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등장인물'이 되었습니다.]
내 화신체 위로 스파크가 흘렀다. [제 4의 벽]이 기능을 멈추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고, 황폐해진 머릿속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명들이 울렸다. 떨리는 고개를 숙인 체, 가까스로 심호흡을 했다.
[제 4의 벽]의 말이 맞다.
어쩌면, 나는 알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힌트들이 있었다.
「그 세계에서 나는 너무나 운이 좋았고.」
「그 세계의 모든 것이 내게 편의적이었으며.」
「때로는 허술하기까지 했다.」
그 모든 것이, '가장 오래된 꿈'의 가호 때문이었다면.
「모든 세계선의 태초, 원형(原形)의 세계선.」
나는, '가장 오래된 꿈'을 끝내야 할 이유가 있다.
[마왕화를 발동합니다.]
찢어진 어깻죽지에서 새카만 날개가 펼쳐졌다.
[천사화를 발동합니다.]
내 몸의 뒤에서 붉은 후광이 비쳤다. 노트에서 눈을 뗀 소년이 나를 바라보자, 눈이 커졌다.
"아, 아......."
나였지만, 나와는 다른 존재.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빛과 어둠의 감시자'가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괴, 괴물......"
아이의 몸을 중심으로 불투명한 막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새카만 공처럼 생긴 막. '가장 오래된 꿈'이 만들어낸 가장 튼튼한 보호막.
"그래, 괴물이야."
이 작고 연약한 절대자는 나의 존재를 부정한다. 나를 막으려, 튼튼한 보호막을 몇겹이나 두른다.
"우우......"
그러나, 너는 날 막을 수 없다.
나는, 너니까.
"난, 너야."
소년을 둘러싼 막들이, 산산조각 났다.
*
소년의 이마에 내 손이 닿자, 가공할 스파크가 튀었다. 스파크는 이내 활자의 모양을 띄기 시작했고, 그 활자들은 문장이 되었다.
[시 작 도 끝 도 없 는 부 질 없 는 이 야 기 만 이 남 을 것 이 다]
언젠가 들었던 말. 곧 내가 원하던 시스템 메세지도 출력되었다.
[너무나 유사한 두 존재가 조우했습니다!]
['끊어진 필름 이론'이 발동합니다!]
'김독자'는, '구원의 마왕'은, '빛과 어둠의 감시자'는, '긴고아의 죄수'는, '나'는 오늘 죽는다.
-서걱!
그러나, '가장 오래된 꿈'도 함께일 것이다.
스스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박아넣은 가슴에선 설화들이 울컥 쏟아져나왔다. 시야가 점점 낮아지며, 눈앞이 흐려졌다.
'아,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시나리오를 해쳐온걸까. 일행들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멋대로 그들을 구원했을까. 왜,
나는 그렇게 발버둥 쳤을까.
-김독자!
소리들이 흐릿하다.
후회로 점칠된 최후.
제 하나 살겠다고 우주를 비탄에 빠뜨린 악당에게, 너무나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당신은 사망하였습니다.]
['끊어진 필름 이론'에 의해 '가장 오래된 꿈'이 끝났습니다.]
[당신은 '은밀한 모략가'와의 이계의 언약을 지켰습니다.]
젠장, 한번만 더 기회가 있다면, 만약 그랬다면,
-띠링!
더 잘 할수 있을텐데.
['가장 오래된 꿈'의 마지막 가호가 당신에게 깃듭니다.]
[당신은 '회귀자'가 되었습니다.]
어?
*
"헉!"
아무 감각도 없던 영혼체 상태에서, 갑자기 폐에 공기가 들어온다.
"독자....씨?"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날의 유상아.
"무슨 일 있으세요?"
시간이......7시 1분 전이군.
"아뇨, 그보다 유상아 씨,"
"네?"
왜인지 모르지만, 나는 '회귀자'가 되었다. 항상 보이지 않던 상태창이 보이고, 특성에는
-회귀자(불멸)<1회차>
라고 적혀있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이제,
"곧 지하철이 흔들릴 겁니다. 당황하지 마세요."
"네?"
그 순간 내가 시계를 본 것은 순전히 의도한 것이었다.
PM 7:00
-콰과과과과광!
[제 8612 행성계의 무료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내 삶의 장르가 '판타지'로 결정나는 순간이었다.
*
나는 저번과는 달리, 얼타지 않고 길영이를 찾아 헤맸다.
「&아#@!&아#@!.......」
「&아#@!&아#@!.......」
멀리서 비형이 떠들고 있었다. 내심 반가웠지만, 이제 '대도깨비 비형'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저기, 이것 좀 줄래?"
나는 길영이를 찾아서, 속삭였다.
"네...."
그대로 채집통을 건네주는 이길영. 나는 그 통에서 귀뚜라미 한 마리를 길영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내가 조용히 하라고 했죠.]
나는 급히 돌아가 따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마디 거들려는 유상아를 말렸다.
"가만히."
"네?"
-퍼버벅
방금까지 항의하던 사람들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그 뒤로도 내가 아는 전개 그대로 흘러갔다. 나는 벌레를 터뜨렸고, 김남운과의 전투에 들어갔다.
'젠장, 체근민이 다시 평균 1이 됐잖아.....어?'
-회귀자(불멸)의 특전으로 이전전 회차에서 스탯에 투자한 코인의 25%를 얻습니다.
-이전 회차에서 얻었던 특성은 일정 코인으로 해금할 수 있습니다.
-전용 특성, '책갈피'의 인물목록에 이전 회차의 등장인물이 등록됩니다.
-니르바나 뫼비우스의 윤회 회로, 유중혁의 회귀 회로가 당신의 회귀 회로에 종속됩니다.
-성좌의 권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배후성이 없어야 하고, 일정량 이상의 '설화'를 획득해야 합니다.
유중혁에게는 없는, 불멸 등급의 회귀자에게만 주어지는듯한 특전. 애초에 불멸 등급은 나도 처음 들어보는 등급이었다.
"김남운, 미안하지만 죽어줘야겠다."
나는 메뚜기의 알을 터뜨려 추가로 코인을 얻은 뒤, 체근민에 20씩 스탯을 추가했다.
"뭐? 이 꼰대가 무슨......"
말도 끝나기 전에 지르는 주먹.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무슨......."
피할 필요가 없었기에.
[제한 시간이 경과하였습니다.]
[유료 정산이 시작됩니다.]
나에 의해 김남운은 죽었다. 그는, 나중에 좋은 패가 될 것이다.
[저는 이만 다음 시나리오 준비하러 가봐야 해서. 10분 뒤에 뵙죠!]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어느새 배후선택이 끝나있었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총 7개였다.
<배후(背後) 선택>
-당신의 배후를 선택하세요.
-당신의 배후는 당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1. 심연의 흑염룡
2. 악마같은 불의 심판자
3. 은밀한 모략가
4. 긴고아의 죄수
5. 부유한 밤의 아버지
6. 지고한 빛의 신
7. 고려제일검
어차피 유중혁이 저 철문을 부술것 이기 때문에, 나는 비형이 다시 사라지자마자 사람들을 모았다. 내가 노렸던대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과 동일했다. 나는, 다시한번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
젠장, 이번엔 거의 다 왔는데.
내 회귀 회로에서는 '가장 오래된 꿈' 조차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끊어진 필름 이론'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꿈을 끝낼 수 있도록 단련해왔다.
코인을 악착같이 끌어들여 스텟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렸고, 히든피스는 모두 얻었다. 히든 시나리오 또한 모두 해결했다. 그 결과, 나는 그 '유중혁'을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격도 '신화급 성좌'의 상위급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김독자에게는 최선따위는 부족했다. 최선의 그 이상을,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왜, 왜 이렇게 된걸까. 지하철 바닥에는 다시 모았고, 다시 키웠던 동료들이 쓰러져 있었다.
'모두들, 미안해요.'
나는 내 '성흔'을 발동시켰다. 문득 이 세계가 소설이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것이 후회되었다. 아니, [제 4의 벽]이 없는 지금은 이게 '현실'일지도.
「그렇게, 김독자의 2회차가 시작되었다.」
*
「2회차에서는 올림포스에게 전멸당했다.
72회차에서는 베다가 김독자를 죽였다.
950회차에서는 도깨비 왕에게 죽었다.
1866회차에서는 은밀한 모략가에게 패배했다.
5427회차에서는, 가장 오래된 꿈에게 이기지 못했다.」
그 모든 회차에서, 나는 그 이유를 기억하지도 못한 채 '가장 오래된 꿈'을 죽이기 위해서만 살아갔다.
그리고 64827회차에 다다르고서야,
-서걱
'가장 오래된 꿈', 김독자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그럼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나. 64828번의 생을 거듭하며, 감정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일행들과의 64828번의 만남과 64828번의 이별.
64828번의 삶과 64828번의 죽음.
이제는 뭐가 중요한지조차 알 수 없었다. 0회차의 '김독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구인가.'
전에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었던 질문이지만, 이제 김독자는 이 질문의 답을 모른다. 너무나 많은 시간이 그의 삶을, 그의 자아를,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목적도 결과도 행복도 비애도 없는 삶. 64828번의 삶은, 인간이 견디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신을 나눠버렸다. '가장 오래된 꿈'을 이어받고, 자신을 나눠 모든 세계선으로 보내버린다.
망각의 축복을 받기 위해, 더는 기억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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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독자 회귀물.
항상 어설픈 글 읽어줘서 고맙다.
버스에서 잠깐씩 생각나는대로 쓴 글이라 엉망진창일텐데도 읽어줘서 고마워