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은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시각과 청각은 정적으로 돌아간다. 아무도 탐지할 수 없는 의식의 바다 깊은 곳엔 아픔도 걱정도 없다.



밤비나타

윽...주인님?


밤비나타는 눈을 떴지만 예상대로 바네사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몸담았던 방은 기억 데이터에 전혀 기록되지 않았고, 이곳에 온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이상 데이터에 갇혀 있을 때 누군가 기체를 이곳으로 무단으로 이동시킨 것일까. 그렇다면 주인은 지금 안전한 상태일까.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달리 주인에게서 분리된 것으로부터의 초조함은 밤비나타의 의식 바다에 공포라는 정서를 띄운다.


밤비나타가 방금 너무 쓸모없게 행동했기 때문에, 주인은 아예 그녀를 여기에 남겨두는 선택을 한 것일까?


주인의 상태를 확인하고 의심을 거두기 위해 밤비나타는 곧바로 바네사의 단말기에 연락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 그제야 어떠한 교란이 그녀가 기체를 온 힘을 다해 조종할 수 없게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밤비나타는 냉정을 강요하며 자신이 처한 환경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전에 수색하던 방보다 더욱 컸고 마치 강당과 같은 규모였다. 촛불, 조명, 불빛, 서로 다른 좁은 범위의 광원이 각각 방의 한 부분을 밝히고 시야는 절단된 채 산산조각이 났다.


연산력 증강 시각 모듈을 가동하는 데 실패했고, 밤비나타는 밝은 곳에서 자신을 탈출시킬 수 있는 계기를 찾아야 했다.



'도티'

엄마, 동생이 일어났어요.


기체가 간신히 전투 태세를 취하기 전, 가정부 복장을 한 또 다른 기계체가 밤비나타 뒤에서 나타났고, 앞쪽으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녀를 완전히 집어 넣었다.



'엄마'

아이, 내 아이가, 되렴.


'엄마'

착한 아이, 그래야, 가족.


'엄마'

도로시, 도티, 다 함께.


밤비나타

침식체? 아니야, 고농도 퍼니싱 바이러스는 검출되지 않았어...


밤비나타

침식되지 않은 기계체와 초기 실험형 구조체인가요? 당신들은ㅡㅡ


'도티'

도로시, 엄마 말에 똑바로 대답해. 그렇지 않으면 나쁜 아이가 될 거야.


'도티'

언니로서 네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아. 나도 엄마도 슬퍼할 거야.



'엄마'

나쁜 아이, 벌이, 필요해.


'엄마'

착한 아이, 그래야, 가족, 도로시.



보모 기계체가 팔을 감싸며 밤비나타의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다.


평소 주인이 이 기체를 섬세하게 다듬는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의 소속을 명확히 인지한 구조체는 낯선 손바닥에서 극도로 벗어나고 싶어했다.


밤비나타

'밤비나타'는 주인님이 입력한 이름입니다. 다른 사람은 절대 바꿀 수 없습니다!


밤비나타는 다시 통신을 시도했지만 신호가 깊은 골짜기로 떨어지는 듯 전하고자 했던 목소리는 모두 삼켜져버렸다.


'엄마'

도로시, 다른 사람, 필요 없어.


밤비나타

아니에요, 주인님의 명령은 밤비나타의 존재 의미예요!


'엄마'

도로시, 규정에서, 벗어남.



밤비나타

퍼니싱 바이러스?! 어떻게 그럴 수가ㅡㅡ


역원장치에서 비롯된 극심한 통증에 말문이 막히고 거대한 쇠못이 두개골에 박힌 것처럼 밤비나타는 사고와 연산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역원장치가 작동하는 것을 거의 느낄 수 없었고, 바이러스는 자유롭게 밤비나타의 이성을 무수한 조각으로 찢어버리고, 다시 수없이 의식의 바다 밑바닥에 집어넣었다.


침몰은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시각과 청각은 정적으로 돌아간다. 아무도 탐지할 수 없는 의식의 바다 깊은 곳엔 아픔도 걱정도 없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서 덩어리들이 산발적으로 아래에서 점점 더 보슬보슬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둘러싸고, 마치 누군가 잡으라고 유도하는 것처럼 만질 수 있는 위치에 떠 있었다.


옆에 비교적 작은 균열에서 솟아나는 낯선 기억 데이터가 밤비나타를 감쌌다.



입양을 준비한 이후로 밤비나타는 실험실에서 격리되었고 디버깅을 위한 전담자가 파견되었다.


쿠로노 연구원

널 입양한 사람은 아주 대단한 박사야. 그의 아내는 과거에 우리의 동료였지. 어마도 그들의 도움으로 언젠가 다시는 잊지 않게 될 거야.


밤비나타

다시는 잊지 않는다고요?


쿠로노 연구원

그래. 갑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은 더 이상 없을 거라는 뜻이지.


밤비나타

괜찮아요. 연구원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밤비나타에게 알려줄 테니까요...기억을 하게 된다면, 앞으로 밤비나타를 책임질 사람은 없는 건가요?


쿠로노 연구원

일생은 길지만 구조체로서는 더 길어질지 모르니 혼자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은 완전히 피할 수 없어. 만약 네가 무언가를 기억할 수 있다면, 넌 스스로 살아갈 수 있지…에휴, 이런 것들을 말해봤자 뭔 소용이래, 넌 이해하지 못할 거야.


쿠로노 연구원

적어도 미래의 너의 엄마와 아빠는 공중정원 사람이 될 거야. 너는 나중에 아마 이곳의 실험 구조체처럼 폐기될 때까지 연구될 일은 없을 거야.


밤비나타

그럼 밤비나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쿠로노 연구원

어떻게 한다라...스스로를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라고 여기렴.


ㅡㅡ그런데 어째서 바네사 언니는 밤비나타를 싫어할까?



바네사

...난 니가 싫어!!


바네사

네가 온 이후로 엄마, 아빠는 항상 너랑만 있어. 난 분명히 여동생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고!


바네사

내가 말을 잘 안들으니까, 그래서...부모님이 나대신 너로 바꾸려고 하는 거잖아?


바네사

아니면 저번 시험에서 1등을 못 해서 그런걸까?


바네사

하지만 난 이미 최선을 다했는데...다들 3등도 좋은 성적이라고 했는데...흑흑, 거짓말쟁이...


바네사는 두서없이 말하다가 점점 흐느끼며 쪼그려 앉았다.


언니처럼 귀여움받는 사람, 모든 것을 계획적으로 해내는 아이도 존재의 자리를 잃는 것이 두려운 것일까?


밤비나타처럼 언젠가 의미가 없어지면 무가치해질까?


어렴풋이 같은 그림자를 보았는지 밤비나타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며 팔로 감싼 바네사의 머리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바네사

뭐하는 짓이야! 동정하지 마!


밤비나타

죄송해요...그냥 이렇게 하면 바네사 언니의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요.


바네사

...


바네사의 마음을 알 수 없었지만 호통을 치지 않자 밤비나타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바네사

설마 정말로 엄마 아빠가 날 싫어하는 걸까?


밤비나타

절대 아니에요. 오늘도 바네사 언니가 미래의 훌륭한 박사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했어요!


밤비나타

어머니는 밤비나타의 실험이 진전되어 아버지의 의식의 바다와 역원 장치의 비밀을 밝혀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바네사 언니에게 밝은 미래를 줄 수 있다고 얘기했어요.


밤비나타

밤비나타는 바네사 언니에게 엄마 아빠를 뺏어갈 생각 없어요…. 밤비나타는 가치 있는 부분 때문에 여기에 온 거예요.


밤비나타

바네사 언니에겐 미래가 필요하니까, 그래서 밤비나타는 바네사 언니를 위해 존재해요.


바네사

정말이야? 그런데 바다니 장치니 뭔지 모르겠어. 아니 잠깐! 너 오늘 엄마 아빠랑 또 하루 종일 같이 있었다고 자랑하고 있는 거지?


밤비나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바네사

흥, 됐어! 오늘 내가 울었던 일 말하지 마!


바네사가 내민 새끼손가락을 보며 밤비나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바네사

손가락 끼우기도 몰라? 멍청이.


바네사는 밤비나타의 손을 잡았고, 부드러운 인간의 새끼손가락은 기계로 만든 새끼손가락에 걸려 몇 번 흔들렸다.


바네사

새끼손가락 꼭 꼭 걸고 약속하기! 좋아, 동의한 거야. 알겠지, 밤비나타?


밤비나타

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바네사 언니.


밤비나타의 이름이 그녀에게 불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생체공학피부에 아직 낯선 촉감이 남아있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의식'은 밤비나타가 결코 바네사와의 약속을 어겨선 안 된다는 것을 환기시켰다.


바네사

안 돼, 깨진 액자를 빨리 치워야 돼, 그렇지 않으면 혼날 거야! 너 빨리 가서 청소기를 가져와!


밤비나타

아, 네!



...


기억의 화면이 뚝 끊기듯 여기서 멈추췄고, 선명한 장면은 점차 고요의 어둠으로 퇴색되었다.


밤비나타의 의식에서 떨어져갔고, 크고 작은 데이터 덩어리가 다시 몰려들었다.


데이터 덩어리...기억상실증 때문에 일관성 없는 모습으로 잘려나간 것일까?


낯선 기대를 안고 또 다른 사람을 매만지며 추억 속의 영화가 시작되었다.



페트라

작동됐어. 밤비나타, 엄마의 손가락을 바라봐.


페트라

응, 시각 기능은 정상이고 의식이 뚜렷해.


레이몬드

밤비나타, 기분은 어떠니? 어디 아프거나 이상한 점 있어?


밤비나타

...


밤비나타

당신은...누구죠?


레이몬드

우리는 너의 엄마와 아빠고, 너의 이름은 밤비나타란다. 너에게 문제가 좀 생겨서 엄마아빠가 널 위해 병의 원인을 찾는 것을 돕고 있단다.


밤비나타

밤비...나타...


어린 소녀는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듯 했고, 밤비나타는 겁에 질린 기색 없이 알려준 정보만을 중얼거렸다.


레이몬드

칩 동작은 어떻지?


페트라

동작은 양호해. 즉시 데이터 스냅샷을 찍어서 보존해야겠어.


페트라

밤비나타, 다음엔 뒷머리가 좀 따끔거릴 수 있어. 정상이니까 걱정하지 마렴.


밤비나타

네...


레이몬드

걱정하지 마. 기억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칩이 들어갔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돼.


페트라

데이터 스냅샷을 저장했어. 자, 여기.


레이몬드

이 작동 효율은 아직 최적화할 여지가 많네. 첫 버전의 프로토타입인데도 예상했던 것과는 좀 거리가 있어.


페트라

기존 테스트는 의식의 바다의 안정성을 목표로 했고, 메모리 저장 칩은 임시적으로 연구개발을 한 거라 추론모델 자체가 초기의 기반 데이터가 괴리가 있어.


레이몬드

그들이 준 시험 기록도 완전하지 않다 보니 이런 데이터량은 당연히 모델의 정확성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지금 당장은 데이터 수집을 보조할 수만 있다면 더 가치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써야 해.


레이몬드

기체가 꺼진 이유도 밝혀졌어. 이전 테스트 때 남아있던 충돌 문제 중 하나인데, 지금은 조정해 놓은 상태야.


레이몬드

오늘은 일단 이곳으로 가서 기체에 칩을 탑재해 일정 기간 가동하면서 지켜보자.


페트라

자, 밤비나타, 일어나.


기구와 기기를 챙기고 페트라는 실험실의 문을 열었다. 문 밖의 바네사는 깜짝 놀라 재빨리 지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레이몬드

바니, 지금 숙제할 시간 아니었니?


바네사

아빠, 오늘 숙제는 전부 다 했어.


페트라

숙제 다 해놨으면 좀 더 공부하는 건 안 돼? 봐봐, 쉬는 시간까지는 20분 남았잖아.


페트라

이 녀석아, 아직도 모르겠어? 스미스네 그 아들내미는 너와 비슷한 또래에 벌써 천재로 인정받았잖아.


레이몬드

바네사, 엄마 말이 맞다. 공부 시간에 어슬렁거리면 안 돼.


바네사

어슬렁거린거 아닌데...


바네사는 무슨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고개만 숙였다.


페트라

참, 때마침 밤비나타는 너에게 아름다운 부분의 데이터를 다시 입력해놔야겠어. 자, 밤비나타, 이쪽은 바네사, 네 언니란다.


바네사

새로 입력?


바네사는 이 난해한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고 페트라와 레이몬드도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다. 밤비나타는 바네사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바라보며 자신의 몸을 쓸어내리며 해답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밤비나타

바네사 언니...안녕하세요.


바네사

...날 기억하지 못해?


밤비나타

죄송해요...


바네사

기억이 잘 안 나는 거잖아. 사과하지 마.


바네사는 말을 마치고 곧장 방으로 달려갔다.


밤비나타

밤비나타가 뭔가 잘못했나요?


페트라

바네사 성격이 원래 저래. 매번 어떤 수작을 할지 영원히 모르겠어. 걔도 너처럼 말을 잘 들었으면 좋았으련만.


페트라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그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것을 언제 알 수 있을지 모르겠어.


밤비나타는 페트라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아빠와 엄마가 하는 모든 일이 언니를 위한 것이라면 '착한 아이'로서 언니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언니의 아까 그 모습... 혹시 전에 밤비나타가 놓친 게 있었을까?


페트라

곧 점심시간이야. 소파에 가서 쉬어도 돼.


밤비나타

네, 엄마.


아직 지치지 않았지만 밤비나타는 페트라의 지시에 따라 소파 한구석에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페트라는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가족 구성원들을 차례로 식탁으로 불러냈다.


레이몬드는 천천히 2층을 내려와 식탁 의자에 앉았고, 그는 손가락으로 뭔가를 계산하며 연산에 심취한 듯 했다.


페트라가 세 번째로 문을 두드리자 바네사는 마지못해 방 밖으로 나왔고 소파에 있는 밤비나타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페트라

밤비나타, 구조체는 먹지 않아도 돼.


페트라가 다가온 것을 눈치챈 밤비나타는 무의식적으로 등을 쭉 폈다.


밤비나타

네...


페트라

그래서 우리가 식사할 때 집에서 편하게 둘러봐도 되고, 피곤하면 소파에 계속 있어도 된단다.


밤비나타

네, 밤비나타는 여기에 앉아있어도 되겠죠.


페트라

그래, 좋아. 바네사가 식사를 마치고 낮잠을 자면 네가 이론상 휴식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페트라

바네사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두 사람을 빨리 친숙하게 만들 수 있겠지. 결국 너희들은 이미 자매가 되었으니까 말이야.


그러자 페트라는 밤비나타의 어깨를 토닥이며 돌아서서 식탁으로 향했다.


페트라의 모습을 지켜보던 밤비나타는 바네사가 훔쳐보는 눈빛을 포착했지만, 밤비나타의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돌려 더 이상 이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바네사 언니는 밤비나타를 싫어하는 것 같다. 오늘부터 다시는 언니가 싫어하는 일을 하면 안 된다.


이를 의식한 밤비나타는 돌아서서 더 이상 식탁을 쳐다보지 않았다.


점심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바네사가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밤비나타는 소파 한구석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페트라가 식기를 정리하고 나서야 밤비나타는 "방에 가서 낮잠을 자라"는 명령을 받고 떠났다.


마그네틱 장식으로 꾸며진 밝은 회색 침실 문에는 바네사의 이름이 걸려 있었고, 한때 혼자만의 공간이었던 이 공간에 발을 들이려던 밤비나타는 초조하게 문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가장 조심스런 움직임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대 한가운데 이불 한 뭉치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밤비나타는 어느 곳에 누워야 할지 망설였고, 이불을 둘둘 싸고 있던 바네사는 침대 한쪽으로 굴러서 반대쪽 자리를 내줬다.


밤비나타

...


밤비나타는 속도를 늦추며 바네사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침대 옆으로 다가오자마자 바네사는 벌떡 일어나 앉았고, 놀란 밤비나타는 침대 곁에서 두 걸음이나 멀어졌다.



바네사

빨리 좀 누우면 안 돼?! 느려터져 죽겠네!


이 말을 마친 바네사는 다시 누워서 몸을 돌렸다.


밤비나타는 마치 허락을 받듯 바네사가 내준 빈자리에 반듯하게 누웠다.


휴면에 들어가기 전, 바네사는 이불 한 귀퉁이를 던져 밤비나타를 덮어줬다.


바네사

엄마는 잠을 잘 때 배를 잘 덮고 자야 한다고 말했어. 그렇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까. 너는 말을 잘 들으니까 잊지 않겠지?


밤비나타

엄마는 아직 밤비나타에게 말해주지 않았어요. 혹시 구조체는 감기에 걸리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바네사

...어차피 그냥 덮으면 그만이잖아!


밤비나타

네, 덮을게요, 바네사 언니.


바네사는 돌아서지 않고 그저 콧방귀 소리를 냈다.


밤비나타는 바네사가 느슨해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고, 이를 깨닫고는 긴장되었던 기체도 묘하게 풀렸다.


왜 이런 느낌이 들까?


명령은 존재의 의미이며 밤비나타는 지시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어떤 명령과도 달리 바네사의 강경한 말에는 더 부드러운 무언가가 감겨 있었다.


밤비나타는 부드러운 이불을 살며시 움켜쥐고는 말 밖에 담긴 그림자를 움켜쥐려는 듯 했다.


바네사

너...나 기억 안 나?


밤비나타

죄송해요...


바네사

자꾸 사과하지 마. 그냥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야.


밤비나타

엄마 아빠는 밤비나타의 기체에 기억을 돕는 물건을 넣었다고만 하셨고, 다른 건...기억나지 않아요.


바네사

무섭지 않아?


무섭다? 처음에는 무서웠을지 모르지만 그런 기분은 이 기체에 존재하지 않는다.


백지화를 오가는 사이클에서 밤비나타는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을 찾으면 행동의 방향을 찾을 수 있고, 모든 것을 잃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밤비나타

괜찮아요. 엄마랑 아빠가 밤비나타한테 뭘 해야 하는지 알려줄 거예요. 언니도 마찬가지에요.


바네사

너에게 말해주기 귀찮아...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잖아! 아직 일어나려면 30분이나 남았으니까 어서 자고 일어나.


밤비나타

네, 밤비나타는 기억할게요.


바네사

분명 악속했는데도 기억 안 난다면서...


휴면에 들어간 순간 바네사는 옆에서 뭔가를 중얼거리는 듯했다. 그 가냘픈 목소리를 잡지 못한 밤비나타의 의식은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