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 자신의 영혼을 불태워 눈과 얼음을 녹였기 때문이다.



따스한 봄의 새싹이 황야를 뒤덮고 074번 도시에 다다르기 직전, 벨라는 마침내 그녀가 기다리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보육구역 직원1

이 사람 전에 본 적 있어.


벨라

정말인가요??


보육구역 직원1

4년 전, 그날 비가 많이 내리던 날, 그녀는 다친 아이를 안고 보육구역 직원에게 입양을 권유하려 했던 기억이 나.


벨라

아이...?


보육구역 직원1

그래, 그녀는 길에서 구한 세 살짜리 소년이라고 했는데, 그 아이가 열이 많이 나서 그날 밤 바로 세상을 떠나버렸지.


벨라

그녀의 이름이랑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시나요?


보육구역 직원1

이름...그 시절 기록을 찾아보니 유일한 간병인으로 이름을 남겼던 기억이 나는구만.


보육구역 직원1

아, 찾았다, 엘레나 벨라, 맞아, 4년 전 9월 28일에 기록을 남긴 적이 있어. 일벌 부대의 일원이었지.


벨라

엘레나 벨라? ....그 이름이라면 틀림없어, 바로 그 사람이야.


슈렉

하지만 4년 전 일벌부대는 이미….


보육구역 직원1

나야 모르지, 지금은 일벌부대원들도 그리 흔치 않으니, 그 사고가 아딜레 상업 연맹에 주는 충격이 꽤 컸다고 하던데?


수송부대 구성원1

다행히 열차 안에는 여전히 많이 있고, 자밀라가 서서히 영향력을 키운 뒤 모든 사람들에게 식량 배급을 실시했어. 그들은 일이 없으면 굶주리겠지만, 그래도 죽을 처지는 아니야.


옆에 있던 수송대원들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보육구역 직원2

그동안 몇 명이 죽었나?


수송부대 구성원1

듣기로는 몇천, 심지어 만 단위까지 올라간다고도 하고, 사람마다 얘기가 달라. 어차피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대부분 없어졌어.


수송부대 구성원2

수송부대도 어렵사리 다시 꾸려졌고, 우리의 대장은 미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말했어.



슈렉

대장...?


슈렉

...지금 수송부대 총책임자가 누구야?


수송부대 구성원1

신야.


슈렉

...신야? 그가 살아있었다고? 하지만...


벨라

하지만 오슬란은 그 후 줄곧 수송부대의 핵심 구성원을 찾아 책임을 추궁하는데 혈안이 되었는데, 어떻게 그 사람에게 총책임자의 자리를 허락할 수 있었나요?


벨라는 노안이 묻지 못한 말을 먼저 가로챘다.


수송부대 구성원1

왜냐하면 오슬란은 지금의 자밀라를 이길 수 없거든, 그리고 신야와 첩자와는 아무런 상관 없어.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뒷칸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했었는데, 오슬란은 그의 약점을 잡으려 하였지만, 지금까지도 잡히지 않았지.


벨라

자밀라를 못 꺾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가요?


수송부대 구성원2

아, 그 사고 이후에 공중정원의 지상 거점은 오슬란과 협력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고, 원래 많은 귀족 양반들이 오슬란을 옹호하고 있었는데,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그를 멀리하게 되었어.


슈렉

여러 가지 이유?


수송부대 구성원3

말을 듣지 않는 귀족들에게 사람을 보내 암살하고, 수송부대에 뒤집어씌우기까지 했었다지.


수송부대 구성원1

그래? 원래 수송부대 사람이 죽였다고 들었는데.


수송부대 구성원3

에휴, 어쨌든 그의 지저분한 짐승같은 행동이 점점 드러나고 있어. 똑똑한 사람들은 벌써부터 그를 멀리하고, 그에게 잡혀죽을 처지의 녀석들만 그의 개 취급을 받고 있지.


수송부대 구성원3

그 녀석은 지금 미친 듯이 사방으로 사람을 물어뜯으려고 해, 그 전에 정비부대를... **! 정비부대까지 해치려고 계획했었어! 소피아라는 이름의 어린 소녀만이 살아남아 구조체로 개조되었잖아.


수송부대 구성원2

망할 놈, 언젠가 고속으로 달리던 오셀람 호에서 내동댕이쳐지는 날이 올 거야.


슈렉

...


수송부대 구성원1

...어쨌든 그때보다는 좀 나아졌어.


수송부대 구성원4

예전 수송부대가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오슬란이 쓰러지는 날까지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몰랐겠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아도 되었을 거고 말이야.


수송부대 구성원4

그렇게나 많은 목숨들이, 참 허망하기 그지없지.



수송대장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슬란을 지금의 그 자리까지 밀어붙힐 수 있었을까?


수송부대 구성원4

네? 그 사람들은 실패했잖아요?


수송대장

실패하면 의미가 없는 건가?


수송부대 구성원4

실패하면 무슨 의미가 있죠?


수송대장

당시 오슬란 수하의 경비병이 그렇게 많았는데, 그들이 얼마나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말할 것도 없고, 둥근 공 같은 군용 기계체는 구조체조차 상대하기 어려웠는데, 누가 감히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배반했겠는가?


수송대장

수송부대, 혹은 일벌부대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오슬란의 껍데기를 벗긴 게 아니었다면, 그의 모습은 결코 오늘날과 같지 않았을 거다.


수송대장

누가 척추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데,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감히 움직일 수 있겠나?


슈렉

...


수송대장

나는 지금까지 너희들과 이런 것들을 토론하고 싶지 않았지만, 너의 그 말을 듣고 정말 화가 났어. 선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삶의 터전이 어디 있었겠나?


수송대장

그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아직 하층칸의 풋내기에 불과했고, 수송부대에 합류하지도 않았고, 그들과 함께 올라가지도 않았지만, 피와 시체투성이의 그 객차를 직접 본 적이 있었어.


수송대장

지금도 나는 밤에 그 날을 꿈꾸곤 해. 아무리 잊어도 잊을 수 없다고!


수송대장

너희는 지금 오슬란과 그 도당들이 패악질을 부리는 것을 싫어하지만, 이전에 그들은 지금보다 백배 더 가증스러웠어. 그의 경비병은 심지어 감히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음대로 사람을 죽였었어!


수송대장

공중정원의 지상 거점이 왜 오슬란과 협력하려 하지 않는지 알고 있나? 그가 한 그 더러운 일들은 또 어떻게 폭로되었는지는 알고 있고?


수송대장

핵심 멤버가 냈다는 증거가 있었기에 그의 주변 세력은 조금씩 무너지고, 그 단말기는 현장에서 깨져 재판을 몇 년이나 지연시켰지만….


수송대장

그런데 올 것이 왔어. 그것은 자연스레 좋아진 게 아니라 누군가 앞에 시체로 길을 터놨기 때문이었지!


수송대장

너는 그들을 마땅히 영웅이라고 불렀어야 했어!!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의 죽음에 가치가 없다고 하잖아!!


수송부대 구성원4

...


수송대장

아직 살아있는 예전 멤버들은 몇 명이나 될까? 나머지는 죽거나 아니면 아직도 오슬란에게서 도망치고 있거나 심지어 어떤 것들은 심지어 억울한 죄를 뒤집어써버려 씻어도 씻지 못하고 있겠지!


수송대장

살아남았다고 해서 어딘가에서 맘편히 지내고 있는게 아니라고!


수송부대 구성원2

맞아, 틀림없어, 지난번에 신야 총대장을 찾아갔을 때, 불도 켜지 않고 니트를 반 장 들고 있으면서 책상에 앉아있어서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슈렉

...


수송대장

오슬란이 하루빨리 열차에서 쫓겨나지 않는 한, 퍼니싱이 우리의 생존 환경을 빼앗고 있는 한, 이전 세대 수송부대와 일벌부대는 우리에게 맡겨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없어.


수송대장

승리까지는 아직 멀었다! 한 사람의 희생도 헛되이 여겨선 안 돼!


수송부대 구성원4

대장님,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보육구역 직원1

화 풀어, 어린 사람들은 지나간 일을 확실히 잘 모르니까, 이런 기회에 들려줘서 좋지 뭘.


보육구역 직원1

참, 며칠 전에 듣기로는 오슬란이 또 행운상자를 가지고 와서 멤버를 모집한다고 들었는데, 어떤 승격자를 찾아가면 바이러스에 면역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야.


수송대장

어떻게 당신까지 알게 되었지?


보육구역 직원1

아직 당신들의 말을 들은 건 아니야.


슈렉

승격자?


수송부대 구성원1

오슬란도 이게 어디서 온 정보인지도 모르고 요즘 계속 이걸 떠벌리고 다녀.


수송부대 구성원3

흥, 며칠 전에 이종중합체가 차에 떨어졌을 때, 그 틈을 타 그 이야기를 꺼냈어. 무슨 속셈인지도 모르겠어.


슈렉

이종중합체?


수송부대 구성원3

그래, 하늘에 떨어진 큰 괴물이었어. 엄청 위험했지.


슈렉

결국 어떻게 됐죠?


수송대장

처리했어. 공중정원에서 보내온 사람들이 그것을 박살냈지.


수송부대 구성원2

이쯤 되어서 다시 보니 그날의 오슬란은 정말 어릿광대 그 자체였다니까.


보육구역 직원1

어쨌는데?


수송부대 구성원2

이종중합체를 승격자의 소문과 연관시켜 장악하고자 수많은 계획을 세웠었지.


수송부대 구성원2

결국 소피아라는 구조체는 열차도 필요 없고 공중정원도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말하고, 당분간 어떻게 할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고 말했어.


보육구역 직원1

그래서 어떻게 됐지?


수송부대 구성원2

다들 소피아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실감했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오슬란의 그 어떤 말보다 믿을 만하니까!


보육구역 직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수송대장

그 자식들이 스스로 어떤 계획을 세웠었고 얼마나 비밀리에 행동했는지 잘 모르니까 함부로 얘기하고 다니지 마.


수송부대 구성원2

하하, 그 오슬란이 마침내 짜져있게 되는 날이 왔으니 감개무량하지 않습니까.


슈렉

...



오슬란

알고있을지 모르겠지만, 고사에 '지록위마'라는 말이 있었단다.



슈렉

...



정확한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은 밤새 길을 재촉했고, 마침내 열차가 074번 도시 역 앞에 멈춰 섰다.


벨라

그녀가 열차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생각해보니 그게 당연한 거였어.


벨라

집 없는 사람이 어디 갈 수 있었겠어. 베테같은 늙은 짐승녀석을 피하려면 오셀람 호로 갔어야만 했어.


벨라는 그 구겨진 그림을 쥔 채 텅 빈 정거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침묵했다.


벨라

예전에 레이첼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나한테 수송부대 가입을 권유했었지... 그때 내가 동의했더라면 진작에 그녀를 찾을 수 있었을까?


슈렉

후회해도 돌아갈 문은 없으니까, 이따가 차에 타서 어떻게 빨리 찾을 수 있을지 생각이나 하자고.


벨라

칫.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주먹을 불끈 쥐었고, 그렇게 두 사람의 무언의 기다림 속에 열차가 들어오는 신호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슈렉

네가 원하는 소식을 빨리 얻을 수 있기를 바라.


벨라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걸 도와줄까?


슈렉

열차가 그렇게 오래 정차하고 있진 않을 거야. 자신의 일을 우선으로 해. 그냥 이대로 떠나버릴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야.


그는 손을 흔들며 역 밖으로 걸어갔다.


벨라

어디로 갈 거야?


슈렉

산책하러, 돌아오면 074번 남쪽 제 3거점에서 보자.


벨라

...



그는 정거장을 떠나 황급히 폐허를 지나 숲의 아침 햇살과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미풍이 약간의 온기를 보내자 노안은 고개를 들어 사방이 이미 푸르스름하게 변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필드가 실종된 지 7년 만에 다시 074번 도시로 돌아왔다.


수송부대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노안은 눈에 보이는 대로 계속 그의 소식을 찾고 있었지만, 임무에 지체되어 074번 도시에 올 기회가 생겨도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


감방에서 레이첼이 남긴 자료를 보고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눈치챈 뒤에도 노안은 그녀가 남긴 로드맵대로 수년 전 수송부대가 걸어온 길을 밟았다.



이 길을 노안이 처음 가 본 것은 아니다.


수송 임무를 시작한 첫해에 074번 도시로 복귀할 기회를 얻었었다.


그날 그는 어둠을 틈타 필드를 찾아가려다 레이첼에게 발각됐다.



레이첼

네가 뭣때문에 가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어. 하지만 내일 아침에도 임무가 있잖아. 너 때문에 우리의 일정을 지연시킬 수 없어.


노안

당신들 먼저 가도 돼.


레이첼

네가 여기서 침식체에게 찢어지도록 방치하라고? 혼자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노안

어쩌먼 안될 수도 있지만, 이 일만큼은 타협하지 않을 거야.


노안

모두와 함꼐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도 아니야. 밴크로프트 아저씨가 좋은 예시지.


노안

다른 사람들이 그를 무시하지만 않았어도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도 없었고 결국 행방불명이 되는 일도 없었어.


레이첼

...뭐라고?


노안

내 말이 틀렸어?


레이첼

줄곧 그렇게 생각했었니?


노안

그래...필드가 실종된 후부터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어.


레이첼

...


레이첼

그날 밤, 많은 사람들이 너를 데리고 한밤중까지 그 아이를 찾아다녔어.


노안

많아? 아니, 얼마 되지도 않았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시했지.


노안

그날 기꺼이 나서준 사람에겐 고맙지만 그렇다고 용서할 수 있는 건ㅡㅡ


ㅡㅡ퍽!


우렁찬 소리를 내며 뺨을 주먹으로 소년을 내리쳤고, 그는 몇 발자국 물러서다가 뒤에 있던 나무에 부딪혔다.


레이첼

나는 네가 그 아이를 찾게 냅둘 수도 있어.


레이첼

수송부대를 떠나게 할 수도 있고, 우리처럼... 네가 용서할 수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할 수도 있어.


레이첼

하지만 필드와 밴크로프트가 실종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잊지 마.


레이첼

그리고 줄리가 왜 죽었는지!


레이첼

이런 문제의 본질을 버리고 가망없는 사람을 찾으러 가겠다고?


레이첼

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 당연히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을테니 네가 직접 위로할 필요가 없어. 그 아이가 만약 죽었다면 네가 그를 찾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노안

단지 그의 행방을 알고 싶었을 뿐이야.


레이첼

그런건 지금 이 순간에도 안 돼!


레이첼

네가 그를 찾으면 또 무엇을 할 수 있니? 그에게 사과하고 허겁지겁 돌아올 거야?


노안

...



수송대장 세나

노안.


수송대장 세나

레이첼과 말다툼하지 말고 나랑 같이 가자.



어느덧 그는 이 숲의 깊은 곳까지 걸어갔다.


노안

세나 대장...


세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분명 자신의 장벽과 근심을 안고 마냥 걸어갔을 것이다.



수송대장 세나

네가 그들을 용서하고 싶지 않다면, 용서하지 마.


노안

무슨 소리야?


수송대장 세나

각 사람마다 이토록 복잡한 존재인데, 모든 사람들에게 육신부터 영혼까지 조화롭게 통일하라고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잖니?


수송대장 세나

우리는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자신이 포기할 수 없는 부분과 입장을 고수하기도 하고, 타인이 용서할 수 없는 일을 하기도 해.


수송대장 세나

다만 하층칸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수송대장 세나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면, 우리의 공동의 목표를 버리고, 사람들을 버리고, 다시 원래의 그 외딴 아이로 돌아오게 되겠지….


수송대장 세나

그것이 네가 필드를 버리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니?


노안

...


수송대장 세나

힐을 기억하니?


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송대장 세나

너가 싸울때 그녀가 용기내서 돕지 못한다는 것은 그녀가 너를 적대시한다는 뜻이었니?


노안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수송대장 세나

우리는 모두 보통사람이야. 완벽하지 않은 점이 있지. 보통사람의 완벽하지 못한 점을 받아들이는 것도 성장의 한 요소야.


노안

이견은 미뤄두고 의견의 같은 부분부터 협력하라...그런 뜻이야?


수송대장 세나

좋아, 깨닫는 속도가 아주 빠르네.


노안

세나 대장.


노안

레이첼 대장을 믿어?


수송대장 세나

...


수송대장 세나

이놈아, 하필 이럴 때 하나를 보고 열을 깨닫는 거니?


노안

나...몇 가지 얘기는 들었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어.


수송대장 세나

나는 그녀가 믿을 수 있는 부분을 믿는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할 수 있겠니?


노안

믿는 것은...레이첼 대장과...모두가 바라는 소원?


수송대장 세나

그래, 상층칸에 저항하려는 그녀의 마음은 결코 거짓이 아니야. 나는 그녀를 믿지만, 그녀에게는 완벽하지 않은 부분도 있겠지.


노안

...응, 알겠어.



세나는 노안에게 레이첼의 반면교사와 같았다.


레이첼은 늘 상대방이 의심할 만한 점을 의심하고, 세난는 믿을 수 있는 점을 믿길 원한다.


두 사람 곁에서 몇 년 동안 그는 정반대의 특질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결국 그가 원하는 형태로 쌓이게 되었다.


노안

이것은 당신들이 나에게 남긴 보물...


노안

그리고 나에게 남긴 여한이야.



수송대장 신야

그나저나 너의 후회의 유통기한이 평소보다 더 긴 것 같군.


수송대장 신야

자신의 마음을 빨리 허심탄회하게 푸는게 좋지 않을까?


레이첼

마음에 두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나쁠 건 없고, 때로는 신경 쓰는 사람이나 일에 얽매여 있어야 무너지지 않기도 해.


수송대장 신야

말하는 걸 들어보니 너에게도 이런 일이 있을 것 같군.


레이첼

허, 그건 어떻게 알았지?


수송대장 신야

너 설마...


수송대장 신야

어차피 나는 이해할 수 없어. 지난 일에 끌려다니며 전전긍긍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빨리 내려놓으면 홀가분하지 않겠어?


레이첼

과거의 경험이 없으면 어떻게 진로를 판단하겠어.


수송대장 신야

그럼 경험만 남기자고.


수송대장 세나

너 또 무슨 바보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경험 자체가 겪고 체험한 것의 총결산인데, 예방접종도 주사를 한 대 맞아야 하는 법이잖아. 남의 가르침을 듣기만 해봐야 얼마나 깊은 감명을 받겠어?


수송대장 세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이켜 봐.


수송대장 세나

사람들의 삶에서 수많은 고통이 사라진 후, 실수는 언제나 반복되었어.


수송대장 세나

그러니까...상처라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진 마.



노안

그게 바로 너가 말한...썩은 풀이 반딧불이가 되다, 라는 거였지?



필드

맞아, 새 생명은 들풀에서 태어나고, 빛이 없어도 들풀을 태운 불길이 하늘을 밝힐 수 있어.


필드

죽음의 탄생은 서로 나선처럼 얽혀있어.


필드

죽음이 주는 유감을 받아들여야 반딧불이의 희미한 빛을 손에 넣을 수 있지.



노안

모두가 남긴 것이라면, 아쉬움, 회한, 혁신, 그리고 미래도….


노안

버리고 가지 않을 거야.


노안

그 기억들 속에서…. 나아갈 방향을 찾는 거야.



한낮의 햇살이 점차 흐린 구름 속으로 물러나 비의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


노안은 그 황야의 끝을 바라보았고, 수많은 들풀과 꽃들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노안

너는...여기에 있니?


그는 꽃밭에 발을 들여놓으며 과거의 흔적을 뒤졌고…. 기억 속의 정체된 시간도 마침내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 시각은...


1:01 a.m./1:37 p.m.



1:02 a.m.


들풀이 아직 산과 들판에 널려 있지 않던 7년 전, 달빛을 틈타 수송차 한 대가 들어왔다.



밴크로프트

거점으로 가는 길은 아니죠?


레이첼

그 길은 무너진 폐허로 막혀서 멀리 돌아갈 수밖에 없어.


밴크로프트

알겠습니다. 그럼 저 먼저 앞서 가겠습니다.



한편 필드는 수송차의 화물칸에 몸을 숨긴 채 불안하게 지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필드

...



1:56 p.m.


그는 흙 밑에서 부러진 백골을 찾아냈지만 그리 드문 광경은 아니었다. 만신창이가 된 이 땅 곳곳에 죽음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남아 들풀의 자양분이 되었고, 들풀은 새와 짐승, 굶주린 사람들을 키웠다.


노안

하지...


그는 무기력하게 외치며 죽은 나무와 잔해 사이를 계속 탐색했다.



1:21 a.m.


어슬렁거리던 침식체가 차량 행렬의 끝을 향해 돌진했고, 수송차 한 대를 덮쳐 전복시켰다.


밴크로프트

차량 행렬을 모두 멈춰라! 피격된 차량을 보호하라!


레이첼

안 돼, 침식체들이 너무 많아서 우선 대피해야 돼!


밴크로프트

저는 더 이상 물건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밴크로프트는 젖은 흙 위에서 급정거를 했고, 부하 수송대원들을 데리고 차에서 뛰어내려 화물을 파괴하고 있는 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아사

어떡하지?


레이첼

...도와주러 가자.


아사

쳇...



2:31 p.m.


청년은 어지럽혀진 땅 앞에서 멈추었다.


부러진 칼날, 먼지 속에 묻힌 탄피, 수많은 침식체의 잔해 등 이미 여러 해가 지나도 싸웠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수색을 이어나가면 작별의 시간이 곧 다가올 것임을.


ㅡㅡ정말 그래도 괜찮아?


청년은 자신의 마음을 묻고 있다.


친구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야만 그는 이 목표를 가지고 계속 전진할 수 있다고 자신을 속였었다.


필드가 정말 죽었다면,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이제 어디로 향해야 할까?



1:44 a.m.


20분 동안 계속된 이 전투는 마치 10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레이첼의 판단은 옳았었다. 여기서 멈추면 더 많은 차량이 공격에 노출될 뿐이었다.


총성과 비명이 뒤섞인 가운데 화물을 가득 실은 수송차 한 대가 생체공학기계에 치여 전복됐다.


화물칸 안의 그 비명은 아수라장 가운데서 보잘것없어 보였다.


이곳의 침식체를 유인하기 위해 그녀는 강제로 차량 행렬의 철수를 명령하기 시작했다.


ㅡㅡ모든 전투가 끝나고, 화물을 회수한 소대가 속속 복귀했을 때.


그녀는 비로소 창백한 달빛아래 무거운 물건 더미 아래서 마지막 숨을 고르던 몸뚱이를 발견했다.


밴크로프트가 따라오기까지 불과 10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 실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녀는 잔인한 결정을 내렸다.



3:16 a.m./3:16 p.m.


밤과 낮으로 어긋난 시간이 이 순간에 겹쳤다.


3:16 a.m

필드가 버려진 과수원에서 깨어날 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도 없는 어둠과 방황하는 침식체였다.


3:16 a.m

그는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돌아온 것은 자신의 메아리였고, 여기서 벗어나려다 점점 몸이 망가지는 것을 보았다.


3:16 a.m

피의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낮은 묘목 옆에 누워 먹구름이 덮인 하늘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필드

작별이야, 노안...


이 짧은 작별인사 후에, 그의 시간은 영원히 정체되었다.


3:16 p.m

청년은 옛 상처를 따라 전진하다가 낮은 언덕을 넘자 시든 과수원이 나타났다.


3:16 p.m

이곳의 대부분의 나무들은 이미 시들어 버렸고, 또 많은 사람들이 벌채해갔다.


3:16 p.m

가장 끝자리 부분만이 흰 꽃을 드문드문 피운 채 남아있었다.


노안은 흔들리는 꽃 앞에서 천천히 고글을 벗었다.



7년이란 시간이면 한 사람의 흔적도 완전히 사라진다.


고요한 황야 위에 나뭇가지에 바람에 흔들리는 헝겊만 남아 있었고, 여전히 필드의 스카프와 비슷한 무늬가 남아 있었다.


노안

...


여기에 남은 것은 스카프뿐이었고, 필드 자신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웃고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꿈은 끝이 났고,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노안

...배꽃...


죽음의 생명은 부패를 통해 새로 태어나고, 아무리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방식으로 광활한 하늘과 땅 사이로 돌아간다.


노안

이 나무가 살아있어…너 때문이야?


노안

이제 오셀람 호는 억압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어...


노안

이것은 너에게 있어 좋은 소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고요한 대지에 물었으나 대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안

난 이제...너를 찾은 셈인 거지?



산들바람이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한바탕 스치고 몇 개의 꽃잎을 휘감아 그의 손에 떨어졌다.


허황된 부탁임을 잘 알면서도 노안은 배꽃잎을 받쳐들고 그것을 답으로 삼은 듯 조심스럽게 손아귀에 넣었다.


노안

오랜만이야...하지.


노안

나는 마침내… 현실을 직시하고 너에게 안녕이라고 말할 용기가 생겼어.


오랜만에 활짝 웃는 청년은 하얀 꽃잎을 바라보며 겨우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노안

고마워...고마워...


청년은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이 말을 계속 마음속으로 묵상했다.


필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직도 레이첼 옆에서 살고 있는 자폐아였을 것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함께 주위의 냉담함을 미워했었다.


필드는 그에게 여러 가지 온화한 변화를 주었지만, 그는 그런 변화로 필드와 완전히 헤어져버렸다.


다시 만났을 때 그의 몸은 흙으로 녹아들어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영혼은, 옛 친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노안

네가 내게 남긴 추억, 반딧불이가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고 있어… 내가 긴 밤을 이겨낼 수 있도록 말이야…


노안

나는 죽음이 존재의 의미를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어.


노안

너희들은 그저 다른 방식으로 여기에 남아있던 거였어. 어두운 밤을 밝히는 등불, 설원을 녹이는 불길,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열차...그리고 내가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원인과 이유가 되어서 말이야.


노안

고마워...하지...


그는 다시 한 번 황야와 배꽃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노안

그리고...안녕.







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