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그것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김독자가 앉아있었다.


「분홍 폭포수」


그가 손에 잡고 있는 책의 제목이었다.

고요한 도서관 안으로 바람이 한 번 더 불어왔다.

김독자는 멋대로 넘어가버린 책장에 미간을 찡그리며 창문을 닫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 손잡이를 잡고 닫으려다가 문득, 창 밖으로 한 무더기의 학생들이 눈에 스쳤다.

오늘 막 고등학교 2학년이 된 그의 눈에는 1학년들이 한참 어린 애기들로 보였으리라.

그는 피식 웃음을 지어보인후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2시간 동안의 정적-물론 김독자의 숨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를 제외한-을 깬 것은 도서관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김독자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주인을 모를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독자야, 뭐 보고 있어?"


맑은 목소리는 김독자가 뒤를 돌아보게 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유상아였다.

김독자보다 한 학년 위의, 예쁘고 성격 좋은, 말 그대로 인싸 선배.

김독자는 그녀인 것을 알아차리자 미소를 지었다.


"그냥 소설이요. 도서관에는 왜 오셨어요?"


"너 보러 왔다기에는 내가 빌려야 할 책이 있어서. 대출 좀 도와줄래?"


"네. 책 가지고 오세요."


유상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책장 사이로 사라졌고, 김독자는 그런 그녀의 잔상을 눈으로 쫓다가 책을 덮고 일어섰다.


「분홍 폭포수」


그녀가 내민 책은, 공교롭게도 김독자가 방금까지 읽던 것이었다.


"어, 선배도 이거 읽으시게요? 별로 안 유명한건데."


"원래 빌리려던 책이 없어서 그냥 마음에 드는 제목으로 가져왔어. 혹시 너가 읽고 있는 책이니?"


"네. 아직 다 읽지는 못했는데 재밌더라고요. 반납은 다다음주 까지에요."


"그래? 그럼 믿고 읽을 수 있겠다. 도와줘서 고마워. 나중에 보자."


긴 머리를 흩날리며 그녀는 도서관 밖으로 나갔다.

김독자는 다시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도서관 문이 열렸다.


"혹시 대출 돼?"


초면부터 반말이라니.

게다가 소녀의 가슴팍에 붙은 하얀색 명찰은 그녀가 1학년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김독자는 순간 언짢았지만 도서부원의 책임을 되새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 대출할 책 가지고 오세요.. 학생증 가져왔나요?"


"학생증은 아직 없는데. 그럼 대출 안 되나?"


"1학년이면 그냥 학번이랑 이름만 말해줘도 대출돼요."


"10401, 한수영."


성이 ㅎ인데 어떻게 1번이 될 수 있는지 그는 의아했지만 곧 키보드를 두드려 학생 정보를 찾았다.


"네. 대출할 책 가지고 오세요."


한수영은 금세 작은 몸집으로 두꺼운 소설책 3권을 가져왔다.


"이거 3개만."


삑- 삑- 삑-


책의 바코드가 차례대로 등록되었고 그녀는 순식간에 소설들을 챙긴 후 나가려다, 탁자 위에 놓인 김독자의 책을 보고 다시 말을 걸었다.


"그 책, 재밌어?"


"이거? 아직 다 안 읽어서 잘 모르는데. 지금까지는 꽤 재밌더라고요."


한수영은 대꾸도 하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갔다.


"뭐야... 1학년이 선배한테 예의없이."


다시는 볼 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물론 최소한 한 번은 더 마주쳐야 하지만-그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

.

.

한수영은 바로 다음 날 점심시간에 그의 앞에 나타났다.


"반납 좀."


저 두꺼운 소설들을 하루도 안 돼서 다 읽었다고?


김독자는 꽤 놀랐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코드를 연달아 찍었다.


"반납됐습니다."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한수영은 다른 소설책 3권을 더 가져왔다.


"이것도 대출 좀 해줘."


삑- 삑- 삑-


"대출 됐습니다. 아 근데 잠깐만."


김독자는 책을 챙겨 나가려는 한수영을 붙잡았다.

한수영은 무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너 1학년인 것 같은데. 2학년 선배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다른 데서도 그렇게 말하지 말고 사람한테 예의 좀 갖춰."


한수영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대신 아직 몇 페이지가 남겨진 채 펼쳐져 있는 김독자의 책을 바라보았다.


"그 책, 재밌냐?"


이게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네.

김독자는 퉁명스럽게 비꼬았다.


"아직 다 안 읽어서 모르겠고, 재미는 있더라? 근데 너한테는 추천 안 해주고 싶네."


그제야 피식, 비웃음을 흘린 한수영은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내일 다시 온다."


이건 뭐 통보로 받아들여야 되는건가?

김독자는 황당한 표정으로 의자에 넘어지듯 앉았다.

금방 다시 문이 열렸다.

유상아였다.


"독자야. 방금 저 귀여운 여자애 누구야? 막 웃으면서 지나가던데."


"저도 몰라요. 어제오늘 책 대출하러 와서 반말만 찍찍해대고. 근데 웃고 있었어요?"


"응. 그냥 행복해서 짓는 웃음 같았어. 설마, 걔가 독자 너 좋아하는거 아니야?"


"그러면 저 학교 자퇴할거에요. 첫인상부터 완전 비호감인데."


"야, 사람 일은 모르는거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보다 새로 만난 사람과 시작하는 사랑이 얼마나 많은데?"


유상아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김독자는 유상아가 자신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근데 벌써 책 다 읽으셨어요?"


"아, 그건 아니고 그냥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거 있어서."


물어보고 싶은거?


"이거 작년 수능 기출인데 너가 문학은 진짜 잘하잖아. 친구들도 다 모른대서 너한테 물어보려고. 한 번 봐줄 수 있어?"


뭘 기대한거냐.


"당연하죠. 저한테 주세요."


문제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지문이 까다로웠다.

집중하면 자연스레 인상을 쓰는 습관 때문에 머리카락이 저절로 눈 앞을 가렸다.

그가 문제를 푸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상아가 손을 뻗어 김독자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너는 남자애가 머리가 왜 이렇게 길어? 손도 예쁘고."


김독자는 고개를 들어 유상아를 쳐다보았다.


"선배. 이러면 저 문제 못 풀어요."


"아하하. 알겠어. 안 건드릴테니까 천천히 해."


이렇게 말해놓고서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비발디의 사계 중 봄.

열 마디가 지나갈 때 쯤 김독자가 문제 푸는 것을 끝냈다.


"다 풀었어요."


"와 벌써? 그럼 어떻게 풀었는지 알려주라."


바짝 다가와 앉은 그녀의 갈색 머리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고 생각했다.

몽롱해지는 정신을 붙잡은채로 김독자는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여기서 화자는..."


몇 분 동안 도서관은 김독자의 말소리와 유상아의 놀라는 소리, 호응하는 소리로 가득찼다.


"...그래서 정답이 5번. 화자는 사랑하는 대상에게 간접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고 있다."


"와. 진짜 국어는 독자가 최고라니까. 도와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저도 기출문제 풀어보고 좋죠 뭐."


"그래도. 너 아니었으면 며칠 동안 머리 싸매고 있었을걸?"


"그럼 다행이고요."


유상아는 배시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석식 먹니? 같이 먹을 사람 없으면 나랑 먹자."


"저 오늘 집 바로 가야돼서... 죄송해요."


"뭘 죄송해! 다음에 먹으면 되는거지. 그럼 내일 보자. 수업 시간에 자지 말고!"


"네. 선배도 열심히 하세요."


"아 미적분 진짜 싫어... 암튼 화이팅!"


유상아는 손을 흔들며 도서관에서 나갔다.

그녀가 없어진 자리가 이상하리만치 무채색으로 느껴진다고 김독자는 생각했다.


독수 단편으로 만들기에는 아이디어가 너무 많았고

연재글에 적용하기에는 들어갈 스토리 틈이 없고

그래서 그냥 새로운거 하나 더 써보기로 했습니다.

[독자의 1년]은 이번 달 안에 나옵니다.

원래 하던거나 잘 하라고요?

나도 로맨스 쓸거야 빼애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