드

이 혈청으로는 자신의 처지를 바꿀 수도 없으니까….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어.


노안

...이게 바깥 세상이라는 건가?


필드

응, 엄격한 검증은 보육구역 내 질서를 지켜주면서도 구조해야 할 사람들을 많이 저버리기도 했어.


필드

그래서...이곳에 오기전부터 기대하고 있었어. 아버지는 아딜레 상업연맹에선 그렇게 엄격한 검증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어. 이곳은 퍼니싱 바이러스에 영원히 침식되지 않아서 이동에 있어서 완벽한 이상향에 가까운 장소라, 세계 각지의 사람들에게 긴급히 필요한 물자와 웃음을 선사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야.


노안

이상향?


필드

응, 지금 보니 무지하고 우스운 말이었지만...


필드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처음부터 이랬던 거야?


노안

...여긴...




노안

바깥에서와 마찬가지로 살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많아.


필드

우리에 대한 태도도 그래서일까?


노안

...응.



필드와 상층 귀족의 관계를 눈치챈 사람들은 필드에 대해서도 익숙한 소외감과 악의를 가졌다.


몸이 건강하지 않아 거동이 불편한 것은 물론 미열이 자주 나, 노안은 사고를 줄이기 위해 최대한 책 창고에 머무르도록 했다.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한 어린아이들로서 비밀기지에서 서로를 도울 수도 있었지만, 그 무모한 투쟁 이후 노안을 향한 사람들의 태도는 슬그머니 바뀌기 시작했다.



ㅡㅡ어느 날.


천성적으로 유쾌한 분위기의 여성이 구석구석을 배회하는 소년을 찾아냈다.


수송대장 세나

여어, 꼬마영웅, 와서 우리랑 같이 밥 먹을래?


노안

어?


한 번도 초대된 적이 없던 소년은 다짜고짜 서민칸 식당 칸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수송대원 웨이란

어? 아까 얘가 겉돈다고 말만 했을 뿐인데, 벌써 오는 거야?


수송대장 세나

내가 불렀지!


노안

...무슨 일 있어?


수송대장 세나

노안, 너도 수송부대의 일원이니까 곧 사람들과 따라 나가서 수송을 해야 하는데 아직도 혼자 구석에 박혀있으면 어떡하니.


노안

...그런게 아니라...


수송대장 세나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어울리기 싫어? 너는 아직도 줄리의 일을 신경 쓰는 것 같은데, 차라리 늙은이 몇 명과 함께 앉아 있을지언정 수송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니?


노안

분명히 신경 쓰고 있긴 하잖아.


수송대장 세나

칫, 사람 마음은 돌덩이가 아니야. 줄리한테 무슨 불만이 있어도 감히 나서지도 못하는 일도 네가 해냈고, 레이첼이 또 이렇게 지켜주는 걸 보면서…. 다들 조금씩 태도도 바뀌고 있지.


노안

예전엔 레이첼 빼고는 대부분 우리를 도와준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런 얘기가….


수송대원1

내가 말했잖아, 이 자식 쌓인 게 많은 데다가 고집불통이라니까.


수송대장 신야

도움이 없기는? 너 고작 겨우 몇 년밖에 안 살았는데, 옛날에 네 엄마 방이 물막이 판자 근처에 있어서 그런지 견식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짧구만.


수송대장 세나

그때는 줄리가 그를 못 나오게 했겠지, 귀찮은 일에 연루되거나 공연히 목숨을 잃을까 봐.


수송대장 신야

지금은? 지금은 나오라고 해도 문을 닫잖아.


수송대장 신야

사람이 그렇게 깡통 안에만 박혀있는 걸 좋아하면 누구도 널 도와줄 수 없어.


수송대장 세나

꼭 자기 소개 하는 것 같단 말이야.


수송대장 신야

닥쳐!


노안

...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는 주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어린 아이였다.


그 시절 소년은 온갖 책이나 취향에 사로잡혀 사람들의 선의나 악의에 대해 조금이나마 느꼈을 뿐 그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도 행운상자의 판매가 점점 악화되고 있어 예전처럼 사람들을 계속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다. 더구나, 노안은 집에 방치되는 것을 거부해 왔다.


갑작스러운 선의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해도 지금으로선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노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안

...응, 알았어. 고마워...모두와 함께 행동해 볼게...


흔들리는 물방울이 시내로 합류하는 첫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수송대원1

뭐야, 벌써 설득된 거야? 그럼 그동안 우리가 서로 고민했던 건 뭐였지?


노안

고민?


수송대원2

하하, 가끔 그들과 밥 먹을 때 너의 이야기를 해.


노안

그들?


수송대원2

그래, 신야, 웨이란...하여간 수송부대 핵심 멤버 몇 명들이랑 말이야.


노안

왜 내 얘기를 한 거야?


수송대원3

열세 살도 되기 전에 수송대에 합류했고, 레이첼의 측근인데다 줄리 얘기까지 하는 게 정상 아닐까?


노안

...


수송대원2

눈살 찌푸리지 마. 너에게 나쁜 말을 한 게 아니야. 다만 지금은 쓸만한 사람이 많지 않거든. 레이첼 대장이 사람을 보는 눈은 정확해. 또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옳지도 않고 말이야.


수송대원2

원래 레이첼이 줄리와 친해서 널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건 줄 알았는데, 그 전에 그런 일이...다들 눈치챘겠지만, 엄마와 아들이 다르다고 할 수밖에, 좀 더 얘기하자면 우리는 어린 자식만도 못한 것 같았어.


노안

엄마와 아들이 다르다...


수송대원3

흥, 누군가 입을 열 때마다 줄리가 어쨌고 저쨌고 말만 늘어놓지 않았다면, 오늘 세나가 널 끌고 오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을 거야.


수송대원1

마치 넌 얘기하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


수송대원3

내가 말한 건 줄리가 평소에 이 아이를 나오지 못하게 했던 것이라고, 지금 쟤가 다시 사람들과 어울리도록 하는 게 좀 어려워야 말이지!


수송대장 신야

어떤 아이가 천성적으로 한 사람을 너무나 좋아했다면, 스스로를 타인으로부터 고립시키고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기 쉽지.


수송대장 세나

잘 아네?


세나의 농담에 웃음꽃이 흩어졌지만 노안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수송대장 세나

왜 그래, 불편해?


노안

아니, 단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수송대장 세나

특별히 뭘 할 필요 없어.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주고, 도움이 필요하면 말을 하면 돼. 귀찮게 생각하지도 말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마.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서로 베풀면서 점점 깊어지는 거니까.


노안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수송대장 세나

당연히 아니지! 사람과 사람 사이엔 귀찮은 규칙이 너무 많다고! 귀찮아 죽겠어!


노안

으...


수송대장 세나

하지만 이런 것들을 알기 전에 솔직하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세나는 웃으며 노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송대장 세나

아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도 내가 도와줄게.


수송대장 세나

그날 네가 필드를 도와줬듯이 서로 도오야 미래의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어.


노안

응.


소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인파가 몰리는 가운데 어색한 자세로 테이블에 앉았다.


노안

...모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