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깨어났을 때 비앙카는 곁에 없었다.


텐트에서 나왔을 때 비앙카가 창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고 안개 낀 하얀 빛이 유리를 뚫고 나와 밖을 내다보는 그녀의 옆얼굴을 비추었다.


그녀의 손은 창가를 부드럽게 지탱했고, 그녀의 굳건한 자태는 마치 세상과 독립된 조각상 같았다.


자신의 동작이 공기 중의 정적을 깨뜨릴 때가 이르러서야 그녀는 비로소 먼 곳에서 시선을 돌려 자신을 향했다.



비앙카

일어나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지휘관님.


지휘관

비앙카, 좋은 아침.


비앙카

눈보라도 이미 그쳤습니다.


비앙카는 자신이 창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자리를 양보했다.



푸른 하늘은 화폭에 흩뿌려진 수채화와 같이 층계가 뚜렷했고 온통 새파랗다.


새하얀 대지는 지평선의 끝까지 뻗어 있다.


끝없는 흰색과 깊은 푸른색, 두 가지 색깔이 세계의 전경을 이루는 듯하다.


비앙카

이렇게 빨리 개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저희의 진척도가 오래 지체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비앙카

텐트에 있는 주방기구와 냉동식재료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만들었지만, 지휘관님께서는 차량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해 여전히 불만스러우시겠죠.


지휘관

차?


창밖을 다시 바라보니 눈밭에 빠졌던 탐사차량이 이제 과학연구소 밖 공터에 굳건히 주차돼 있었다.


비앙카

지휘관님께서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을 때, 약간의 시간을 들여 탐사차량을 몰고 돌아왔습니다.


비앙카

한두 시간 정도 걸렸지만 구조체로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제서야 비앙카의 머리카락에 눈송이가 조금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아마 탐사차량을 옮기는 작업 중에 생긴 흔적일 것이다.


지휘관

(손을 내밀어 비앙카 머리 위의 눈을 털어준다)



비앙카

지휘관님?


비앙카

아...죄송합니다. 몸가짐을 정리하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지휘관

나를 깨워서 도와 달라고 해도 돼.


비앙카

그런 생각도 했었습니다.


비앙카

그러나 지휘관님이 그렇게 편안하게 잠든 모습을 보고 차마 깨울 수 없었습니다.


비앙카

당신은 어젯밤에 너무나 많은 체력을 소모했습니다. 다음 임무를 고려해 볼 때 당신도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비앙카

이것은 구조체인 제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니 지휘관님께서는 중요한 순간에 온 힘을 다하시면 됩니다.


비앙카

결국, 지금 저희 '둘'이 함께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휘관

...너의 말이 맞아.


비앙카

그럼 출발합시다.



텐트를 치운 뒤 탐사차량에 다시 시동이 걸렸다.


비앙카가 자신을 위해 요리한 옥수수 수프가 담긴 찻잔을 들어 올리자 주변 순백의 설원으로 시선이 쏠렸다.


눈보라에 가려졌던 남극의 광경이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눈에 들어왔다.


북극항로연합이 뿌리내린 북극권과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인지역이다.


인기척도, 분란도, 바이러스도, 전쟁도 없다.


인류와 퍼니싱의 대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 지구의 경치가 본래 이렇게 고요하고 무구했음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흰색 너머에 여전히 흰색이 있었다.


비앙카

지휘관님, 커피도 있습니다. 물론 인스턴트지만요.


비앙카는 한 손으로 보온병을 집어 옆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지휘관

고마워.


보온병을 건네받아 뚜껑을 열었다. 커피 특유의 진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어쩌면 황홀경 사이사이로 스쳐가는 황당무계한 생각일지 모른다.


어쩌면 이 끝없는 순백이 불러일으키는 착시일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자신은 끝없는 설원 위의 여정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앙카

지휘관님, 준비하세요. 1킬로미터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설정한 목적지에 곧 도착할 것입니다.


남극의 풍광에 젖어 있던 정신은 비앙카의 부드러운 한마디에 다시 돌아왔다.


지휘관

(끄덕)


마지막 한 모금의 옥수수 수프를 마시고,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모든 불필요한 감정을 뇌 밖으로 내보냈다.


알 수 없는 환경의 신선함이 한때 주의를 현혹시켰지만 자신 역시 이번 여행의 진정한 목적을 잊지 않았다.


멀리 극지탐사대가 주둔하던 과학연구소가 보일 듯하자 비앙카에게 손짓으로 탐사차량을 눈 덮인 바위 그늘 뒤에 세워두도록 하였다.


지휘관

여기서부터 걸어가자.


비앙카

이해하였습니다.


비앙카는 차에서 내리는 김에 이 기체의 전용장비인 검장을 운전석에서 꺼냈다.


지휘관

(총알을 장전한다)


군말 없이 눈빛과 최소한의 제스처만으로 전술적 선택을 주고받은 뒤 자신은 비앙카의 뒤를 따라 과학연구소로 다가갔다.


어젯밤 자신이 머물렀던 연구소와 외관은 비슷했지만 새어나오는 불빛과 작동 중인 환풍기를 보면 분명 누군가가 장시간 사용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구소 정문에 가까워질 때까지 매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문을 나서는 순간, 방 안에서 아련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사람 소리)

그럼 내가 여기서 '혁명'을 일으키면


비앙카

'혁명'...?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이상한 직감을 비앙카에게 전달하기도 전에 희미한 빛을 감싼 검장을 두 번 휘둘렀고, 에너지의 폭발로 금속으로 주조된 문 전체를 쪼개 날려버렸다.



비앙카

모두 무기를 버리세요!


그녀는 수년간 정화부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목소리로 인원 수를 판단한 뒤 먼저 이 과학연구소 내 모든 사람을 무력으로 제압하기로 결정했다.



탐사대원A

모든 점수가 거꾸로 되는 거지ㅡㅡ으악! 뭐야!?


홀에 앉아 있던 탐사대원들이 고개를 들고 있는 가운데,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문짝의 굉음과 함께 풍압이 강하게 일었고, 동시에 그들이 탁자 위에 깔아놓은 카드 더미도 날아갔다.


비명을 지른 대원의 손에는 클로버 7 카드 네 장이 쥐어져 있었고, 문을 박차고 들어온 비앙카와 자신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모로 보나 이들은 임무 브리핑에 묘사된 것처럼 반란이나 실종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비앙카

이게...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를 본 비앙카도 탐사대원들과 비슷한 눈빛을 드리우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집중력 때문에 안 그래도 원래 팽팽했던 몸이 더욱 뻣뻣해졌다.


탐사대원B

너, 너희들은 공중정원에서 파견된 사람들이야...?


비앙카

공중정원의 정화부대입니다. 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비앙카는 패닉에 빠진 비무장상태 탐사대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나서려고 하는 것처럼 한 걸음 물러섰다.



비앙카

지휘관님, 여기서부턴 당신이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원들이 '정화부대'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모두들 자신도 모르게 냉랭한 기운을 들이켰다. 오랜 세월 세상과 단절된 이들 구조체도 정화부대의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비앙카와 눈빛을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탐사대원A

배, 배반? 어떻게 그런짓을 합니까?


탐사대원B

저희 모두는 이곳에 여러 해 동안 주둔하고 있었고, 게다가 저희는 과학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구조체이기 때문에, 변혁을 꾀할 능력이 없습니다.


비앙카

하지만 공중정원이 남극으로부터 수상한 통신 한 통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탐사대원A

통신...? 잠깐...


탐사대원B

혹시...설마...?


몇 명의 탐사대원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낮은 소리로 몇 마디 주고받았다.


결국 그들 중 가장 리더다운 기질을 가진 구조체가 앞에서 정중하게 자신에게 설명했다.



탐사대 소대장

죄송합니다. 보아하니 저희와 공중정원에 약간의 오해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탐사대 소대장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저희 마음속에 한 가지 짐작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탐사대 소대장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고,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더 직관적일 것 같습니다.


탐사대 소대장

그러니, 우리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현장에 도착한 후에 다시 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비앙카

지휘관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화부대의 임무였지만 비앙카는 지휘권을 자신에게 넘겼다. 극지탐사대의 말을 따를지 여부는 결국 자신의 판단에 달려 있다.


지휘관

...그럼, 길을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든, 어떤 인상을 주든 간에 자신은 정말로 눈앞에 있는 무리와 '반역자'를 연결할 만한 매개를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관찰 결과 구조체는 상당히 초기 모델이었고, 몸에 아무런 제식 무장도 없었고, 머릿수가 두배로 불어나도 최신 특화 기체를 갖춘 비앙카가 혼자서 쉽게 제압할 수 있디.


이들의 제안을 수용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다.


탐사대 소대장

알겠습니다.


비앙카가 부숴버린 문을 간단히 처리한 후 대장은 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장비를 정비하고 출발 준비를 했다.



탐사대 일행을 따라 과학연구소의 차고로 내려갔는데, 이곳에 보관된 대형 탐사차량은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을 태우기에 충분했다.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자신이 운전석에 앉았고 조수석 소대장이 자신의 진행 좌표를 설정해줬다. 탐사대에 대한 최소한의 경계이기도 하고, 만일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최소한 핸들은 자신의 손에 쥐고 있을 것이다.


두 탐사대원은 가운데 좌석에 배치됐고 비앙카는 맨 뒷줄에 앉아 대원들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탐사차는 새로운 방향으로 달려갔다. 인원은 늘었지만 분위기는 자신과 비앙카 둘만 있을 때보다 더 조용했다.


정화부대가 갑작스레 등장하면 긴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있어 비앙카는 조금이라도 거동이 수상해 보이면 가차없이 목을 베어버릴 것처럼 보였다.


내재적 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차치하더라도 후속 정보 교환에 불필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은 차 안의 분위기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 앞장서서 말을 건네고자 했다.


지휘관

공중정원이 건립된 이후 당신들은 줄곧 여기에 있었나요?


탐사대 소대장

아...정확히는 예술협회의 고고학 원정대가 결성된 직후였습니다.


탐사대 소대장

하지만 예술협회의 관할이라도 저희의 업무는 예술협회의 취지와는 별 관련성이 없죠.


탐사대 소대장

인류문명이 탄생하지 않은 남극에서 탐사대가 한 일은 지구의 생태변화와 미지의 종을 탐사하는 것, 기타 등등….


탐사대 소대장

예를 들어…남극의 장기기후 데이터를 통해 다음 단계에서의 지구 기후 변화의 총체적 추이를 보다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결국 황금시대에서의 지구온난화는 이미 수년간 인류를 괴롭혀온 환경문제였었죠.


탐사대 소대장

또 예를 들면...남극 생물권의 먹이사슬 시스템을 장악한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순환 가능한 자원 어획 체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공중 정원...더 나아가 전 인류의 물자 부족도 상당 부분 개선될 수 있을 것입니다.


탐사대 소대장

많은 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임무라고 말하고 싶지만…. 공중정원의 자원은 대부분 지구의 잃어버린 땅을 탈환하는 데 쏟아부어야 하는 실정입니다. 과학이사회가 아닌 예술협회가 탐사대 활동을 맡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탐사대원A

저희가 하는 일이 퍼니싱 소탕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히는 상부에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탐사대원B

정밀기기 관련 물자 신청은 최소한으로 유지하고, 탐사대원 기체들의 상당수는 오랫동안 공중정원에서 정비를 받지 못했었죠.


탐사대 소대장

사실상 방치된 상태라고 할 수 있겠죠...하하. 가끔 공중정원이 저희들을 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답니다...



비앙카

이 점에 대해서는 제가 여러분께 보증할 수 있습니다.


비앙카

공중정원은 결코 당신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비앙카의 말은 소대장의 서글픈 자조를 끊었다.


비앙카

당신들이 보낸 메시지를 받은 지휘센터는 즉시 최우선적인 속도로 저와 지휘관님을 보내 조사를 실시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비앙카

반란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희는 '숙청'만을 위해 온 것은 아니며, 만일 남극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했다면, 저와 지휘관님이 가장 먼저 여러분을 구원할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휘관

저희는 그 어떤 동포도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탐사대 소대장

하하...그렇군요.


탐사대 소대장

이것이 단지 인사치레인지 모르겠지만, 직접 당신들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약간 위안이 됩니다.


탐사대원A

저기, 당신...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이죠?


지휘관

저를 알고 있었나요?


탐사대원B

하하...실은 당신이 들어왔을 때 전부 알아봤습니다.


탐사대원B

매달 정기 통신 때마다 공중정원에서 전선 전장에 대한 브리핑이 오는데…. 그게 저희가 지상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탐사대원B

그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진과 이름이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이었죠.


탐사대원A

저희가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인간과 퍼니싱의 전쟁에 가장 관심이 많거든요.


탐사대원A

탐사대원들은 집행부대의 행적을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를 두고 논쟁하는 데 쓰지만….


탐사대원A

공중정원 신세대의 전설을 직접 볼 날이 있게 될 줄이야...하하하.


지휘관

(1)저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하지 않습니다...

(2)그것들은 모두 저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탐사대원들은 자신이 신분을 인정하는 것을 보자 하나둘씩 흥분했다.


탐사대원B

구룡의 방어전에 참가하였다면서요? 당시의 그 전투는 도대체 얼마나 컸던 겁니까? 공중정원뿐 아니라 거의 모든 지상세력이 참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탐사대원B

그리고 풀리아 숲공원의 그 전투는 너무나 참혹했다고 하던데….


탐사대원A

저희의 최신 특화 기체가 정말 퍼니싱을 흡수할 수 있습니까? 달의 영점 에너지 엔진 폭주 사태를 해결한 카레니나라는 구조체는 또 어떤 자입니까?


세상과 단절된 지 너무 오래됐으니 불가능해 보이는 작전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자신에게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이 대단했다.


탐사대와 잡담을 나누는 사이 탐사차량도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휘관

저건...


주변에 기억에 남는 이정표가 없어서 탐사대가 주둔하고 있는 과학연구기지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빙하를 지나고 또 지나서 영구동토의 호수를 넘었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끝없이 반복되는 풍경 뒤에는 깜짝 놀랄만한 인공 경치가 숨어있었다.


수많은 유빙이 떠다니는 만에서...


배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