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태워서 몸을 따뜻하게 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마렴.




혹사의 두 손을 잡는 순간 봉쇄된 갑문이 와르르 무너졌다.


먼지로 뒤덮인 지난날과 최근의 혼란은 한데 뒤엉켜 서로 갈기갈기 찢기며 무질서한 나선을 이루고 있었다.



레이첼

...하, 확실히 나는…. 오슬란의 앞잡이가 맞았어…. 그의 말이 옳아.


레이첼

그와 협력하기로 하고 무기를 마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해치려고 했을 때, 나는 이미 성공할 수 없었어.



구조체

다 죽었어?? 어째서?? 어째서야??


구조체

너의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야,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라고!! 네가 그 녀석들과 다르다면 말이야!! 네가 승격자 옆에 있는 한!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어!!


온통 새빨간 적색과 수많은 비명이 그의 앞에서 황급히 흘러갔다.



수송대장 신야

이것이 정녕 우리가 그토록 노력해서 바랐던 결과라면 너무 비참하기 짝이 없군.


어지러운 기억은 흩날리는 눈으로 변해 견딜 수 없는 눈사태를 만들었다.



구조체

우리는 모두 틀렸어… 아무도 선별을 통과하지 못했어.


구조체

이것이 바로...대가였어.


그 추억의 끝에서 오직 하나뿐인 생존자만이 싸늘한 눈 속에 누워 캄캄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사

승격 네트워크의 은혜를 받아들여.


끝없는 어둠 속에서 내리는 눈은 슬픔이 섞인 비웃음을 자아냈다.


혹사

그렇지 않으면 너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레이첼

이 선택밖에 없었어.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노안

...뭐?


정신을 차린 노안은 자신이 레이첼의 방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고, 지금 시각은 새벽 1시였다. 그는 레이첼의 지시에 따라 벨라 베테에게 받은 마지막 무기들을 G열차 객차에 숨겨놓았다.


그는...상층 경비병과의 전쟁이 불과 7시간밖에 남지 않은 것을 기억했다.


아사

왜 얼빠진 사람처럼 행동하는 거야, 방금 레이첼에게 왜 오슬란과 함께 하냐고 물어봤잖아?


노안

미안, 확실히 넋을 놓고 있었어. 다시 한 번 얘기해 줄 수 있겠어?


레이첼

...좋아. 어차피 전쟁이 임박해서 네가 묻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말해 줄 수 있어.


레이첼은 손에 든 잔을 들어 술을 꿀꺽 삼켰다.


레이첼

나에겐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었어.


그녀는 방금 한 말을 또 한 차례 반복했다.


레이첼

당시 수송부대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어 더 많은 점수를 받아 안전한 도시로 가기 위해 소대끼리 충돌하기도 했었어.


레이첼

나는 이런 환경을 바꾸고 싶지만 내겐 주먹밖에 없었고, 다만 마음속으로는…. 폭력으로 모든 것을 타개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어.


레이첼

이런 멍청한 발상으로는 물론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지. 내가 뭔가를 하려고 하면 귀족들에게 대가를 강요당해. 내가 귀족에게 버림받으려고 할 때 줄리가 나를 구해줬어.


노안

엄마?


레이첼

응, 그때는 그녀가 너의 아버지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자신의 재능으로 그의 부하 비서 중의 하나가 되었었지.


레이첼

그녀는 하층칸의 혼란을 보다 못해 내게 손을 내밀었고…. 우리는 논의를 거듭한 끝에 유일하게 해결 가능한 수단.... 오슬란을 찾아냈어.


레이첼

즉, 네 아버지가 나를 그에게 천거해서 황족을 대신할 음모를 꾸미는 남자를 만나 거래를 성사시켰던 거야.


레이첼

나는 하층칸의 무장폭동으로 비협조적인 귀족들을 협박하는 것을 도와주었고, 그는 나를 도와 빗장을 풀고 물자를 제공해 상층에 대한 반발을 이용해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게 했어.


레이첼

여러 차례 성공적인 항쟁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나를 무소불위의 '영웅'으로 여기고 수송부대의 총책임자로 내세웠지.


레이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든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어. 내 뒤에는 진정한 힘을 지닌 상층 귀족이 있었으니까.


레이첼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때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고,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



혹사

걱정하지 마. 너라면 해결할 수 있어. 이 침식체들은 너의 명령을 따를 거야.


눈앞의 화면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흰 안개가 자욱한 해항으로 옮겨졌고, 혹사는 옆에 있던 청년들을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참을성 있게 그의 행동을 이끌고 있었다.


그것은 노안이 구조체로서 깨어났을 때의 기억이었다.그는 자신의 정체를 잊고 승격자가 무엇인지를 잊고 있었다.


눈을 뜨면 바로 옆에서 자신의 '모든' 비밀을 다 알려주는 이 사람을 믿고 있을 뿐이었다.


혹사

사용해 봐, 심지어 그들의 황금시대 질서를 회복시키고, 물건을 운반하고, 폐허를 재건할 수도….


혹사

다만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제어하기 힘들 거야.



노안

...이렇게 하면 돼? 그것들은 나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 것 같아.


혹사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혹사는 노안의 손목을 잡고 쓰러져 있는 구조체를 가리켰다.


혹사

그것들에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시키고, 살리고 싶은 사람을 구하게 해...


혹사

고통의 무력감에서 벗어나 진정한 '영웅'이 되는 거야.


노안

...


혹사

왜 그래?


노안

너는 지금까지 이런 힘에 대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이야기하지 않았어.


돌이켜보면 그때의 경각심은 분명 '상인'의 영혼에 새겨진 천성이었을 것이다.


혹사

난 단지 네가 우리의 동반자가 되었으면 해…. 선별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난 널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여기에 남아주길 바라.


노안

동반자가 된 다음에는?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 거지?



레이첼

나에게 충분한 '원조'를 준 뒤, 그는 내가 보다 더 많은 일을 하기를 바랐어.


눈앞의 광경이 다시 개전 직전인 그날 밤으로 돌아갔다. 레이첼은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비집고 자조 섞인 냉소를 터뜨렸다.


이 장면을 보면서 청년은 불안에 떨며 어떤 위험을 감지했다. 기억 속 개전 시점까지 불과 7시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왜 아사와 술잔을 기울이며 잡담을 하고 있는 것일까?


레이첼

맨 처음의 임무는 가뜩이나 눈 뜨고 볼 수 없는 망나니들을 처리하는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무고한 사람들이 연루되기 시작했어.


레이첼

그러던 어느날, 그는 너의 아버님을 처치하라고 했었지…. 그도 그렇게 고분고분한 사람이 아니게 되어버렸다는 게 그 이유였어.


레이첼

미안해...


레이첼

그때도 나는 오슬란이 우리 말고도 몇 명의 쓰레기들을 사들일 줄은 몰랐었어. 만약 알았다면, 그때는 행동하지 않았더라도 줄리...혹은 네 아버지를 지켰어야 했었는데...


레이첼

하지만 뭔가를 하기엔 너무 늦어버렸어. 결국 그녀는 얼굴을 긁혀 흉터가 남아버렸고, 뱃 속의 너와 함께 하층칸에 갇히게 된 거야.


레이첼

그 이후로 그녀는 점점 변해갔어…. 예전에 즐겨 보던 책과 영화, 믿었던 꿈들이 그 가면 밑에 박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어.


레이첼

저항할 기회를 얻기 위해, 수송팀을 오슬란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그녀는 내 제안에 응해 장부를 조작해 수송부대의 무기 조달에 지원했었지.


레이첼

...그 일이라면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알려줬거나.


노안

응, 그 사람들이 말해줬어.


레이첼

역시 그렇구나, 세나랑 웨이란 녀석들이 차마 널 못 속일 줄은 알고 있었어.


그녀는 술잔의 탁한 액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레이첼

줄리는 나나 아사와는 달리, 나쁜 사람이 될 소질이 별로 없었어. 장부를 조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녀는 줄곧 지나치게 긴장한 상태였거든.


레이첼

입으로는 너에게 모두와 함께 있다고 하지만, 네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과 멀리 떨어져있고,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에 가면 그녀는 매우 두려워했어.


노안

그래서 엄마가 내가 도서 창고에 들어가 있는 것을 허락한 거였어?


레이첼

그래, 나는 '이렇게 걱정되면 차라리 아이를 곁에 두는 게 낫겠다'고 하면서 말렸지만, 그녀는 너무 가까워지는 게 두려웠고, 발각된 날 그런 죄를 지은 엄마가 있다는 걸 납득할 수 없을까봐 두려워했어.


레이첼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야'라고 자기암시처럼 말하곤 했는데, 고개를 돌리면 자신이 없어지면 네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생각하기 일쑤였지.


레이첼

그림을 그리는 데 시간을 보내느라 생존 능력이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언제나 너에게 가혹하게 다가왔을 거야.


레이첼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으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랐어. 책을 읽어도 좋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좋고, 그림도 잘 그리기를 바라고 있었어.


노안

...엄마는 내게 '원하는 방식대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었어.


레이첼

그래? 그럼 나도 너에게 한마디 부탁할게...네가 원하는 미래가 어떤 것이든지, 절대 날 따라하면 안 돼.


노안

그 말도 했었어.


레이첼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 온몸을 떨며 웃었다.


노안

레이첼 대장?


레이첼

그래, 어떤 일은 진작부터 터무니없이 틀렸고, 과거의 잘못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틀릴 수밖에 없었지...



혹사

이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지만, 이대로 틀릴 수밖에 없었어.


첫 기억상실 후 그가 다시 깬 날은 어느 오후였다.


혹사는 끝없이 펼쳐진 적조 앞에 서서 품에 안긴 유리통을 애틋하게 어루만졌다.


혹사

난 단지,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혹사

퍼니싱을 어떻게 하면 인류와 공존시킬 수 있을까 고민해 왔었어. 퍼니싱을 완전히 퇴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야.


혹사

하하...넌 마치 승격자인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유리통을 들어올려 슬픈 표정으로 내용물을 주시하고 있었다.


혹사

이것들은 모두 나의 '가족'의 유품이야.


혹사

나는 선천성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자랐었어.


혹사

아이에게는 지옥, 어른에게는 낙원이었던 곳이었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건 단 1초도 힘들었지만, 우리같은 아이들은 '엄마'와 서로를 지켜주며 살아왔었어….


혹사

나는 비열한 사람도 만났고, 사심 없는 사람도 만났고, 상처받으면서도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어. 내가 인간에게 단일한 사랑이나 한을 품은 것이 아니라 더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은 퍼니싱 바이러스에도 마찬가지였어.


혹사

고아원이라는 견고한 굴레를 깨고 나와 형제자매는 '엄마'의 안내로 그곳을 탈출해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얻었지.


혹사

...그래서 나는 이 재난에 감사한 적이 있었어.


혹사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씩 빼앗아갈 때까지는.


혹사

이제, 내 생각을 이해하겠어?


노안

...


혹사

나는 단지 모두를 지키고, 남을 수 있는 그 어떤 동료도 지키고자 해.


혹사

두려워하지 마. 적조는 그렇게 잔혹한 산물이 아니야. 더 이상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다시 생명을 잉태하잖아.


혹사

그게 최선은 아닐지 모르지만, 내가 찾을 수 있는...최선의 답이야.


혹사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면…. 설령 그들이 살아나지 않더라도…. 진짜 죽음보단 나아.


혹사

...과거에 죽었더라도, 남겨진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그녀의 그림자를 말이야….


누군가의 가장 소중한 유품을 만지듯 그는 넋을 잃고 보라색 긴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혹사

허황된 '조각'보다는 진정한 사람들 곁에 서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어.


혹사

그러나 그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주면 배신을 당하게 되고, 절대적인 우위와 힘을 손에 쥐어야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사람을 보호할 수 있어.


혹사

나는 이미 그런 교훈을 뼈저리게 느꼈고, 너도 마찬가지겠지...수송부대의 말로를 기억하고 있어?


노안

말로?


혹사

기억 안 나? 하긴 한 번 잊은 적이 있었을 테니까...


혹사

그럼, 지금 다시 회상해보고...그리고 너의 선택을 말해줘.



아사

이 모든 건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니까!


뒤섞인 상념과 잡음이 개전 전의 그날 밤으로 다시금 가라앉았다.


아사

그렇지 않으면 너는 어떻게 할 건데? 그 무기상들이 뜨거운 가슴으로 너에게 무기를 지원해줄 리 없잖아?


아사

모두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더욱이 행운상자가 있은 후, 수송부대의 신뢰도 예전만큼 높지 않아. 빈손으로 가봤자 누가 네 말을 들어주겠어.


아사

나는 레이첼과 항상 의견이 충돌했었지만, 오슬란과 손잡고 행운상자를 나눠 갖는 것에 한해서는 그녀도 옳다고 생각했었어.


노안

행운상자는 품절된지 오래잖아. 최근 물품은 어디서 구한 건데?


레이첼

바바리.


노안

엄마 자리를 이어받을 그 사람을 말하는 거야?


아사

그래, 바로 내 색시야. 헤헤, 얘는 요리사였는데 밥을 정말 잘 만들더라고.


노안

하지만 대장...



레이첼

나는 그녀를 믿을 수 없어. 이 두 사람은 줄곧 뒤에서 아무도 모르는 일을 하고 있거든. 몇 차례의 '식중독'이 발생한 사건이 있었어. 나는 모두 바바리의 손아귀에서 빚어진 일이라고 의심했었지만 여태 증거를 찾지 못헀었지.


레이첼

아사가 우리와 보조를 맞춘 것도 그가 상층칸에서 좋은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뿐, 그가 스스로 이 과업을 즐겼다면 우리의 처지를 결코 외면하지 않았을 거야.


노안

그렇다면 왜 그를 여기에 머무르게 하는 거야?


레이첼

수송부대와 그 위에 그의 인맥이 있기 때문에 그는 내게도 이용 가치가 있거든.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사람한테 안정적인 물자를 제공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레이첼

이것이 장기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양털은 양에게서 얻는 법, 그녀가 장부를 조작해 뜯어낸 물자 자체는 수송부대와 일벌부대의 보수였어.


레이첼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굶주린 나머지 아무렇게나 사람을 물어뜯지.


레이첼

각자 나쁜 생각을 가진 놈들이 많아질수록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결국 적들의 와해 공작을 돕고 있는 셈이 되버렸지.


아사

흥, 그런 녀석이 얼마나 되었든 발견하면 차에서 쫓아내버리지!


노안

그 때, 밴크로프트도 그렇게 한 거야?


아사

...


아사

네가 계속 그런 생각을 품는다면 나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알코올이 약간 작용했는지, 혹은 오래 전에 질책을 받아서인지, 이번에는 아사가 그렇게 단호하게 부인하지 않았다.


아사

너는 그 당시에 내가 고의로 그를 살해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냐?


아사

하지만 나는 아무짓도 하지 않았고, 그 아들이 왜 사라졌는지 나도 몰라.


아사

어쨌든, 그와 같은 큰 골칫거리가 아들을 찾으러 가느라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것을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그를 애써 찾으려 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내가 해친 건 아니라고. 알겠냐?


노안

...


레이첼

노안, 너 곧 열여덟 살이지.


노안

맞아, 왜 갑자기 물어봤어?


레이첼

필드가 실종된 지 5년 정도 지났구나.


노안

...


레이첼

나는 네가 074번 도시에 가서 필드를 찾고 싶어도 항상 수송대의 임무때문에 지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기회가 닿아도 그쪽에 가서 어떤 단서도 알아내지 못했겠지.


레이첼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어. 개인적으로 여러 번 부탁해서 필드 소식을 알아봤고, 계속 들어봤지만 매번 그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아서, 나도 너에게 이런 불확실한 이야기들을 하지 않았어.


노안

정말이야? 그에게 소식이 있었어??


레이첼

말한대로, 아직 그 녀석이 맞는지 확실하지 않아.


레이첼

열차의 일이 일단락되면 수송대를 떠나 직접 그를 찾으렴.


노안

수송대에서 떠나다니?


레이첼

응, 여기 남아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받지 못한 자들인데, 너는 그들과는 달리 아직 젊으니 밖에 나가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아사

그래서 언제 시작할 생각이지?


레이첼

최대한 빨리. 무기가 객차에 쌓여 더 이상 끌리면 더 위험해질 수밖에 없어. 그리고 며칠 후 두 소대가 돌아오면 나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할 거야.


그녀는 마지막 술 몇 모금을 삼키고 손에 든 잔을 내려놓았고, 그제서야 노안은 일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노안

레이첼 대장, 오늘 얼마나 마셨어?


아사

하하, 저거 딱 한 잔만 마셨어. 하지만 그녀의 주량에 따르면 기껏해야 10분 정도만 깨어있을 걸.


레이첼

술을 몇 모금 마시는 것도 축복이지, 와인은 너무 비싸다니까.


노안

빨리 정보를 확인해야 한다면서 이러다가는...


레이첼

오늘 저녁은 괜찮아. 그들이 그렇게 빨리 돌아오지 않을 거야. 먼저 너에게 맡긴 '숙제'를 볼까? 석능검 조립은 다 된 거야?


노안

...응.


레이첼에게 석능검을 맡긴 노안은 어두운 빛을 빌려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검사했다.


레이첼

좋아, 너는 자습 능력이 아주 뛰어나구나.


노안

이 부품들이 각각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어.


레이첼

인내하고 연구할 줄 아는 것만으로도 대단한걸, 이런 일을 아사나 그 밑에 있는 녀석들한테 맡기면...


아사

하하, 이게 왠 떡이냐 하겠지? 그 녀석들이라면 부속품을 가지고 나가서 술로 바꿔먹을거야.


노안

...


노안

옛날에 우리 엄마는 '책을 태워서 몸을 따뜻하게 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말라'고 하셨어. 책으로 배운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시면서 말이야.


레이첼

'책을 태워서 몸을 따뜻하게 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말라'


레이첼

...흐흐...그래, 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쏘시개로 삼는 사람들은 정말 바보야.


그녀는 술잔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레이첼

가끔 너를 보면 줄리가 하는 말이 정말 많이 맞는 것 같단 말이야.


레이첼이 고개를 떨구자 마치 말문을 터져나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레이첼

기성세대는 항상 '태도가 인생을 좌우한다'고 말하지만, 넌 참을성 있게 이해하고 배울 수 있었고, 스스로 흙 속에 누워 있는 많은 사람들보다 훨씬 나았지.


레이첼

그녀는 널 아홉 살 때 수송대에 보내려고 했지만...


레이첼

그건 단지 급해서 줄리의 몸이 계속 안 좋은 데다 그런 일들까지 닥치면…. 혼자서는 살 수 없을까 봐 걱정했었어.


노안

...


노안

엄마는 이 일만큼은 결코 나에게 말하려 하지 않았어. 만약 대장이 나중에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 엄마가 그때 줄곧 병이 났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거야. 그냥 기침이 자주 나오는 줄 알고 있었는데.


레이첼

너는 정말로 엄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허, 나중에 한 번 거울을 들여다 봐. 지금의 너랑 똑같다고.


레이첼의 두 눈은 이미 취기에 흐려져 있었다.


노안

...나랑 똑같아?


레이첼

그래, 그녀는 그 가면을 쓰기 전에 지금과 거의 같은 키와 고집스런 눈을 가졌었는데...


레이첼

머리와 옷이 모두 새까맣고, 고양이처럼 소리도 나지 않아, 밤에 불을 켜지 않으면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어.


레이첼

...그런데 말이야, 가끔은 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너를 딱 찾을 수 있을 만큼 반딧불이를 어깨에 걸어두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했어.


노안

이미 소리내는 걸로 최선을 다했었는데.


레이첼

싸우면 어느 소리가 너인지 분간할 수 없잖니.


그녀는 노안의 검은 머리를 보고 뭔가 우스운 그림이 떠오른 듯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레이첼

차라리 머리를 무지개 색으로 염색하는 거 어떠니.


아사

쯧, 남을 들볶을 겨를이 있으면 차라리 네 야맹증부터 어떻게 해봐.


레이첼

야맹증이 있을 리가 있나.


아사

없는 게 말이 돼? 작년에 의사가 너에게 비타민A 한 병을 줬는데, 너는 올해까지 아직 반 병이나 남았는데도 결국 또 다른 사람에게 줬잖아.


아사

더구나 지금 어디 염색을 할 여유가 있겠나. 쟤가 구조체가 될 수 있다면 가능하겠지만.


레이첼

그렇게 쉽게 구조체가 될 수 있다면 우리들도 여기서 목숨을 걸 일도 없었어.


아사

노안이 아직 적합성 테스트는 해보지 않았지?


노안

어떤 적합성?


아사

그 뭐시기냐...아무튼 무슨 적합성만 있다면 구조체가 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만 깜빡해버렸네.


아사

하하, 개조할 때 폭사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레이첼

됐어, 이런 일은 나중에 스스로 모색하도록 해…. 젊은이, 앞으로 기회가 있을 거야.


그녀는 취기를 띠고 손을 내저었다.


레이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널 살려줄테니까.


노안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뜻이야?


레이첼

무슨 뜻이냐고? 하...


레이첼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내가 너에게 해줄게. 지금…어떤 것도…….


레이첼

...확실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책상 위에 겹겹이 쓰러졌다.



노안

레이첼 대장?!


아사

자, 그냥 자게 냅 둬~ 어떤 일은 마음에 오래 쌓아놓은 다음에 발산할 필요가 있거든.


아사

더구나 결전이 며칠 안남았는데 슈퍼맨도 아니고 술기운으로 한껏 들떠오를 수도 있지 뭘.


노안

...


노안

그녀를 눕힐 수 있는 장소로 들어가자.


아사

갑니다요~


레이첼을 눕힌 뒤 노안은 담요를 찾아 덮으려 했지만 방에는 의자 등받이에 달린 외투 한 벌만이 있었다.


아사

아니, 그거 가져가지마, 내 옷이라고.


노안

미안.


아사에게 코트를 돌려주려다 무심코 옷깃이 접힌 곳에 부딪혀 뭔가 심상치 않은 딱딱한 것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노안

...?


아사

왜?


노안

당신 이 옷....


노안이 옷깃을 여미며 자세히 살펴보니 접힌 곳에 잘 보이지 않는 수선 흔적이 보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봉합실을 뜯자 안쪽에서 얇고 작은 초소형 기계가 떨어졌다.


노안

...이건...감청기? 언제부터 당신에게 있던 거야?


아사

...


노안

아사!


아사

그..그게...


그는 눈빛을 피하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다시 옷을 빼앗아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아사

얼마 안 됐어, 몇 시간 전이었나.


아사

이 외투는 어제 내 애인인 바바리가 나에게 선물한 거야. 나는 평소에 외투를 전혀 입지 않는다고.


노안

우리는 이 시간 동안 후속 계획과 관련해서 무기를 기차로 다시 가져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왔고 레이첼 대장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말했었잖아.


아사

이런, 바바리가 내가 밖에서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고 생각해서인지 온갖 통신기록을 다 뒤져봐서 만났던 여자들은 다 찾아봤던 것 같아. 무기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


아사

안심해, 레이첼과 나는 항상 바바리에게 밥을 먹고 있는데, 하물며 그녀가 진작부터 우리를 도와서 회계 일을 처리해 주고 있어. 모두 한 배에 타고 있는 몸인데, 그렇게 잔뜩 경계해서 뭐 해?


아사

내가 지금 바바리에게 가서 밖에 나가지 말라고 당부하면 되겠지?


노안

하지만...


아사

하지만 뭐,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레이첼은 취하면 최소 5시간은 자니까 그동안 깨워봤자 소용없어. 신야와 세나도 아침이 지나야 열차로 돌아올 거라고.


아사

너 아직 밥 안 먹었지? 테이블 위에 통조림 좀 남아있는데, 다 먹으면 가서 자렴. 레이첼이 깨어나면 다시 생각해 보마.


노안

안 돼, 이건 너무 위험하다고.


아사

위험은 무슨 위험? 레이첼한테 아무도 믿지 말라고 배웠어? 바바리가 수송부대를 도와 이렇게 오랫동안 물자를 조달했는데 폭로하는 게 그녀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우리 부부 사이의 감정적인 일을 이야기했는데도 아직도 그렇게 궁금한게 많아!


아사

신경쓰지 마, 내가 그녀를 빨리 만나야 해. 또 무슨 사고라도 나지 않도록 말이야. 네가 감히 일을 벌려서 나를 망신당하게 하면 나중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왠지 아사의 뒷모습을 보며 노안은 다시 밴크로프트를 떠올렸다.


노안

아사!!


지금 그는 그때의 밴크로프트처럼 조급한 듯 걱정에 가득 찬 표정으로 거의 비틀거리는 걸음을 하며 객차를 빠져나와 이내 자취를 감췄다.


노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