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

텔레파시. 외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타인과 의사를 공유하는 초능력. 그것이 21세기에 드디어 현실이 되었다. 아직 상용화는 멀었고, 커다란 기계 장치를 이용해서 의식을 연결하는 수준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되기엔 충분했다. 그 기술을 개발한 K대학 소재 뇌과학 연구소를 이번 여름 방학 때 견학할 수 있었던 건 좋은 기회였다. 고1 여름방학을 즐겁게 장식할 이벤트로도 훌륭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2.

방학이 다가올 무렵에, 우리는 그 연구소에서 고등학생을 상대로 견학 기회를 제공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만 기회를 주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단순히 추첨이었다. 엄청나게 운이 좋았던 결과로 우리 두 명이 함께 뽑혀버렸다. 그래서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너와 그럭저럭인 내가 같이 가게 됐다.


"이런 일이 다 있나. 정말 우연이네."


네가 말했다.


"난 과학에는 관심 없는데 다른 애가 가는 게 맞지 않았을까."


"어울리지 않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잖아."


네 말대로였다. 역시 이건 약간 데이트 같다고 생각하면서 내심 들떠있었으니.


3.

방학이 시작하고 일주일 뒤, 우린 연구소를 찾았다. 직원이 우리를 맞아줬다. 격식이 덜한 정장을 입은 아저씨였다. 견학은 여름방학 내내 하루에 2~3명을 상대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가 말하길 6월 한 달 동안은 애들을 상대하게 되었다나. 아무튼 우리 말고도 견학이 예정된 학생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그는 몰랐다. 그 후에 우리가 첫 번째이자 마지막 견학생이 되어버린 것을.


우리는 아침부터 여러 시설을 구경했지만, 모든 일의 발단이 된 건 그가 "이번 견학의 하이라이트"라면서 소개한 의식-데이터화 탱크. 그건 반투명한 액체로 채워진 두 개의 수조였다. 공중목욕탕에 있는 욕조 정도의 크기에, 깊이는 그보다 좀 더 깊었다. 나는 헬멧 형태의 뇌파 감지 센서 같은 걸 기대했는데 좀 의외였다. 직원은 수조를 가리키며 말했다.


"원한다면 두 사람에게 체험을 시켜줄게. 견학생을 학교마다 2명씩 뽑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셈이지."


"안전한 거죠?"


내가 질문했다.


"그렇게 위험한 원리로 작동하는 물건은 아니야. 참고로 사람을 상대로 한 270번의 테스트 과정에서 문제는 없었어."


운 좋게 얻은 기회인데 기계만 구경하다 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우리는 동의했다. 탈의실에서 젖어도 되는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조금 흥분되는 마음으로 수조에 몸을 담갔다. 직원이 준비됐냐고 묻자 너는 그렇다고 대답한 뒤에 나를 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아, 맞다. 엉큼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겠네요. 이게 작동하면 상대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너나 조심하시지."


직원은 장치를 작동시켰다. 우리는 지시에 따라 머리까지 물속에 들어갔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마치 공기 속에 있는 것처럼 숨도 자유롭게 쉴 수 있었다. 그리고 비현실적인 감각과 함께 머릿속에 너의 의식이 흘러들어왔다. 이럴 수가...


'너 방금 믿기지 않는다고 생각했지.'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생각으로 나한테 말을 건 거야? 적응력 대단하다, 너.'


나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목소리와 성대를 거쳐서 나오는 실제 목소리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너의 '생각'은 실제 목소리에 비해 더 낮은 톤이었다.


'야한 생각 하지 마.'


'안 했어. 그리고 너가 자꾸 언급하니까 더 생각이 나려 하잖아.'


네가 한 말 때문에 떠오르려 하는 몹쓸 생각을 참는 것도 한계였다. 나무아미타불. 나는 애써 무념무상을 유지하면서 수조를 기어 나왔다. 잠시 후, 나는 수조를 나오는 너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까지 수조에서 완전히 나온 것을 확인한 직원이 말했다.


"견학은 이걸로 끝이야. 이제 작동을 정지할게."


그때, 수조 주변에서 발을 헛디딘 네가 앗 하는 비명과 함께 나를 잡아당겼다. 우리는 장치가 작동하고 있는 수조에 빠져버렸다. 같은 수조에 두 사람이 빠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의문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우리는 의식을 잃었다.


4.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누워있는 의료용 침대 주위로 간호사, 연구소의 직원들, 그리고 너의 부모님이 보였다.


"이쪽 아이는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누군가 외쳤다. 그러자 침상 주위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제일 먼저 너의 부모님이 내게 말을 걸었다. 네 어머니는 울다가 만 얼굴로 네 이름을 부르며, 다행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세연이는 괜찮아요? 같이 물에 빠졌는데...'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어서 아무도 나의 대답을 듣지 못한 듯했다. 호흡기를 떼고서야 나는 겨우 몇 마디를 전할 수 있었다.


"같이 물에 빠진 애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나는 아주머니로부터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다만 너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다 기묘한 광경을 보았다. 내 바로 옆의 침대에는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내가—나의 육체가 누워있었다. 나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이 시야를 가려서 더 이상 내 몸이 누워있는 침대가 보이지 않았다.


(2화)

5.

그 후 한 달 동안은 병원에서 보냈다.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하자면 길다. 우선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나는 너의 몸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 사실을 우리 엄마와, 너의 부모님과 의사에게 설명하는 데에도 꽤 애를 먹었다. 의식-데이터화 기술 방면의 전문가의 의견은, 수조에 들어갔을 때 나의 의식이 너의 뇌에 이식되었다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된 건지, 너의 의식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도 나오지 않았다.


"정말 불가사의한 현상입니다. 데이터화된 의식이 다른 생명체에 옮겨 간 것은 이번이 첫 사례입니다. 의도한 것도 아니었고요."


전문가들은 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얘기의 다른 표현이었다. 나의 의식이 너의 몸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너의 부모님이 받아들이는 데엔 며칠이 걸렸다. 그들은 내가 차지한 너의 몸속에서 너의 의식을 끌어내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수일을 노력한 끝에, 그들은 지금 너의 몸속에 있는 게 이전의 너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우리 엄마는 그것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엄마는 혼수상태에 빠진 내 원래 육체 앞에서 날을 지새웠고, 내가 다가갈 때마다 원망의 시선으로 보았다. 엄마는 이번 일을 전부 너의 탓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이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걸 설명하려 애썼지만, 엄마는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았다. 정말 슬펐는데, 결국 나는 엄마가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한 달 뒤, 나는 건강상의 문제가 없었으므로 퇴원했다. 너의 몸속에 있는 것의 나의 의식이라는 사실을 가려낼 방법은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너에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야 했다. 공식적인 진단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착각하고 있다나... 뭐 그런 걸로. 그 이후로 쭉 나는 너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


6.

퇴원한 지 다시 일주일쯤 되었을까. 그때는 여름방학이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너의 몸으로 살아가는 데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네 단짝인 현지가 찾아왔었다. 네 걱정을 많이 했다고 했다. 그 애와 그렇게 길게 대화해본 건 처음이었다. 현관문을 열어준 나와 마주쳤을 때, 현지는 나를 너의 이름으로 불렀다.


"세연아, 퇴원했다는 얘길 들어서."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 어서 들어와."


남의 집에서 남의 친구를 들이는 상황은 묘하다.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일단 2층의 네 방으로 들였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현지에게 나는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렇게 하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줄 수 있을까 싶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내?"


"나야 뭐 그럭저럭. 나는 오히려 네가 걱정되어서. 입원해 있는 동안 몸은 이제 다 나은 거야?


"괜찮아. 애초에 크게 건강이 위험한 것도 아니었어."


그렇게 한동안 대화를 나눴다. 도중에 아주머니가 차와 과일을 내주셨고, 마침 현지도 퇴원 선물이라고 가져온 과자가 있어서 그걸 같이 먹었다. 역시나 현지는 우리가 겪은 사고의 자세한 부분을 모르고 있었다. 진심으로 너를 걱정하는 그 애의 마음이 느껴져서, 나는 우리의 부모님, 병원과 연구소의 관계자들에게 애써 설명했던 사실들을 그 애에게도 알릴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적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네 친구들 앞에서는 너의 모습을 연기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방학도 곧 끝나가네!"


"그러게."


방학의 끝이라. 나는 그 말에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가볼게."


나는 현지를 다시 현관문까지 바래다주었다. 그 애는 떠나면서 곧 학교에서 보자고 말했다. 무심코 그래. 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정말로 너의 모습을 한 채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학교를 다녀야 할지 고민했다. 개학 전날, 언제까지고 집에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겠지. 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학교에 가기로 했다. 너의 일상생활을 망쳐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너가 되기 위한 나의 연기가 시작됐다.


(3화)

7.

나는 개학일에 맞춰 학교에 갔다. 그날 아침에는 아주머니가 학교 갈 준비를 도와줬다. 아직은 혼자서 머리를 감는 것부터 옷을 입는 것까지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니까. 아주머니는 머리를 만져주면서 마치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간 너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평소에는 조금만 손을 대도 짜증을 냈으면서, 오늘은 웬일로 가만히 있네."


그야, 나는 당신의 딸이 아니니까. 머리를 만지는 아주머니의 손길은 다정했다. 어쩔 줄 몰라 얌전히 있는 내가 귀엽다면서도, 슬퍼 보였다. 네가 예전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거겠지. 그나저나, 네가 매일 이렇게나 단장에 신경을 썼다는 걸 전에는 몰랐는데.


슬슬 문을 나서야 할 때쯤 현지가 찾아왔다. 내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아주머니로부터 부탁을 받았다는 듯하다. 지금 보면 아주머니는 내가 너의 몸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었다기보다, 자기 딸이 친한 친구를 잃은 후에 정신이 좀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은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내가 신발을 다 신었을 때쯤에 말했다.


"갈까?"


"그래."


평범한 척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있자. 학교까지 걸으면서 되뇌었다. 나를 특별하게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아직 부담스러웠다. 그러는 와중에 현지는 계속 나한테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 애가 하는 말을 흘려들었다. 그러나 그 중 한 마디가 나를 일깨웠다.


"근데, 잘 어울린다. 그거."


"응?"


그녀는 내 옆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못 보던 머리핀이잖아."


나는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길쭉한 핀이 만져졌다. 나는 무심코 그것을 머리에서 떼어내려 했다. 그러자 현지가 막았다.


"어어, 빼지 마. 잘 어울린다니깐. 너도 봐봐, 저기."


그녀가 가리킨 곳은 휴업 중인 점포의 유리창이었다. 그곳에는 너를 닮았지만, 너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여자애가 비쳐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그 녀석은 항상 기운이 넘쳤던 너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 표정을 죽을상이라고 하나. 거울에 비친 녀석은 걱정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본 나는 아차, 싶어서 표정을 좀 폈다. 옆으로 넘긴 머리카락을 고정하고 있는 두 개의 빨간색 일자 머리핀은 조금이라도 산뜻함을 더해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네가 그걸 하고 있던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개학 첫날에 딸의 음침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아주머니가 손을 써두었나 보다.


"잘 어울려. 그치?"


"응. 이건 그냥 내버려두는 게 좋겠네."


8.

교실에서의 그 어색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다. 일단 난 네 친구들 이름도 몰랐으니까.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다들 관심을 보이면서 내가 앉은 책상으로 몰려들었다. 다른 반에서까지 구경하러 오질 않나, 너는 정말 인기가 많았나 보다. 게다가 연구소에서 있었던 사고가 전국적으로 논란이 된 걸 생각하면 너는 예전보다도 더 유명인이 된 셈인가. 선생님이 들어와서 전부 자리로 돌려보내기 전까지 내가 무슨 대화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주위에서 떠들고 나는 가만히 다물고 있었던 것 같은데.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학교에서 너의 역할을 연기하는 게 절대로 쉽지 않을 거라고 직감했다.


점심시간 때는 배가 좀 아프다고 하고 혼자서 화장실을 갔다. 같이 밥 먹자는 애들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화장실에서 모르는 애와 마주쳤다. 볼일을 보던 그 애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젠장. 나는 실수를 알아차리고 여자 화장실로 갔다. 그나저나 여자 쪽이면 사소한 걸 볼 때도 앉아서 쓰는 그걸 이용해야 하나. 그거 찜찜해서 쓰기 싫었는데 이젠 어쩔 수 없네. 피차 같은 입장인데 다들 깔끔하게 쓰겠지. 볼일을 보고 복도로 나와 손을 씻고 있는데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런 거 익숙해질 수 있으려나."


"뭐가 익숙해져?"


나는 혼잣말을 했는데 뒤쪽에서 대답이 들려서 당황했다. 누가 있었구나. 내가 돌아봤을 땐 이미 나를 지나쳐서 걸어가고 있었다. 검도부에서 친하게 지낸 선배였다. 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잊은 채 무심코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형."


아차 싶었다. 돌아온 반응은 차가웠다.


"너 나 알아? 미친 년이네."


멀어지는 선배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와 친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너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웬 여자애가 넘어지면서 잡아당기는 바람에 내가 죽었다—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고 나서 교실에 돌아오니 뭔가 달랐다. 친구들의 시선과 대화 속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혐오? 아니, 기분 탓인가. 어쨌든 나는 이제 그것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멍하게 있다 보니 어느새 하교 종이 울렸다. 여전히 내 옆에 모여 떠드는 여자애들 중에서 누군가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뭐라고?"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되물었다. 지금 무슨 얘기가 오간 거지?


"걔가 죽은 건 네 탓이 아냐."


어...


"맞지. 안전사고였잖아. 따지고 보면 견학을 주최한 쪽에서 잘못한 거 아님?"


"근데 애초에 걔도 그냥 자기가 헛디딘 거 아니야? 얘가 팔을 잡아당겨서 물에 빠졌다는 건 어디서 나온 얘기야?"


"몰라, 소문이지 뭐."


제발 나를 좀 내버려둬.


"어, 세연아 괜찮아? 안색이 안 좋아."


"야, 이 얘기는 그만하자."


그쯤에서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꼬일 대로 꼬여버린 상황에 현기증이 났다. 더는 이 녀석들의 잡담을 듣고 있기 어렵다고 생각이 들 때 쯤이었다.


"세연아, 집 가자! 너네 종례 안 했어? 우린 일찍 끝냈는데."


다른 반에서 일찍 수업을 마친 현지가 구하러 와줬다. 나는 다른 애들을 내버려두고 교실을 나가버렸다. 그렇게 그날은 종례도 안 하고 도망치듯 집으로 갔다. 앞으로도 이런 생활이 계속되는 건가. 애초에 미지의 현상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막연한 기대라도 하는 수밖에. 걱정만 잔뜩 늘어나고 말았다.


(4화)

9.

개학 후 일주일이 지났다. 너의 친구라는 애들에게 둘러싸여 첫날 같은 하루가 반복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건 의외로 저절로 해결됐다. 며칠이 지나자 다들 이쪽에 무관심해졌다. 정말 너랑 친했던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아마 내가 너처럼 붙임성 좋게 굴지 못해서 그렇겠지. 하지만 네가 피곤하게 늘 사람을 달고 다녔던 이유를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까 불만이 있다면 빨리 돌아와 주길.


"그럼 이따 보자."


1교시가 시작하기 전, 현지가 말했다. 이 애는 일주일이 지나도 여전하다. 매일 아침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린다. 함께 언덕을 걸어 오른다. 내가 묵묵히 걷는 동안 계속해서 말을 건다. 나는 가끔 대답할 뿐이지만 모든 이야기에 집중한다. 너무 혼자 떠들게 했다는 생각이 들면 미안해져서 어색하게 웃으면서 맞장구를 친다. 그러면 그 애는 그런 시시한 반응에도 기쁜 듯이 그렇지? 라고, 다시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몇 번 '응', '그래', '그렇지'가 오고 가면 우리는 교실 앞에서 헤어진다. 별것도 아닌 대화 같지만, 나는 그 애가 해주는 이야기로부터 너의 일상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


오늘은 교실 앞에서, 나는 무심코 살짝 그 애의 손을 잡아버렸다.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였나? 아니, 미안하다. 이게 무슨 짓일까... 여자애 손을 마음대로 잡다니 정신이 나갔나 보다. 나는 손을 놓고, 머리에 떠오르는 친절한 말을 아무거나 했다.


"아... 좋은 하루."


현지는 조금 놀란 듯했다. 하지만 웃으면서 대답해 줬다.


"응! 너도."


오늘 아침, 조금이지만 기운이 났던 건 이 바보 같은 해프닝 덕분이었을지도.


10.

"오늘 7일이니까 28번이 나와서 풀어 봐."


도대체 무슨 논리야.


"칠 사 이십팔이니까 28번이 나와서 풀어보자. 한세연 나와."


책상 위에 붙어있는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28번 한세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필이면... 하지만 괜찮았다. 지금 배우는 단원은 집합과 명제. 집합 정도는 아무리 나라도 식은 죽 먹기지.


"쌤, 한세연 수학 전교 2등이래요!"


나는 뒤를 돌아봤다. 전혀 모르는 남자애였다. 얘도 한세연의 친구라는 놈일까. 그 녀석이 던진 한 마디가 재앙을 불렀다.


"선생님도 알지~ 전교 2등이니까 어려운 거 시킬 거야."


어지간히 어려운 문제를 고른 건지 나는 잠시 지문을 읽으며 고민했지만, 풀이가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은 머리가 멍해진 채로 서 있었을 뿐이지만. 유난히 문제를 오래 읽고 있는 전교 2등을, 교사는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내가 진심으로 그걸 어려워서 못 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종종 있는 컨디션 문제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는데. 슬슬 칠판 앞으로 나서지 않으면 부끄러워질 타이밍이었다. 갑자기 옆자리에 앉아있던 녀석이 손을 들며 말했다.


"제가 풀어보겠습니다."


내가 쳐다보자, 눈이 마주친 그 녀석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윙크를 했다. 윽. 능글맞기도 정도가 있지. 이 반에는 정상인이 없는 건가?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은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오, 뭐야 흑기사야?"


교사의 질문에 녀석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게 아니고, 이 학교 수학은 제가 짱먹을 겁니다."


교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답이 아주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녀는 잠시 출석부를 뒤지더니 말했다.


"아아, 너 전학생이구나. 도전적인 자세가 멋있다. 세연이는 긴장 좀 해야겠는데?"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싶었는데 전학생이었구나. 2학기 맞춰서 편입을 한 모양이다. 녀석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칠판에 풀이를 적고 자리에 앉았다. 거기서 답이 틀렸다면 웃겼을 텐데. 아쉽게도 교사는 흐뭇해하며 칭찬 일색이었다.


"일부러 헷갈리게 낸 문제인데 안 속고 잘 풀었네. 자, 박수."


11.

그 전학생은 소위 말해서 '엄마 친구 아들'의 정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부러운 녀석이었다. 키도 큰 편에 공부도 잘하고 잘생기기까지 했으니까. 특유의 능글맞은 언행만 빼면 한세연의 남자 버전이라고 보면 되겠다. 아니나 다를까 쉬는 시간만 되면 옆자리가 얼마나 북적대는지,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야... 이 반은 참 재밌어 보이네. 우린 조용한데."


현지가 말했다. 그 애는 내가 다른 애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는 안 그러다가 요즘 들어 종종 찾아와서 말을 걸었다.


"그거 부럽네. 복도로 나가자. 바람 좀 쐬고 싶어."


현지하고 대화하는 것에도 익숙해진 나였다. 원래 네 친구지만 이제는 나한테도 친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린 잠시 복도에 있다가 3교시가 시작하기 전에 교실로 돌아갔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전학생이 나한테 말을 건 것은 의외였다.


"한세연, 아까 걔 너랑 친해?"


"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전학생도 자기가 한 말이 두서없다는 걸 알았는지 이번엔 자기소개로 시작했다.


"나는 김도하. 이번에 전학 옴. 너는 한세연이지? 우리 친해지자."


싫... 아니, 일단 냉정해진다. 재수 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너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붙임성 좋은 너답게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해. 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필요 이상으로 까칠하게 구는 건 좋지 않다. 적을 만들어 봤자다.


"그래. 잘 부탁해."


아무래도 새로운 친구가 하나 생긴 것 같다. 말해두지만 나중에 네 의식이 돌아왔을 때, 뭔가 이상한 녀석이 있다고 놀라지 말길. 멍한 채로 내 팔자를 비관하는 동안 3교시가 지나갔다.


12.

"어? 한세연!"


점심시간에도 끈질겼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최대한 이 이상한 친구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학교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어떻게 된 건지, 가는 곳마다 녀석과 마주쳤다. 그러면 어울리지 않게 앙탈을 부리면서 졸라댄다.


"야, 아까 걔 이름 뭔데? 말해 줘 봐..."


아무래도 현지에게 반하기라도 했나 본데, 안된다. 이 녀석은 잘 쳐줘서 공부 좀 잘하는 예쁜 쓰레기니까. 그 애에게 이런 폭탄을 떠넘길 수 없어. 그건 무책임한 짓이다.


"그렇게 관심 있으면 본인한테 가서 물어보던지, 이 스토커 자식아."


역시 이런 위험한 녀석은 내치는 게 맞다. 친구로 둬서는 안 되는 건데.


"너 설마 전교 2등 뺏길까 봐 견제하는 거야? 네가 원한다면 난 그냥 3등할게."


"관심 없어. 수학이든 국어든 너나 실컷 짱 먹어라."


내가 끝까지 철벽을 치고 방어하자 녀석은 비겁한 수를 꺼냈다.


"아까 수업 때 네가 쩔쩔매던 거 내가 도와줬잖아. 그 빚은 갚아야지?"


"어이가 없네."


"어이 어이, 설마. '어차피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 할 수 있었어' 같은, 비겁한 말을 하려는 거야?"


악덕 사채업자보다 더한 놈이군. 그때 그게 나라서 확실히 도움을 받긴 했다만, 진심으로 한세연이 그 문제를 어려워서 못 풀었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비겁한 수엔 비겁하게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네가 좋아하는 애 저기 있네. 남자답게 가서 말이나 걸어 봐."


물론 거짓말이었고 나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때마침 불어난 복도의 인파 사이로 숨어드는 건 좋은 전략이었다. 아예 보건실에서 쉬어버렸더니, 이번에는 진짜로 학교가 끝날 때까지 벗어나는 데에 성공했고.


"헐. 웬일이야? 세연이가 우리 반에 다 오고?"


나는 종례 시간에 맞춰 현지네 3반을 찾아갔다. 미행당하지 않도록 신경을 좀 썼다.


"좋은 하루 보냈어?"


아니. 피곤한 일이 있었어. 굳이 얘기하진 않을게. 또다시 몇 번의 '응'과 '그래'가 오가는 동안 우리는 집 앞에 도착했다. 나는 현지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고 말했다.


"넌 내가 지켜."


"뭐? 갑자기 너무 설레잖아..."


"집에 조심히 가."


바닥에도 더 바닥이 있다고, 내 일상은 어디까지 피곤해질 수 있는 걸까. 그런데 이런 비일상도 차츰 일상으로 자리잡혀 가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건 아이러니다. 한 달 반이 지나도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당분간은 더 이런 생활이 계속되겠지. 너는 어디에 있는 걸까.


— 아— 듣고 있나? 지금은 9월 7일 수요일... 날씨는 맑지만 상황은 절망적이다. 한세연 응답하라 오바!


(5화)

13.

목요일. 현지는 사정이 있어서 이번 주에는 학교에 못 온다고 했다.


"그럼 다음 주에 도와줘."


전학생은 포기를 모르는 것 같다. 나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 주는 이 일로 날 귀찮게 하진 않겠지.


"빵 머거."


그는 이마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겨있는 나에게 소보로빵을 내밀었다. 상당히 지능적인 수법을 쓰는군. 3교시를 앞둔 지금은 하루 중 가장 배고픈 시간이다. 그가 내민 빵은 아마도 이 점을 노린 전략 병기, 마치 트로이의 목마 같은 것으로, 이걸 받으면 또 부탁을 들어줄 구실로 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바로 치워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째선지 거절할 수 없었다. 확실히 나는 소보로빵을 좋아한다. 다만 내가 고작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놀랐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스트레스 때문인가?


싫은 티를 내면서도 빵을 먹던 나는 어떤 여자애가 한 말에 그만 목이 막혔다.


"아이구 옘병. 아주 사랑싸움을 하네."


내가 돌아보자, 그 애는 눈꼴시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분함과 자괴감이 밀려왔다. 나는 먹던 빵을 버리고 돌아와서 책상에 엎드린 채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엄청나게 우울한 상태로 3교시가 지나갔다.


"야 우냐?"


수업이 끝나고 전학생이 말했다.


"말 걸지 마. 죽인다."


그는 그 뒤로 하루 종일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14.

동네 친구 중에 현우라는 애가 있다. 소위 '지인 스펙트럼'이 겹치지 않는 너와 내가 공통으로 알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친구이기도 하다. 그 녀석과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보던 친구 사이였다. 단짝이라고는 안 하겠지만 그래도 자주 어울렸던. 어쩌면 그 녀석에 대한 특기사항 중에서 중요한 건, 너와 내가 만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거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나는 현우랑 다른 중학교로 가게 됐었다. 그리고 한동안 연락도 잘 안 했다. 그 녀석은 중학교에 가서 너와 같은 반이 되었다던가. 그러다 우리 중학교랑 그쪽 중학교랑 축구 시합을 붙은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너와 만났다. 너를 그 시합으로 부른 게 현우였고. 시합이 끝나고 나는 그 녀석이랑 인사를 하면서 은근슬쩍 물어봤다.


"야, 걔 누구야? 너랑 같이 다니던 애."


"세연이? 그냥 같은 반 애야."


"둘이 사겨?"


"뭐? 너네 웃긴다. 아까 걔도 나한테 똑같은 거 물어보던데."


내가 무슨 소리냐고 묻자, 녀석은 뜸을 좀 들이다 대답했다.


"초록색 11번이 누구냐 길래 내 친구라고 했지. 너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보더라."


처음 보는 여자애와 친해질 절호의 기회라는 건 분명했다. 나는 현우에게 너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고 우리는 만났다. 한 달 뒤, 너는 내가 다니던 검도관에 갑자기 나타나서는 자기가 사범님의 조카라고 했다. 우연히 알게 된 여자애가 우연히 한사범님의 조카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운명적인 만남, 뭐 그런 걸 뒤로 하고서라도 나는 금세 너를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주말마다 도장에서 얼굴을 보면서도 좋아한다는 말만은 할 수 없었다. 너의 멋진 부분들을 알아갈수록, 나도 거기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전에는 먼저 고백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예쁘고 성적도 전교 순위권에 드는 너의 곁에서 부끄럽지 않고 싶었다.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합격점에 미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 아. 다시 만나면 어째서 그때 검도를 시작한 거야? 라고 물어보고 싶네. 만약 대답을 머뭇거린다면 먼저 말해버리자. 좋아한다고.


3월.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 지역에 난잡하게 분포했던 중학교에 비해서 고등학교는 갈 곳이 별로 없었던 이유로이번에도 우연의 힘을 빌렸다고 하기는 왠지 싫으니까우리는 전부 같은 학교에 모였다.


15.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기운이 조금 생겼다. 나는 화장실에서 입가와 손을 씻고 교실로 돌아갈 참이었다. 전엔 밥 먹고 축구를 하곤 했는데. 운동장에 나가서 나도 끼워달라고 하면 어떨까. 다들 의외라고 생각하겠지. 그때 누군가 남자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야, 한세연이다."


그 뒤로 따라 나온 두 명을 포함해서 모르는 애들이었다. 1학기 때 같은 반이었다는 사실만 기억났다.


"얘가 그 살인자야?"


"얘 맞음."


세 명 모두에게서 담배 냄새가 났다. 학생부장은 도대체 뭘 하는지. 사실 요즘은 옛날처럼 물리적으로 금연을 시킬 수도 없으니, 있으나 마나 한 직책이긴 하다. 나는 분위기가 좋지 않은 걸 느끼고 교실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한 놈이 내 앞을 막아섰다.


"게이야? 남자들끼리 화장실도 같이 다녀? 비켜."


"사람을 죽여놓고 뻔뻔하게 학교를 다니네. 하민이 어머니가 슬퍼하시겠다."


그 말에 이성이 날아갔다. 나는 놈의 불알을 걷어찼다. 아프긴 했는지 그놈은 신음하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보고 있자니 기분이 더러워서 거시기를 몇 번 더 밟아줬다.


"씨발 새끼야. 너 나랑 안 친하잖아."


마무리로 멱살을 잡고 주먹을 먹여주자, 놈은 단말마 같은 억 소리를 내고 쓰러졌다. 다른 두 명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놀랐는지, 잠깐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한 명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길거리 싸움 같은 건 해본 적 없었지만, 그냥 맞아주기엔 어설프고 느렸다. 나는 살짝 옆으로 비키면서 그놈의 명치를 무릎으로 찼다. 거기까진 좋았지만, 나는 다른 녀석에게 팔을 붙잡혔다. 힘으로 벗어나기란 불가능했다. 나는 그대로 뺨을 한 대 얻어맞았다. 위기였다.


"그만해!"


밖에서 난 소란에 화장실에서 뛰쳐나온 건 현우였다. 그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었다. 그는 황당하다는 눈치였다.


"미쳤어? 이러면 정학이야."


그제야 모두 정신을 차렸다. 붙잡고 있던 손이 풀리자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연히 바닥에 누워있는 한 명에게 모든 시선이 모였다. 현우는 그 녀석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하더니 조금 안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일어나 봐. 죽은 줄 알았네."


그러나 애처롭기 그지없는 신음이 들릴 뿐이었다. 현우는 잠시 고민했다.


"안 되겠다. 너네가 얘 데리고 보건실 가라."


"알았어. 근데 뭐라고 말하지?"


"아, 그 뭐지? 너네 맨날 계단에서 하는 거 있잖아. 난간에 세게 부딪혔다고 해."


잠시 후, 화장실 앞에는 멍하게 앉아있는 나와 생각에 잠긴 현우가 있었다.


(6화)

16.

"괜찮아? 너 손 다쳤네."


나는 가까이 다가오는 현우를 밀어냈다. 현우는 그런 나를 안되겠다는 듯이 가까운 비품실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자기가 자주 사용하는 구급상자가 있다는 모양이다. 안 쓰이는 교실에 수납장과 잡동사니를 잔뜩 밀어 넣어서 미로 같은 공간이었다. 우리는 의자를 가져와서 앉았다. 까진 손등이 쓰려왔다. 확실히, 세 명을 상대로 덤볐는데 손을 좀 다친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었다. 현우는 손에 난 상처에 거즈를 댄 다음 붕대를 살짝 감아줬다. 완전히 지쳐버려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녀석에게 앞머리를 기댔다. 이마가 가슴에 닿았을 때, 셔츠에서는 진한 탈취제 향이 났다. 잠깐만에 다시 기운을 낸 내가 떨어지자, 현우는 그제야 뭔가 발견한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얼굴 맞았어?


그때쯤 맞은 곳이 발갛게 되었었나 보다. 나는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무슨 페브리즈를 그렇게 뿌리고 다녀."


해야 할 말은 이게 아닌데. 나는 비품실을 나가기 전에 덧붙였다.


"고마워."


교실에 돌아왔을 땐 모두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자리에 돌아오자, 옆자리의 전학생 녀석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뭔가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는 걸 보고 3교시의 일이 떠올랐다. 아, 말 걸면 죽인다고 했었지.


17.

아무리 긴 하루도 끝이 오기 마련. 혼자서 집에 가는 길은 조금 낯설었다. 해방감을 느꼈다기엔 오히려 발걸음이 무거웠다. 현지가 오늘 학교에 오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이 꼴을 보면 뭐라 했을지.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교문에서 불러세운 건 현우였다.


"한세연. 같이 가자."


이쪽으로 달려오는 녀석을 보니, 그새 옷을 갈아입은 게 눈에 띄었다. 딱 봐도 새 것인 체육복에는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갑자기 어디서 난 건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너, 집이 같은 방향이었어?"


"아니."


현우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앞서 걸으면서 기다렸다. 그러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때쯤에는 내 쪽에서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아까 화장실에서 나온 애들이랑 친구야?"


"예전에는. 같이 안 다닌 지 꽤 됐어. 화장실에서 마주친 것도 우연이었어.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싸우는 줄 알았는데 깜짝 놀랐어. 여자애를 상대로 주먹다짐을 하고 있었다니. 역시 그 자리에서 손봐주는 게 맞았을까? 어떻게 생각..."


"아아, 됐어. 잊어버려."


만약 현우까지 그 자리에서 싸움에 끼어들었다면 문제가 더 커졌을 거다. 자기 나름대로 상황을 수습하려 했던 거겠지. 그 정도는 나도 이해했다. 다만 그다음에 녀석이 한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학교 때 기억해? 나는 그때 너를 하민이에게 소개시켜 줬던 걸 후회하고 있어."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하민이가 나쁘다는 건 아냐. 하지만 걘 너를 좋아했으면서 아무것도 안 했어. 마치 가만히 있으면 자기 마음을 알아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그런 사람은 널 좋아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갑작스러운 그 말에 나는 당황하면서도 화가 났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물어보았다.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하민이는 입장이든 뭐든 하나도 확실하게 해두지 않았어. 지금 와서는 말야, 그 녀석의 사고로 너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데 정작 자기는 병원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로 있는 거잖아."


정곡을 찔리고 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짧은 침묵 끝에 현우는 그 말을 하고야 말았다.


"무슨 상관이냐면, 널 좋아해."


타당한 지적이었다.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한 말도 아니었다. 차라리 내가 너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나는 너의 평범한 일상을 망가트려 놓고선 모든 게 저절로 해결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오늘처럼 위험에 빠졌을 때도 스스로를 구하지 못했다. 결국엔 너를 좋아해서 고백한 친구에게도 미안한 일이 되어버렸다. 현우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딱히 없었다.


"결국 넌 세연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은 거잖아? 나로선 말해줄 수 없어."


"무슨 말이야?"


"왜냐하면 나는 한세연이 아니니까. 나는 그 애의 몸을 멋대로 차지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이제 알겠냐?"


나는 대답을 듣고 벙찐 현우를 뒤로하고 다시 걸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몇 걸음 정도를 걸었을까. 참다못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아마도 그 사고 이후로는 처음으로, 네가 아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하민! 너 맞지?"


현우는 그대로 떠나려 한 나에게 다가와 팔목을 잡아당겼다. 마침내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게 된 나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그대로 한마디를 전한다는 게, 그만 목소리가 뒤집히고 말았다.


"놔 줘. 내가 잘못했어."


그 순간, 나를 잡고 있던 손이 맥없이 풀렸다. 그 뒤로 현우는 따라오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나는 아주머니가 있는 거실을 피해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네 방에 들어가 방문을 굳게 닫았다. 한참을 닫힌 문에 기댄 채로 울었다. 다친 손등이나 얻어맞은 얼굴보다도 마음이 미치게 아팠던 건, 밀려오는 통증이 너에게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게 했으니까. 오늘 네 몸 구석구석을 멍들게 한 것도. 스스로 흘린 눈물이 네 얼굴을 적시게 한 것도. 그런 마당에 나는 아직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18.

금요일.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또 몸을 상하게 할까 봐 무서워서, 그리고 도저히 갈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방문도 열지 않은 채로 아주머니께는 몸이 너무 안 좋다고 말했다. 아주머니가 아플 때는 공부하지 말고 쉬라고 말한 걸 보면, 너는 아플 때도 공부를 했던 모양이다. 그런 점 때문에 더더욱 나로서는 너의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 현지가 집에 찾아왔었다. 아프다는 말로 돌려보냈다.


일요일. 더는 너로서, 너의 인생을 대신해서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월요일이 오는 게 끔찍했다. 나는 말 그대로 한계에 다다랐지만, 여전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대로면 나는 망가지고 말 것 같았다. 아니, 나는 망가지고 있었다. 지금껏 경험해 본 적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시련을 겪고 헤매는 동안 말이다.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고 나는 여전히 모든 게 해결되기를, 그리고 너의 응답을 무력하게 기다리고 있다.


수요일. 뭔가 이상하다. 일요일의 다음이 수요일이던가. 그럴 리 없다. 그러나 내가 긴 꿈을 꾼 듯한 기분 끝에 일어났을 때, 스마트폰 화면은 분명히 9월 14일 수요일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의심하기를 반복했다. 하늘이 월요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들어주기라도 한 건가. 방문을 열고 나와 거실에 내려가 보니, 아주머니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는 아침을 먹는 동안 계속 생각했다. 갑자기 생겨있는 이틀의 공백. 평소와 묘하게 다른 아주머니의 분위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틀 동안, 그녀의 기분을 좋게 만들 만한 변화가 있었던 걸까. 식사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어제 학교에 갔었죠?"


내가 지나가듯이 던진 질문에 아주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잠이 아직 덜 깼구나."


확실히, 내가 잠이 덜 깼다는 게 가장 말이 되는 설명이긴 했다. 그렇게 나는 좀 전까지 했던 멍청한 생각들을 떨쳐내려 하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세면대 가장자리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어야 할 칫솔이 양치컵에 꽂혀 있는 걸 보고 말았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이 변화는 상당한 괴리감을 자아냈다. 세면대의 도구 배치는 주인의 사소한 습관이 만드는 것이라 했던가. 예를 들면 나처럼 손으로 대충 물을 떠서 입을 헹구는 사람은 양치컵이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나는 분명 그 쓸모없는 물건을 수납장에 처박아뒀었다. 요약하자면, 화장실을 나온 나의 머릿속에선 어떤 멍청한 생각이 반쯤 확신으로 바뀌어 있었다.


교복 입는 건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됐지만, 가슴까지 오는 머리카락에 관한 건 답이 없었다. 보기에 예쁘긴 한데 말이지. 감았다가 말리는 건 어려워서 저녁에나 시도해 볼 수 있었고, 자고 일어나서 부스스해진 머리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건 그것대로 다른 문제였다. 결국 나는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거울 앞에 앉았다. 한심하게도 아직도 많은 걸 다른 사람 손에 맡겨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머리가 정돈되는 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그날따라 아주머니가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 됐다."


마침내 정적을 깬 그 말에 거울을 올려다봤을 땐, 온 정성을 쏟은 듯한 차분한 모양이 완성되어 있었다. 언제나처럼 옆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머리핀까지. 준비 만전이었다. 어깨 너머로는 아주머니가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저기..."


조금 울고 있었다. 너를 빼닮은 얼굴이. 역시 이틀의 공백을 채웠던 건 너였구나. 모든 걸 파악한 나는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죄송해요."


"사과를 왜 하니. 넌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나는 아주머니의 그런 대답에 조금 놀랐다. 어깨로 느껴지는 따뜻함.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그녀가 나를 뒤에서 안아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