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백로의 입구에 다시 멈춰 섰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무엇일까.


'지나치는 김에 잠깐 들르자'는 마음만으로 다시 청정백로의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겨우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옛날의 모습을 애써 떠올리면, 그 하늘색 실루엣은 잊을래야 잊히지 않는다.



지휘관

밤비나타?



밤비나타

...안녕하세요...


지휘관

나는 【지휘관 이름】이야.


지휘관

너...나 기억나니?


밤비나타

당신은...누구?


지휘관

기체 검사 받으러 갔었니?


밤비나타

검사? 어떤...검사요?


지휘관

어제 일 아직 기억하고 있어?


밤비나타

어제...명령...대기.


밤비나타

다른 것은...없었어요.


지휘관

기체 검사는? 기억나?


밤비나타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1]

지휘관

(1)기억나는 거 없어? ← 선택

(2)바네사 기억나?


밤비나타

무엇을...기억, 바...네사...



[2]

지휘관

(1)기억나는 거 없어? 

(2)바네사 기억나? ← 선택


밤비나타

바네...주인님, 네, 바네사 주인님.




밤비나타는 어제처럼 바네사를 기억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너무 비슷한 나머지 오히려 차이점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어제 밤비나타와 바네사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녀는 오늘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했고, 비교적 완전한 말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다시 잊혀진 기억들이 그녀의 눈에 더욱 짙어진 그늘이 되고, 그 그늘을 드리운 텅 빈 두 눈이 문 밖의 빛을 향해 꼼짝 않고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에게 남겨진 대안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네사

...


바네사와 연락이 닿았을 때 한바탕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에게 밤비나타의 증상을 설명하자 바네사는 보기 드물게 한참을 망설였다.


바네사

언어 능력 손상 증상은 예상했었어. 기체 검사도 이를 위해 예약해둔 거였는데.


지휘관

그러니 가능한 한 빨리 돌아와서 그녀를 데리고 검사받으러 가는 것이 좋겠어.


바네사

쳇...생각보다 더 똑똑한 줄 알았건만.


바네사

네가 계속 이렇게 총명하고 기민하게 살았으면, 이 세상에 세상을 구할 천재가 하나 더 생겼겠지?


바네사가 말을 마치자 갑자기 통신기 너머로 강렬한 전류 노이즈가 들려왔고, 그 뒤로는 어렴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네사의 목소리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는 느낌이 확연히 들었고 의도적으로 목청을 가다듬는 듯했다.


바네사

말하자면 난 지금 꽤나 불편한 상태야.


바네사

하지만 네가 제멋대로 내 대기실에 들어온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담판을 짓자고.


바네사

밤비나타?


바네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아까부터 기대하며 자신의 통신기를 노리던 밤비나타가 곧바로 다가왔다.



밤비나타

바네사...주인님, 밤비나타...입니다.


바네사

벌써 이렇게 심각해졌나...


바네사

야, 너, 밤비나타에게 함부로 대한 건 아니겠지?


지휘관

내가?


바네사

아니야?


지휘관

(1)그것 참 실망이겠네.

(2)아무짓도 안 했어.


바네사

당연히 그래야지.


밤비나타

바네사 주인님...그레이...레이븐의...지휘관, 사이...좋아보여요.


밤비나타

친구...입니까?


아니거든!


거의 동시에 자신과 바네사는 통신기를 향해 생각조차 닿기 전에 부정했다.


지휘관

단지 동료일 뿐이야.


밤비나타는 자신이 뭔가 잘못 말한 것 같은 것을 의식한 듯 침묵한 채 문 쪽으로 물러나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바네사

크흠...됐어. 지금도 다른 방법은 있어...널 탓하지 않아. 밤비나타.


바네사

야, '친절한 수석'


지휘관

(1)또 무슨 새로운 놀림거리를 만든 거야?

(2)말 좀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바네사

너...밤비나타...검사...기다려...


바네사

...


한바탕 시끄러운 잡음이 있은 후에 통신이 두절되었다.


이것이 바네사가 앞서 언급한 '불편함'일 수도 있고,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비밀 임무 같은 걸 수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밤비나타

친절한...수석님.


지휘관

?


밤비나타는 갑자기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바네사의 자신에 대한 '조롱'을 되풀이했다.


밤비나타

주인님이...검사하라고...당신...밤비나타, 검사.


바네사가 자신과 함께 기체 검사를 받으라고 명령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일까….


밤비나타

...


밤비나타는 옷자락을 잡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듯 손을 놓지 않으면서도 힘을 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마치 나비 한 마리처럼 조용히 자신의 몸 앞에 멈춰 섰다.


밤비나타

친절한 수석님...


지휘관

그래, 알았어.


지휘관

하지만 친절한 수석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지휘관 이름】으로 불러줘.


밤비나타

친절한...【지휘관 이름】.



그렇게 청정백로에서 생명의 별 진료실까지 걸어가는 30여 분 동안 밤비나타에게 자신의 이름 앞에 바네사의 조롱과 비아냥거림을 붙이지 말라고 설명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한 시간여 전 기억이 머릿속에 맴돌다 생명의 별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와 자신을 진료실로 향하게 했다.


무영등 아래 당직 의사는 손가락 굵기의 튜브를 하나씩 밤비나타의 몸에 꽂고 있었고, 그녀는 각양각색의 탐침과 전선이 꽂힌 채 조용히 병상에 누워 있었다.



당직의사

음...거의 다 됐어요. 이제 곧 시작하겠습니다.


밤비나타의 뒷머리에는 차갑게 빛나던 새끼손가락 굵기 탐침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의 감긴 두 눈이 번쩍 뜨였고, 하늘색 동공이 흔들렸고, 몸도 그런 떨림을 동반해 가볍게 경련을 일으켰다.



밤비나타

...주인님...밤비나타...아파요...


밤비나타

주인님...주인님?


밤비나타의 목구멍에서 갑자기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오자 겨우 살며시 떨던 손이 펴졌다가 접히기를 반복했다.


지휘관

어떻게 된 일인가요?


당직의사

신경망에 직접 자극을 줘야 하기 때문이에요. 지각 시스템은 끌 방법이 없지만 이때 그녀의 기능도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겁니다.


지휘관

뭔가 할 수 있는 거 맞죠?


지휘관

그녀는...매우 괴로워 보여요.


당직의사

아픈게 당연합니다. 이건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이런 진료만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이죠.


당직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려 계속 기기를 조작했다.



밤비나타

주인님...


밤비나타는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는 그 말을 헛되이 되풀이하면서도 떨리는 몸을 조금도 풀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는 어떤 율법 떠오른 듯 자신을 비판하며 재촉했고, 또 다른 부분과 대면하는 듯했다.


고통으로 경련이 일던 손을 잡을 때, 차가운 손끝을 타고 손의 심장을 통해 통증이 전해지는 듯했다.


누군가 이런 고난을 감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선 안 된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보다 더욱 가녀린, 그녀가 아픔을 달래고 있을 때의 감정을 위로해줄 무언가의 직감이 떠올랐다.


밤비나타

주인님? 주인님...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밤비나타의 중얼거리는 말투가 차분했다.


지휘관

(1)여기 있어..

(2)나는 【지휘관 이름】이야.


당직의사

당신이 지금 그녀에게 이야기해도 들을 수 없어요.


당직의사

지금 그녀가 말하는 것은…. 의식 깊은 곳의 잠재의식에 더 가깝고, 대부분 무의미합니다.


하지만 밤비나타의 상황이 조금 누그러지자 의사는 말을 잇지 않고 자기 곁으로 다가갔고 일에 몰두하던 날카로운 눈빛도 한순간에 부드러워졌다.


당직의사

이런 의식의 바다 문제는 항상 구조체 진료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는데 정말 고생이 많겠어요..


지휘관

의식의 바다요?


당직의사

당신...모르고 있었나요? 이 기체의 의식 모형과 기체 모델은 매우 낡았어요.


당직의사

기억상실증이나 실어증 문제 역시 의식의 바다 문제와 관련이 있죠.


의사는 부서진 감호 단말기를 자신에게 내밀었고, 화면에는 다양한 색상의 얽히고 혼란스럽고 불규칙하게 변동하는 얇은 선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뒷 부분에는 약간의 리듬이 나타났다.


지휘관

이것은?


당직의사

그녀의 의식의 바다 신호입니다. 그만큼 사고 활동이 활발하면서도 혼란스럽다는 얘기죠.


당직의사

이것도 봐봐요.


의사는 심전도의 꺾인 선을 연상시키는 다른 화면을 단말기에 갖다 대었다. 아까의 기록보다 훨씬 규칙적이었다.


당직의사

이것은 그녀의 의식의 바다의 활동 주기로, 일반적으로 이 지수가 0에 근접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당직의사

하지만 그녀는 의식의 바다의 최근 활동 주기는 이렇게 나와있어요. 24시간마다 그녀의 의식의 바다는 0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죠.


지휘관

그 뜻은...


당직의사

텅 빈 데이터로 뒤덮인 의식의 바다에서 바로 이 수치가 나오고, 심지어 순수한 공백이라 할 수도 있죠.


당직의사

지금 그녀의 의식의 바다는 24시간이 지날 때마다 이 새로운 데이터로 뒤덮이고, 그동안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지워지죠. 실어증도 그러한 범주 내에서 비롯된 겁니다.


지휘관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걸까요?


진료는 제대로 된 것 같았고 이제 밤비나타는 더 이상 의미 없이 중얼거리지 않았지만 통증을 유발하는 경련은 계속됐다.


당직의사

글쎄요, 적어도 이 기체가 처음 검사하러 왔을 때나 이런 문제가 있었어요.


당직의사

기체진료가 아마 30분 정도 더 걸릴 것 같은데...굳이 여기에 안 계시고 휴식을 취하러 가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지휘관

괜찮아요. 여기에 있을게요.


당직의사

...


당직의사

그것도 좋습니다. 누군가 곁에 있다면 그녀도 기분이 좋아지겠죠.


이렇게해서 30분도 채 지나기 전에 의사는 밤비나타의 몸에 삽입된 튜브를 하나씩 꺼냈고, 자신은 저려왔던 손을 풀었다.


기본적인 인지 테스트를 하고 밤비나타가 언어 능력을 거의 회복한 것을 확인한 의사는 밤비나타의 진료 보고서를 자신에게 넘겨주었다.


당직의사

상세한 상황을 모두 위에 기록했어요. 다 됐습니다. 이제 저는 또 다른 환자의 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의사의 재촉을 받고 진료실을 나온 뒤 붐비는 현관을 지나 생명의 별과 마주보는 대로로 돌아갔다.



저녁에도 생명의 별 바깥 가장자리 거리는 공중정원 다른 거리보다 더 분주했고, 에덴의 하늘 위의 인공태양은 오후 6시의 석양을 충실히 연기하며 그 분주함에 맞는 기호를 붙였다.


이런저런 그림자들이 이리저리 흐르는 가운데,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으며, 두 가닥의 가늘고 긴 그림자가 조용히 그들이 오는 길을 확인한다.


밤비나타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자신의 곁을 따랐다. 도리어 진료 검사 이후 지금까지 의사의 인지검사를 마친 것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입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 고민하던 중, 갑자기 손에서 생체 공학 피부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마 자신의 손을 완전히 잡을 수 없는 것 같아보였다. 밤비나타는 자신의 손가락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밤비나타

기체 정비 중...당신은 밤비나타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밤비나타

그래서 밤비나타는 지금 당신의 손을 잡습니다.


지휘관

방금 전 일 기억해?


밤비나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길은 여전히 앞길을 향하고 있었다.


밤비나타

바네사 주인님은 기체 검사 때도 밤비나타의 손을 잡아줍니다.


밤비나타

그래서 밤비나타도 그 후에 주인님의 손을 잡습니다.


지휘관

바네사도 직접 기체 검사를 하러 가주니?


밤비나타

밤비나타는 병원에 갈 때마다 주인님이 밤비나타를 데리고 갑니다.


밤비나타

때로 주인님은 【지휘관 이름】이 오늘 의사 선생님과 말을 많이 하는 것처럼, 의사 선생님과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밤비나타

밤비나타가 아플 때, 바네사 주인님은 더 많은 말을 할 것입니다.


밤비나타

하지만 아플 때마다 밤비나타는 주인님이 어떻게 밤비나타가 아픈 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밤비나타

아플 때, 바네사 주인님은 밤비나타의 머리를 만지곤 했습니다.


밤비나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전보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겁많은 아이에 가까웠고, 스스로 묻고 답하면서 생각나는 대로 말한다.


자신의 상상 속에서의 바네사는 대원들을 거의 전적으로 도구로 여겼고 외부인 앞에선 결코 선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바네사를 언급할 때, 밤비나타의 어조는 더욱 순수하고 부드러워졌다.




[1]

지휘관

(1)이런 일들 아직 기억하고 있니? ← 선택

(2)바네사는 평소에도 그렇게 대해주니?


밤비나타

아니요. 밤비나타는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밤비나타

밤비나타는 주인님의 외장 메모리 모듈이 없었다면 이런 기억을 갖고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밤비나타

하지만 이런 일들은 밤비나타에게는 모두 인상적이었고, 주인님은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밤비나타에게는 인상적이었습니다.



[2]

지휘관

(1)이런 일들 아직 기억하고 있니? 

(2)바네사는 평소에도 그렇게 대해주니? ← 선택


밤비나타

평소...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주인님의 외장 메모리 모듈이 없기 때문입니다.


밤비나타

하지만 주인님은 가끔 밤비나타의 손을 잡고 밤비나타를 안아줍니다.


밤비나타

【지휘관 이름】이 밤비나타의 손을 잡아주고 의사 선생님과 많은 이야기도 나눴기 때문에 밤비나타는 바네사 주인님도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외장 메모리 모듈. 생명의 별 검사 보고서에도 이런 글자가 적혀져 있었다.


의사에게 물어봤을 때 그것이 아주 귀중한 뇌과학 연구의 산물이라는 사실만 알았을 뿐, 공중정원에서 또 다른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었다.


그리고 바네사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장치를 밤비나타에게 주었지만, 지금 그 장치는 바네사와 마찬가지로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바네사와 밤비나타의 관계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간단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밤비나타와 바네사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잘 모른다'는 말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네가 나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나는 영원히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