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짜는 일종의 낙인처럼, 이 숫자들의 조합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의 장면들과 은은한 아픔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문.


어둠 속에서 문이 나타났다.


나는 그 문이 매우 큰 소리를 내며 닫힌 것을 기억한다.


???

넌 정말이지...실망스럽구나.


???

...


???

이런 짓은 자신의 가치를 낭비할 뿐이야.


???

...다른 이의 노력을 무시하지.


???

...


???

흥. 네가 지금처럼 행동하면 아무도 진심으로 너와 함께 있고 싶지 않을 거야.


???

...


???

가게 둬!


손에 든 단말기가 통신음과 함께 규칙적으로 켜지며 아직 막이 오르지 못한 꿈을 꺾어버렸다.



바네사

...


바네사

잠이 들다니.


심각한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성가신 생명의 별 의사는 관찰을 위해 보름간 더 입원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었다. 이제 드디어 낯설고 조금은 익숙해진 그 병실을 떠날 수 있는 셈이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부대에 복귀한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 아무런 전투임무도 받지 못했다.


세상이 너무나 태평해진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 근무시간을 요양을 위한 장소로 바꿔놓는 것 따위의 따분한 고려를 했을 것이다.


바네사는 자세를 가다듬고 쉬다가 헝클어진 머릿결을 빠르게 정리하며 근무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모든 준비가 다 된 후에 바네사는 통신을 연결했다.



참모부 산하 일원

청정백로 소대의 지휘관 바네사 씨인가요? 지금 소대원의 보충에 대해 논의해도 괜찮겠습니까?


바네사

말하세요.


참모부 산하 일원

소대원 보충 신청을 아직 받지 못했는데, 절차상에 어떤 문제라도 생겼나요?


바네사

앞서 보내주신 후보 명부를 봤지만, 테슈를 대체할 만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참모부 산하 일원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적임자가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엘리트 소대 대원자리가 잠깐 공석으로 남을 텐데 과연 괜찮겠습니까?


참모부 산하 일원

물론 소대 지휘관을 기준으로 결정하되 임무의 난이도와 특수성 등을 고려해 적합한 대원을 임시로 선택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바네사

고려해보죠.


참모부 산하 일원

밤비나타는 어떤가요? 어제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바네사

예전과 마찬가지로 외장 메모리 모듈에서 다시 읽으면 됩니다.


바네사

전투 데이터는 외장 메모리 모듈에 기록돼 있어 전투 성능에 영향을 주지 않죠.


바네사

통신이 끝나면 다시 한번 밤비나타의 상태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참모부 산하 일원

기량을 의심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지상의 상황이 여전히 긴박해 조만간 임무가 부여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참모부 산하 일원

청정백로소대가 당분간 충원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기존 대원의 컨디션을 보장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귀하의 안전을 위한 것입니다.


바네사

알았어요.


통신이 두절되자 바네사는 수십 명의 교체 대원들의 자료가 담긴 단말기를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구조체의 얼굴과 자료가 촘촘하게 표시돼 있는데 화면이 어두워지면서 내용을 보기 어려워졌다.


상대방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테슈의 이탈로 인해 현재 청정백로소대에는 구조체 밤비나타 혼자 남아 있어 전술 수행이나 전투 강도 등에 많은 제약이 걸렸다.


지휘관으로서 바네사는 사실 그보다 훨씬 일찍 이 상태를 예견했었다. 대원 보충 신청을 미루고 있는 것은 모두 아직 답을 얻지 못한 어느 한 사람의 당혹감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충성스런 장난감을 구할 수 있을까?


수석이 활용하는 소위 선의의 발휘라는 그 어리석은 방법은 분명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ㅡㅡ그런 비이성적 행태와 우스꽝스러운 가치 잣대로 '따뜻한 집'을 지어낸 것일까?


모두가 밤비나타처럼 자신의 명령에 완전히 복종하면 일은 훨씬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결국, 어째서 인형은 자신의 생각을 가지려 하는 걸까?


그래서 스스로 사지로 향하더라도 탈주해야만 했던 걸까?


테슈가 바닷가에서 발걸음을 멈추기 전까지, 자신이 묻고 싶던 말이었지만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었다.


못다 한 꿈을 생각하니 저절로 조바심이 싹트기 시작한다.


바네사

정말...빌어먹을 꿈이네.



밤비나타

주인님...오늘 어디 편찮으십니까?


표정과 옷차림이 평소와 다르지 않고 걸음걸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주인의 짜증이 그녀의 은은한 향기와 뒤섞여 공기 중에 서서히 퍼졌다.


푸른색 생체 공학 동공은 주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세히 관찰하며 고민의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바네사

기체는 별 문제 없어?


밤비나타

외장 메모리 모듈의 메모리 데이터를 읽었습니다. 데이터 동기화 범위는…


바네사

직접 검사하지.


밤비나타

네, 주인님.


바네사는 밤비나타의 외장 메모리 모듈을 단말기에 연결해 메모리 데이터에 다른 부분이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바네사

전투 데이터 판독 속도가 이전보다 느려졌군…. 지상에 머무른 시간이 너무 길어서 유지 보수 간격이 너무 컸나?


밤비나타

밤비나타는 적시에 발견했어야 했습니다...죄송합니다...


바네사

잠시 후에 아시모프 쪽에 가서 외장 메모리 모듈을 검사해 봐. 내가 추가 신청서를 제출하지.


밤비나타

네.


밤비나타의 '기억상실증'은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구조체의 개조수술은 초기에 비교적 큰 위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결과는 종종 기체가 활성화된 직후에 나타나곤 했다.


학계에서는 밤비나타처럼 오랜 시간 안정상태를 유지하다 갑자기 간헐적으로 기억 데이터를 환기하지 못하는 사례를 이례적으로 여겨 가치있는 연구 대상으로 보았고, 특히 의식의 바다 분야에 몰두하고 있는 일부 구조체 연구자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전황이 점점 심각해지면서 당분간 공략할 수 없는 구조체의 병증과 잠재적 문제는 제쳐두고 당분간 유지보수 조치를 통해 연구 대상자들이 정상적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시모프는 바네사가 밤비나타를 소대에 합류시킨 이후 밤비나타의 기존 기억보조장치를 업그레이드하면서 기본 데이터를 내장했다. 언제 발병하더라도 밤비나타는 전투에 지장을 받지 않고 중요한 정보를 즉시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전투와 임무에 필요한 내용 외에 외장 메모리 모듈이 밤비나타의 기억을 무제한 저장할 수는 없다. 용량이 상한에 도달하면 갱신된 데이터가 기입됨에 따라 최초의 부분은 소실된다.



아시모프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야. 개인적으로는 '그 실험'의 후유증일 수 있다고 추정하지만, 지금 내 손에는 실험의 상세한 데이터가 없어 더 정밀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


아시모프

밤비나타의 문제는 역원 장치가 어떻게 그녀의 의식의 바다의 충돌을 유발하는 것이고, 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시모프

하지만 역원장치 원리에 대한 연구는 아직 모색 중이라 현재의 조건에서 올바른 회피 방법이나 해결책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아시모프

역원장치의 비밀이 풀리면 거부 반응과 관련된 이론의 판을 보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바네사

...


아시모프

단 하나의 희소식은, '기억상실'의 본질이란 데이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 데이터가 의식 속으로 빠져들어 스스로 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로 기억나지 않는 일이 많지만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지.


아시모프

즉,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면 이론적으로 모든 과거 기억 데이터를 회상할 수 있음을 의미해.


바네사

그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현 상황에서의 가장 적합한 처리 방식이라면, 우선 그렇게 하죠.


바네사

그다음은...구조체가 말을 잘 듣기만 하면 상관없습니다.


바네사

그렇지, 밤비나타?



바네사

기억 데이터의 일관성...문제 없어. 데이터 시작일은...


바네사의 손가락이 한순간 끝자락에서 뻣뻣해졌다.


그 날짜는 일종의 낙인처럼, 이 숫자들의 조합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의 장면들과 은은한 아픔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약동하는 적조, 지하실에 누워있는 폐인이 된 수석과 부상당한 기체를 끌고 다니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


형언할 수 없는 강요가 그녀가 단말기를 클릭해 기억 데이터를 재구성하도록 만들었다.


의식 정경 구축 중>>>100%

메모리 데이터 재현 중 >>>>>>100%



이합생명체

!!


밤비나타

이곳을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네사

후우...그레이 레이븐, 그들이 떠난 지 얼마나 되었지?


밤비나타

적과 조우한 이후, 총 1시간 45분 되었습니다ㅡㅡ


바네사

두 시간도 되지 않았다고?


바네사

큭, 끝이 없네...결국 나도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니ㅡㅡ


이합생명체

지이익ㅡㅡ


밤비나타

조심하세요!!


밤비나타는 바네사를 향해 옆에서 돌진한 적들을 정리하기 위해 몸을 돌렸고, 틈을 내준 순간 원래의 위치는 돌진하는 적에게 점령당했다.


부상당한 바네사는 체력의 한계에 다다랐고, 밤비나타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고 다른 한 손으로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파손된 단거리 비행체에 폭발물을 부착해 눈앞에 있는 적들을 소탕했었다. 그러나 이합생명체는 동족의 사지를 밟고 빠르게 솟아올랐다.


싸우며 후퇴하는 두 사람에게 선홍색 조수이 길모퉁이에서 그녀들을 에워쌌다.


밤비나타는 바네사를 파편 뒤에 기대게 하여 최대한 힘을 절약하게 만들었다.



밤비나타

밤비나타는 준비되어있습니다.


밤비나타

주인님이 기력을 찾을 때까지, 주인님이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밤비나타는 끝까지 버텨낼 것입니다.


밤비나타

이 발신기로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게 연락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시동기와 약과 혈청도 여전히...여기에 있습니다.


주인이 움직이지 않자 밤비나타는 바네사의 손에 시동기를 살포시 얹었다.


밤비나타

'비밀병기'는 오래전부터 굳건했습니다. 주인님이 자주 활용하는 딜레이 모드로 설정돼 있습니다. 시동 이후, 밤비나타는 5초의 지연 시간동안 발파 방향을 조정합니다.


밤비나타는 팔을 들어 바네사에게 기체에 부착된 폭발물을 보여줬다.


폭발물이 놓인 위치는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고, 극한 상황에서 밤비나타는 파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도 순간적으로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순간, 독실한 신도는 유익한 가치를 더 크게 확장할 수 있게 된다.


이합생명체

캬악ㅡㅡ!


밤비나타

!!


밤비나타는 몸을 돌려 방어선을 다시 밀어내려 했다. 작은 몸이 붉은 물결 속에서 춤을 추는 모습은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한 송이의 물보라와 같다.


피로와 고통을 외면할지라도, 그 몸으로 재앙의 파도를 완전히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바네사

지금까지 시간을 끌었으니, 그레이 레이븐 녀석들은...


바네사

살아남아 나에게 구원받은 대가를 제대로 짊어지는 것이 최선이지.


바네사는 똑바로 앉으려 했지만 상처에서 오는 통증으로 자세를 바로잡을 힘이 없었다.


바네사

...



리브

우리는 함께 단결하여 수많은 난관을 뛰어넘고, 결코 어려움과 두려움 때문에 전쟁터에서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그때 리브의 말이 떠올랐고, 바네사는 적조에서 푸른 모습을 보며 좀처럼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바네사

밤비나타...


바네사

이제....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직 굳지 않은 피가 묻어있는 시동기가 바네사의 손에서 떨어졌다.


바네사

...샤워라도 제대로 하고 싶으니까...적어도 이렇게 헛수고할 필요 없어...


밤비나타

필요 없지 않ㅡㅡ


이합생명체

!!


밤비나타

윽!


밤비나타가 방심하는 순간 몸에는 무시무시한 상처가 여럿 생겼다. 바네사의 정교한 손질 없이는 지금 그녀는 버려진 낡은 장난감처럼 보인다.


부서진 인형은 쓸 수 있는 기체 계산력을 총동원해 어떻게 해야 주인에게 한 가닥의 생기를 줄 수 있을까를 재빠르게 고민했다.


자신을 카드와 수단으로 삼는 다양한 방안이 추진됐지만 밤비나타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답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무의미한 '비밀병기'.


무의미한 카운트다운.


무의미한 사투.


무의미한...기체.


이합생명체는 눈앞의 기체가 왜 행동이 느려졌는지 고민하지 않았고, 그들이 행하는 것은 단지 상대방을 갈기갈기 찢는 것뿐이었다.


이합생명체

지이익ㅡㅡ


물에 잠기기 1초 전, 밤비나타 앞에 있던 이합생명체는 예고 없이 쓰러졌다.


곧이어 가장 주변의 차례였다. 그리고 더 멀리 떨어진 적이 공격 의욕을 잃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멈춘 공세 속에 훤칠한 모습 하나가 햇빛을 거스르며 그녀들을 향해 다가왔다.


???

...임시 권한으로도 그런게 가능했나?


밤비나타

테슈...


밤비나타의 이름을 듣고 혼수상태에 빠진 바네사는 애써 눈을 떴다.


바네사

...?


거의 멈춰있던 뇌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이합체의 물결 깊은 곳에서 나타난 이 모습을 다소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구조체는 적조에 휩쓸렸을 수도 있고, 비겁함을 발휘해 전장에서 혼자 살아남을 수도 있지만 어느 소대의 지휘관이든 가장 원치 않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반대편에 서게 되는 것이었다.


잠시 놀란 바네사는 눈앞에 있는 자가 더 이상 자신의 '장난감'이 아니라는 것을, 그를 대하는 방식은 한 가지밖에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바네사

흥...네 이전 주인을 가까이에서 비웃기 위해 잡졸들을 제지한 건가?


바네사

아니면, 너도 이제 인형 다루는 맛을 깨달아…. 일부러 나랑 교류하러 온 거야?


테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바네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밤비나타가 그녀의 팔 바깥쪽에 달린, 적을 무자비하기 베어내는 맨티스 블레이드를 들어올릴 때까지.


밤비나타

테슈, 갈 수 없습니다.


바네사

오라고 해. 날 죽일 생각이었다면 나타날 필요도 없지.


바네사

충성을 다하지 못하는 인형이 마지막으로 어떤 고견을 말하는지 들어보고 싶거든.


밤비나타

하지만...


바네사

밤비나타, 오게 냅둬.


밤비나타

네, 주인님...



밤비나타는 바네사를 향해 질주했다. 그녀는 바네사의 손을 잡고 앉아 테슈에 대한 적개심을 늦추지 않았다.


테슈는 여유롭게 앉아 옷가지에서 깨끗한 붕대와 약 한 통을 꺼내 바네사의 왼쪽 눈 거즈를 다시 갈았다.


붕대 끝을 능숙하게 고정시키고 테슈는 빈 붕대통을 바네사의 머리맡에 놓았다.


빈 통이 바닥에 닿자 '쾅'소리가 울려퍼졌다.


테슈

이것은 공중정원에서 가져온 마지막 물자다.


테슈는 바네사의 눈을 마주쳤고, 그의 말에는 어떠한 감정의 기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피바다에 빠진 시동기를 주워 들고 바네사의 기억 속 모습을 흉내 내며 손에 쥐었다.


바네사

ㅡㅡ!


테슈

나는 줄곧 네가 누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슈

돌이켜보니, 네가 매번 시동기를 눌렀을 때의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지.


테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미끼가 될 차례가 됐을 때 어떤 표정을 지으며 버튼을 누를지 상상하곤 했다.


테슈

하지만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ㅡㅡ아무런 표정도 없었겠지.


테슈

내가 너의 웃는 얼굴, 농담, 비꼼, 혹은 만족하는 모습을 증오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주인'이 소유물에 주는 피드백이다.


테슈

그러나 '소유물'들이 산산조각이 나자, 너는 좋은 연극을 본 웃음조차 주기 싫어했다.


테슈

너에게 있어 그들은, 아니, 우리는 그런 존재였다. 살아 있을 때는 장난감처럼 휘둘리지만, 녹는 순간만큼은 '물건'으로서의 존재의미조차 박탈당한다.


바네사

...


테슈

아마도 밤비나타는 네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가 그녀를 파괴할 때 어떤 모습일지 기다리고 있다.


테슈

네가 가장 좋아하고 말을 잘 듣는 '장난감'을 죽이고 난 뒤, 내가 직접 널 죽이겠다.


밤비나타

당신의 행위를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테슈!


테슈는 밤비나타를 바라보며 여전히 시동기 버튼 위에 손가락을 부드럽게 펴고 있었다.


바네사는 냉소를 지었다. 오만했던 자는 이제는 멸시받는 자가 되었지만, 그녀의 오만함은 반도 줄어들지 않았다.


바네사

역시 내가 가르쳐준...하...너의 나쁜취미는 칭찬받을만해.


바네사

그럼 시작해, 너의 '장난감' 동료 밤비나타를 해방시켜줘.


테슈

이것이 바로 내가 의심하는 점이다.


테슈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어떻게 설득했는지, 넌 이곳에 남아 적을 저지하게 만들고, 잠시나마 '장난감'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했는지 알 수 없다.


테슈

그들의 태도는 네가 보기에 줄곧 아주 어리석기 짝이 없다.


바네사

네가 만약 그렇게 알고 싶다면…


테슈

...아니, 생각해 보면, 나는 이미 알 필요가 없다.


테슈

내가 원하는 것은, 사실 이 몸은 오롯이 나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너, 청정백로, 그레이 레이븐은 중요하지 않아.


테슈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고 달빛 아래 고요한 호수의 수면 같았다.


테슈

'테슈'라는 이름은 네가 그때 결정한 것이다. 청정백로소대의 일원으로서, 그 기념비에서 네 이름 옆에 나타나길 바라지 않아.


테슈

그래서 이 만남이 끝나면 이 세상에 더 이상 '테슈'는 없을 것이라고 직접 전해주기 위해 특별히 찾아왔다.


바네사

너...


바네사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참을 수 없는 피로감이 몰려와 의식을 잃었다.



밤비나타

주인님!


테슈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다. 다만 기절했을 뿐이다.


테슈가 바네사를 들어올리려 하자, 밤비나타는 즉시 바네사를 보호하는 자세를 취했고, 칼날은 이미 테슈의 팔을 긁어냈다.


밤비나타

건드릴 수 없습니다.


테슈

그녀가 지금 여기서 죽길 원하지 않는다면.


테슈

...정말로, 조금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 건가?


밤비나타

왜 주인님을 미워하죠?


테슈

너의 의식의 바다가 그녀에게 조종될 수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 있다. 그래서 나는 네가 항상 그렇듯이… 맹종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느낌을 진정으로 경험하고 싶지 않나?


테슈

누구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람이...되는 것이다.


밤비나타

밤비나타가 하고 싶은 것은 곧 주인님이 원하는 것입니다.


밤비나타

자유, 임무를 완성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아닙니다.


테슈

지금은 안 될 것 같군...언젠가 나의 말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나를 다시 찾아와라. 나는 너를 '그분'에게 추천할 수 있다.


테슈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기억 데이터 재현 종료 >>>>>>>>>



버네사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손가락은 자신도 모르게 데이터를 편집하는 메뉴 위로 향했다.


테슈는 뜻밖에도 자신이 쓰러진 뒤 밤비나타에게 혼자 러브콜을 보냈다.


밤비나타의 답은 단호했고, 그녀의 기체에 침입 신호는 없었다. 다만ㅡㅡ


테슈

지금은 안 될 것 같군...언젠가 나의 말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나를 다시 찾아와라. 나는 너를 '그분'에게 추천할 수 있다.


밤비나타가 '자유'를 이해하는 날, 그녀도 돌아설 것인가?


결국, 밤비나타가 청정백로 소대의 전투구조체로 출현한 것은 결코 그녀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만약...


바네사

...아시모프를 찾아가. 별도로 그에게 확인받을 게 있어.


밤비나타

네. 주인님은 여기에 머무르실 겁니까?


바네사

너만 가면 돼.


밤비나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바네사에게 인사를 하고 황급히 떠났다.


바네사는 밤비나타의 휴면실을 열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액세서리는 예외 업시 바네사 본인이 고른 것이었다.


왠지 아까보다 형언할 수 없는 초조함이 더 심해서 그 유래를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바네사가 주먹으로 휴면실을 때리자 합금 껍질이 뻑뻑하고 둔탁한 소리를 냈다.



주인이 말하고 싶지 않으면 더 묻지 마라.


이것은 밤비나타가 수없이 모색한 '규칙'이자, 그녀의 주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 방식이기도 하다.


주인이 밤비나타에게 기꺼이 전할 때 비로소 상대방의 심정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의 불안과 초조함은 밤비나타가 보이지 않는 깊은 곳까지 억누르는 데 익숙하다.



밤비나타

청정백로 소대 구조체 밤비나타, 외장 메모리 모듈 검사를 신청합니다.


연구원1

너 또 왔구나, 이리 와봐. 마침 내가 아직 30분이나 여유가 있어. 30분 후에 저 사람이 너를 계속 지켜볼 거야.


이 연구원은 옆을 가리켰고, 수습 명찰을 달고있는 또 다른 연구원은 긴장한 모습이었다.


연구원2

청정백로 소대의 그 구조체? 전형적인 구조체 기억상실증 환자인가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입을 틀어막았다. '병례' 앞에서 상대방의 아픔을 직접 지적하는 데 인정사정이 없다. 더욱이 그들에겐 병례보다는 특별한 연구사례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의 무례함에 대해 사과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다른 두 사람은 이미 대화를 많이 진전시켰다.


연구원1

밤비나타, 정기 검진이 필요해? 아니면 이미 무슨 문제가 생겼니?


밤비나타

주인님은 읽기 속도가 느려졌다며 지난 지상임무가 너무 오래 지속돼 유지보수가 부족했던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연구원1

어디 보자...아, 너 또 증상이 나타났구나, 어쩐지.


연구원1

기왕이면 이번 기회에 전면적으로 점검해 보자. 내가 의식의 바다 전용 계측기를 좀 준비할게, 너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밤비나타

네.


경험이 많아 보이는 연구원이 기기를 보관하는 구역으로 들어섰고, 곧이어 디버깅 소리가 들렸다.


연구원2

안녕, 밤비나타. 난...에휴, 아니야, 내가 말해도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아. 신경 쓰지 마.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돼.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 밤비나타에 불필요한 기억 부담을 줄 것을 우려했는지 신입 연구원은 결국 자기소개를 포기했다.


밤비나타

네...


연구원2

아까는 미안했어. 내가 일부러 병례를 말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들어보긴 했는데 여기에 온 첫날에 바로 만날 줄 몰랐거든...잠깐, 이렇게 말하는 것도 그닥 적절하진 않은 것 같은데...


연구원2

아무튼 내 말은 이런 병세가 너에게 발생해서 안타깝게 생각해.


밤비나타는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잠시 후 다시 눈을 떴다.


밤비나타

괜찮습니다. 밤비나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모두 익숙합니다.


익숙? 연구원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익숙함은 슬픈 사실을 바꿀 수 없다. 옆사람의 연민마저 익숙함에 물들었다고 가정하면, 이렇게 무력한 순간은 도대체 몇 번이나 겪어왔다는 것일까.


연구원1

자, 여기, 인턴. 이걸 그녀에게 세팅해 놔.


연구원2

아, 네!


신입 연구원이 서투르게 밤비나타에게 계측기를 세팅하고 있다. 구조체에 기기를 연결하는 것이 인간의 체감과 같은 고통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일부러 부드럽게 다루었다.


밤비나타는 금속 침대에 능숙하게 누운 뒤 눈을 감기 전 연구원을 진지하게 바라봤다.


ㅡㅡ그가 방금 이름을 말했다면 적어도 외장 메모리 모듈에 최근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이 무의미한 생각에 밤비나타는 명령에 따라 무질서한 사고를 점차 멈추었다.



구조체1

직접 보지 못했구만. 그 괴물이 10층 건물보다 더 거대해졌어! 그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다리가 부들거릴 거라고!


구조체2

허? 오늘은 웬일로 자신의 용맹함을 뽐내지 않는 걸까?


구조체1

야, 그런 전장에서 자기 혼자 용맹하다고 해봤자 부질없잖아. 너는 혼자서 너를 죽일 수도 있는 빌딩을 허물 수 있겠어?


구조체1

나 같은 게 소대 단위로 있다 쳐도 절대로 좋게 끝나지 않았을 거라고.


구조체2

너 같은 게 소대 단위로 있다 쳐도 소용없어. 지난 번 전투에서 대기 중인 거의 모든 엘리트 소대가 출동했다고 들었으니까 말이야.


구조체1

요컨대 다행스럽게도 잘 해결되었어. 나는 바다에 있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


구조체2

겁먹기는! 어차피 새 기체로 갈아타면 되잖아.


구조체1

이놈 입버릇 좀 봐라. 지난번 네가 중상을 입었을 때, 감히 양심을 걸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어?


구조체2

내가 너랑 같아? 사내대장부라면 지난날의 용맹함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법!


구조체1

아,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휴가를 보냈는데 이제 귀대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겠지? 어느 소대로 갈 생각이야?


구조체2

아직 정하지 않았어. 엘리트 소대 선발에 지원할지 고민 중이야.


구조체1

어? 그동안 나 몰래 연습 많이 했나 봐?


구조체1

씁, 어째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겠네. 어제 마침 청정백로 소대 차출 소식을 들었어. 그런데 구체적으로 나도 잘 모르고 부고 소식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한 사람이 실종됐다는 얘기인 것 같았어.


구조체2

청정백로? 거긴 안 가...괜히 어디서 헛소문만 들어가지곤...그 젊은 놈은 도망쳤던 거래!


구조체1

...뭐?


구조체1

아니지? 그 지휘관은 최고 수준이라고. 그들 소대에는 줄곧 별다른 감원이 있던 적이 없었어.


구조체2

뭘 잘못 먹었나...넌 목에 전자 쓰레기통을 달고 다니는 거야? 잘 좀 생각해 보면 안 될까?


구조체2

청정백로와 함께 임무를 수행한 사람은 중상을 입은 사람이 거의 없거나 아예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지. 천천히 생각해 봐...


구조체2

어쨌든 거긴 가고 싶지 않아. 정말 좋은 소대라면 어떻게 대원들이 이탈할 생각을 해? 봐봐, 그레이 레이븐은 어째서 배반하는 사람이 없을까?



바네사

그래, 너의 당찬 포부라면 심사위원회에서 모든 감독관을 웃길 수 있을 것 같네.

 

바네사는 박수를 치며 모퉁이에서 걸어 나왔다. 밤비나타의 휴게실을 나오자마자 테슈의 이탈에 대한 논의가 복도에서 흘러나왔다.


대화하던 두 구조체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그중 하나는 재빨리 입을 가리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난감하게 손을 내려놨다.


바네사

그레이 레이븐이 널 원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백로는 쓰레기를 거두지 않지.


구조체2

너!


구조체1

쉿...그만해, 그만해...


바네사

너 같은 놈도 엘리트 소대에 들어갈 수 있을 때쯤이면 인간의 운명은 그야말로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겠네.


바네사

하지만 엘리트 소대 지휘관으로서 내가 책임지건데, 네가 그날까지 가만히 기다릴 것 같지 않은 것 같고, 지상 임무에서 적조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


바네사는 두 사람을 향해 경멸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자신의 휴게실로 향했다.


한 구조체는 일을 크게 벌이기 싫은 듯 다른 구조체를 끌고 복도 반대편으로 향했다.


휴대단말기에서 통신음이 들리자 바네사는 걸음을 멈췄다.



바네사

밤비나타? 외장 메모리 모듈 검사에 무슨 문제 있어?


밤비나타

아닙니다, 주인님. 아직 검사절차가 끝나지 않았는데...


밤비나타

밤비나타는 임무지시를 받았고, 지금 당장 지정된 장소로 이동해 임무 브리핑을 들어야 합니다.


바네사

임무? 누가 임무를 내렸지?


밤비나타

아마...의장님이 직접 결정하신 것 같습니다.


바네사

나는 아직 임무 통지를 받지 못했어. 설마 너 혼자 가라는 거야?


밤비나타

케르베로스 소대의 대장이 포함되어있습니다.


바네사

케르베로스 소대의 그 여자? 도대체 무슨 근거로...


바네사는 밤비나타의 연락을 끊고 세리카를 불렀다.



세리카

바네사 양, 죄송해요, 지금 가고 있는 중ㅡㅡ


바네사

임무 내용 전달하러 가는 중이지?


바네사

나는 밤비나타의 감독관으로서 이 임무에 합류하겠어.


세리카

네? 밤비나타 양의 기체에 문제라도 있나요?


바네사

아니...하지만 최근 일부 대원들이 규정을 어기고 이탈한 점을 감안하면 밤비나타는 소대에 남은 유일한 소대원으로서 지휘관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보다 안전하지.


바네사

지금 나도 마침 임무가 없기도 하고.


세리카

...총사령관님?


니콜라

가게 둬라.


니콜라

어떤 측면에선 바네사의 말 또한 일리가 있지.


세리카

알겠습니다. 그럼 바네사 양, 제가 바로 당신의 단말기에 임무를 동기화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