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나타와 자신과의 경험을 담을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자신은 결국 그 심포지엄 연설문을 완성하지 못했다.


늘 새로운 빛으로 눈가에 가득한 아이들에게 피와 화염의 조우를 전하려 했지만 포기해버린 탓이다.


다행히 심포지엄이 열리기 10여 분 전, 시몬에게 쪽지를 써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기에 자신이 따로 할 말은 없었다.



시몬

흠...이제 끝났으니 다음 일을 이어서 해야겠네요.


시몬

입학식의 원고는 잊으면 안 됩니다. 심포지엄 같은 여유로운 자리에서는 부담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지만, 입학식은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요.


시몬과 자신은 도미니카 공원 벤치에 주저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마 이 오후의 짧은 여유만큼은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 되겠지만, 다시 대기실로 돌아오게 된다면 내일 입학식의 연설문에 또 다시 자신의 시간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지휘관

솔직히 말해서 아직 글을 쓰지도 않았어.


시몬

?


시몬

어째서 절박한 느낌을 받는데도 아직도 이렇게 이상한 여유를 유지할 수 있는 걸까요...


시는 애초 그곳에 있었고, 시인은 황야에서 그것을 따왔을 뿐이라는 낭만적인 비유가 있었다.


사실 무엇을 써야 할지 자신의 마음속에 대체적으로 윤곽이 잡혀있었다. 다만 뭔가 결점이 있는 것 같아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었고, 뭐라 해야 할지 잘 생각나지도 않았다.


지휘관

시몬 선생님. 나 좀 살려줘.


시몬

이건 제가 도와줄 수 없는 일이에요...제가 현장에서 당신을 도와 이렇게 중요한 연설문을 쓰게 할 수는 없잖아요?


시몬

하지만 뭐가 되었든, 내일이 지나면 모두 끝나겠네요.


같은 태양이 지친 시몬과 자신을 비추고, 공원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비추고 있다.


그렇게 조금씩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지고 그림자가 엷어지자, 아이들이 서로 작별인사를 하고 내일의 어느 순간에도 계속 천진난만함을 즐기기로 약속하면서 각종 기념품과 소품을 파는 자동판매원들도 점차 떠나고 있다.


시몬은 자신과 함께 공원을 떠나 집행부대로 돌아갔고, 헤어질 때까지도 내일의 연설문 작성을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신은 뭔가 확증을 얻으려는 듯, 또 한 번 청정백로의 문을 두드렸다.



밤비나타

안녕하세요?


밤비나타

밤비나타...당신을 알고 있나요?


지휘관

나는 【지휘관 이름】이야.


밤비나타는 여전히 대기실 문틈에 기대어 문 밖의 자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밤비나타

【지휘관 이름】? 당신이 【지휘관 이름】입니까?


밤비나타

밤비나타는 그 이름을 알고 있고, 목소리도...조금 익숙합니다.


지휘관

너는 일기에 내 이름을 적었어.


밤비나타

밤비나타가 그랬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밤비나타

아니야...밤비나타가 당신에게 일기를 보여드린 것 같습니다...


갑자기 밤비나타는 문에서 손을 내밀어 자신의 손을 잡았다.


밤비나타

이것은 당신의 감각입니다. 밤비나타는 이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밤비나타는 그녀가 자신을 순간 이렇게 잡아당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문득 깨달은 듯이 이내 손을 움츠렸고, 항상 굳게 닫혀 있던 문도 열어주었다.


밤비나타

죄...죄송합니다, 밤비나타는 【지휘관 이름】이 맞는지 확인하려다 이런 행동을 해버렸습니다.


지휘관

이제 확실하니?


밤비나타

네, 밤비나타는 당신이 바로 【지휘관 이름】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밤비나타

밤비나타는 지금 24시간밖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당신에 대한 다른 일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밤비나타

단지 일기장에는 당신에 관한 것, 당신을 찾은 것,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러 간 것, 나중에의 의미, 그리고 친절한ㅡㅡ


지휘관

?


밤비나타

네...【지휘관 이름】.


밤비나타의 얼굴에는 장난에 성공한 아이처럼 무언가 미안한 마음이 담긴 선한 미소가 번졌다.


이 미소를 배경으로 한 청정백로의 대기실은 여전히 밤비나타 자신뿐이다.


그날 밤비나타와 기체 검사를 마친 뒤 바네사와는 도저히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학교에서 도와준 틈을 타 교관과 지휘관들에게 바네사에 대해 알아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휘관

바네사는 너에게 연락했었니?


밤비나타

주인님은...밤비나타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밤비나타도 주인님에게 연락하지 못했습니다.


밤비나타

하지만 주인님이 며칠 후면 돌아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밤비나타는 이곳에서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밤비나타

며칠 후는...몇 일이죠?


지휘관

(1)아무튼 다음 날은 아니야.

(2)이건 설명하기 곤란한데...


밤비나타

그런가요...


밤비나타는 멍하니 대기실 소파 옆으로 돌아갔고, 티테이블에 놓여 있던 일기장을 들어 올렸다. 깡마른 모습이 텅 빈 대기실에서 더욱 가냘프게 보였다.


밤비나타

밤비나타는 여기서 기다려도 괜찮습니다. 이것만 여기에 적어두면 됩니다.


밤비나타

【지휘관 이름】, 바네사 주인님, 이런 일들을 기억하면 됩니다.


밤비나타

그럼 이제 돌아가실 건가요?


모든 질문에는 대답이 존재한다.


지휘관

여기 잠깐 앉아있어도 될까?



밤비나타

엣?!


그녀의 얼굴에는 한바탕 경이로움이 역력했지만 곧 기계적 평정심을 되찾아 처음의 무표정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밤비나타

당신...이런 요구...밤비나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밤비나타

【지휘관 이름】은 바네사 주인님의 친구...아니야! 친구가 아니야!


밤비나타

주인님의 허락을 맡아야 하는 일인데 주인님은 밤비나타에게 당신을 따라 검사를 받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밤비나타

당신이...그래도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밤비나타의 자기주장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면서 고개를 숙여 얼굴의 안색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밤비나타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그녀의 일기에 기록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의 존재 여부도 문제였다. 밤비나타의 그날에 대한 기록을 나중에 읽었을 때 비로소 그 창백한 기록에서 약간의 색채를 발견했다.





...


일기, 제 225번...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바네사 주인님, 【지휘관 이름】, 병원, 순찰대원에 대한 과거의 기록을 읽어보았다.


오후 5시 43분까지 줄곧 대기하고 있었다.


오후 5시 43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고, 문밖에서 【지휘관 이름】임을 밝혔고, 목소리도 익숙했다.


하지만 밤비나타는 【지휘관 이름】이라는 이름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확실히 하기 위해  【지휘관 이름】의 촉감을 점검했다.


촉감은 【지휘관 이름】의 것이었다.


【지휘관 이름】은 바네사 주인님에 대해 물어봤다. 【지휘관 이름】은 주인님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았고, 밤비나타도 주인님을 만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밤비나타는 모른다. 주인님과 연락을 시도했지만 닿지 않았다.


그렇다면 밤비나타는 주인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주인님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전의 기록에 다음과 같히 적혀있기 때문이다:


'대기하고 있어. 며칠 있으면 돌아올 거야.'


바네사 주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인님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며칠 후면 돌아올 것이다.


그 후, 【지휘관 이름】은 밤비나타에게 주인님의 대기실에서 잠시 쉴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밤비나타는 주인님의 판단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주인님은 자신에게 【지휘관 이름】을 따라 병원에 가라고 명령했고, 다시 말해 주인님은 【지휘관 이름】을 믿었다.


밤비나타는 단지 주인님의 판단을 믿었고, 주인님은 【지휘관 이름】을 믿었기 때문에, 밤비나타는 【지휘관 이름】을 믿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판단을 범비나타가 대신 할 수 있을까.


뜻밖에도 자신만이 있다. 이것이 과연 옳은 생각일까?


밤비나타는 【지휘관 이름】이 주인님이 앉던 소파에 앉으면 주인님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지만 밤비나타는 이것도 기록에 남겼다.


【지휘관 이름】을 믿는다. 밤비나타는 그렇게 판단했다.


'오늘의 경험을 우리 모두가 일기로 기록한다면 밤비나타는 어떻게 기억할까?'


이상한 질문이다. 【지휘관 이름】은 잊지도 않는데 왜 일기를 쓸까?


밤비나타는 일기를 【지휘관 이름】에게 가리켰고, 이렇게 되어 밤비나타는 일기를 적었다.


'간단하긴 한데...밤비나타는 일기를 쓰다 보면 옛날 일의 느낌이 들지 않아?'


그런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밤비나타는 이렇게 적었고, 쓰다보면 또 이런 일이 발생한다.


밤비나타는 과거의 일을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밤비나타는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는다.


【지휘관 이름】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긴 듯 했고, 바네사 주인님 역시 늘 그래왔다.


【지휘관 이름】은 일기 쓰기를 이야기했는데 【지휘관 이름】도 밤비나타와 마찬가지로 오늘을 기록할까?


'밤비나타는 알고 싶어?'


생각을 했든 안했든, 【지휘관 이름】이 그런 얘기를 했기에 밤비나타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지휘관 이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밤비나타가 뭔가 잘못 말한 걸까?


【지휘관 이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밤비나타는 【지휘관 이름】 옆에 앉아 있었다.


'고마워, 밤비나타'


【지휘관 이름】이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지휘관 이름】은 밤비나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밤비나타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왜 밤비나타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을까?


【지휘관 이름】은 고개를 저으며 종이 위에 글을 썼다.


'내일 내가 너를 보러 올게'


【지휘관 이름】은 종이 위에 이렇게 적었다. 이것은 【지휘관 이름】과의 약속이라고.


그 후 【지휘관 이름】은 떠났고, 대기실에는 밤비나타밖에 없다.


밤비나타는 오늘의 일을 모두 기록해 두고 내일 밤비나타는 다시 그 기록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전 기록에도 밤비나타뿐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