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가 남쪽 제 3거점에 들어선 것은 다음 날 오후였다.


청년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손에 쥐고 있던 만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벨라

산책하러 간다면서 알고보니 꽃을 꺾으러 간 거였어?


슈렉

...그런 셈이지.


벨라

그래도 배나무를 찾을 수 있었다니, 참 다행이야.


슈렉

소식은 찾았어?


벨라

응.


그녀는 굳은 얼굴로 노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벨라

죽었어, 3년 전에...병 때문에 열차에서 돌아가셨으니 그 혁명도 보지 못하셨겠지.


벨라

이 일기는 어머니가 죽기 전에 남긴 건데, 다른 유품과 함께 어머니의 친구가 받아서 간직하고 있었어.


벨라는 손에 들고 있던 얇은 책자를 흔들었다.


벨라

어머니는 줄곧...혁명이 승리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고, 하층칸에 학교가 들어서고 더 이상 음식과 화장실을 빼앗기 위해 다툴 필요가 없어질 거라고 굳게 믿었어. 그때가 되면 용기를 내어 베테에게 가서 나를 찾으려고 했었대.


슈렉

...


벨라

네 생각은 어때, 어머니의 소원은 과연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아니면 모두 허사가 되어버린 것일까?


그녀는 울음을 억누르며 이야기를 했다.


벨라

울지 마. 눈물은 가장 쓸모없는 거야. 아무도 구할 수 없어.


슈렉

...우리 엄마하고 똑같은 소리 하지 마. 그리고 울고 있잖아.


고개를 숙인 청년도 목이 메었다.


벨라

똑같은 말이라도 상관 없잖아. 이 말은 기성세대에서부터 전해져오는 당연한 이치인걸.


슈렉

기성세대에 전해 내려오는 것은 확고한 이치뿐만 아니라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관념도 있어.


벨라

너처럼 허황된 판타지 이야기를 하루 종일 보는 것보단 나아. 보통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면라이더'처럼 못하는 게 없는 영웅이 될 수는 없다고.


슈렉

가면라이더도 모든 걸 다 해낼 수는 없어. 하지만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멋진 이야기가 되는 거야.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고, 방금 전의 슬픈 기분을 다시 각자 삼켰다.


벨라

현실과 이야기는 달라, 매번 주인공처럼 쓰러지고 일어설 수 있는 게 아니야.


슈렉

알고 있었구나? 난 네가 좋아하는 책처럼 '어려움은 자신을 연마할 뿐이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줄 알았어.


벨라

어려움은 항상 파괴적이지. 다만, 나는 그것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고 싶어.


슈렉

내키지 않는 자기 위안일 뿐이야.


벨라

자기 위안이 나쁠 건 없어. 사람은 원래 자기 자신을 잘 다스려야 하니까.


벨라

처음에 만났을 때 너는 그렇게 쉽게 웃고 다녔으면서 지금 네 표정을 봐봐. 그건 바로 너 자신을 위로할 수 없기 때문이잖아.


슈렉

여태껏 굳은 얼굴을 한 주제에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는 아니잖아.


벨라는 냉소를 지었다.


벨라

그날 열차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너를 이렇게 만들었니?


슈렉

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충분히 들었잖아?


벨라

그건 그들의 이야기야. 네 것도 아니고, 슈렉이라는 이름조차 네 이름도 아니지.


슈렉

진짜 이름이라는 게 꼭 의미가 있는 걸까?


벨라

물론이지. 이름은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의미해.


슈렉

때로 어떤 과거는 번거로움만 더할 뿐이야. 나는 어디를 가든 남들에게 자신을 설명하고 증명하고 싶지 않아.


벨라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네가 아직 과거와 화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


슈렉

...


슈렉

내가 과거와 화해해도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 게다가 너도 나에게 말하지 않은 일이 많이 있을텐데.


벨라

너도 안 물어봤잖아.


슈렉

그럼 지금 물어볼게, 말해줄 수 있어?


벨라

못해.


슈렉

나도 마찬가지야.


벨라

...


벨라

파트너로서 서로 소통하지 않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슈렉

예전처럼 지내면 안 될까? 어쨌든 책 얘기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벨라

그런 걸로 서로 통할 수 있을까? 너는 자신의 한을 뛰어넘는 법을 배워야 해.


슈렉

이 점은 너도 마찬가지겠지.


벨라

나에겐 시간이 필요해.


슈렉

고맙구만, 나도 마찬가지야.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벨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화제를 바꾸었다.


벨라

오셀람 호로 돌아갈 예정이니?


슈렉

돌아가서 뭘 하게?


벨라

하긴, 오슬란의 사람들이 아직 열차에 타고 있는 한, 돌아갈 수 없겠지… 그럼 계속 나랑 같이 행동하지 않을래?


슈렉

넌 어디로 갈 건데?


벨라

잠시 머물다 새로운 거취를 생각해 볼 생각인데, 어차피 어디를 가도 지금보다 더 나쁘지는 않겠지.


슈렉

인생의 난관을 헤쳐 나가도록 내가 너에게 축복의 힘을 가진 이름을 지어줄게.


벨라

필요 없어.


벨라

인생의 밑바닥을 본 적이 있는데 예전보다 더 나빠질 것도 없어. 다음 번에는 분명 지금보다 더 좋아질 거야.



적조 환영

...


슈렉

하지만 어디까지 추락해야 바닥이 나오는지 누가 알겠어?


슈렉

꼭 수많은 재난과 재앙을 겪어야만 밑바닥인 것이 아니었어. 단지 우리와 같은 부랑자들을 경계하지 못하는 바람에, 너는 그대로 떠나버렸지.


슈렉

...


슈렉

고마워, 벨라.


슈렉

이 말은 원래 좀 더 일찍 했어야 했는데.


슈렉

내가 가장 막막할 때 네가 나를 찾아준 덕분에 이 길에 올랐던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어...


슈렉

가끔 정말 화나게 만들기도 했지만...그 점은 너도 마찬가지기도 했지. 하지만 널 다시 만날 수 있었기에 지금처럼 무사히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거야.


슈렉

그래서, 고마워...그리고 미안해...끝까지 너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어.


슈렉

'봄이 오면, 네가 좋아하는 꽃도 피겠지'라고 말할 때가 되서야 비로소 난 너에게 말하지 않았던 걸 깨달았어...


슈렉

...내 책 속에 끼어있는 배꽃잎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슈렉

우리는 항상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책에 대한 애착을 가장 중요한 화제로 삼을 수밖에 없었어.


슈렉

만약 너가 살아날 수 있었다면, 나와 함께 망각자의 교환 상인이 될 수도 있었겠지. 그리고, 언젠가, 솔직하게... 진정한 친구가 되었을지도 몰라.


슈렉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봤자 소용없겠지만.


슈렉

엄마, 레이첼 대장, 필드, 세나, 신야, 웨이란, 에드 할아버지, 힐 아주머니...열차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 한때 나의 동반자였던 사람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적조 환영

...오셀람 호로 돌아갈 예정이니?


환영은 여전히 벨라가 생전에 했던 말을 무질서하게 되풀이하지만 듣는 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오히려 익숙한 목소리로 잡담을 늘어놓았다.


슈렉

돌아갈 필요 없어.


슈렉

몇 달 전 망각자의 거점 근처에서 마이크를 만났고, 그는 신야도 그만 떠나버렸다고 말했어.


슈렉

그가 말하길...



일벌부대장 마이크

신야의 오랜 상처는 큰 후유증을 남겨서 요 몇 년 동안 밥도 점점 먹지 못했고, 지난달에는 그런 채로 잠이 들었다가 결국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게 되었어.


일벌부대장 마이크

그는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또 내가 아딜레를 떠날 준비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네 물건을 본인에게 돌려주라고 내게 부탁했었지.


일벌부대장 마이크

그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열차에서 너를 도와 이 물건을 보관해줄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었어.


마이크는 눈에 익은 배낭 하나를 던졌는데, 안에는 노안이 남긴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가 즐겨 쓰는 단검, 레이첼이 선물한 무기 설계도, 필드의 노트, 반쯤 읽고 책갈피가 끼워놓은 만화책이었다.


일벌부대장 마이크

원래 사탕도 가져다주고 싶었는데 도중에 잃어버렸지, 에휴.


노안

사탕?


일벌부대장 마이크

너의 11번째 생일날 내 조카에게 자신의 생일날 사탕을 주었잖아.


노안

엄청 옛날 일이었는데...



슈렉

그에게 오셀람 호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보고 오슬란이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슈렉

열차에서의 많은 것들이 점차 나아지고 있어. 어쩌면 몇 년 뒤면 너의 어머니가 고대하던 학교도 정말 하층칸에 세워질지도 몰라.


슈렉

그는 우리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했었지...


청년은 고개를 돌려 생각에 잠긴 듯 옆에 있는 셰퍼드를 어루만졌다.


슈렉

그는 아딜레를 떠나 새로운 여행길에 오르기로 결심했어.


슈렉

나도 그래...네가 간 후, 나는 외과 의학을 독학으로 공부했어. 아직도 모르는게 많지만...


슈렉

조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예전처럼 사람들 속에 남아있고 싶어.


슈렉

그래서 나는 망각자와 제휴를 맺었고, 교환 상인이 된 거야.


슈렉

그러나 풀리아숲 유적의 그 재난 이후 적조는 다시 도시를 뒤덮었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어.


그는 적조 속의 환영을 보며 잠시 침묵했다.


슈렉

희망이 막연해도, 목숨을 바치더라도, 항쟁을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열차에 살던 사람들이 떠올랐어.


슈렉

...


슈렉

오셀람 호를 떠난 뒤에도 나는 내 선택과 혁명의 결과에 대해 혼란스러워했어.


슈렉

모두가 바라는 미래가 실현됐다고 해서 그들이 사라진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슈렉

그런데 재난을 위해 싸우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날만큼은 오슬란에게 단말기를 맡기지 않은 것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지.


슈렉

타협은 그들에 대한 배신이고, 그것은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어버려.


슈렉

네가 말한 것처럼, 따뜻한 봄이 곧 찾아올 거야...


슈렉

다만…엄동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 자신의 영혼을 불태워 눈과 얼음을 녹였기 때문이겠지.


노안은 고개를 들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슈렉

이런 환경 속에서 매 순간마다 재난에 맞서 싸우다 죽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의 목숨으로 하여금 방어선을 만들어 놓았기에 홍수가 나지 않은 거야.


슈렉

또다시 똑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면, 나는 과거와 똑같은 선택을 하겠지.


슈렉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내게 맡긴 모든 것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들과 똑같은 선택을 해서 미래로 가는 티켓을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싶기 때문이야.


슈렉

안녕, 벨라. 성냥을 데리고 망각자의 거점으로 갈게. 그들은 내가 혈청을 보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어.


슈렉

지인의 목소리가 들려 반가웠지만, 적조를 보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해.



그래, 기억난다.


045번 보육구역, 그레이 레이븐 소대, 그때까지 혼수상태였던 지휘관…. 그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망각자들을 따라 다시 열차로 돌아올 때, 나는 확실히 똑같은 선택을 했다.


그 소년 구조체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자밀라는 기억하고 있었다...



후회는 없다...


ㅡㅡ평생 많은 생명을 구했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싶었다.


ㅡㅡ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ㅡㅡ우리의 죽음과 부패는 결코 공허가 아니라 어둠을 밝히는 불길로 변한다.


ㅡㅡ이 빛은 반딧불이처럼 연약해도 희망의 끈을 당기기에 충분하다.



잠결에 답을 찾은 청년은 차츰 눈을 떴다.


모든 기억이 그의 가슴으로 돌아왔고, 몸이 갈라지고 속박으로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하게 되어도 청년은 더 이상 헤매지 않을 것이다.



전투 개시




눈을 뜨다


시각 모듈 교정 중>>>>> 58.21%

기체손상>>>>41.79%



노안

...기체 일부가 복원된 것 같군.


노안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노안

이곳은...뭔가 익숙한걸...



일어서기



앞으로 이동


노안

매번 기억을 잃기 전…. 나는 혹사에 의해 이곳으로 끌려왔었어.


노안

거점 중 하나였을 텐데, 내 기억으로는 등대였던 것 같은데?


노안

잠깐만, 이번에는 기억을 잃지 않았어.


노안

그가 미처 손을 대지 못한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노안

지금 당장 여길 떠나자...




기체 긴급 재가동 완료



혹사

너는 지금 깨어나면 안 돼.


노안

혹사?


혹사

선생님은 그 소대를 처리하기 위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셔. 나는 지금 널 데리고 갈 여유가 없어.


노안

그 소대를 처리한다고? 또 무슨 짓을 할 생각이지?


혹사

그런 걱정 하지 말고 얌전히 여기에 있어.



노안

아래는 온통 침식체 투성이니까 일단 올라갈 수밖에 없곘군.


등대 위층으로 가기


혹사

그렇게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거야!




등대 위층으로 가기

의식의 바다 침식에 주의하라



혹사

여기에 머물라고 말했어!



혹사

네가 어떻게 해서든 말을 듣고싶지 않다면,


혹사

이번에야말로 너의 의식의 바다를 완전히 갈아버리겠어.


노안

하지만 항상 너의 뜻대로 되지 않을 거야...!


노안

내가 되찾은 기억은 과거뿐만 아니라 너에게 대항한 경험도 있었어!


혹사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해봐.



전투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