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잊으려 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이름을 버릴 수 있어. 너도 그런 부류니?



혹사의 간섭으로 청년은 또다시 괴로움과 재생의 틈바구니에 빠졌다.


그는 지난 과거의 삶의 시간 만큼이나 기나긴 꿈을 꾸었다.


하지만 끝없는 확산의 시대에 이 꿈은 덧없는 거품처럼 짧았고, 고작 21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지속되었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허구의 풍경이 잔잔한 물결을 타고 허구의 꿈결 속에 울려 퍼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 속삭임, 기도가 사슬로 변해 영혼을 갈기갈기 찢었다.


얼마나 허우적거렸을까, 방황하던 몸뚱이는 저항을 포기하고 잔해 더미 속에서 빨갛게 물들어갔다.


이렇게 기억을 잃고 공백부터 시작하는 것은 몇 번째일까?


ㅡㅡ뚝뚝.


기억의 파편이 핏자국과 함께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는 귓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네가 그 힘이 목적이라면, 그들의 하수인이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해야 하겠지. 이것은 희생된 전사들에 대한… 배신이자, 모독이잖아!'


노안

...후회...?


노안

아니, 후회는 없어...


차에서 내동댕이쳐진 후엔 또 무슨 일이 있었지?…. 기억의 부재도 여전하다.


???

노안...노안?


???

일어나...



노안

...?



필드

다행이야, 괜찮니...


노안

...필드?



어머니

또 어딜 그렇게 쏘다닌 거니? 온몸이 상처투성이잖아!


노안

엄마...



레이첼

몸은 괜찮아?


노안

몸...?


그는 몸을 움직이려다 심한 통증에 막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레이첼

내가 말했잖아. 증거를 오슬란에게 넘기라니까.


노안

...미안...


레이첼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면 나더러 네 엄마에게 어떻게 설명하라는 거야?


어머니

너는 어째서 아직도 자신의 무능력과 타협할 줄 모르는 거니?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잖아.


노안

...하지만 모두 다 사라졌잖아. 내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던 건데?


필드

...


노안

하지, 엄마, 레이첼...이모...내가...어떻게 했어야 해?


...


노안

어떻게...했어야 돼?


노안

도와줘...


필드

그럼 우선 깨어나, 노안


노안

지금 꿈꾸고 있는 거야?


노안

내 꿈에서…당신들은 이미 죽었으니까…잠에서 깨면 다 괜찮아질까?


어머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니, 이것만큼은 꿈이 아니란다.


그 문장은 꿈 속에 숨어 있는 사람을 깨우는 찬물 세례와 같았다.



그는 끝없는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뜨고 숨을 크게 쉬려고 했지만 가슴에서는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전해져 입가에 흐느끼는 듯한 신음만 흘러나왔다.



??

이봐, 의사! 깨어났어!


거점 의사

운이 정말 좋았네요.



노안

아직 살아있는 거야?


??

그래, 내가 널 살렸어.


??

운이 좋았어. 네 몸에 묶인 끈이 끊어질 때 마침 기둥에 걸려서 완충역할을 해줬고, 또한 눈 더미 위에 떨어졌지.


??

가슴에 총상을 입은 것도 반딧불이 장난감이 지켜줬고….


??

충격으로 골절된 데다 다른 부상까지 겹쳐 적어도 3개월 이상은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아.


노안

...왜 구해줬어?


??

너에게 이런 위험을 무릅쓰게 한 것 자체도 황족에게 책임이 있으니까.


??

보스가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너를 공개적으로 도울 방법이 없어. 요 몇 년 동안 하층칸을 돕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지.


노안

...


??

뭇사람을 위해 땔나무를 안은 자는 눈바람에 얼어죽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면서, 적어도 너만큼은 포기해선 안된다고 하셨지.


??

네가 여기 있는 비용은 내가 다 지불했으니까 잘 휴양하고 나서 우리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어.


노안

좋은 소식?


??

보스는 모두가 목숨을 바쳐 개척한 길을 헛되게 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어.


??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들은 이미 모두...


??

혹시 '천지일역려, 동비만고진'*(天地一逆旅, 同悲萬古塵)이라는 시 구절을 들어본 적 있어?


*세상은 하나의 여관과 같아, 만고의 먼지가 되어버리는 것을 함께 슬퍼하네 (이백 - 『의고(擬古)』 제 9수 中)  


??

나는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어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먼지로 돌아가기 때문에 결과를 추구하는 것 자체는 무의미하고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

결국 그동안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는 너 자신에게 달려있어.


노안

...


??

참, 그리고 또 한 가지.


소년 구조체가 몸을 숙여 노안의 귓가에 기대었다.


??

내가 너를 구하러 갔을 때 너무 급하게 내려오는 바람에, 오슬란은 네가 살아있을 거라고 예상했을 거야.


??

거점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는 길가에 누워 있던 애꿏은 행인이라고 말했고 나도 조용히 돈을 찔러넣었으니까, 너도 몸조심해.


??

나는 다시 보스에게 돌아가야 해, 먼저 갈게.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길.


노안

...안녕.


그는 힘없이 작별을 고하고 다시 꿈속에 잠겼다.



그는 끝없이 눈이 내리는 꿈을 꾸었다. 바닥은 온통 얼룩덜룩한 핏자국으로 덮여 있었고, 여기저기서 인간의 잘려나간 사지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수없이 많은 검은 그림자에 쫓기며 좁고 그윽한 길을 도망쳤다.


다음 순간, 그는 또 갑자기 뚝 떨어져 붉은 수렁으로 떨어졌다.


그는 날지 못하는 날개가 자라나며 온갖 추악한 방식으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보았다.


무수한 분노의 손길이 그의 몸을 끌어당겨 그를 끝없는 심연 속으로 몰아넣었다.


ㅡㅡ쫓고 쫓기고, 도망치고, 추락하는 꿈이 반복되었다.


그는 늘 한밤중에 놀라서 잠에서 깨고 낯설고 캄캄한 방을 바라보면서 넋을 놓는다.


혹은 아물지 않은 아픔을 안고 다시 낭패한 꿈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이 꿈에서 죽은 사람은 언제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노안은 죽음과 고문의 꿈에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가시밭길의 꿈조차 지금의 현실보다 더 이상적이다. 꿈의 경계는 낮과 밤이 번갈아 가며 흐려지게 된다.



반복되는 졸음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잃은 자는 꿈속의 지난날의 여온을 구하며 긴 잠에 빠져들게 한다.


머나먼 방에서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와 함께 음식물과 땀 냄새가 병원으로 흘러들어 차가운 공기를 따스하게 만들었다.


의사는 웃으며 봄꽃 한 송이를 침대 머리맡에 놓고서야 자신이 나날이 하염없는 기다림에 생기없이 허송세월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

열차는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그 소년 구조체가 말하는 '좋은 소식'은 언제 들려올까요?


그는 몸을 가누고 병상에서 일어나 허약한 목소리로 지나가던 거점 직원을 불렀다.



노안

실례합니다만...요즘 오셀람 호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있나요?


거점직원1

그 사고 소식 말이냐?


노안

네.


거점직원1

오셀람 호에서 발생한 사고가 인재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는 공식 발표가 며칠 전에 나왔어.


노안

...


거점직원1

수송부대는 아딜레 상층의 관리감독에 불복하여 폭동을 일으키려 했었지.


거점직원1

결국 첩자가 계획을 미리 누설했고,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나머지 차를 폭파하는 바람에 이런 일을 저지르게 된 거야.


노안

...이게 공식 발표인가요?


거점직원1

틀림없어.


거점직원1

내가 듣기로는 그 첩자가 아사라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들 총대장의 곁에 10년 동안 잠복해 있었던 것은 바로 자기 부모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더군.


거점직원1

그런 시기에 정보를 흘리는 바람에 수송부대 전체가 그의 부모와 함께 순장되었지.


거점직원2

아니야, 총대장 주변에 있던 녀석의 이름은 노안이었어. 잘못 기억하지 마. 정식 통보는 없었지만 이건 어제 그 수송대원이 직접 말해준 거야.


노안

...


거점직원1

그들의 수송부대는 최근에야 조직 개편이 시작되어 계속 사람을 모집하고 있는데, 그 안에 별의 별 사람들이 섞여 있어서 소식도 그다지 정확하지 않아.


거점직원3

됐어, 그가 뭐라고 부르든 간에, 그 첩자는 결국 어떻게 되었지?


거점직원2

죽었다는 사람도 있고, 살아있다는 사람도 있고, 만약 소식을 구한다면 경비병들이 왔을 때 알려주고 물자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이들은 웃으며 자리를 떴고, 병상 옆에는 얇은 담요를 두른 채 혼자 앉아 있는 사람만이 남아있었다.



두 눈을 뜬 그는 다시 텅 빈 객차로 돌아갔다.


석양의 잔광이 창밖을 감싸고 있는 풍경이 열차 소리에 맞춰 흔들렸다.


이곳의 모든 것은 소위 말하는 현실보다 더 진실하고 친숙하다.



수송대장 세나

요즘 어때?


노안

요즘?


수송대장 세나

그래, 저번에 여기 왔을 때 봄이 왔다고 말했잖아.


수송대장 세나

지난번에는 이미 많이 회복되서 거점에서 임시직 일자리를 구했다면서.


수송대장 세나

요즘은 어때?


노안

어...


도대체 이런 꿈을 꾸는 게 몇 번째일까?



레이첼

수송부대 소식은 있어?


노안

계속 새로운 인원을 모집하고 있대.


레이첼

그렇다면 수송부대는 더 많은 인력에 의지할 수 있겠네.


노안

수송대원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열차 안의 환경이 이전보다 좋아졌나봐.


어머니

...그러니?


필드

환경이 좋아졌다면, 돌아갈래?


노안

돌아갈 수 없어. 오슬란이 아직도 나를 찾고 있는데, 그곳에 내가 몸 둘 곳이 있을 리 없잖아.


그가 흔들리는 객차 안에서 고개를 숙이자 옛 망령들도 침묵에 잠겼다.


노안

우리는 정말로 올바른 선택을 한 걸까?


노안

오셀람 호의 환경이 바뀌고 있고, 모두가 기대하는 미래는 언젠가 실현될 거지만...


노안

당신들은 전부 사라졌어...이래서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내가 여기에 머무른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앞에 있는 환영에게, 자기 자신에게 묻고 있다.


노안

내가 당신에게...가야 할 때일까?


레이첼

아직 다하지 못한 일이 남았지?


노안

뭐가?


필드

너는 아직 나를 찾으러 오지 않았잖아.


필드

노안, 난 아직도 074번 도시에서 널 기다리고 있어...


레이첼

내가 너에게 자료와 지도를 줬잖아.


노안

...하지.


필드

응?


노안

나에게 말해줘, 정말 아직도 살아있어?


필드

난 항상 여기에 있었어.


노안

하지만 난 알아...



노안

...그냥 꿈일 뿐이야.


거점의사

어째서 눈 위에 난 상처를 또 후벼파는 건가요?


노안

...


거점의사

이 상처는 거의 일 년이 다 되어도 낫지 않는데, 매번 흉터가 생길 때마다 또 후비고, 계속 그러면 장님이 될지도 몰라요.


노안

...벌써 1년째인가요?


거점의사

맞아요.


거점의사

정신과의사를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매번 이런 식으로 깨어있는지 확인하다 보면 언젠가는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요.


노안

...미안해요.


노안

오늘...무슨 일 있었나요?


거점의사

아, 인사부의 담당자가 와서 저더러 당신과 얘기해보라고 하셨어요. 어쨌든 우리는 꽤 친해졌잖아요.


거점의사

당신이 여기 온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요.


그녀는 또 한 차례 시간을 강조했다.


거점의사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죠? 마냥 일용직만 할 수는 없잖아요.


노안

...


노안은 그 소년 구조체가 낸 약값을 빌미로 반 년 동안 거점에서 쉬었다.


부상이 완쾌되자 과거 일벌부대원을 본떠 거점 잡일을 도맡아 했다.


온실에서 채소를 돌보고, 거점을 청소하고, 파손된 집을 수리하거나, 밖으로 나가 폐품을 주워 쓸 수 있는 부품을 뜯어 직원에게 건네기도 했다.


기술과 정교함이 요구되지 않는 한 아무리 지저분한 일이라도 받아들여 꼬박꼬박 해치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점직원1

너희들 그 녀석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도대체 언제부터 왔던 걸까?


거점직원2

나도 기억이 안나. 의사가 받아온 환자 같은데 병을 치료할 겸 여기 남아서 도와주고 있었잖아.


거점직원3

도와? 그것은 확실히 '도와주는 것'이긴 하지. 건조 식량 외에는 일체의 보수를 받지도 않고 허드렛일 태반을 도맡아 하는 바람에 존이 일거리를 잃었지. 또다시 들어갈만한 거점을 찾지 못하면 그는 밖에서 썩어 죽게 될 거야.


거점직원2

어쩔 수 없어, 거점 대빵이 그가 마음에 든 모양인데, 그 녀석 혼자서 4명 몫의 일을 해내니까 인사부에서 몇 명 더 뽑아가려고 해도 뽑질 못하는 거야.


거점직원3

그야 당연하겠지, 이렇게 유능한 젊은이가 있으면 나도 늙은이를 고용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거점직원1

지금도 수송부대에서 사람을 모집하는데, 기술이 없다 쳐도 왜 열차에서 일하려 하지 않는 걸까?


거점직원2

화물을 호송하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나?


거점직원1

흥, 겁쟁이인가 보네.



거점의사

정규직 자리는 아직 비어 있지만 베테랑 전문가가 필요해요.


거점의사

당신은 아직 젊고, 더 좋은 선택지도 많이 있어요. 막다른 길에 몰린 노인들처럼...이렇게 막노동자로 살지 않아도 돼요.


노안

...


거점의사

휴우, 당신이 그 구조체에게 실려 왔을 때, 그는 단지 길에서 당신을 만났는데 열차에 부상자를 수용할 곳이 없다고 했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다 나은 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 말하지 않았어요. 다시 돌아갈 수는 없나요?


노안

...


거점의사

당신을 쫓아내는 게 아니라... 더 좋은 계획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정 없으면 여기 있어도 돼요.


노안

알겠어요...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


거점의사

어디 갈지 생각해 보셨나요?


노안

네, 내일 떠날게요.


거점의사

...벌써요? 설마 홧김에 억지로 하는 건 아니죠?


노안

네, 안심하세요.


거점의사

그럼 내일 인사팀에 가서 반 년치 보수를 받아가세요. 가는 길에 밥도 챙겨먹어야 하니까 얼마가 되었든 가져가아죠.


거점의사

그리고 어디 가서 눈에있는 상처 후벼파지 마세요, 들었나요?


노안

네, 감사합니다.



다음 날, 노안은 무거운 짐을 메고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홀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황무지의 대열에 합류해 도시의 폐허 사이를 맴돌며 필드가 사라진 074번 도시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겨울눈이 다시 녹고 날씨가 풀릴 때, 그는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예상치 못한 지인을 만났다.



벨라 베테

살아 있었구나.


노안

...?


벨라 베테

기억 안 나? 우리 두 번째로 만나는 거잖아.


노안

...


벨라 베테

오랜만이야. 열차 이야기는 들었지만 자기 사람에게 배신당할 줄은 몰랐어.


벨라 베테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개전을 강행하다 보니…. 실패는 불가피했겠지.


벨라 베테

오슬란은 아직도 살아남은 핵심 멤버를 찾고 있는 것 같아. 지금 너의 모습을 보면 돌아갈 수는 없겠지?


노안

...


그는 확실히 돌아갈 수 없다.


노안

너는? 왜 거점에 머무르지 않은 거야? 베테ㅡㅡ


벨라 베테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마!!


그녀의 얼굴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벨라 베테

베테 그 늙은 짐승같으니...! 그 인간은 수년 동안 나를 속여왔는데 아직도 나의 할아버지라고 말하고 다닌다고!


노안

베테 씨는 너의 할아버지가 아니었어...? 근데 확실히 엄청 닮긴 했는데...


벨라 베테

입 다물어! 난 이미 베테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 원래부터 관계가 없었어. 다시는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노안

...벨라...무슨 일 있었어?


벨라

말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나도 돌아갈 수 없고, 앞으로도 그 거점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을 거야.


노안

너는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벨라

어머니를 찾아뵙고 싶었는데…. 살아계셨다는 걸 알게 되었어.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에 그 늙은 짐승의 손에서 도망쳤는데, 지금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벨라

너는? 너는 어디로 갈 거니?


노안

074번 도시.


벨라

걸어서? 미쳤구나,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


노안

1년, 혹은 2년.


벨라

너 진짜......됐어. 그것 말고는 할 일이 없어 보이네.


벨라

나랑 같이 행동하지 않을래? 어차피 나도 사람을 찾아야 하니까, 두 사람이 같이 봐주는 셈이 되겠네.


노안

...


벨라

참, 이름이 뭔지 아직 안 물어봤었어.


노안

나랑 수송부대와 줄곧 접촉해왔으면서 내 이름이 뭔지도 몰랐던 거야?


벨라

그 사람들은 '대장', '안경쟁이', '유령', '레이첼이 키우는 꼬맹이'이라고만 불렀잖아.


노안

...유령은 또 언제 생긴 별명이지.


벨라

수송부대의 사람은 많고 호칭은 엉망인데, 어떻게 너를 뭐라고 부르는지 기억할 수 있겠니.


벨라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공식통보'에 적힌 '주모자'들 이름이야. 아사, 바바리, 노안, 심지어 레이첼 자신까지. 이 안에 네 이름이 있니?


노안

...


노안

나는 이름같은 거 없어.


벨라

게임 속 최하위 몬스터도 '슬라임'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름이 없을 리가 있겠니?


노안

그럼 슬라임이라고 불러줘.


벨라

과거를 잊으려 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이름을 버릴 수 있어. 너도 그런 부류니?


벨라는 한숨을 내쉬었고, 그녀는 이 말이 곧 자기 자신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벨라

열차의 그 변고가 모든 것을 앗아갔더라도 네 곁에 있었던 추억은 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으면 안 돼.


노안

...추억...



어머니

노안, 엄마는 그 사람들이 널 어떤 단어로 부르는지 알지만, 괴물이 결코 추함과 불행을 의미하지 않는단다. 그 그늘에서 헤어나올 수 없더라도, 엄마는 네가….


어머니

그래, 《슈렉》처럼 주인공이 되어 행복한 결말을 맺었으면 좋겠어.



슈렉

슈렉...이 이름 어때? 우리 엄마는 예전에 나를 이렇게 불렀었어.


벨라

그것도 좋아.


그가 숨긴 것을 눈치챘음에도 벨라 역시 굳이 털어놓기 싫은 비밀이 있었기 때문에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벨라

참...마침 부탁할 게 있어.


한 사람의 과거와 미래는 추위 속에 파묻혀 더 이상 영혼의 희비를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다른 한 사람은 24년간 속아온 치욕을 분노로 감추며 누구에게도 들먹이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자 걱정거리를 안고 그렇게 074번 도시로 향했다.



슈렉

...


슈렉

너 이러는거 너무 심하다는 생각 안 들어?


동행 25일째, 영혼의 희비는 더 이상 없을 줄 알았던 사람들은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벨라

왜?


슈렉

지금 내 목표는 074번 도시로 가는 거지, 여기 앉아서 25일 동안 네 기억 속의 어머니를 그림 그리는게 아니잖아.


벨라

내가 어머니를 찾아야 하는데 사진도 없으니까 너에게 찾아가서 그림을 그려 준 게 뭐가 잘못됐니? 너는 원래 나에게 신세를 진 거잖아.


슈렉

나는 수송부대에 가입한 이후로 그림 연습을 거의 하지 않았어. 요구하는 수준이 너무 높잖아. 진짜 완성 못하겠다고.


벨라

나는 단지 네가 이 그림에서 눈썹을 좀 높이 그리라고 한 것밖에 없어.


슈렉

5분 전까지만 해도 눈썹을 좀 낮춰달라면서?


벨라

조금 더 높으니까 다시 낮출 수는 없는 거야? 왜 내 요구가 그렇게 까다로운 건지 이해시켜 줄래?


슈렉

...


그는 숨을 삼키고 펜을 잡고 그림의 눈썹을 다시 조정했다.


슈렉

지금은 어때?


벨라

느낌이...그래도 잘모르겠어. 일단 눈썹은 신경 쓰지말고, 눈은 왼쪽과 동시에 오른쪽으로 좀 더 바라보게 하자.


슈렉

?


벨라

나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잘 익은 포도덩굴처럼 온화하고 풍성했던 걸로 기억해.


슈렉

?


벨라

눈빛도 호수의 잔물결처럼 흔들리는 느낌이 있어야 하고.


슈렉

...


노안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슈렉

...도대체 내가 그림을 그릴 줄 안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어?


벨라

레이첼.


슈렉

그건 그냥 농담이야. 나는 진짜 그림 그릴 줄 몰라.


벨라

그녀의 카드지갑에는 네 어린 시절 작품이 한 장씩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없어.


슈렉

그리고 또 어디서 이런...외모에 대한 묘사를 배운 건데.


벨라가 들고 있던 책을 흔들었는데, 그것은 인생의 깨달음을 담은 산문집으로 여주인공에 대한 아름다운 표현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마치 초연으로 입맞춤한 사과처럼, 외기러기가 놓친 황혼을 비춘다...'


'액자 속에 남아있는 모나리자의 외로움은 곧 그녀의 손끝 색깔이다...'


노안은 탁소리를 내며 책을 덮고 벨라에게 공손히 돌려주었다.


슈렉

우리 엄마 말이 맞았다고 생각해. 사람은 자신의 무능력과 타협해야 하지.


슈렉

나는 오늘 펜을 버리고 종이를 버리기로 결심했어. 더 이상 그림에 대해 어떠한 불필요한 감정도 생겨나지 않아.


벨라

너는 창작할 때 항상 이렇게 고통스러워했니? 아니면 서투를 때만 그런 거니?


슈렉

항상 이랬어.


벨라

하지만 넌 내게 신세를 지고 있어. 레이첼도 네가 수송부대를 떠난 후에도 그림을 계속 그리길 원한다고 말했었고. 나는 지금 너에게 종이와 펜을 줬어. 너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안될까?


슈렉

...


벨라

다시 연습하자. 근면은 너의 서투름을 만회할 수 있어. 나는 네가 할 수 있다고 믿어. 그러니까ㅡㅡ


벨라

고!쳐!줘!



동반 50일 만에 노안은 벨라의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렸다.


벨라

진작에 할 수 있다고 말했었잖아.


슈렉

'눈을 왼쪽과 동시에 오른쪽을 본다'는 말을 '눈 사이 간격이 좀 더 넓게'로, '머리카락은 포도덩굴처럼 온화하고 풍성한 느낌이 든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말려있다'로 진작에 말했다면, 여기서 이렇게 오래 지체되지 않았을 거야.


벨라

나쁠 건 없잖아? 너의 감정이 전보다 훨씬 더 풍부해진 것 같은데. 널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의기소침하지도 않고 말이야.


슈렉

...홧김에 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덕분에 배웠어.


그는 펜을 놓고 자신의 시큰거리는 손가락을 조금 움직였다.


벨라

불평하지 말고 마음을 좀 열어봐, 어서 가자!


벨라는 50일 전부터 예정됐던 방향으로 멋지게 손을 흔들었다.


슈렉

...


한번 여행길에 오르면 시간은 바람처럼 휙휙 지나간다.



그들은 부랑자가 되어 각자의 재주로 물자를 찾고, 소식을 수소문하며, 서로 도우며 나아갔다.


지난날의 아픔은 마음 한구석에 잘 안착돼 서로 말할 수 없는 비밀로 부쳐졌고, 두 사람은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새해 겨울이 되어서야 책의 내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다소 누그러졌다.


한 사람은 만화에, 한 사람은 자기계발서에 열중했었고, 책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각자의 취향도 많이 달랐었지만 그 덕분에 두 사람은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당초 벨라가 '발육부진'이라고 평가했던 소년도 조금씩 성장해 청년의 뼈대를 갖게 됐지만, 단 한 가지, 그는 여전히 옛 꿈에 사로잡혀 얼굴의 상처를 계속 쥐어뜯고 있다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감염 악화를 막기 위해 깨진 안경을 겨우 대체할 수 있는 근시용 고글을 찾아낸 벨라는 노안이 의식적으로 고글을 사이에 두고 상처를 만지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벨라

동물이 자기 상처를 긁지 못하게 보호대를 씌우는 거 본 적있어?


슈렉

너의 자기계발서에 '대화하는 기술'같은거 알려주는 내용은 없었어?


그녀는 좋은 의도로 한 것이지만, 정신을 확인할 수 있는 이 수단을 잃고 잠을 두려워하게 된 노안은 다시 옛날의 꿈에 빠져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분간할 수 없게 될까봐 걱정했다.


이런 조바심을 안고 동이 틀 때까지 혼자 앉아 있을 때가 많았지만, 이렇게 잠이 부족한 날이 길어지면 낮의 여정을 버틸 수 없었다.


도중에 한 번 의식을 잃은 후, 벨라는 그에게 잠을 재촉해야 했다.


벨라

내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엄마가 된 기분을 맛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간식 좀 구해올 수 있어?


노안

...날 신경쓰지 않아도 돼.


벨라

도로의 온갖 번거로움에 대처하는 전 수송부대 대장은 여기 하나밖에 없잖아. 너가 죽어버리면 내 생존 난이도가 몇 퍼센트나 오르는지 알고는 있니?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더 이상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노안은 다시 코를 고는 척 하는 법을 배웠다.


벨라가 마음 놓고 자야 긴 밤을 차분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긴 시간 동안의 고단한 여정에서 그들은 수많은 황혼의 폐허를 지나 외롭고 텅 빈 골목에서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여름밤의 반딧불이가 다시 숲을 에워싸고, 그 선율은 이미 가슴속에 깔려 다시 울려 퍼졌다.


그는 마침내 그 기계 반딧불이를 빌려 자신이 아직도 꿈속에 있는지 확인하는 법을 배웠고, 그 길었던 고통의 진정제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